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천사라면, 나에게도 천사라면
하현
- 우린 여기에 살려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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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정리를 마치고 모두들 마루에 모여앉아 예배를 보았다. 하지만 건한이는 잔뜩 주눅이 들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엄마, 아빠, 누나 그리고 아저씨 셋과 아줌마 다섯이 함께 둘러앉아 예배를 보는 자리였다. 저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고도 불안해보였다. 팔이 없거나, 눈이 없거나, 코가 뭉개졌거나, 입술이 올라붙었거나, 머리는 부스스 얼굴은 짭짭하니… 징그럽고 어색하게도 생긴 모습들이었다.
건한이가 더욱 누나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예배를 보는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의 동작은 말할 수 없이 불안하고 낯설었다. 걷는 모습이 기는 모습과 흡사하고, 팔을 휘젓는 모습이 하늘을 나는 새처럼 불안해보였다. 그런데도 보퉁이 하나씩을 챙겨들고 그것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무사히 집안으로 옮기는 것은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아, 저렇게도 걸을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생겨나는 걸음걸이였다.
나환자촌이니, 정착촌이니 하는 소릴 이사 오기 전에 아버지한테 듣기는 하였지만 그게 뭔지, 어떻다는 건지, 건한이는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냥, 어디가 좀 아픈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마을을 그렇게 부르는가 보다, 하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을까. 달리 어떤 상상을 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어휴, 나… 간다.”
이모부는 채 짐정리가 끝나기도 전에 부리나케 돌아갔다. 담벼락에 세워두었던 오토바이를 질질 끌듯이 서둘러 시동을 걸 땐 괜한 배신감마저 들게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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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섶에 침을 퉤 뱉으며 이모부는 신경질적으로 오토바이핸들을 틀었다. 마치 그것을 신호로 양계장이 줄지어 늘어서기 시작했다. 동시에 역하고 구린 냄새가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것 같았다. 무슨 냄새지? 건한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닭장이야. 돼지우리도 있고.”
이모부는 다시 침을 퉤 뱉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주내-천성농원-가리비’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팻말을 비껴 돌자, 쥐 죽은 듯 조용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덕 위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른 쪽 산자락을 끼고 돌면서는 고만고만한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러한 집들 사이로는 양계장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고, 삐뚤빼뚤 아카시아나무와 엉겅퀴가 남은 언덕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오토바이 소리만 크렁크렁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필사적으로 오토바이를 따라오며 짖어대는 개들도 있었다.
건한이는 발가락에 더욱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신고 있는 슬리퍼가 훌떡 벗겨질 것 같아서였다.
“우리가 너무 일찍 도착했나?”
불량스럽게 껌을 씹으며 이모부는 집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말했다.
“크크, 여기가 천성이다 이거지?”
이모부가 쳐다보는 언덕 위로는 뾰족한 예배당 종탑이 노을 진 하늘에 쿡 박힌 것처럼 아득하게 솟아 있었다.
먼저 오토바이에서 내린 이모부는 건한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하지만 땅을 딛는 순간 건한이는 저도 모르게 맨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발이 저린 까닭이었다. 이모부는 그런 건한이를 아랑곳도 않고, 오토바이를 담벼락에 아무렇게나 기대 세웠다. 곳곳이 녹슬고 안장이 다 해진 볼썽사나운 오토바이였다. 저걸 타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미쳤군! 건한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슬리퍼를 벗었다. 탈 때만 해도 저 정도인줄은 몰랐는데 용케도 여기까지 왔다, 싶었다.
이모부는 건한이를 남겨두고 좁은 계단을 따라 저 혼자 올라갔다. 건한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코끝에 침을 바르며 발가락을 주물렀다. 땅바닥이 오토바이를 타고 있은 것처럼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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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보는 동안 건한이는 곁에 앉은 아줌마의 발과 닿지 않으려고 더욱 다리를 오므려야 했다. 찬송가를 들고 있는 그이의 손은 뭉뚝하고 손가락이 없었다. 그 손으로 책을 쥔 터라, 언제 바닥에 툭 떨어질지 몰라 불안했다. 또한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해죽거리며 웃어 보이는 맞은 편 남자의 그렁그렁한 눈물도 저러다 언제 주르륵 흐를지 몰라, 건한이는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설교는 유난히 길어졌다. 둘러앉은 사람 가운데 꾸벅꾸벅 졸듯이 상체를 앞뒤로 건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생과 함께 안방에 들어가 일찍 잠들었어야 하는 건데….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 때문에 도저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게 후회스러웠다.
“기도합시다.”
아버지가 여태 무슨 말을 했는지, 건한이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른 눈을 감으려니까 앉아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눈앞을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누나 곁으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누나는 비스듬히 다리를 포개고 있었는데, 마루를 짚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세요.”
“어휴, 고생들 많으셨어요.”
“뭐, 변변하게 내올게 없네요.”
“원, 별말씀을…. 일 년을 넘게 비워둔 집이라, 손 볼 데가 많으실 거예요. 저희가 짬짬이 들려 손을 볼게요.”
“왜에? 그래도 이 사택이 옛날에 목사님이 손수 다 지은 건데….”
“누가 뭐래?”
“혼자서 뚝딱뚝딱 방을 지었나 싶으면 또 언제 부엌을 짓고, 그렇게 금세 마루를 붙이고 하셨지, 왜?”
“하긴, 그 목사님 손을 안 빌린 집이 어디 있나?”
“하긴…!”
“아이고, 걸레 이리 주세요. 대충 훔친다고 했는데, 사모님이 힘드시겠어요.”
“아, 아니에요. 다 했는걸요, 뭘.”
어쩌고저쩌고…. 한참동안이나 사람들은 주거니 받거니 선 채로 말을 길게 했다. 그러는 동안 몇몇은 먼저 뒤뚱거리며 집을 나갔고 집사님, 집사님, 깔깔, 호호, 서로를 정신없이 불러대며 떠들어댔다.
땅거미가 짙은 마을은 벌써 한밤중인 것처럼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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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한아!”
언덕 위로 올라가더니 내부로 통하는 문이 따로 있었는지, 이모부는 건한이를 부르고 있었다. 건한이는 그제서 담벼락을 짚으며 일어섰다. 바닥을 딛자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열려진 문틈으로는 너른 마당이 한 가득이었다. 담을 맞대고 채마밭이 그득한 마당이었다.
“꽤 신경 좀 썼는데?”
이모부 곁으로 가자 역한 담배냄새가 훅 끼쳐왔다.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하고, 오토바이를 먼저 얹어 타고 온 거였다. 건한이는 부러 인상을 쓰며 고개를 팩 돌렸다. 집 구조는 전체가 미음자였다. 집을 에우듯 네모난 담벼락이 쳐져있고, 담 안에는 또 작은 네모가 들어있는 구조였다.
대문에서 정확히 열 보 반을 떼니까 집안 내부로 통하는 현관문과 맞닥뜨려졌다. 그 문들을 일제히 활짝 열면 한길서부터 집안을 관통하여 뒤뜰까지 일렬로 통하는 그런 셈이었다.
“누가 이렇게 지었지?”
집안을 휘젓듯 돌아다니며 이모부는 혼자서 궁싯거렸다. 건한이는 빗물자국이 그대로 땅바닥에 패여 있고, 짐승 발자국도 옅게 찍혀 있는 오른쪽 통로를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강아지풀이 그득하게 자라있었다. 쩍쩍 금이 간 담벼락에는 담쟁이덩굴이 엉성하고 푸르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 다니지 않는 통로인 게 분명해보였다.
“골 때리네….”
이모부는 다시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야, 그래도 방이 세 개나 된다? 마룬 또 왜 이렇게 길어?”
신을 신은 채 이모부는 혼자서 잘도 떠들고 다녔다.
“야, 부엌 안에 방이 또 있어? 거참 희한하게도 지었네!”
이모부의 신발자국이 부엌에도 여기저기 찍히고 있었다. 한 동안 쓰지 않던 집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예였다. 마루 위에도 뽀얀 먼지가 그대로 쌓여있는 걸 보면, 건한이는 장난스럽게 이모부의 신발자국만 따라 걸었다.
부엌은 층계참을 두 개 내려서야 할 정도로 깊었다. 아궁이도 두 개였고, 그것은 연탄을 때는 아궁이라고 이모부가 말했다. 부엌방은 어른 키를 자로 잰 듯 낮고 좁은 골방이었다. 잊었다는 듯 이모부가 양철로 만들어진 부엌문을 열어젖히자 광인지 가축우리인지 하는 가건물이 눈앞을 턱 가로막고 있었다. 그곳은 현관에서 니은자로 이어지는 채마밭과 누운 기역자모양의 뒤뜰 정원을 경계로 하는 지점이었다.
부엌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안방으로 이모부는 신을 신은 채 거침이 없었다. 어디서 주웠는지 건성으로 비질을 하며 돌아다니는 이모부를 좇아 건한이도 재미난 듯 덩달아 기웃거리며 다녔다. 안방은 담벼락에 막혀 답답한 느낌이었다. 건넌방은 그와 마주한 작은방을 나란히 하여, 뒤뜰로 난 창 때문에 환해보였다. 정원이 한눈에 내다봬는 널따란 창이었다.
“거참, 하나하나 따로 지었나? 방들이 전혀 연결이 안 돼!”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한 것 같았다. 건한이 역시 어딘가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하였다. 부엌방이 제일 낡은 걸로 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것 같았다. 마루는 그 다음으로 건넌방과 부엌에 붙여서 지었다가, 안방을 놓으면서 작은방을 따로 포개어 붙여놓은 것 같았다. 각각의 이음 턱이 떠보였고, 조각퍼즐처럼 왠지 덧댄 흔적도 분명하였다.
그렇게 이모부를 졸졸 따라다니며 내부를 살피던 건한이는 새삼 심드렁해져서 뒤뜰로 나가보았다. 그늘진 뒤뜰은 생각보다 오싹하리만치 후미지고 음습했다. 절반 이상이나 꽃들이 심겨져 있었지만, 그대로 방치된 게 오래인지 들쭉날쭉 이름 모를 꽃들이 제각각이나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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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서 한참을 배웅하고 들어온 아버지는 양복저고리를 탁탁 털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엄마와 누나는 마루 한 편에 돌아앉아 아무 말도 없이 시무룩해 있었다. 건한이는 그런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뭔가 말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이라 그래. 곧 괜찮아질 거야.”
아버지가 먼저 누나를 보며 말했다. 누나는 시무룩하게 얼굴도 들지 않고 있었다.
“우리, 여기서는 오래 살아?”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인 걸 알면서도 건한이는 툭 던지듯 누나의 침묵을 대신했다. 괜한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그냥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
하지만 아무도 그런 건한이의 말에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마루에 포개져 있던 남은 책 뭉치를 작은방으로 옮겼다. 엄마는 공연히 돌아앉아 걸레질만 하고 있었다. 누나는 그런 엄마 곁에서 엉덩이춤을 추듯 제자리만 맴돌 뿐이었다.
“혹시, 옮는 건 아니지?”
아버지가 작은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건한이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었다. 가족들의 침묵은 왠지 숨 막히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인상을 쓰고 말했다.
“이, 녀석! 쯧. 말조심하라니깐! 옮긴 왜 옮아?”
