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의 힘
-'중국인 거리'에서
하현
차이나타운
일명 차이나타운(Chinatown)으로 불리는 '중국인 거리'는 아시아 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거대 중국 특유의 생활풍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하면 저들의 의상, 음식, 일상적인 생활문화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 거리에 가보면 중국원산 가공품 상점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는가 하면, 저들의 사찰이나 사당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이는 중국 전통의 문화가 작은 화폭에 그대로 재연된 듯한 인상이다.
본래 중국인들의 외국진출은 남다른 특징이 있어 보인다. 대체로 그 나라의 항구를 거점으로 하여, 하류(河流) 연안을 거쳐 내륙지방으로 투과되는 식이다. 그러므로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업지역에 주로 중국인 마을이 형성되는가 보다.
또한 중국인들은 해외로 진출하여 그 거점을 확보하면, 우선 본국에 남아 있는 가족(혈연자)을 데려오고, 이어 친구(동향자, 지연자)를 불러들이고, 다음으로 사업 파트너(동업자)를 끌어들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어느 차이나타운이나 저들 동향자가 모이는 '동향회관'이 있기 마련이다. 저들은 거기서 관혼상제나 전통행사를 주로 거행한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차이나타운은 싱가포르·마르세유·샌프란시스코 등에 형성된 것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인천이나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에도 작은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인천의 신포동 거리, 일명 '중국인 거리'로 불리는 이곳은 의외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것은 영화 <파이란>과 드라마 <북경반점>의 주 배경무대이기도 하였고, 소설가 오정희의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로도 이미 소개가 된 바 있기 때문이다.
영화, <파이란>을 통해 본 중국인 거리
3류 건달인 강재(최민식)가 중국인 아내 '파이란'(장백지)과 위장 결혼하여 서류 상 남편 행세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흐름이다. 하류 인생인 강재는 아내 파이란의 죽음을 수습하는 것으로, 그 여정을 삼으면서 우리 내면의 감성적 자극을 물씬 끌어내고 있다.
영화 <파이란>은 참담하고 절망적이기까지 한 인생의 고단한 삶과 그 지친 여정에서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을 되짚게 한다. 위장 결혼으로 한국에 건너온 중국인 여성 '파이란'을 등장시켜 우리 내면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을 애달프게 그려주고 있다.
<파이란>의 원작인 아사다 지로의 소설 <러브 레터>는 그 자체로 맛깔스런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죽음을 앞둔 '칸 파이란(姜白蘭)'이 말단 야쿠자 조직원 고로(영화 속의 강재)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의 이 한 구절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망연해지게 한다. 문장 사이사이에 드리워진 이국땅에서의 한 외로운 여성의 실루엣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 원작을 골격으로 영화화 한 <파이란>은 소설의 미세한 감정과 절제된 흐름이 행간의 의미를 넘어 '강재'라는 인물을 통해 더욱 절실하게 연장되고 있는 듯도 하다.
강재는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그녀의 서러움을 강한 메시지로 반전시키며 관객들에게 통변하는 매개자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이는 진지한 삶의 무게를 되짚어보게 하는 감독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처럼 버거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본질적 생활의 세트장이 다름 아닌 중국인 마을인 것이다.
어느 시인의 절규처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는 삶의 진지한 성찰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 서해를 건너온 중국인들의 고단한 삶이 덕지덕지 배여 있는 곳, 인천의 신포동 거리 '중국인 거리'는 이제 그나마 공장지대로 둘러싸여 바다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저들이 이루고 있는 작은 단위의 부락은 외형적으로는 더욱 화려해지고 관광 특구로까지 지정된 형편이지만 그 안의 숙연한 삶의 모습은 감출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중국 전통 춘장으로 만든 자장면이 그리우시다면 기꺼이 중국인 거리를 가보시라 권하고 싶다. 허름해서 정겨운 중국식 가옥이 구석구석 늘어서 있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다양한 문양의 종교성이 가득히 배어있는 곳. 어쩌면 우리의 어릴 적 추억을 송두리째 재현하고 있는 곳일 것이다. 졸업과 입학을 맞으면 아무리 궁색한 살림이었다 해도 가장 근사한 외식으로, 그래서 값진 축하 선물로 여겨지던 자장면! 바로 그 시절, 아무리 가난과 궁핍이 얼룩으로 점철돼 있는 시기였다 해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었던 추억의 근거가 바로 그 자장면이 아닐까, 싶다.
인천에 있어 자장면의 고향이기도 한 신포동 거리, 차이나타운에 가면 '구 한의원' 건물이 그대로 서 있다. 드라마 <북경반점>의 풀세트로 사용된 바로 그 건물이다. 이 건물은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지나온 우리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 '중국인 거리'로 다시 읽는 중국인 거리
소설가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는 작가의 성장소설이면서 전후소설인 단편이다. 전쟁 직후 항구 도시에 위치한 중국인 거리를 배경으로 그녀는 육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의 모체로 이곳을 찾아 형상화하고 있다.
소설 속의 화자인 '나'는 열두 살 소녀이면서, 새로 이주한 중국인 거리를 배경으로 성장한 작가의 아픔을 대변한다. '나'의 급우인 '치옥'은 의붓자식으로 '매기언니'의 동생이다. '매기언니'는 양공주다. 동거하던 흑인 병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어머니'. 아이를 여덟이나 낳으면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한 여자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이다. 다음은
창백한 얼굴로 그려지는 '중국인 남자'. 그는 '나'의 내부에 잠재된 욕망과 내면을 자각시키면서 그 성장을 도왔던 인물이다.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는 6.25 피난살이 도중 인천으로 이주하면서 중국인 거리에 섞여 사는 한 소녀의 눈을 통해, 전쟁이 가져온 비극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흑인 병사와 국제 결혼을 꿈꾸던 양공주 '매기언니'의 죽음처럼, '나'의 감수성은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 라는 슬픈 소망을 동반한다. 전쟁이 낳은 비극과 잔인한 가난의 무게를 덤덤하게 형상화하는 작가의 호흡이 놀라운 작품이다.
자장면이 그리울 때
그리움은 지나온 자만의 특권이다. 비록 그 지나온 길이 더디고 힘겨웠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추억함으로 여유로울 수 있다. 가장 만만한 음식이 되어버린 자장면. 아무리 식생활이 윤택해졌다 해도, 자장면은 자장면이다. 곧 회상이 갖는 즐거움이다.
어느 날 문득, 살아온 삶이 지독하게 그리워질 때 자장면 한 그릇은 넉넉한 회상의 보탬이 되어준다. 내남없이 살기 어렵다고 푸념하는 요즘, 더더욱 우리에게 그때의 그 시절은 큰 교훈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입가에 검은 테를 두르고 번들거리는 입술로 헤벌쭉하니 웃을 수 있었던 시절, 자장면의 값진 선물은 그래서 넉넉한 것이다.
공부에 치이는 자녀와 생활에 쫓기는 가족의 손을 이끌고, 자! 한 번 신포동 거리, 중국인 거리를 다녀오시라. 왠지 어수선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의 중국인 거리를 둘러보다, 내키시면 '홍콩반점'이든 '북경반점'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들어가 좌정하시라. 그리고 자장면 한 그릇 앞에 두고, 조금 계면쩍더라도 지나온 어린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들려주시라.
정작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위로를 받으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장면의 힘이다. 자장면이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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