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수필] 지금 우리는 여행중이란다

전봉석 2006. 8. 1. 19:08


지금 우리는 여행중이란다




  자연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리를 낸다. 회색빛으로 말라죽은 줄 알았던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고 꽝꽝 얼었던 흙이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면서 틈새를 벌린다. 그 사이로 풀이 자라고 풀이 자라는 길을 피해 비가 내린다. 봄이 온 길을 따라 장마가 지고 더해진 빗물에 신록이 우거진다. 습하고 건조한 여름을 견뎌낸 순서대로 과실을 맺고 열매가 영그는 동안 가을볕은 해충을 다스린다. 새가 나는 길을 피해 바람이 불고 바람이 가는 순서에 따라 겨울이 온다. 자연의 모색은 그래서 되풀이되는 여행과도 같다. 


  “어느 커다란 나무에 원숭이들이 모여 살았단다. 그 원숭이들 가운데 어느 원숭이의 궁둥이가 제일 볼품없이 빨갈까?” 


  우리의 성장도 이와 흡사하다. 졸업과 입학이 대체로 봄에 닿아 있는 것처럼, 축하祝賀는 견뎌낸 길을 따라 만개한 꽃과 같다. 그래서 자녀의 성장은 자연의 일정에 따라 순응한다. 우리가 자연을 닮은 것인지 자연이 본래 그리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더불어 우리는 여행에도 능하다. 여행은 극한 슬픔을 쉬게 하고 더한 걱정에서 놓여나게 한다. 마치 계절의 변화와도 같다. 홀가분한 여행길을 동행하는 듯하다.


  “늘 위만 올려다보고 사는 원숭이! 그 원숭이의 궁둥이가 제일 볼품없이 빨갛단다.”


  대청소를 하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딸애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우리 집도 아닌데 뭘 이렇게 유난을 떨어요?” 딸애의 말에 내심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세 들어 사는 집을 두고 딸아이의 마음이 그리 상해있던 모양이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친구 생일파티에 다녀온 뒤로 제 것에 비해 친구의 것이 나아보였던지 괜한 투정을 부리곤 하더란다.


  “위만 쳐다보면 남의 궁둥이만 쳐다보는 셈이니까, 마치 자신의 빨간 궁둥이만 서러워하는 꼴이 되는 것이지.”


  청소를 끝내고 모처럼 외식을 했다. 그래봐야 삼겹살집이 고작이지만 내친김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가까운 공원으로 나섰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린 탓인지 딸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꼭 어디 여행 온 것 같다. 그치?”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여느 가족들 곁에서 우리 가족도 덩달아 여행 온 기분에 젖어있었다.

      

  “우리가 가야할 본향은 따로 있단다.”


  가야 할 본향이 따로 있고, 우리가 지금 머무는 곳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과도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여행이란 욕심이 없는 차림을 전제로 할 때 홀가분하다. 짊어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행은 그만큼 고되고 벅찬 법이라고 하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어느 나무에 모여 살던 원숭이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남과 견주어 위엣 것만 바라고 살 땐 괜한 서러움에 공연히 자신의 엉덩이만 빨개지는 꼴이라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남으면 남은 대로 궁색함이나 버려짐이 없는 것이 자연의 지속적인 여행법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한데 풍요로운 것이 자연이고, 그 자체로 한데 자유로운 것이 여행이란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늘 가난한 교회로만 전전긍긍하며 목회를 하던 아버지를 향해 공연히 트집을 부렸을 때, 아버지는 어린 내게 들려주셨다. 이는 한 뼘씩 자신을 낮추어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 자연의 것과 같다고. 갯가의 풀들이 바다 쪽으로 갈수록 제 키를 낮추는 것처럼. ‘바다와 가장 가까운 퉁퉁마디는 칠면초보다 작고 칠면초는 갯잔디보다 작다. 갯잔디는 갈대숲보다 고개를 숙이고 갈대숲은 사람의 키 높이에 맞춰 한 뼘을 더 몸을 낮춘다.’ 그러므로 갯가에 서면 누구나 공평하게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나는 딸애에게 해주었다.


  “지금 우리는 여행 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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