다시 한 손에 들던 책 뭉치를 도로 놓으며 아버지가 버럭 역정을 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건한이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것 같았다. 속이 다 시원하고 후련했다. 화를 내도 좋으니까 제발 무슨 말이고 계속 했으면 좋겠다. 건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음성 환자라니까. 음성 환잔, 옮지 않아!”
아버지는 한 번 더 확인을 하듯 건한이에게 말했다.
“음성? 그게 뭔데?”
그런 아버지를 향해 건한이는 자꾸 말을 걸었다. 이미 대충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계속 말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치료가 다 끝난 사람들이라고 했잖아. 양성 환자는 소록도에 따로 살고!”
아버지는 그런 건한이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꼬박꼬박 그래도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 아버지가 고마워서 건한이는 또 얼른 물었다.
“여긴 그럼 뭐야?”
“정착촌이라니까! 안 옮아. 괜찮아. 다 치료가 끝난 사람들이야. 사회에서 살 수 없으니까, 여기에 따로 모여서 사는 것뿐이야.”
“왜 따로 살아? 어차피 치료가 끝났다면서?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안 살고?”
밤새 떠들어도 좋으니까 건한이는 계속 말이 하고 싶었다. 이대로 잠자리에 들면 다시 또 견딜 수 없는 침묵과 싸워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목을 죄는 두려움이었다. 그나마 이사를 앞두고 조금씩 풀리던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사를 하고나서 다시 또 침울해지는 것만 같아 건한이는 마음이 급했다.
이번엔 아버지도 뭐라 더 설명을 하기가 어려웠는지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간신히 대답을 했다.
“그건, 아무래도 사람들이… 서로가 괜히 불안하니까 그런 걸 거야. 건강한 사람은 건강해서 불안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은 자기 몸이 또 그러니까 불안하고…….”
건한이는 아버지의 말을 반은 이해할 것 같았고, 반은 모를 것 같았다. 그래서 대뜸 되물은 소리가, “왜? 흉측하게 생겨서?”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인상을 쓰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래도? 흉측하긴 뭐가 흉측해?” 하며 털썩 주저앉더니, “그러니까, 그건, 그런 게 아니고… 어쨌든 따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나보지.” 하고는 애써 설명을 더했다.
아버지가 아예 자리에 눌러앉자 건한이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누가? 그게 법이야?”
“법?”
그래서 부러 더 묻고 또 묻기로 하였다. 아버지는 그래도 인내를 갖고 건한이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건한이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것이 고맙고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역시도 뭐라 딱 부러지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끝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동안, 그 사이에도 건한이는 마음만 조급하고 답답했다.
구석에 앉아있는 엄마는 시무룩하게 헛손질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건한이와 아버지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건한이는 그런 엄마를 위해서도 어쨌든 다시 뭔가를 물어야 했다. 아버지가 계속 말을 할 수 있도록 무슨 질문이든 하고 싶었다.
“근데 우린, 그럼 왜 여기로 이사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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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에는 작은 쪽문 하나 있었다. 비스듬히 열려 있는 쪽문에 슬쩍 손을 갖다 대자 제풀에 쿨렁, 하며 45도 기울다 멈춰 섰다. 멈칫 놀란 건한이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쪽문에서 다섯 걸음 정도 앞에는 아름드리소나무가 눈앞을 턱 가로막듯 서 있었다. 그 나무 밑동을 에우듯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그것은 적당히 앉아서 쉴 수도 있는 그런 높이의 것이었다. 돌 사이에는 삐쭉빼쭉 들풀이 자라 있고, 또 저만치 다섯 걸음을 비켜서서 허름한 변소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는 똥냄새가 진동을 했다. 변소를 등지고 언덕 위로 오르는 서른한 개의 층층계 꼭대기에는 예배당 지붕이 까치발을 뗀 듯 삐쭉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외줄짜리 포장도로가 이곳과 저곳을 정확히 가르며 흐르고 있었다. 네모난 버스정류장은 정중앙에 놓여있고, 그곳이 바로 이 마을의 입구였다. 옆으로 난 샛길도 마을로 오르는 언덕과 맞닿아 있었다.
시선을 멀리 두면 온통 곡선으로 이어지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두고 보면 유난히 네모난 게 눈에 띄었다. 눈길 방지를 위한 제설함도, 버스정류장을 표시하는 팻말도, 방향을 알려주는 입간판도, 본래 곡선인 세상에다 따로 만든 네모 같았다. 야트막한 산을 끼고 길은 휘어지듯 원을 그리고 있었다.
누가 있는지, 버스정류장 안쪽에서 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약간 더 휘어지던 찻길은 뒤미처 두 갈래로 나뉘다 삼거리가 되었다. 그 갈래 사이에는 허름한 가게가 하나 붙박여 있었다. 그리로 막 버스가 들어서고 있었다. 달려온 길 위에 너울지듯 흙먼지를 털어내면서.
건한이는 층층계에 앉아 마을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스가 오고 있다는 걸 아는지, 펄럭이던 치마는 벌써 한 걸음이나 찻길 위에 올라선 다음이었다. 그런데, 그처럼 일찍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데도 버스는 불안하게 걸음을 떼는 여자 앞에서 에스 자를 그리며 무심히 지나쳤다.
순간 건한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어, 하고 소리쳤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더 급한 걸음을 떼느라, 여자는 팔을 휘저으며 버스가 달려간 방향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불안하고 불규칙한 걸음이었다. 서걱서걱 비질을 하듯, 여자의 그림자는 길 위에서 허둥거렸다.
층층계에서 일어선 건한이는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여자의 뒷모습만 쫓았다. 저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트럭 하나가 툴툴거리며 달려올 때까지.
“야, 아빠 왔다.”
트럭이 마을길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곧 있자 이모부가 뛰어오며 건한이를 찾았다. 건한이는 이미 열한 번째 층계를 내려서고 있었다.
“얼른 내려와.”
이모부는 여전히 껌을 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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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린, 그럼 왜 여기로 이사 온 거야?”
이건 마치 엄마의 궁금증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건한이는 대놓고 당돌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와 누나, 그리고 건한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
건한이는 그런 아버지의 표정이 은근히 재미있고 고소했다. 하지만 이대로 대화가 끊길 것만 같아 안달이 났다. 그래서 또 다른 걸 물을까 하는데,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누군가는 그래야 하잖아!”
무슨 말인지, 건한이는 멀뚱히 아버지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도 교회가 있는데!”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아버지의 표정은 단호했다. 누군가는 그래야 하고, 여기도 교회가 있다? 건한이는 속으로 아버지의 말을 되씹으며, 그 뜻을 짐작해보려고 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소리였다.
“아무도 이 교횔 오려고 하지 않았대. 그래서 벌써 몇 년째 주일날만 다른 데서 목사님이 왔었나봐. 아니면 이사를 왔다가도 금세 나가거나… 그게 다 가족 때문이었겠지만, 전에 있던 목사님처럼 아예 혼자 들어오면 모를까…….”
“……!”
“하지만, 우린 여기에 살려고 왔어!”
라고 말을 맺은 아버지의 입술은 완결된 문장의 마침표처럼 단호했다. 여기에 살려고 왔다는 아버지의 말이, 왠지 슬픈 것 같았다. 하지만 건한이는 그 말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
“너희들한텐 조금 미안한데, 그래도 이게 가장 나을 것 같아서… 우리한텐 아무래도 어떤 변화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지난가을에 우연히 알게 된 다음부터… 아빠가 여태 고민하다가 그렇게 결정을 내린 거야.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 석이를 그렇게 데려가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
“……!”
“……!”
말을 하다말고 아버지의 표정이 먼저 굳어졌다. 하지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나와 엄마는 동시에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건한이 역시 저도 모르게 울컥, 하는 심정이었다.
아버지는 아차,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눈치였다. 그래서 엄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고….”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아버지의 눈빛이 피곤해 보였다. 이대로 있다간 눈물이 제멋대로 쏟아질 것 같았다. 건한이는 무슨 말이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가급적이면 빨리. 하지만 누구 입에서든 동생 석이에 대한 말이 나오면, 저절로 굳어지는 마음은 모두가 어쩔 수 없었다.
▣
그럼 아빠 혼자 오지 왜? 하고 물으려다, 건한이는 얼른 그 말을 삼켜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난처해하는 아버지에게 뿐 아니라, 엄마나 누나에게도 너무 잔인한 소리일 게 분명해서였다.
아버지는 막상 말을 해놓고, 도로 주워 담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건한이는 측은해보이고 그래서 미안했다. 결국 말까지 더듬으면서 아버지는 엄마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미, 미안해. 괜한 소릴 했어, 내가.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엉거주춤 다가가며 뭔가 변명을 좀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아버지는 상관도 않고, 엄마는 벌써 고개를 푹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여보! 미안해.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아버지는 엄마의 등을 다독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 자신 없어요!”
“흠…?”
뜬금없는 엄마의 말에 아버지는 그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자신 없어요. 당신처럼 괜찮을 자신이 없어요.”
그런 아버지를 향해 엄마는 잔인하게도 흐느껴 울며 말했다.
“참내. 당신도 같이 와보고선 뭘? 당신도 그땐 그러자고 했잖아?”
아버지는 아주 기가 죽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애원을 하듯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어느새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땐 그랬는데… 막상 이렇게 와서 살 생각을 하니까… 정말 자신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 석이가, 혹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냥 거기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석이가…….”
한동안 참았던 눈물이 퍽 쏟아지면서 엄마는 더 주체를 하지 못했다. 단순히 이사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쩌라는 소린지, 건한이는 엄마가 불쌍하면서도 서운했다. 누나 역시 기다렸다는 듯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건한이는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이게 다 자신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눈물을 참아야 했다. 무슨 염치로, 자기까지 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 참…….”
아버지는 더욱 난처한 듯, 누가 뺨을 쳐주길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그 덕에 펑펑 울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래서 건한이는 울 수가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누나와 엄마를 둘러 안고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더하셔서, 위로의 손길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이렇게 해서라도 아버지는 속 시원하게 울고 싶은 거였다. 건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 같이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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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이면 상을 물리기 바쁘게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심방을 나갔다. 누나는 서울로 학교를 다니느라 새벽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가을학기를 걱정하며 심방을 다녔다. 전학수속이 늦어진 건한이는 아예 무기한 연기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일곱 살 난 막냇동생 민이는 마땅히 다닐만한 유치원이 없었다. 그래서 건한이와 민이는 하루 종일 빈집만 맴돌았다. 마루에서 뒹굴뒹굴 노는 게 싫지 않았다.
“엉아, 정말 괴물이 있지?”
“응?”
“무섭지?”
“응!”
“그런데 괴물이름이 다 똑같아. 그치?”
“……?”
민이는 마루에 엎드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다말고 건한이에게 물었다. 건한이는 건성으로 민이의 말에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다 준 ‘한국 전래 동화집’을 읽고 있었다. 그 가운데 도깨비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민이가 곁눈질을 하듯 본뜨고 그리는 중이었다.
“괴물이름이 다 똑같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응. 괴물이름이 다 똑같아.”
“누가 그래?”
“응? 엄마가! 엄마가 그렇게 불러.”
“엄마가?”
“응. 엄마가. 엄마가 괴물들을 보면 안녕하세요, 집사님! 안녕하세요, 집사님! 그래.”
