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길 따라 걷기
-남한산성에서
하현
비를 머금은 소나무 숲은 정숙하다. 마치 때를 기다리는 각시처럼, 다소곳이 푸른 산자락을 여미고 앉은 모습은 과히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후텁지근한 날씨로 도시는 온통 흐느적거리고 있는데 늘 푸른 소나무의 땅, 남한산성은 짙은 녹음으로 신선하니 푸르다. 도시로부터 한 뼘만 비껴나도 이처럼 별천지가 따로 있는 셈이다.
하남IC를 빠져 경기도 광주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안은 고속도로와 맞닿아 있는 어색한 마을을 지나야 한다. 이는 사람살이의 고된 흔적으로, 펑퍼짐하니 치맛자락을 펼쳐놓은 여러 개의 산봉우리를 만나면서 그제야 넉넉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 연주봉(467.6m)과 동쪽 망월봉(502m) 그리고 벌봉(515m)에 이어 남쪽 몇 개의 봉우리로 연결되는 남한산성의 짙은 녹음은 거느린 식솔이 많아 유복하다.
금세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회색 빛 무거운 하늘은 산봉우리를 경계로 엷고, 짙은 색채의 얼굴을 동시에 드리운다. 이는 흐리고 탁한 얼굴을 멀리하고, 밝고 명랑한 낯빛은 가까이 두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멀리한다고 내침이 아니고, 가까이 한다고 거둠이 아니다. 한데 지어지는 본래의 얼굴이 그러해 보인다. 노인의 것처럼 지긋한 시선과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의 웃음이 한 얼굴에 서려 있는 것이다. 자글자글한 산의 잔주름이 지긋함을 더하고, 팽팽하니 달뜬 수직의 산등성이가 신선함을 보태면서, 장마철 하늘은 그토록 무심히 남한산성을 굽어보고 있었다.
늙음과 젊음이 이처럼 맨 얼굴로 드러난 장마철 하늘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사이에 두고 저 혼자 짓궂은 표정을 짓는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일장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남한산성이 3,993보의 둘레를 성내로 하여 장난스런 하늘을 그대로 어르고 달래어 보듬고 있는 듯도 하였다.
현재 남한산성 경내의 마을은 행정구역으로 ‘산성리’라 불린다. 이는 1914년 일제가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부터 그리 불리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국가 사적 57호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다.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이 한데 있다. 산성 주변으로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어, 이에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에 대한 자료를 뒤적이다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발견했다. 1986년에 새로 복원된 ‘개원사’라는 절이 남문 근처에 있는데, 이 절은 옛날부터 불경(佛經)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단다. 그 불경을 보관하는 궤짝에는 <중원개원사간>이란 글자가 적혀 있다고도 하는데….
조선 인조 때 서울 삼개나루로 배 한 척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으며, 그저 달랑 궤짝 하나만 실려 있었다. 그 궤짝에는 <중원개원사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이를 발견한 삼개마을 사람들은 아무래도 기이하여 이 사실을 관아에 통보하였고, 종당엔 인조에게까지 올려졌다.
인조는 이 배가 사공도 없이 저 혼자 삼개나루에 닿은 것도 신기하고, 또한 불경이 잔뜩 들어있는 궤짝에 중원의 개원사에서 판각되었다고 찍혀 있으니, 이는 필시 사연이 있어 우리 나라로 들어온 것이라 여겼다. 하여 우리 나라에 개원사라 불리는 절이 있는 지를 알아보게 하였고, 결국 그 궤짝은 오늘의 남한산성에 있는 개원사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이쯤 되니, 개원사는 불경 궤짝을 잘 보관하였을 테고… 어느 날, 이 절의 화약고에서 큰불이 일어 불길은 삽시간에 경내를 휘젓고 있었는데, 마침 불길 맞은편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 일순간 그 불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또 이후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도,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을 단박에 잠재웠다고 한다. 그러니 여느 절보다 개원사는 부처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절이라 여겨질 법하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개수를 한 것은 광해군 13년(1621)에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하여 석성을 개축한 까닭에서다.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자, 1624년 인조2년에야 비로소 오늘의 남한산성이 완공되었다.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를 만들어 광주읍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이에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그 시설을 제대로 완비한 것으로 손꼽힌다.
