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선물
하현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자연은 우리에게 선물을 한다. 회색빛으로 말라죽은 줄 알았던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돋고, 꽝꽝 얼었던 흙은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의 틈새를 벌리고 그 사이로 풀이 자라게 한다. 풀이 자라는 길을 피해 봄비가 내리고, 봄비가 내리는 길을 피해 꽃씨가 날린다.
봄이 오면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을 한다. 졸업과 입학은 그래서 초봄에 맞닿아 있다. 만개한 꽃과 함께 계절의 여왕 5월이 오면, 내남없이 선물로 풍성해진다. 자녀의 바른 성장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하고,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선물을 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보답하기 위해 선물을 한다. 이처럼 서로 서로 이유를 찾아 선물을 한다. 선물은 그래서 왕의 노여움도 달랠 수 있다.
그런 거 보면 우리가 자연을 닮은 것인지 자연이 본래 그리 가르친 것인지, 우리는 늘 선물하기를 좋아한다. 때를 찾아 그 형편에 맞게-꽃이 자라는 길을 피해, 봄비가 내리는 길을 피해, 줄 수만 있다면 더더욱 주고 또 주고도 모자라는 게 선물이다. 그럼으로 선물은 새로운 시작이면서, 새 생명을 틔우는 봄의 전령 같다.
돌이켜 보면, 칭찬만한 선물은 없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해야 하는 것보다 넘쳐나는 세상에서, 했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칭찬이다. 설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고 칭찬하는 법은 없다. 누구의 잘잘못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야 이골이 났다. 그래야 내가 정당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니 이천 년 전 예수가 그랬을까, "너희의 그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헤아림은 배려다. 배려는 곧 이해이고 존중이다. 그러므로 칭찬은 이 모두를 아우른다. 설마, 실수를 들추어내어 지적하듯 그 가운데 잘한 것만 들추어내어 칭찬하는 것은 본디 칭찬이 아닐 것이다. 칭찬은 애씀의 과정을 향한 것이다. 애씀은 실수의 과정도 용인한다. 결과만을 용납함이 아니다.
어느 사이 결과만 놓고 모든 잣대가 저울질되는 시대이다 보니, 과정은 결과에 따라 용인되기도 하고, 더욱 확대되어 목을 조이기도 한다. 성과급이 보편화된 까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윤을 내야 하는 생존경쟁 사회에서 성과는 곧 선물과 비례한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본래 자연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은 올곧은 소통의 방법이다. 과정이 무시된 결과는 칭찬의 대상일 수 없다. 오붓한 선물을 마다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값을 따지고, 양으로 가늠되는 선물이란 게 인간 사회에서밖에 더 허용되는가? 미천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등식물의 세계에도 그 존재 자체가 값진 선물로 고마운 법이다! 심지어 자신의 자리를 한 뼘씩 낮추어가면서 서로를 선물로 선물답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자연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갯가의 풀들은 바다 쪽으로 갈수록 제 키를 낮춘다. 가장 바다와 가까운 퉁퉁마디는 칠면초보다 작고, 칠면초는 갯잔디보다 작다. 갯잔디는 갈대숲보다 작고, 갈대숲은 사람의 키 높이에 맞춰 한 뼘 더 몸을 낮춘다. 서로에 대한 존재론적인 선물의 의미다.
있음으로 그저 고마운 것, 더 무얼 바라지 않아도 꽉 차는 것, 너는 그래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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