“……?”
건성으로 대충 듣고 있던 건한이는 동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어휴. 이 맹추야! 동네 사람들이 왜 괴물이야?”
“아야. 봐 여기, 여기! 다 비슷하게 생겼잖아. 엉아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괜히 그래. 내 말이 맞지? 똑같이 생겼지?”
건한이는 동생이 색칠하고 있던 그림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동생이 그려놓은 도깨비는 하나같이 얼굴이 뭉그러졌거나 험상궂게 생긴 것들이었다.
“어휴. 여기 사람들은 괴물이 아니야. 그 그림에 나오는 도깨비하고는 달라.”
“뭐가 달라? 내가 보기엔 다 똑같이 생겼는데, 뭘?”
우겨대며 오히려 소리치는 동생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건한이는 잠깐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어, 맞다. 너 여기에 상처 있지?”
건한이는 민이를 일으켜 앉힌 후 다리에 난 상처를 짚으며 물었다.
“응. 이거? 이거 그때 엉아가 밀어서 넘어진 거잖아!”
“그래. 하여튼 그때 난 상처 맞지? 엉아랑 계단에서 놀다가 넘어진 거?”
“응.”
“근데 지금은 다 나았지?”
“응.”
“아파 안 아파?”
“안 아파!”
“엉아가 만지면 옮아 안 옮아.”
“옮아? 옮는 게 뭐야?”
“음… 그러니까, 너 여기 있는 상처가 엉아한테 옮기냐고… 아니, 엉아가 여길 만졌다고 엉아도 이런 상처가 생기냐고?”
“안 생겨. 에이, 바보. 그게 어떻게 옮아?”
“거봐. 그런 거야.”
“뭐가?”
“여기 동네 사람들은 괴물도 아니고, 옮기는 병도 아니야.”
“…….”
건한이는 아버지에게 물었던 것을 동생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때 난 상처가 흉이 져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치?”
“흉?”
“흉터 말이야!”
“아! 흉터? 내가 넘어지면, 엄마가 흉 지겠다, 그러는 거?”
“응. 그거. 이렇게 흉이 남는 거.”
“근데?”
“응? 아… 그러니까, 여기 사람들도 그냥 흉이 남은 거라고.”
“치… 그래도 무서워. 괴물처럼, 징그럽게 생겼어.”
“어어…! 너 누가 그럼 너한테도 아, 징그러, 괴물처럼 생겼어… 하며 이 상처를 보고 놀리면 좋아?”
건한이는 동생의 말투를 흉내 내며, 어른스럽게 굴었다. 하지만 민이는 금세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안 좋아. 엉안, 내가 징그러워? 이거 보면, 징그러워?”
“아, 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런 거라고! 너도 금방 슬프잖아. 안 그래? 다 똑같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앞으론 그러니까 그런 소리하지 마. 누가 너더러 괴물 같다고 놀리고, 징그럽다고 놀리면서 같이 안 놀면, 너도 슬프지? 안 그래? 여기 사람들도 아마 똑같을 걸?”
“…….”
민이는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입을 씰룩거렸다.
“아, 아니. 너가 정말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러니 건한이는 얼른 동생을 다독거리며, “넌 모르고 한 소리잖아. 괜찮아. 하지만, 앞으론 안 그럴 거지? 그치?” 하면서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동생의 등을 톡톡 다독여주었다.
▣
오늘따라 점심나절도 못돼 엄마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급하게 옷만 갈아입고 서둘러 휑하니 집을 나갔다.
“아빠 어디 가?” 하고 민이가 묻는데도, “응. 다녀올게.” 하면서 뒤도 안 돌아다보고 급하게 뛰어나가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 왜 그래?”
건한이도 걱정이 되어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응? 어… 학교에 가시는 길이야.”
“왜?”
“오늘이 신학교 마지막 추가등록 날이래.”
“추가등록?”
“응. 가을학기! 내친김에 아예 끝마치실 생각인가 봐. 이번에 또 미루면 내년에나 해야 하니까.”
“뭘?”
“알면서 뭘 자꾸 물어.”
엄마는 더 이상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주섬주섬 건한이의 옷과 동생 민이의 옷을 챙겨 내느라 분주했다.
“서둘러!”
“뭘?”
“학교 가자.”
“왜?”
“집사님이 우선 널 데리고 오래.”
“집사님이? 누가? 학교엔 왜?”
“아까 아침에 만났어. 학교 서무과선생님이래. 우선 그냥 데리고 오래.”
“치… 그런 게 어디 있어. 나중에 가면 안 돼?”
보름이 지나도록 건한이의 전학통보가 없자, 엄마는 조급해 했다. 아버지는 한 학기를 마저 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건한이는 2학기를 마저 마쳐야 중학교에 올라갈 수 있었다. 괜히 한 학기를 유급하면 내년에 다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건 아버지나 건한이나 마찬가지였다.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 괜히 아빠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엄마는 동생 옷을 입히며 잔소리를 했다.
“걱정 마. 내가 무슨….”
“엄마, 난?”
“넌 내년에 가.”
“싫어. 엉아 따라 갈래.”
“그래, 알았어. 얼른 양말 신어.”
“네에.”
민이는 금방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엄마는 그런 동생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더 이상 때를 써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하긴, 좀이 쑤시던 것이 은근히 학교엘 가고 싶긴 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다른 애들보다 모범을 보여. 알았지?”
“…….”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였다.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이 다 이 교횔 다니고 있었다. 엄마의 걱정도 이해를 못할 건 아니었다. 건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며칠 새 자주 웃는 것이, 건한이는 좋았다. 때로는 정원을 돌보기도 하고, 벌레 먹은 상추를 솎아내느라 이른 아침이면 시골 아줌마처럼 채마밭에 앉아 있는 그런 엄마의 뒷모습이, 건한이는 괜히 싫지 않고 좋기만 했다.
“엉아, 같이 가!”
건한이가 먼저 대문을 나서자 민이가 뒤따르며 말했다.
“조심해. 넘어질라.”
그래서 그런지 엄마의 목소리도 왠지 들떠있었다. 건한이는 동생의 엉덩이를 발로 차는 시늉을 하고 달아났다. 민이도 더욱 신이 나서 건한이를 금세 따라잡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생과 장난질을 치다보니 어느새 건한이가 다닐 학교가 보였다. 볼품없는 건물이었다. 분교라고 하더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했다. 단층 건물로 멋대가리 없는 학교였다. 건한이는 속으로 실망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한 해씩 건너뛰며 신입생을 받는데, 올해는 마침 짝수학년이었다. 2, 4, 6학년이 다니고 있다며, 엄마는 좋아했다. 내년에 민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는 마침하니 1, 3, 5학년이니까, 그것도 다행이라고 하면서.
만약에 바로 밑엣 동생 석이가 같이 있었다면, 낭패를 볼 뻔했다. 전학도 미룬 채 꼬박 한 학기를 기다려야 했을 텐데. 내년에 다시 3학년을 다녀야 했을지도.
건한이는 숨이 턱 막히는 것처럼, 석이가 보고 싶었다.
죽음이란 자고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어쩌면 석이가 먼저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언젠가 우리도 갈 곳에 석이가 먼저 간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곳은 가난도 없고,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그저 좋은 것만 있다고. 하지만 건한이는 지금 여기서, 석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
미아리에서 아버지가 개척교회를 할 때였다. 건한이네 집은 변소가 따로 없었다. 덜렁 교회를 얻기만 해서였다. 마땅한 살림집을 얻을 형편은 못되었다. 그래서 교회가 세든 건물 옥상에 주인댁의 양해를 얻어 가건물을 지었더랬다. 베니어판으로 대충 꾸민 그런 집이었다. 그런데 변소가 문제였다. 아래층 건물을 돌아가면, 주인집 마당에 더러운 변소가 있기는 하였다. 언제나 대문이 잠겨있어서 그렇지. 아니면 근처에 건한이가 다니던 학교까지 달음박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어디서 커다란 함지박을 하나 구해왔다. 그리고 그 위에 널빤지를 얹고 대충 가린 천막으로 변소를 대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차면 비워야 하는 게 문제였다. 변소가 없을 땐 몰라도, 일요일이면 내남없이 그 변소를 이용했다. 그러니 한 달이 멀다하고 엄마와 아버지는 똥통을 져다 버려야 했다.
한날은 앞서 내려가던 엄마가 계단을 굴렀다. 엄마는 그대로 똥통을 뒤집어쓰고 고꾸라졌다. 계단은 온통 똥 범벅이 되고 말았다. 허리를 삐끗하고 발을 겹질렸으면서도, 엄마는 계단을 쓸고 닦고 그렇게 며칠을 꼬박 물청소를 했다. 하지만 그 냄새는 엄마가 앓아누운 날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물론 그 사건 때문에 교회까지 쫓겨날 뻔 했다. 다행히 교회는 남고 옥상 가건물만 철거하는 것으로 간신히 무마가 됐다. 그러니 건한이네 가족은 졸지에 새로 살 집을 얻어야 했다. 다급한 마음에 마침하니 반 지하 단칸셋방은 얻긴 하였는데.
이사 당일 날, 애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방을 주지 못하겠단다. 옥신각신 끝에 주인남자와 아버지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때도 이삿짐을 날라주느라 이모부가 와 있었다. 그 이모부네 집으로 건한이와 석이를 보내는 것이 그것이었다.
당분간만 그렇게 지내다가, 날이 풀리면 다시 이사하자고 다들 설득했다. 그때 건한이는 동생과 이모부 오토바이를 탈 생각에 마냥 좋아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건한이와 석이는 번번이 엄마네 집을 찾아갔다. 그럴 때마다 석이는 눈치도 없이 엄마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같이 살고 싶어요.?” 하면서.
단칸셋방에 엄마, 아빠, 누나, 그리고 막냇동생이 지내는 것으로 주인남자와 타협을 본 건데. 하는 수 없이 건한이는 그런 동생을 따돌리고 엄마네 집엘 들르곤 하였다. 그날도 그랬다. 기껏 뽑기까지 시켜주고는, 정신 팔려있는 석이를 두고 잠깐 갔다 온 것이다…….
혼자 엄마네 집엘 찾아 나선 석이의, 그 뒤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누구는 도봉산 중턱에서 어린아이 사체가 발견됐다고 하고. 누구는 청량리 역전에서 석이를 닮은 아이를 보았다고 하고. 또 어느 보육원엘 가면 잃어버린 아이들이 수용돼 있다고 하고. 그럴 때면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온 교인들까지 나서서 전단지를 뿌렸다. 매주 오후예배가 끝나면 시내 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는 동안 건한이도 헤매고 있었다.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너 때문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실신하는 엄마와 매일같이 눈물짓는 누나와 점점 말을 잃어가는 아버지…….
지지난 해 초겨울의 일이었다. 건한이는 있는 듯 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한날은, 막냇동생 민이와 장난치다 층계참에 부딪쳐 민이의 무릎이 까졌다. 그때도 누가 하나, 건한이를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욕을 하고 야단을 쳐주어야 하는데, 서로가 자신의 미안함에 눌려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 건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사 이야기가 나오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뤄진 이사였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건한이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목회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기운을 추슬러 다행이었다. 그러니 여기가 나환자촌이든 정착촌이든 건한이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하물며 이와 같이 너른 마당이 있는 집이라면, 민이 말마따나 괴물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도 좋기만 하였다.