남한산성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인조 5년(1627)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다. 물론 그 전에도 몇몇 화전민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 남한산성 내의 행정구역은 산성리이며, 광주 행궁에서 동문에 이르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남쪽은 남동, 북쪽은 북동으로 나뉜다.
성벽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어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내부는 약 350m의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되어 있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도시와 약4。C 정도 낮은 기온 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로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에 달한다고 한다.
남한산성 축제는 매년 10월에 열리는데 각종 풍물놀이와 공연, 전시를 아우르며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산성소주 제작시연과 시음, 민속장터도 함께 열려 그 흥겨움을 더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백제의 도읍지이자 국난 극복의 장소라는 ‘역사성’에 초점을 둔 축제이다. 대동굿과 숭열전제향은 여느 볼거리에 뒤짐이 없다. 대동굿은 남한산성 축성과 병자호란 때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한 굿으로 전국의 무속인들이 대거 몰려오는 큰 행사이다.
또한 남한산성은 소나무군집으로 유명하다. 서울 인근에서 이만한 노송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한산성에 있는 전체 소나무의 연령은 70년에서 90년생이 많고, 약 72ha가 수어장대-서문-북문에서 행궁터-숭렬전-연무관-현절사를 에워싸며 전 지역을 두루 늘 푸른 소나무로 둘러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이 소나무 숲이 현존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때 마을 주민 3백3명이 국유림을 불하 받아 벌체를 금지하는 금림조합을 만들어 남다른 애정을 갖고 보존한 까닭이라 한다.
서울 한강 남쪽의 주산인 남한산성 동문으로 하여 관어정자를 거쳐 중앙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이미 정오가 다 돼 있었다. 처음부터 한나절에 둘러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막상 차를 세우고 보니 그 위풍은 더욱 당당하니 까마득하였다. 산책로로 친다면 동문으로 진입하여 산성로타리를 거쳐 북문, 서문을 지나 수어장대와 천주사 터로 해서 다시 남문을 지나 동문으로 내려오는 길이 가장 멀다. 안내서에도 적혀 있는 바, 무려 4시간은 족히 걸려야 할 터였다. 그러니 내심 작정을 하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거리다. 하여 고향산천도 식후경이라, 채 너덧 발짝도 떼지 않은 것 같은데 아침을 거른 까닭인지 빈속은 요동쳤고, 덕분에 눈에 띄는 아무 집에나 들어 산채비빔밥을 맛나게 먹었다.
맛난 음식을 혼자 먹을 때의 미안함처럼 부른 배를 하고 휘적휘적 현절사를 향해 걷다, 다음에는 필히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겠다는 빈말로 혼자 걷는 고즈넉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런 동안 멀찍이 작달막한 바윗돌 위에서 벌써부터 나의 수작을 지켜보기나 한 것인지, 눈을 마주치고도 청솔모는 꿈쩍도 않는다. 처음부터 나를 의식하지 않는 것인지, 심술 난 하늘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그저 심드렁하니 허리를 펴고 서있는 녀석이 괜히 얄미워, 부러 발을 쿵쿵 굴러 놀려줘도, 청솔모는 오늘 하루 그리 고집을 부리기로 작정을 한 것처럼 전혀 개의치도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발치께의 넙데데한 돌 위에 퍼더버리고 앉으려니, 어느새 녀석은 자취를 감추고 난 다음이다. 문득 싱겁기도 하고, 괜히 저 혼자 멋쩍어진 나는 도로 일어서기도 우습고 그냥 앉아 있자니 머쓱하여 사방을 휘둘러보려는데, 아! 저만치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짙은 흙냄새가 절로 코를 간질인다. 하여 연신 재채기를 하느라 눈물을 쏙 빼물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무슨 신호처럼 후드득후드득 드디어 빗발이 들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자연은 결코 난데없지 않다. 다들 제 길 따라 걷는다. 저들만의 신호로 서로를 감싸고 각자의 영역에서 제 몫의 자리를 내어준다. 빗물이 듣는 흙바닥에 골이 패이고, 골을 따라 물이 흐르며, 솔잎은 제 몸을 적셔 숲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훅, 끼쳐왔던 흙냄새도 어느새 습한 나무 냄새에 자리를 내어주고, 바위틈 어디 청솔모는 그때쯤 팔베개를 하고 곤한 낮잠에 빠져 오수를 즐기는지 기척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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