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에 대하여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세상을 사는 동안 근심이 없을 수는 없으나 도리어 그 근심은 삶의 질곡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자양분이 되어주기도 한다. 보니 그러하다. 근심은 얼굴을 어둡게 하지만 오히려 마음을 맑게 한다. 무엇에 넋을 빼앗겨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또한 근심이나,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은 이치다.
근심을 ‘근심하다’로 바꿔 동사형으로 물으면, ‘애쓰다’라는 말과 나란히 한다. ‘애쓰다’는 무엇인가? 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보니,
〖비슷한 말〗힘쓰다, 힘들이다, 애며글면하다; 타울거리다, 타울대다, 터울거리다, 터울대다; 땀빼다, 땀흘리다; 노력(努力)하다, 진력(盡力)하다, 갈력(竭力)하다; 고생하다, 각고(刻苦)하다, 각고정려(刻苦精勵)하다; 공(功)들이다; 바둥거리다, 바둥대다; 발버둥치다, 역역(役役)하다
이와 같다. 이에 엿볼 수 있듯, 본래의 ‘걱정’과 동일하게 쓰이는 ‘근심’이 행동으로 이어질 땐 각고의 노력을 대신하는 삶의 건강성을 내포한다.
하물며 애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대박의 꿈과 같은 허황된 달콤함뿐이다. 더러 그와 같은 꿈꾸기를 자처하기도 하고, 언제부턴가 그러한 꿈꾸기가 단순히 꿈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의 일부가 된지 오래인 바, 버젓이 아이의 손을 잡고 ‘로또’를 사러가는 어른과 요행을 바라지 말 것을 가르치는 어른이 한데 뒤섞여버린 세상이 되었다.
더는 큰 흉도 아니나, 떳떳한 삶의 자세 또한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해봐서 알지만, 달콤한 상상의 허망함은 중독과도 같다. 뻔히 그 허망함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 또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인 것이다. 힘들이지 않고 얻은 것이기에 그만큼 외줄타기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고, 우선은 당장의 안일을 꿈꾸게 하는 이유다.
그렇다 치고, 근심은 낯을 어둡게 하나 마음을 밝게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이 또한 들어 아는 것이 아니라 해봐서 안다. 여담이지만, 우리 집 애들은 내가 낚시 가는 것을 ‘생각하러간다’로 바꿔 일컫는다. 그게 다 애들 엄마의 공이지만, 몇 차례 함께 낚시를 따라나섰던 아이들이 직접 확인한 바이기도 하다. 물끄러미 바라보기, 들어차는 생각의 분절을 저 혼자 풀어지게 놓아두기-이는 마치 떡밥이 물속에 잠기면서 제풀에 풀어져 고기를 한데 모으는 것처럼, 상관없는 생각들이 한데 모이게끔 하는 구실을 한다.- 하는 따위의 결과를 낳는다. 공연히 낚시에 미친 자기 합리로 들리겠지만, 좌우당간 나에겐 그러하다.
이렇듯 똑같은 생각을 연거푸 도리질하면서도 재차 묻고 답하듯 근심은 끊임없이 묻는 데 따른다.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식의 거듭되는 질문은 싫든 좋든 내 안에서 답을 요구하기 마련이고, 가벼이 답할 수 없는 물음일수록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마음을 후려쳐 빛을 발하는 것일 테다.
사는 동안 긴장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경제적인 조건은 매월 수입의 몇 할은 빚을 갚는데 충당하는 것이라 한다. 어느 경제학자는 이를 수치상으로 통계를 내어 대략 2천만 원 정도의 부채라고 정의했지만, 어쨌든 그 말에는 공감한다. 나른한 오후는 연신 하품을 물게 마련이니까! 행여 그 수치가 너무 버거워 주객이 전도되지 않기를 바랄밖에.
이는 경제적인 범위의 것일 테고-그것이 온 생의 전부인양 우리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삶의 진정성에 따른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문제는 엄연히 풀고 가야하는 숙제로 남겨진다. ‘어떻게’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진 현실에서-아니, 너무 빤한 논리로 ‘돈’이 최고인 세상이 되어버렸지만(가르치는 아이들의 대다수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이유도, 그 끝에서는 돈을 이유로 든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푯대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이에 따른 골똘한 생각의 범주가 또한 근심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러나 근심은 ‘근심하다’와 같이 ‘애쓰다’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몽학(蒙學)선생질밖에 할 수 없다. 5천만 원의 퇴직금으로 대박을 노리던 어느 부녀가 비극적인 결말을 맺었다는 사건보도를 봐도 알 수 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장사밑천을 삼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은 그나마 건강한 삶의 영역에 해당된다. 달콤한 상상이라는 바이러스는 끝 간 데 없이 영혼을 통째로 전이시켜 종당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하면, 나름의 스승이 필요한 이유다. 때론 자식이 나의 스승이 되어 엇길로 접어든 발걸음을 부끄럽게 하기도 하고, 때론 맘속의 신앙이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끔 족쇄 구실을 하기도 하고, 때론 타고난 양심이 그 힘은 미약하지만 연신 마음을 찔러 한번쯤 돌이키게도 하는 것처럼, 숱한 스승을 마음에 모시고 있을 때 그나마 쉴 새 없이 투입되는 다양한 변종바이러스와 맞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하여 나에게 있어 글쓰기는 어느 스승보다도 훌륭한 스승이다-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이와 같은 글쓰기의 역할을 맛볼 수 있게 하고 싶다-.
미처 뒤엉켜 뭐가 뭔지 분간할 수 없을 때, 안개 속을 걷자니 자꾸만 발끝이 걸리는 것처럼 지레 휘청거릴 때, 글쓰기는 나를 조각모음 한다. 행여 놓치고 지나친 생각은 물론, 마다하고 챙기지 않았던 생각을 다시금 관심 있게 긁어모아 정리하게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름의 논리를 세우게 하고, 그 논리는 비로소 헝클어진 자세를 교정한다. 때론 돼먹잖은 생각이나 너무 빤한 이치라 해도,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던 그릇된 몸가짐을 재촉하여 바로잡는 선생이 된다. 또는 위선적인 말이나 꾸며낸 상황이라 해도 그것을 흉내 내어 그와 같게끔 하려는 역할도 한다.
행여 이 또한 몽학선생질이나 하지 않을까 싶어 말을 아끼고 생각을 더하려는데, 아무래도 나이 탓인지 자꾸만 군소리가 붙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한다면, 근심은 보다 나은 내일을 낳는 산모일 테고, 글쓰기는 자처해서 산파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하니, 나는 공공연하게 근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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