▣
“사모님 나오셨어요?”
교무실에 들어서자 낯이 익은 집사님이 반갑게 엄마를 맞았다.
“네에. 김 집사님도 안녕하시죠?”
“네, 사모님. 전도사님은 서울 가셨나요?”
“네. 좀 전에요….”
“네에. 거 얼마나 피곤하시겠어요. 이사하곤 여태 또 대심방하시느라 하루도 쉬지 못하고, 또 부리나케 학교로 가셨구먼요?”
“…….”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얘가 둘째지요? 큰 애가…?”
“큰애는 딸아이에요. 중학교 3학년에 다니는…. 뭐해, 얼른 인사드려야지?”
그제서 생각난 듯 엄마는 건한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 그래. 네가 건한이지?”
“네….”
“너무 많이 놀면 못써.”
“…….”
“사모님, 이리 오시죠.”
집사님은 엄마를 앞서 걸으며 말했다.
“저, 저희 학교 교무주임 선생님이세요. 주임님, 아까 말씀드렸던 저희 교회 전도사님네 앱니다. 6학년, 이름은 경건한이라고… 교육청에서 아직 통보가 오질 않아서요…….”
“아, 안녕하세요. 서무과장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이리 앉으세요.”
엄마가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건한이는 슬그머니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 밖에서는 아이들의 공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야, 패스, 패스, 패스.”
한 아이가 뛰어가면서 자기 쪽으로 패스를 하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솔직히 아이들도 이상하면 어쩌나 하고, 건한이는 은근히 걱정을 하긴 했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교문 쪽 그네 위에서 막냇동생이 발을 구르며 혼자 그네를 타고 있었다.
“건한아! 이리 와라. 곧 점심시간이 끝나니까, 잠깐 여기 앉아 있어.”
서무과장인가 하는 집사님은 건한이를 한쪽 구석에 앉히고, 엄마를 교무실 밖까지 배웅을 하러나갔다. 선생님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서너 명이 전부인 것 같았다. 건한이는 머쓱해져 눈만 멀뚱거렸다.
“아, 최 선생! 저 애예요. 아직 출석부엔 올리지 말고, 우선 반에 넣도록 하세요. 곧 전학통보가 있을 거라고 하니까 따로 교육청에 문의할 것도 없고. 아, 교회 애래요. 후후. 어떻게 이 마을은 온 주민이 다 교인이야?”
건한이를 두고 소개하는 말이었다. 쑥스럽기도 하고, 건한이는 못들은 척하고 교무실 바닥만 내려다봤다. 바닥에는 철심이 네모난 정사각형으로 가로 열세 개, 세로 다섯 개로 나뉘어 박혀 있었다.
“네가 건한이냐? 경… 건한?”
“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건한이가 대답했다. 선생님은 앞머리가 다 벗겨진 초췌한 얼굴의 아저씨였다.
“가자.”
선생님은 출석부 사이에 몽둥이를 끼고, 한 손에는 분필을 들고,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선생님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무료하게 쩍쩍 울렸다. 서울 학교와는 달리 한 복도에 교무실과 자료실 그리고 세 학급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옹색한 느낌이었다. 모든 학년이 1반이었다. 건한이는 선생님을 따라 6학년 1반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채 여남은 명에 지나지 않았다.
“자, 오늘부터 너희들과 함께 공부할 친구다. 이름은…….”
“알고 있어요.”
선생님이 건한이를 소개하려고 하자, 아이들 몇이 끼어들었다. 모두가 주일학교에서 낯이 익은 아이들이었다.
“그래? 그럼 잘됐네. 음… 저기, 해란이 옆에 가 앉아.”
선생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는 심심한 말투였다.
건한이는 아이들 사이로 걸어갔다. 벌써 안다고, 씩 웃으며 건한이를 툭툭 치는 아이도 있었다. 짝꿍인 해란이도 교회에서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언제나 말이 없는 새침데기 같았다. 옆 자리에 앉자 어느새 볼이 빨개졌다. 걸상을 옆으로 끌며 자세를 바로 하자 건한이는 괜히 머쓱하고 무안했다.
“여, 상식이 열 받네….”
“하하, 이제 해란이 뺏긴다.”
“해란아 바람피우면 상식이한테 죽어. 헤헤.”
“크크.”
아이들은 뭐가 그리 재미난 지, 저들끼리 떠들며 놀려댔다. 선생님이 교탁을 탁 쳐도 아이들은 킥킥 쑥덕거렸다. 해란이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금방이라도 퍽 울 것만 같았다. 건한이는 그런 아이들이 달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조용히 안 해?"
갑자기 문가 쪽에 있던 덩치 큰 아이가 소리쳤다.
“왜들 그래? 응? 자, 사회 책 펴. 어디야?”
아이들은 선생님보다 그 아이의 말에 더욱 조용해졌다. 그 아이가 바로 상식이인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애였다. 아무래도 교회엔 나오지 않는 애 같았다. 건한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아이를 곁눈질 하곤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은 저들끼리 걸으며, 건한이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야, 건한아, 우리 집에 가자.”
그때 수업 시간에도 가장 빠릿빠릿하던 민택이라는 아이가 넉살좋게 다가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주한이라는 아이가, “너, 이따 멱 감으러 안 가?” 하고 신경질적으로 끼어들었다.
“밭에 갔다가 가던가, 어쩌던가!”
대수롭지 않게 민택이는 대답했다. 그러더니 “가자. 내가 알 쪄 줄게.” 하며 그 애 들으라고 더욱 친한 척을 하였다.
“새끼. 하여튼….”
주한이는 걸음을 재촉하며 팽하니 돌아섰다.
“헤헤.”
허물없이 웃는 민택이가 괜히 바보스럽고 편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뿐이었다.
“덥다. 야, 멱 감으러 안 갈래?”
“이젠 추워 임마. 곧 해 떨어지는데.”
“춥긴 자식아. 아직 해가 중천이구만. 가자 얘들아. 헤헤.”
“얼른 갔다, 이따 배 씌워야 돼.”
“잠깐 갔다 오지 뭐.”
“그래, 이따 내가 도와줄게.”
하는 식으로, 아이들은 저들끼리 쩌렁쩌렁 떠들어댔다. 부러 건한이 들으라고 크게 말했다. 그 소리는 앞산에 부딪쳐 메아리로 울릴 정도였다. 건한이는 픽 웃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민택이는 눈치도 없었다. 건한이 곁에서 샐샐거리기만 했다. 어디 살다 왔냐? 그 학굔 애들이 몇 명이냐? 운동장은 크냐? 소풍은 어디로 갔었냐? 하는 식으로, 묻는 말에 일일이 답을 하느라, 건한이도 정신이 없었다.
“너, 알 걷어 봤냐?”
“알?”
“계란말이다, 달걀.”
“응. 아니, 그걸 걷는다고?”
건한인 머릴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때 언제 뒤따라 왔는지 한 아이가, “하하. 얘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 하면서 끼어들었다. 지난 일요일 날 뵀더니, 아버지가 예배당 종지기 집사님이었다.
“얘 이름은 경주야. 불국사가 있는 경주. 킥킥.”
민택이가 그 애를 놀렸다.
“안녕? 반가워. 난 건한이라고 해.”
새삼 자신을 소개하며, 건한이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 건한이는 쳐다도 보지 않고, “알아!” 하면서 경주는 쌀쌀맞게 대답할 뿐이었다.
조금 무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조금 기분이 상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건한이는 그냥 픽 웃었다. 저 애도 쑥스러워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긴, 서울 놈이 괜히 서울 놈이겠냐!”
“낄낄. 먹을 줄은 알겠지.”
경주는 두어 걸음 물러서서 놀렸다. 지들끼리 따라오면서 애들은 낄낄거렸다.
그런 애들이, 그냥 반갑다는 소리 같기도 하고. 건한이는 그저 속 좋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하긴. 오늘 알 걷어 보는 게 쟤한텐 대단한 경험이겠다. 야야, 대신 계란프라이나 잔뜩 해줘라.”
“아니면, 찐 계란이나 팍팍 삶아주던지. 헤헤.”
“야, 일당 달라 그래라.”
“크크. 닭 한 마리 주면 되겠네?”
연신 떠들어대는 아이들과는 달리, 저만치 걷는 상식이는 조용했다. 건한이가 그 애에게 눈길을 주자, “쟤? 왕초 손자!” 하고 민택이는 눈치껏 귀띔을 했다.
“왕초?”
“크크. 왕 장로님!”
“아….”
“이 동네, 이거.”
민택이는 엄지손가락을 삐쭉 세우며 말했다. 건한이도 그런 민택이를 따라 조용조용 고개를 끄떡였다.
“저기 해란인 상식이 이거! 니 짝꿍, 알지?”
이번엔 그 뒤를 다소곳이 걷는 해란일 가리키며 새끼손가락을 펴보였다.
“둘이 그런 사인 건, 온 동네가 다 안다. 어른들도 거의 그러려니 하고. 아마 중학교만 끝내면 곧바로 결혼할지도 몰라.”
“……?”
얌전하게 걷는 해란이의 뒷모습이 새삼스러웠다. 건한이는 호오, 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 불쑥, “중학교만 졸업하고? 결혼을 해?” 하고 놀랐다.
“둘 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 적어도 두 살? 상식인 세 살인가?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스무 살도 안됐을 텐데……?”
“왜에. 너 몇 살이냐?”
“응?”
“우린 다 같은 학년이래도 나이가 각자 다르다. 어떤 앤 열넷, 어떤 앤 열다섯. 상식이가 지금 열다섯인가? 아니다 열여섯인가?”
“……?”
“학교가 2년에 한 번 신입생을 받으니까, 늦으면 2, 3년씩 꿇고. 더 나중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성철이 형은 지금 고등학생이지만, 땡구리 집사님하고 동갑인데?”
“땡구리?”
“하하. 저기 밑에 약국 하는 분 있어. 히히. 그 집사님은 벌써 딸내미도 있다, 뭘?”
“……?”
도대체 나이 계산을 어떻게 하는 건지. 건한이는 6학년인 자기 나이도 헷갈릴 정도였다. 아무리 한두 학년씩 늦거나 빠르게 입학한다 해도, 설마. 들쑥날쑥 제멋대로 나이를 매기는 게 아니고선, 어떻게……. 이해가 쉽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선 일찍 결혼하는 게 흉도 아니고, 그게 능력이다, 능력. 헤헤.” 하고 또 민택이는 저 혼자 웃었다.
“너 참, 괜히 상식이한테 까불지 마라. 니 아빠가 교회 이거면, 이 동네 왕촌 쟤다. 아니, 쟤네 아빠.” 하고 엄포를 놓기까지 하는 거였다.
“……?”
“쟤가 또 한 성질이거든. 할아버지 빽 있겠다, 아버진 돈 있겠다, 거기다 옥동자 아니냐!”
민택이는 같이 걷는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묻지도 않은 말을 저 혼자 널뛰듯 하였다.
“그럼 너흰 왜 상식이한테 형이라고 안 불러?”
