[묵상글]

[수필] 덧정

전봉석 2006. 8. 1. 18:36

 

 

덧정





  자신의 글을 읽다 아이가 울컥 목이 메어 쩔쩔맬 때, 나는 이보다 더 숭고한 외로움을 알지 못한다. 날것이 갖는 잔인함. 채 정제되지 못한 감정의 비릿한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순간, 감출 수 없어 숨길 수도 없는 그 찰나적 정점의 목 메임에 대하여…… 나는 덧정을 바란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뭐가 미안한지, 왜 미안한지 생각하느라 미루고 있을 때, 그 애는 연락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다. 뒤늦게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았지만, 그 애의 집 현관 앞에는 새로 배달된 우유가 한 통 놓여있었다.”  

 

  ‘왕따’라는 주제로 쓴 글이었다. 스스로를 왕따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면서, 유난히 잘 웃고 객쩍은 소릴 잘 하던 아이는 자신의 글을 읽다 목이 멨다. -아이의 무거운 시선이 그래서였구나, 별 말 아닌 데서도 과장되게 웃던 이유가 그래서였구나, 눈에 띄게 남을 먼저 챙기곤 하던 이유도 어쩌면 그 아이의 배면背面에 깃든 외로움이었겠구나.- 그럼에도 나는 글쓰기의 잔인한 변통變通을 일러주어야 했다. 날것의 덧없음에 대해, 독백적인 글이 어째서 날것인지에 대해, 그것을 형상화시키기 위해 무던히 재고 따지고 버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가르치는 자로 말하는 내내 울컥거렸다.


  삶이란 어디 그런가. 그러지 못해, 글을 쓰는가. 내 것이 더는 내 것이 아닐 때, 내 이야기가 더는 내 이야기일 수 없을 때, 글은 모두의 것이고 읽는 이의 것이고 공유하는 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가 두렵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 일이 외롭다. 


  무엇을 사랑함에 있어 그 자체만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떠어떠하여’에 깃든 당위적인 감정이 사랑이리라. 그리워 쉬 아쉬움으로 짙게 여미는 감정의 순환 고리 또한 사랑의 찌꺼기쯤으로 여겨지지만, 그래서 나는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다. 주변을 에우고 있는 숱한 덧없음까지도 한데 묶어 사랑되어지는, 덧정을 바란다.


  유난히 나 또한 ‘왕따’ 계열에 속하는 유년을 보냈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아버지의 완고한 훈장(신념 내지는 위신) 때문이었는지, 나의 변변찮은 주변머리 때문이었는지, 그래도 살아있는 것들은 적응을 바탕으로 하는가 보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 적응의 차원에서, 왕따는 어느새 편하고 질긴 외투가 되어있었다. 그런 것이다. 별 거 아닌 것이다. 외롭다는 건, 사랑한다는 건.


  가을 들판에 나가보라. 저 억새가 건네는 시선을 마주해보라. 낱알로 서있을 땐 보잘것없는 풀포기에 지나지 않지만, 벼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 비비고 출렁거리며 한데 겸양謙讓을 떤다. 비탈에 서서 줄지어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는 저 지긋한 억새의 시선은 또 어떻고……! 굳이 어떤 관계를 요구하지 않아도, 같은 시절을 사는 <우리>면 됐다. 한 방향을 향해 묵묵히 살아있는 것으로 됐다.


  덧정은 <우리>를 일깨운다. 사랑은 너와 나의 관계를 고집하지만, 덧정은 나의 무리 너의 무리를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로 인해 나로 인해 무리로서의 우리이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젖어드는 사랑이 덧정이다. 모든 것에 한결같이 배어드는 마음이 덧정이다.


  아무리 비벼대도 떨어낼 수 없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어째보겠다고 안달 부리는 일만큼, 어쩔 수 없는 일도 없다. 안고 가든, 지고 가든, ‘왕따’를 당하든, ‘왕따’를 시키든 외로움은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덧정을 바란다….   

  

  아이를 따로 두어 위로하지는 않았다. 대놓고 다독이지 않았고, 모른 체 나는 수업을 하였다. 그러자 한 아이가 슬그머니 휴지를 건네주었다. 어떤 아이는 흘러내린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쯤해서 나는,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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