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같은 아니 거스러미 같은
글을 쓸 수 없을 때, 고인 생각은 제풀에 말라 푸석한 먼지로 날린다. 고단한 생활이 마음을 건조하게 하는 것처럼, 나는 그리 짐작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도리가 없는 일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생각이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마음에 닿을 때마다 쓰리고 아릴 때가 있고, 섣부르게 말을 하려다보면 푸념이 되어 먼지처럼 풀풀 날릴 때가 있다. 깨달음의 정도는 있겠으나 난감하고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이를 두고 여태 글 한 줄 쓰지 못한 이유로 친다면, 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 동안 무력하긴 하였다. 마음껏 제멋대로 써두어도 위로가 되곤 하였던 글쓰기를 생각하면, 그랬었지? 하는 기억조차 조바심을 부르곤 하는 대목이다. 그런들, 위로를 위한 위로는 도리어 거추장스런 일과와 다를 바 없다. 의무감으로 아이들의 원고를 읽으면서, 원고에 담긴 아이의 생각과 마음은 뒷전으로 미루면서, 이게 아닌데… 싶은 어느 절박한 느낌이 거스러미처럼 나의 마음을 훑고 지나쳤던 것이다. 한동안 꺼끌꺼끌하니 왜 이리 쓰린가, 했더니!
광고지 전단에 찍힌 얼굴처럼 무엇을 향해 웃는지조차 알 수 없는 웃음으로는 행복을 말할 수 없다. 글이란 자신의 생각의 표현이고, 표현된 생각은 깨달음이어야 한다.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행복처럼, 천국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그곳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감사의 단위로 소통되고, 행복의 정도는 천국의 차등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 아이가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가 갈 천국은 살아서 느끼는 오늘의 감사와 비례한다고.
보이는 것이고 감출 수 없는 것이 글이고 행복이라면, 이는 두 것의 공통점이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은희경의 「타인에게 말 걸기」를 읽고 독서토론으로 쓴 아이의 글이 나를 일깨우고 다그치기에 충분하였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 남자와 푼수처럼 끼어들기에 헤픈 여자를 두고, 아이는 아이답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미친 것 같다! 여자가 미친 게 아니라면, 우리 모두가 바보가 되어버렸던가!’
(누가 제안을 해왔었다. 얼마를 투자할 테니 같이 번듯한 학원을 열어보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그의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 시국에 <글방>의 아이들은 고만고만하고, 그래도 분주하고 바쁜 일상에 쫓기는 터였다. 하긴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는 ‘교습소’에서 어엿한 논술전문 ‘학원’으로의 전환은 단연코 달콤한 유혹이었다. 어쩔까? 하는 마음을 두고 며칠은 씨름을 했던 것 같다.
논술을 위한, 논술에 의한 글쓰기가 아니라 앞서 밝힌 것처럼 행복과 견줄 수 있는 글쓰기를 가르치겠다고 다짐했었다. 머릿수부터 계산하고, 엄마들에게 먼저 먹힐 운영계획안이란 걸 받아들었을 때! (……)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나에 대한 그의 마지막 견해처럼 나에게는 사업적인 마인드가 없었다는 것으로, 그러했더라는 사연 정도로만 말하고 말겠다. 그에 대한 어설픈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게 낫겠다.)
때론 객쩍은 소리에 불과한 것이라 해도 나는 아이의 글을 읽고 나의 깨달은 바를 과장되게 들려주곤 한다.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쓰고, 좋아서 쓰는 게 아니라 싫어도 쓰는, 글이란 자신을 들여다보고 세상을 어르며 살기 위한 지침서와 같다는… 어눌한 선생의 객쩍은 소리에 불과한 말이지만, 그것이 아이의 마음 밭에서 생각의 기회가 되고 행복의 소통이 될 수 있다면… 뭐라 끝맺지 못하고 이리 쩔쩔매는 문장처럼, 끊임없이 되묻고 답하게끔 하는 게 고로 글쓰기였으면 좋겠다.
먼지 같은 아니 거스러미 같은 생(生)의 하찮은 깨달음이라 해도…… 그것이 못내 표현되어 자신을 다독일 수 있다면, 기꺼이 생각이 그에 머물곤 한다면, 아이의 글이 나의 깨달음이 되고 나의 수다스런 설명이 아이의 놀이를 부추길 수 있다면, 무던히 제발 무던히 구멍가게 같은 <글방>으로도 감사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에다가 오늘이 천국일 수 있도록, 먼지 같은 아니 거스러미 같은 보챔에 밀려서라도 무던히 글을 쓰며 살아야겠다.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수필] 근심에 대하여 (0) | 2006.08.06 |
---|---|
[스크랩] [수필] 억새가 건네는 시선 (0) | 2006.08.06 |
[수필] 지금 우리는 여행중이란다 (0) | 2006.08.01 |
[수필] 덧정 (0) | 2006.08.01 |
[수필] 공주거리 (0) | 2006.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