참 바보 같긴 해도, 막상 말을 듣다보니 건한이는 그게 궁금해졌다. 하지만 민택이는 뭐가 더 재미있는지 푹 웃어 보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푸. 같은 학년이면 다 말 트는 거지 뭐. 안 그러냐? 헤헤.” 하더니, 슬쩍 또 다른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실은…. 성철이 형이 그럼 죽인다, 그랬거든.” 라는 거였다.
“성철이 형?”
“왜, 너 몰라? 성가대 베이스파트에 앉는 스포츠머리 한 형? 맨 뒷줄에?”
하지만 건한이는 그 형이 누구인지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왜, 그… 아무튼 너, 그 형이랑 얼른 친해져라. 사실 그 형이 진짜 이거다. 삼거리에서 이거, 의정부에서 이거, 이 근처에서 그 형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다.” 하며 말끝마다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민택이는 신이 난 듯 더 열을 올리며 떠들었다.
어찌나 속닥거리듯 말을 하는지, 건한이는 괜히 덩달아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심스러웠다.
“근데… 너,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사실 그 형이 왕초 이거라는 말도 있다.”
“……?”
새끼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민택이가 워낙에 조용히 말한 탓에 건한이는 미처 누가 곁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너, 새끼! 또 그러다 죽고 싶어. 겁도 없이 어서 떠들어, 떠들긴.”
하고 경주가 민택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우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알 사람은 다 아는 소린데… 쳇.” 하면서도 민택이 역시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앞서 걷는 상식이를 먼저 살피는 걸 보면.
“너, 지난번에도 나불거리다가 된통 혼나놓고는 또 까불어? 하여튼, 넌…!”
하더니 더 이상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경주는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그제서 민택이는 쭈뼛거리며 아무 말도 없었다. 오히려 건한이가 무안해졌다.
- 알을 걷듯 마음을 걷듯
▣
민택이네 양계장은 모두 두 동이었다. 그 위로 커다란 버드나무가 축축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건한이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늙은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듯 다가왔다. 건한이는 주춤거리며 개를 경계했다. 하지만 민택이는 검둥아, 부르다가 갑자기 늙은 개의 옆구리를 발로 퍽 걷어찼다. 장난치는 시늉으로 걷어찬 거였지만, 그 개는 노상 그래왔다는 듯 슬쩍, 비껴서다 다시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본래가 순해터진 개였다. 건한이도 경계를 풀고, 늙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언제 교회에서 뵀던 민택이네 엄마가 느린 동작으로 걸어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건한이도 왔어.”
“안녕하세요?”
“어… 어서 와라. 전도사님은 학교 가셨나?”
“네.”
“사모님은 집에 계시고?”
“네."
허리를 꺾듯 땅을 짚었다 떼는 민택이 엄마의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푹 쓰러질 것처럼 불안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외다리 백로처럼 한 쪽 다리가 두 뼘이나 들렸다.
“엄마, 나 알 걷고 멱 감으러 간다?”
민택이는 저 혼자 신이 난 아이처럼 평상 위에 가방을 내던지며 말했다.
“그, 그래. 건한이도 왔는데….”
“…….”
민택이네 엄마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데 그만두는 표정이었다. 주춤거리듯 걸으며 돼지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건한이도 민택이를 따라 평상에 가방을 던져두었다. 그리고 민택이가 들어간 닭장으로 따라 들어갔다. 닭장입구에는 빈 계란 판이 빼곡 했다.
“할 수 있겠냐?”
“……?”
미안했던지, 민택이가 건한이에게 물었다.
“재밌을 거 같은데?”
“흐흐. 그래? 해봐라. 니 덕분에 내가 편하게 됐다.”
민택이는 빈 계란 판을 몇 장 건한이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앞장서서 알을 걷기 시작했다. 일렬로 줄지어 있는 양계장이었다. 닭들은 쉴 새도 없이 꼭꼭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허벅지 정도 오는 높이에, 줄지어 데굴거리는 알들이 신기했다.
민택이는 솜씨 좋게 빈 판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두 개 세 개씩 손에 잡히는 대로 척척 갖다 맞췄다. 건한이도 맞은편을 따라 걸으며, 민택이를 흉내 내듯 두 개 세 개를 잡아보았다. 보기보다 쉬운 게 아니었다. 손에 잘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떨어뜨릴 것만 같아 조심스러웠다. 알기나 하는지, 닭들은 꼭꼭거리기만 하는데도 건한이는 손을 콕, 쪼일까봐 은근히 무섭기도 하였다.
벌써 계란이 가득 담긴 판을 여러 개 내려놓으며 민택이는 우쭐해보였다. 그리고 다시 끄트머리에서 돌아 나오며 계란을 새로 걷고 있었다. 금방 낳았는지, 알들은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어떤 것은 껍질이 없는 물알도 있었다. 물알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른 알들 위에 따로 올려놓았다. 그 느낌이 찌릿찌릿 했다. 마치 고무풍선에 물을 담아놓은 것처럼, 물렁하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나마 제풀에 터져 바닥에 질질 흐르는 것도 있었다. 껍질에 피가 잔뜩 묻은 알은 손을 대기가 께름칙했다.
건한이는 채 한 줄도 걷기 전에 민택이는 벌써 바닥에 내려놓은 계란 판을 차곡차곡 쌓으며 걸어왔다.
“이건 어쩌지?”
건한이는 난처한 듯 물알을 가리키며 물었다. 민택이는 건한이의 계란 판에서 물알을 집더니, 입안에 찍 쏘듯 마셔버렸다.
“이렇게 먹어치우던가, 아니면 이렇게 버리든가… 헤헤.”
하면서 다른 물알을 닭장 밑으로 휙 집어 던졌다. 건한이는 멍하니 서서 그런 민택이의 행동을 무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닭들이 놀라면 원래 물똥을 싸듯 저래.”
민택이는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닭똥 위에 질질 흐르는 물알을 가리키며 말했다.
결국 민택이가 건한이의 몫까지 노련한 솜씨로 알을 걷었다. 줄로 치면 네 줄인 닭장 통로는 각각 서로 등을 마주하듯 한 줄씩 닭들을 가두고 있었다. 그것이 양 끄트머리에서 또 한 줄씩 따로 놓여 있었다. 건한이가 한 줄을 걷는 동안 민택이가 도합 다섯줄을 걷은 셈이었다.
그렇게 남은 닭장을 다 돌아 나오자, 평상 위에는 굵은 소금과 삶은 계란이 한소쿠리 쌓여 있었다. 하지만 건한이는 찐 계란 생각이 없었다. 여태 닭똥냄새를 맡아서인지, 금방 난 알을 걷고 나와서인지, 평소엔 싫지 않던 삶은 달걀이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그런 눈치를 챈 민택이는 이런저런 말도 없이, 건한이의 실내화주머니에 대여서 알의 계란을 쓸어 담듯 쏟아 붓고는, 건한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덥다. 멱 감으러 가자. 빨리 뛰어가면 아직 애들 거기 있겠다.”
민택이는 조바심 나는 걸음으로 먼저 뛰었다. 건한이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러나 마당에는 미루나무 그늘에 누워 혓바닥을 길게 빼문 검둥이 뿐이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민택이는 마을 입구에 있는 약국집을 돌아 부리나케 뛰었다. 건한이도 양계장 사이를 지나 돼지우리를 끼고, 민택이 뒤쫓았다. 저만치 언덕을 오르는 오솔길이 나오는가 싶더니, 그 길을 따라 배나무들이 가지런했다.
민택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여기까지 우리 거, 저기부턴 주한이네, 그 뒤는 성철이 형네….”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겠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뛰어갔다. 그런 민택이의 한쪽 손에 건한이의 실내화주머니가 묵직하니 덜렁거렸다.
한참을 더 그렇게 언덕을 올랐다. 아카시아나무를 끼고 돌기도 했다. 그쯤에서 확 트인 수로가 드러났다.
“어? 뭐야? 벌써 갔나?”
허탈한 듯 민택이가 씩씩거렸다. 허리를 굽힌 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런 민택이를 따라 건한이도 숨이 턱에까지 차올랐다.
“헉헉. 우리가 한 발 늦었나? 아닌데…. 이 자식! 나한테 공갈친 거 아냐?”
민택인 좀 숨이 돌아오는지, 허리를 펴고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너 수영할 줄 아냐?”
둑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훌훌 벗으며 민택이가 물었다. 건한인 그런 민택이를 쳐다보며, “응? 뭐, 그냥….” 하고 말았다.
“야, 여기 생각보다 깊다. 알아서 해라.” 하고는 호들갑스럽게 다이빙을 한 민택이 때문에 건한이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어쩔까, 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민택이가 풀썩 일어서며 깔깔 웃었다. 수심이 고작 배꼽에도 차지 않았다.
▣
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과장되게 큰소리를 치며 야단치는 시늉을 했다.
“너, 하루 종일 어딜 싸돌아 댕기다 이제 돌아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시골아줌마처럼 월남치마를 입은 엄마가 싫지 않았다. 왠지 건강해보였다. 그래도 건한이는 킥킥 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엄마도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슬쩍, 치마를 끌어올리며 눈을 흘겼다.
민이가 그 소리를 듣고 엉아, 엉아하며 달려왔다.
“민택이네 갔다가, 멱 감으러 재 너머에 갔었어.”
건한이는 동생을 안고 변명을 했다.
“민택이가 누구야?”
“왜, 저기 공판장 뒤에 보면 닭장 두 개 있잖아. 입구에 큰 버드나무 있고….”
“아, 조 집사님 댁?”
“조 집사님? 아, 응. 조민택이네….”
엄마는 예전처럼 야단도 치고, 잔소리도 했다. 그런 엄마의 성화가 건한이는 은근히 반갑고 좋았다.
“그럼 집에 좀 들렀다가 민이도 데려가지? 민이가 여태 너 언제 오냐고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알아? 어휴, 그리고 이 옷 꼴이 뭐니? 어머 너 옷 입고 수영했니? 다 젖었잖아?”
엄마는 건한이에게서 민이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
“얼른 옷부터 갈아입어. 감기 들면 어쩌려고?”
“치. 다 말랐어.”
건한이는 그런 엄마 앞에서 투정을 부리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는 금방 갔었던 웅덩이에 대해, 민택이네서 본 늙은 개에 대해, 알을 걷던 일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이렇게 엄마가 예전 모습으로 마주앉아 주는 게 고마워서.
그러다 불쑥, “민아! 너 찐 계란줄까?” 하고, 건한이는 실내화주머니에 넣어둔 삶은 계란이 생각났다.
“응?”
엄마에게 안겨있던 민이는 삶은 계란을 보자 얼른 내려섰다.
“얘가 진짜! 너 옷 안 벗어? 으응? 얘, 그러다 체한다니까!”
엄마의 잔소리를 못들은 척, 건한이는 동생과 부엌문지방에 걸터앉아 삶은 계란 먹었다. 그런 건한이와 민이에게 엄마는 물을 내오고 소금을 챙겨주었다.
“이거, 조 집사님이 주시디?”
“응. 민택이네 엄마가.”
“너… 괜찮아?”
“뭐가?”
“응?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아?”
벌써 두 개째를 까서 동생에게 흰자위를 주었다. 그리고 노른자위를 입에 넣으며 건한이가 물었다.
“응? 아니 그냥…. 야, 목멘다, 물마시고 먹어!” 하며 엄마는 물그릇을 건넸다.
그러더니 또,
“친구들은, 잘 해줘?”
하고 물었다.
“응.”
“다들 착해?”
“응. 왜?”
“어? 아, 아니 그냥….”
사실은 뭐가 궁금한 건지, 왜 그런 걸 묻는지, 건한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 역시도 스스럼없이 사람들을 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악수도 잘 못하던 엄마가 언제부턴가는 먼저 손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저녁이면 한참씩 손을 씻는다는 걸, 건한이는 모르는 척 해주고 있었다. 건한이 역시도, 사람들이 앉았던 방석은 왠지 께름칙할 때가 있으니까. 누가 귀엽다고 머리라도 쓸어줄라치면 자신도 모르게 움찔, 놀라게 되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변죽 좋게 구는 것 같지만 건한이도 사실은 징그럽고 싫을 때가 많았다.
“엄마도 먹어.”
건한인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는 엄마에게 계란 한 개를 까서 건넸다.
“응? 맛있니? 와, 알이 참 굵다.”
엄마는 쭈그려 앉은 채 계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빤?”
“늦으시겠지.”
“누난?”
“올 때 됐어.” 하더니 갑자기, “어휴, 경민! 너, 꼭꼭 씹어 먹으라 그랬지? 얘! 얘가 왜 이렇게 욕심을 부려?” 엄마는 민이의 등짝을 찰싹 때리고, 손가락을 강제로 동생 입에 우겨넣었다. 민이는 입 안 가득 계란을 물고도 또 하나를 입 속에 구겨 넣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뱉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다, 급기야 엉엉 터뜨리며 때를 썼다.
“왜 그래? 원래 찐 계란은 이렇게 먹는 거라 그랬단 말이야.”
맨바닥에 쭉 뻗은 발을 바동거리며, 민이는 억울하다는 듯 말을 더했다.
“석이 엉아가, 이건 원래 한입에 물고 먹어야 제 맛이라 그랬단 말이야! 씨.”
“……!”
순간, 민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석이의 이름. 건한이는 멈칫, 엄마의 눈치를 먼저 살폈다. 이것은 실행 버튼처럼 엄마의 눈동자를 떨리게 했다. 건한이는 그것을 눈치를 채고 얼른 민이를 툭 치며 이를 악 물었다.
순간적인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가족들 모두는 석이의 이름 앞에서 자동 재생되는 슬픔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행여 누가 실수로라도 그 실행버튼을 누르면, 곁에 앉은 사람이 얼른 헛기침을 하거나, 또는 다른 말로 분위기를 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물론 그 일은 아무도 몰래 건한이가 나서서 도맡아 오고 있었지만.
“엄마 오늘 밤에 나, 민택이랑 교회 뒤에서 만나기로 했어. 어느 형네 놀러간대. 누구더라? 아, 성철이 형이라고 알지? 성가대에 앉는 형, 엄마도 알지? 스포츠머리하고 왜 잘 생긴 형 있잖아. 그 형네 큰누나가 공판장 하는데, 형네 집에 가면 과자도 많고, 재미있대. 그리고 있잖아. 우리 반에….”
멍하니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있는 엄마의 표정을 살펴가며, 건한이는 더욱 부지런히 떠들어댔다.
“우리 반 선생님은 느림보야. 말도 느리고, 걸음도 느리고, 꼭 영감님처럼 너무 조용조용히 말해. 수업시간에 애들이 다 졸아….”
“…….”
“근데, 엄마. 다담 주에 운동회 있잖아? 나도 거기서 계주 뛰기로 했다? 여긴 애들이 몇 명 안돼서 한 애가 두 개 세 개씩 해야 하나봐.”
“…….”
“단체 춤은 연습을 못해서 난 못할 거 같고….”
“…….”
“근데, 있지. 여기 애들은 학교 끝나면 부리나케 집에 가서 달걀부터 걷는대. 배 밭에 나가서 일손도 돕고…. 신기하지? 전부다 닭도 기르고 돼지도 기르고 그러나봐. 애들이 전부 어른 같애. 하하.”
두서없이 이 말 저 말을 늘어놓으며 건한이는 건성으로 웃었다. 동생 민이도 언제 울음을 그쳤는지 조용히 앉아 삶은 계란만 만지작거렸다.
“근데 있자나, 민택이 걔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아무 말이나 다시 이으려는데, 엄마가 불쑥 건한이의 말을 끊으며 쳐다봤다.
“됐어. 그만 해.”
“……!”
“엄마, 이젠 괜찮아. 정말이야. 그만 해.”
건한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엄마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하지만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는 엄마의 그런 눈이 안쓰럽고 고단해 보였다. 연거푸 눈을 깜빡거리며 울음을 참고 있는 엄마의 눈이.
“이제 안 그래도 돼! 진짜야, 엄마 괜찮아.”
“…….”
엄마는 말을 하다 울먹거렸다.
“건한아!”
“응?”
“고마워! 니가 제일 고마워!”
“……?”
“니가 제일 힘들었을 텐데… 잘 견뎌줘서 정말 고마워.”
울컥, 하는 감정을 건한이도 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에이. 왜 그래, 엄마.” 하면서 장난처럼 엄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는데, 뭔가가 명치끝에 탁 걸리는 것처럼 답답하고 아팠다.
“엄마도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그러지 마. 응? 그냥 편하게 굴어.”
“……?”
“다 알아…. 건한아!”
“!”
“너 때문이 아니야. 석이 그런 거… 니 잘못이 아니야. 우리 석이,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아빠 말처럼, 하늘나라에 먼저 가서 잘 있을지도 모르고. 응? 그러니까 석이 너도 너무 그러지 마. 너 때문이 아니야. 응?”
엄마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어쩌지도 못한 상태인데, 어쩌자고 눈물은 저 혼자 흐르는 것인지….
“아무도 너 원망하는 사람 없어. 그땐 엄마가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화가 나서, 그래서 엄마도 모르게 너한테 못된 소릴 한 것 같아. 건한아! 그건, 그건 진심이 아니야. 정말이야. 취소할게. 책임지라던 말, 취소할게. 응? 용서해줘.”
“…….”
저 혼자 흐르던 눈물은 저 혼자 어깨를 들썩거렸다. 저 혼자 들썩거리던 어깨는 제멋대로 신음소리를 냈다. 이러지 말아야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을 하는데도 생각은 제멋대로 울음을 쏟아냈다.
“미안해, 건한아!”
와락, 엄마가 끌어당겨 안아주자, 건한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랐다. 엄마 품에 안기면서 비로소 어린아이가 되어 응석부리는 엉엉, 울었다.
“아, 우리 아들! 불쌍한 놈! 여태 너 혼자 얼마나 힘들었니?”
“…….”
“몇 번이고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정말이야. 너 혼자 애쓰는 거 알면서, 여태 엄마가 우리 건한이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어. 미안해. 응? 미안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꺼이꺼이, 목으로 넘어왔다.
“엄마. 내가 그때 석이를 잘 봐야 하는 건데… 엄마, 미안해 엄마.”
말은 또 제풀에 토해내는 서러움이 있었다. 건한이는 엄마에게 안긴 채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곁에 앉았던 민이도 엉엉 울면서 엄마를 껴안으며 달려들었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대문 여닫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엄마, 나왔어!” 하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왜 이렇게 늦었어?”
먼저 나와 있던 민택이가 건한이를 반기며 물었다.
“응? 어… 저녁을 늦게 먹었어.”
“너 혼났니?”
“왜?”
“운 거 같은데?”
“아, 아니야.”
건한이는 얼른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누나가 오고, 또 그렇게 한참을 같이 울었다. 이제 다시는 울지 말자고 약속하듯 마지막으로 실컷 울었다.
밥을 먹으면서, 얼결에 울었던 누나가 “근데 아까 왜들 운거야?” 하고 물어서 건한이와 엄마는 하마터면 상을 엎을 뻔할 정도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너 성철이 형 알지?”
이미 어두워진 마을을 걸어 내려가다 민택이가 물었다.
“응…? 응. 성가대에 앉는, 스포츠머리 한 그 형…….”
사실 건한이는 한 번도 성철이 형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예배가 끝나고 누나한테 몇 번 말을 거는 성철이 형은 봤어도, 굳이 건한이하고는 여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너 데려간단 소리 안 했는데… 괜찮겠지?”
왠지 주춤거리는 것처럼 민택이가 말했다.
“나, 그럼 나중에 갈까? 사실 그 형하고 얘길 한 적이 없거든.”
막상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건한이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공연히 자신 때문에 민택이가 곤란해 하는 것도 같고.
“아, 아냐. 괜찮을 거야. 널 모르는 것도 아닌데 뭐.”
민택이가 먼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회관을 지나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를 비껴서니까, 불을 환히 밝힌 공판장 마당이었다. 민택이는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휙 돌아서서 공판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 민택이구나. 뭐줄까?”
“콜라하고, 새우깡하고, 응 저거, 초콜릿하고….”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밖에 서서 건한이는 갑자기 민택이가 뭘 하나 싶어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
“쟨 누구니?”
서른쯤 되어 보일까, 여자가 문 밖에 서 있는 건한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누나 몰라? 건한이잖아. 교회 애!”
“아, 그래 맞다. 얘, 들어와!”
여자는 문 밖에서 쭈뼛대는 건한이를 아는 체 하였다. 잠시 어색해하면서도 건한이는 주춤거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민택이가 여자 뒤에서 캐러멜을 몰래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건한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와, 얘. 왜 밖에 서 있어?”
“아, 안녕하세요?”
문까지 열어주면서 여자는 건한이를 반갑게 아는 체 했다.
“너, 나 몰라?”
“네?”
“어머, 서운해라. 나 주일학교에서 유치부선생님이야. 난 너 아는데… 어쩜 넌 날 기억을 못하니? 호호.”
여자는 짓궂은 장난을 걸듯 혼자 재미나하며 성격 좋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 민택이는 크고 작은 물건을 슬쩍슬쩍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건한이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마치 자기가 바람을 잡는 것 같았다.
다시 갱엿을 주머니에 넣던 민택이가 건한이를 노려보듯 눈이 딱 마주쳤다.
“……!”
“누나 이거, 얼마예요?”
아주 태연스럽게도 민택이는 손에 든 갱엿 하나만 내밀며 말했다.
“왜, 새우깡하고 초콜릿은?”
“에이, 이거만 살래.”
민택이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나 천연덕스러운지, 건한이는 자신이 금방 헛것을 본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공판장을 나와 둘은 그렇게 서먹한 걸음을 뗐다. 민택이가 캐러멜 하나를 주었지만 건한이는 받을 수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민택이는 내밀고 있던 손이 부끄러운지, “저기….” 하면서 또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건한이는 듣기 싫었다. 배신감도 들고, 자기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도둑질을 한 민택이가 너무 얄밉고 싫었다.
“저기… 저 가겐, 동네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가게야. 그러니까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하는 건데, 성철이 형 큰누나가 맡아서 하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고…….”
민택이는 저 혼자 주절거리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닭장과 돼지우리 사이에서 건한이는 가파르고 어두운 비탈길을 올라 갈 자신이 없었다.
“저기, 건한아! 그러니까…….”
계속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민택이에게, “나 그냥 집에 갈게.” 하고 말했다. 잘하는 짓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건한이는 우선 민택이와 헤어지고 싶었다.
- 네게 천사라면 내게도 천사라면
▣
아니나 다를까 민택이와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며칠째 학교에서 마주쳐도 서로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만나도 소 닭 보듯 맴돌기만 하였다. 뭐라고 먼저 말을 걸고 싶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때 일을 모르는 척 덮어둘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건한이는 누구한테라도 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각자 자기 이름 썼으면 여기 헌금바구니에 넣어.”
학생회 회장이 앞에 서서 사회를 봤다. 학생이 몇 명 되지 않았다. 중고등학생과 함께 초등학교 졸업반인 아이들이 함께 토요일마다 학생회를 가졌다.
“천사게임은 다들 알지? 건한이와 은혜가 모를 것 같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할게. 그러니까 천사게임은….”
회장 형은 헌금바구니에 이름을 적어 넣고 돌리는 동안, 천사게임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렇게 적고 돌린 이름을 뽑아, 그 사람의 천사가 되는 놀이였다. 기도도 해주고, 편지도 써주고, 선물도 해주고… 요약하자면, 그 당사자도 모르게 그 사람의 천사가 되는 게임이었다.
건한이도 자신의 이름을 적어 헌금바구니에 넣었다.
“자, 그럼. 지금부턴 한 장씩 뽑아. 앞으로 두 달 동안 각자 그 사람의 천사가 되는 거야. 알지? 만약에 그게 발각되면 천사에서 추방당하는 건 알지?”
“추방당한 천사는 그럼 마귀가 되는 건가?”
“하하.”
아이들은 하하, 호호 재미나게 웃으며 각자 종이쪽지를 한 장씩 뽑아들었다. 그래봐야 채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적은 수의 인원이었다.
건한이는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을 뽑았다. 그리고 몰래 펴보았다.
조민택!
자음과 모음이 삐뚤빼뚤 적힌 글자였다. 건한이는 습관처럼 머리를 짚었다. 하필이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누나한테라도 말을 좀 해볼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행여 그것이 아빠 귀에 들어가고, 설마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본의 아니게 고자질쟁이에 친구를 배신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니 건한이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만 끙끙 앓았다.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두고 보고 있는데…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게 되었다. 그것은 누나가 돌아앉아 천사에게 줄 편지를 쓰고 있는 걸 보고난 다음이었다. 아하, 그럼 되겠구나, 싶은 생각에 건한이는 누나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누난, 누구 천사야?”
어깨 너머로 누나의 편지를 훔쳐보며 물었다.
“너어!”
하지만 누나는 얼른 편지지를 가리며 건한이를 확 밀어냈다. 맞다, 나도 민택이에게 편지를 쓰는 거야, 그래, 아무도 모르게, 아, 그럼 되겠구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건한이는 뭔가 좀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누나! 그럼, 나도 그 편지지 한 장만 줘.”
건한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누나는 아주 단호하게 “싫어.” 라고 하였다.
“아아, 누나아!” 하고, 다시 누나를 졸랐다. 하지만 누나는 끝내 건한이에게 편지지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누구의 천사인지 발각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하, 똑같은 편지지로 편지를 쓰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건한이도 더 이상 누나를 조르지 않았다. 그리고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아버지의 설교노트였다. 자신이 갖고 있는 공책은 너무 빤한 것인데, 아버지의 설교노트는 바인더에 구멍이 뚫려있는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편지를 쓰려고 보니까 뭐라고 써야할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 일을 다 아는 척 하면 분명히 자신이 누구인 걸 단박에 눈치 챌 테고, 그렇다고 그 일을 쏙 빼고 다른 말만 쓰려니까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모르겠고…….
건한이는 더 큰 고민에 빠져버렸다. 변변하게 편지를 써본 적도 없거니와 고작 썼다고 해도 서울학교에서 국군아저씨께 위문편지 몇 통 써본 게 전부인데… 건한이는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하고, 연습장에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기를 수차례나 거듭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넘기고 이틀이 지났다.
“건한아, 편지 왔다.” 하며 엄마가 웬 편지를 건한이에게 건네다말고, “너, 여자친구 생겼니?” 하고 물었다.
“여자친구?”
건한이는 그게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은 얼굴로 엄마를 쳐다봤다. 그러자 엄마는 더욱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자애글씬데?” 하였다.
아하, 내게도 천사가 있는 거였지? 하고, 건한이는 이마를 탁, 치며 생각해냈다.
“치, 여자애글씨가 따로 있어?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며, 아주 여유 있다는 말투로 얼른 또 되묻자, “호호. 그래? 그럼 엄마가 먼저 읽어봐도 되지?” 하며 엄마는 편지 겉봉을 뜯는 시늉을 하였다.
“치. 교양 없게.”
“뭐?”
“누가 남의 편지를 맘대로 봐? 아무리 그래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데….”
건한이는 더욱 명랑하게 말했다. 그리고 엄마 손에서 편지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어머, 이 녀석이. 언제 컸다고 벌써 엄마를 다 무시해?”
엄마는 호호 웃으며 싫지 않은 듯 건한이의 엉덩이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제 엄마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잘 웃고, 농담도 잘 하고, 더욱이나 자신에게 표 나게 잘해주고, 건한이는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그래서 더더욱 민택이에 대한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행여 또 그 일 때문에 엉뚱한 걱정을 하면 어쩌나 하고. 건한이 역시 어떻게든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은 건한이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으로 마루를 서성거렸다. 나에게 편지가 왔단 말이지? 누나처럼, 누가 나에게도 편지를 썼단 말이지? 하하, 이게 내 천사란 말이지? 오락가락 마루를 서성이며, 건한이는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가슴이 콩콩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런 건한이를 두고 엄마는 또 픽 웃으며 뭔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흐뭇해했다.
건한이는 엄마를 피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른 개다리소반을 끌어당겼다. 그 위에 편지를 올려놓았다. 자신 앞으로 온 생애 최초의 편지였다. 우체국소인까지 찍힌 의심할 게 없는 편지였다. 아, 하하. 건한이는 싱글벙글, 책상 대신 쓰는 소반 위에 편지를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글씨체는 정말 엄마 말처럼이나 예쁘장하게 생겼다. 하늘색 볼펜으로 또박또박 눌러 적은 주소와 그 아래에 적힌 ‘경건한’이라고 자신의 이름이 왜 그렇게도 낯설고 부끄러운지…. 모음을 내려 그을 때 살짝 말아서 감듯 하여 글자는 전체가 자음과 모음이 서로 안겨 있는 것처럼 동글동글했다.
경 자의 ‘ㄱ'이 모음 ‘ㅕ’에 기대어 받침 ‘ㅇ’을 한데 낳은 것처럼. 어찌 보면 한 가족 같고, 그래서 왠지 안정감이 드는 그런 글자체였다. 받침이 없는 글자는 서로가 친한 친구사이 같고, 받침이 두 개이면 다복한 가정을 이룬 듯 어느 것 하나 외따로운 글자가 없었다.
건한이는 편지를 뜯지도 못하고, 감격해 하고 있었다.
필통에서 칼을 꺼내어 조심조심, 마치 생채기 하나라도 낼까봐서 아주 조심스럽게 겉봉을 열었다. 그 안에는 또 반듯반듯하게 접힌 편지지가 누워있었다. 그것을 펼치자 금방이라도 꽃잎이 날릴 것처럼 온통 형형색색의 글자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와! 건한이는 절로 입을 쩍, 벌리며 감탄을 했다. 그려놓은 수많은 꽃잎이 진짜로 수천 송이는 가득한 것 같았다. 본래 그렇게 생긴 편지지가 아니라, 손수 그려놓은 꽃잎들이었다. 저도 모르게 코끝에 갖다 대어볼 정도로. 정말 향기가 나는 것처럼, 더욱 깊이 숨을 들이 쉬게끔.
건한이는 아주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녕?
너를 만나서 반가워. 네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해. 아직 너하고 정식으로 인사도 나눈 적이 없지만, 그래도 널 먼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난 좋아. 또 그 사택에 네가 살게 되어서 너무 기뻐. 아무도 살지 않을 땐, 내가 가끔 들러 꽃들에게 물도 주고 풀도 뽑아주고 그랬는데, 그걸 못하게 되어서 조금 서운하지만… 대신 그 일을 네가 해주면 좋겠어.
넌 할 수 있을 거야. 네 손을 보면 알아.
나는 처음 친구를 사귈 때 제일 먼저 손을 보는데, 손은 사람의 얼굴 표정만큼이나 숨길 수 없는 표정을 간직하고 있어. 슬픈지 아니면 기쁜지, 외로운지 아니면 행복한지, 눈빛처럼 손의 표정은 감출 수가 없어.
너? 넌 참 생각이 많은 손이야. 마음이 여린 손이고, 꿈을 꾸는 손이야.
가만히 뭘 궁리할 때 보면 엄지와 검지가 머릴 맞대고 뭔가 의논을 하듯 비비적거리고….
알고 있었니? 네게 그런 습관이 있었다는 거? 또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할 때 보면, 손이 우선 턱을 받혀주고 때로는 머리를 쓸어주면서 조용조용 생각을 따라가는 그런 손놀림… 그게 넌 참 자연스러워. 그런 손을 가진 아이라면, 꽃들도 분명히 너를 좋아할 거야.
한 번 증명해 볼까? 그럼 지금 당장, 마당에 나아가 채송화를 가만히 만져보렴.
걘 얼마나 새침데긴지 몰라. 수줍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가도 금세 또 얼른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어쩔 땐 너무 얄미울 정도야. 전에 계시던 목사님이 날더러 채송화를 닮았다고 하시더라. 새침 떠는 게 똑 같다고 하시면서…….
꽃의 마음은 느낄 수 있는 손을 가진 사람만 느낄 수 있어. 너의 손처럼!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제비꽃이야. 제비꽃의 꽃말은 ‘순진무구한 사랑’이래. 제우스가 사랑한 이오(Io), 결국 헤라의 질투로 암소가 된 이오를 위해 이오의 눈을 닮은 예쁜 꽃망울을 틔워 이오에게 먹였는데, 그 꽃이 바로 제비꽃이래.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제비꽃을 ‘이오의 꽃’이라고도 부른대. 아름답지 않니?
오늘은 이만 줄일게. 앞으로 자주 보자. 손놀림이 자연스러운 소년! 너의 천사로부터.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것보다 열배쯤은 더 많이, 건한이는 손을 들여다봤다. ‘생각이 많은 손’이라고? 내게 그런 습관이 있었다고? 건한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기쁘고 부끄러웠다. 편지를 들고 마당에 나갔다. 채송화 앞에 앉아서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개다리소반에 앉았다.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가 엎드렸다가 하면서, 건한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수줍음 많은 채송화를 흉내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설레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이오의 눈’을 닮았을 것 같은 자신의 천사를 상상해보았다.
▣
하지만 건한이는 단박에 들통이 났다. 천사에게서 온 편지를 흉내 내어 민택이에게도 편지를 썼었다. 그렇다고 너는 누구를 닮았다느니, 어떤 아이라느니 할 수는 없었다. 그냥, 너처럼 명랑한 아이가 자신을 속이는 건 너무 슬픈 일이야, 라고만 썼다.
그런데 다음다음 날 민택이는 건한이를 보자 대뜸 편지를 내밀며 물었다.
“너지? 너가 내 천사지?”
그 순간 건한이는 정말 채송화처럼 부끄러웠다. 어쩜 그렇게 단박에 눈치 챘을까? 건한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건한이를 두고 민택이는 더욱 짓궂게 웃었다.
“자식. 무슨 편지가 이렇게 짧으냐? 천사가 뭐 이래? 말도 제대로 못하고? 낄낄.”
이렇게 민택이가 놀리는데도 건한이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편하게 웃어주는 민택이가 고마웠다. 그래서 건한이도 낄낄 웃으며 머리만 긁적거렸다.
“그래. 나도 사실은… 너하고 얘기 좀 하고 싶었어. 좀 황당했거든. 또 니가 누구한테 이르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됐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모르더라? 그래서 최소한 니가 누구한테 고자질은 안 했구나, 생각했어.”
“…….”
“처음이야. 아니, 누구한테 들킨 거 말이야. 처음엔 나도 떨리고 그랬는데, 아무도 모르니까 아주 간이 커지더라?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꼭 거기만 가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거야.”
“…….”
“앞으론 안 그럴 거야. 진짜야. 약속해. 사실, 그거 훔쳐도 갖고 있다 그냥 버릴 때가 더 많아. 누굴 주자니 괜히 의심 받을 거 같고… 며칠씩 그냥 들고 다니다가 버릴 때가 더 많아. 맛도 없어. 헤헤.”
역시 민택이는 솔직한 아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반성하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다짐까지 하는, 민택이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건한이는 그런 민택이와 나란히 걸으면서 괜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너 오늘 밤에 뭐 하냐?”
같이 예배당 뒷길을 올라오다말고 민택이가 불쑥 물었다.
“오늘 밤? 왜?”
“내일 토요일이잖아. 오늘 밤에 성철이 형하고 상식이하고 다 모이기로 했대. 너도 오래.”
“어디로?”
“학교 뒤에 있는 무덤 밭!”
“무, 무덤 밭?”
“응. 넌 아직 모르는구나? 가끔 거기서 총 싸움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그래.”
건한이는 무덤 밭이라는 말에 생소한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서울학교에 다닐 때 왕릉을 가본 적은 있어도, 달리 무덤을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무덤에서 놀자고? 건한이는 멍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근데 무덤은 뭐고 밭은 또 뭐야?”
“흐흐. 무덤 옆에 학교 밭이 있거든. 그냥 애들은 그렇게 불러. 공터도 넓고, 그게 그래도 잔디잖아. 레슬링하기에 딱 그만이거든.”
“아하….”
금요일에는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었다. 일주일씩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토요일 일요일은 집에서 보냈다. 설교준비도 하고, 채마밭도 손질하고, 심방도 하고… 그래서 금요일은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그렇게 월요일 새벽에 아버지가 다시 서울에 올라가지 전까지. 가족들이 가장 생기 넘치는 날이었다. 그래서 건한이는 잠시 망설이다 어차피 밤이니까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민택이더러 이따 집으로 데리러 오라고 하고, 둘은 교회 앞에서 헤어졌다.
“다녀왔습니다. 아빠는?”
건한이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아버지를 찾았다. 벌써 돌아온 아버지는 막내 민이와 함께 뒤뜰에 앉아 꽃밭을 손질하고 있었다.
“건한이 넌, 엄마가 이제 보이지도 않나보구나? 아빠만 찾게?”
부엌에서 나오던 엄마는 괜한 소리로 서운한 척 했다. 그런 엄마를 향해 건한이는 혀를 내밀듯 메롱, 하고 돌아섰다.
“이 놈이….”
엄마가 잡는 시늉을 하며 뛰어오자 건한이는 아빠 곁으로 다가가 어리광을 부렸다.
“너 여자친구 생겼다며?”
그런 건한이를 두고 아버지가 놀리듯 물었다.
“치, 엄마가 말했구나?”
뒤에 서 있던 엄마를 보고 건한이가 묻자, 엄마도 건한이처럼 메롱, 하면서 혀를 내밀었다.
“하하. 이 녀석,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벌써 여자친구야?”
아버지는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진짜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시늉을 했다.
“아냐, 그런 거. 학생회에서 하는 천사게임이야. 엄만 괜히 그래. 그게 또 여잔지 아닌지 엄마가 어떻게 알아? 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그래.”
얼굴이 빨개지기까지 한 건한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지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피, 그런 애가 그럼? 그 편지만 오면 좋아서 하루 종일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하니? 치, 누가 모를 줄 알고? 호호.”
엄마는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면 더욱 활짝 핀 튤립 같았다. 머리를 가지런히 올려 묶는 것도 그렇고, 여느 날보다 하얗고 고운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것도 그렇고… 튤립의 꽃말은 박애라고 했다. 천사의 다음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해거름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누나도 학교에서 돌아왔다. 모처럼 한 식구가 한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었다. 엄마와 누나는 여전히 천사의 편지를 두고, 밥상 앞에서 건한이를 놀려먹었다.
두 번째 온 편지를 누나한테 보여준 게 실수였다. 하도 궁금해 해서 못이기는 척 보여준 것이지만, 사실은 건한이도 좀이 쑤실 정도로 자랑을 하고 싶었다. 천사는 그때마다 꽃말을 적어 보냈다. 편지지는 물론 손수 그린 꽃단장이었다. 건한이에 대해, 혹은 꽃에 얽힌 전설에 대해 정성껏 적어 보내는 편지였다.
눈빛이 무슨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눈빛이라나? 걸음걸이가 옛 선비의 그것처럼 사뭇 조용하다나? 심지어 목소리를 두고는 아침나절에 들풀에 이슬 쓸리는 소리 같다나? 너무 시적이면서도 가슴 설레게 하는 묘사였다. 그렇게 적어주는 자신의 모습이, 정말 그랬나? 싶어서 건한이는 천사의 편지를 읽고 난 다음이면 꼭 그렇게 따라해 보기도 하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거울 앞에 서있기도 하고, 뒷짐을 지고 보폭을 가지런하게 떼기도 하고, 변성기가 되면서 컬컬한 목소리를 아아, 어어,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기도 하고. 마치 주술을 걸듯 천사의 편지는 건한이를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었는지, 혹은 처음인지, 그럴 때마다 건한이는 자신이 본래 어떠했는지 생소하고 어색하기만 하였다.
“호호, 왜? 아빠도 좀 보여 드리렴? 여보. 당신 아들이 얼마나 근사한지 알아요? 정말 우리 아들 천사 아닐까요? 게임이 아니라 진짜 천사 말예요. 와, 우리 아들이 정말 근사했구나, 하고 깜짝깜짝 놀랄 정도예요.”
엄마는 민이의 밥 위에 고등어를 발려주며 신이 난 듯 말했다.
“네 목소리는 아침나절에 풀잎에 쓸리는 이슬소리 같단다. 새벽산책을 나가보았니? 사각사각 이슬을 머금은 풀잎소리를 들어보았니? 호호호.”
언제 외웠는지 누나와 같이 돌려본 천사의 편지에서 한 구절을 시 낭송을 하듯 흉내를 내기까지 했다. 그런 엄마를 두고 건한이는 골이 잔뜩 난 아이처럼 입술을 쭉, 빼물고 “나, 밥 안 먹어!” 하고 부러 심통 난 척을 하였다. 가족들을 또 한바탕 하하, 호호 즐겁게 웃었다.
“아이, 참. 고만해. 아휴, 배 아프다.” 하며 누나가 저 혼자 더 낄낄거리더니, “호호. 오늘 건한이 천사, 귀 파느라 잠도 못 자겠다.” 했다. 하지만 건한이는 그렇게 놀리는 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가족들이 이처럼 즐겁게 웃어본 지가 얼마만인지. 천사 덕분에 자신이 괜히 더 나아 보이는 거 같아 혼자 괜히 우쭐해지기도 했다.
“하하. 그게 누군데?”
아버지가 수저를 놓고 보리차로 입을 헹구며 물었다.
“모르지요. 천사가 발각당하면 쫓겨나서 사탄이 된다는데, 호호.”
가족들이 또 돌아가며 건한이를 놀리는 동안, 건한이는 머리를 짚었다가 생각이 많은 손 어쩌고 하던 천사의 편지가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불평을 하듯 뭐라 말을 좀 하려다가 사각사각 이슬을 머금은 풀잎소리 어쩌고 하던 내용이 생각나서 또 그만두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뭘 하든 천사가 말한 자신의 모습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어색했다.
그렇듯 건한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나보다? 건한이 너 부르는데?” 하고 아버지가 먼저 말을 해서, 건한이는 얼른 문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누나는 또, 선비가 발을 떼듯 점잖은 걸음걸이, 하면서 지치지도 않고 놀려댔다.
하하, 호호 가족들이 웃고 있을 때 민택이가 들어오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어, 어서와. 민택이 왔구나. 저녁 먹었니?”
“네.”
“더 먹어? 어서?”
“아, 아니에요. 금방 먹고 왔어요.”
“민택이 엉아!”
“어휴, 민이 잘 있었어?”
한바탕 소란스럽게 서로를 맞고 인사하고 아는 체 하느라, 건한이네 마루는 떠들썩해졌다. 아, 이런 풍경이 얼마만의 행복인지…! 민택이가 마루에 앉은 다음에도 건한이는 잠시 서서 이마를 짚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생각하는 손 어쩌고 하던 천사의 편지가 생각나서 얼른 손을 떼며 아무도 모르게 씩 웃었다.
▣
민택이를 따라 마을 끝에 있는 무덤 밭으로 갔다. 가는 동안에도 건한이는 몇 번씩 뒤를 돌아다봤다. 이 마을로 이사 오고, 이처럼 까만 어둠을 본 적은 없었다. 마을 앞쪽은 그나마 공판장 불빛과 함께 띄엄띄엄 흔들리는 집들의 불빛이 더해져서 괜찮은데, 마을과 다소 떨어진 학교 쪽으로는 일체의 불빛도 새어나오는 곳이 없었다. 간간히 지나치는 길가의 자동차 불빛만 오락가락할 뿐. 그것이 지나가면 금세 또 먹먹하니 어둠이 배어들었다.
“야, 좀 무섭다.”
참다못해 앞서 걷는 민택이를 향해 말했다.
“무섭긴 뭐가 무서워? 저기 봐. 다 보이잖아.” 하고 가리키는 민택이의 손짓이 오히려 더 무서울 정도였다. 건한이는 짙은 어둠이 익숙하지 않았다.
“근데 저 무덤은 누구 거야?”
해서 무서움을 달래보려는 듯 건한이는 민택이의 뒤를 바짝 좇으며 말을 걸었다.
“이 마을 처음, 목사님 묘.”
“……?”
“나도 모르지. 우리 아빠도 이 마을에 오기 전이라니까. 아마 왕초랑 같이 들어올 때쯤이라지 아마?”
“왕 장로님?”
“어? 응. 말마라. 처음엔 외부 목사님이라고 다들 반대하고 난리였대.”
“왜? 어차피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제일 반대한 사람이 또 왕초 아니냐? 우리랑 같은 사람이 아니면 결코 이 마을에서 살 수 없다고, 아주 난리였나 봐. 그냥 예배만 봐주고 가라고. 뭐 아무튼 그랬대. 그런데 그 목사님은 기어코 여길 들어와 살겠다고 그러고….”
“……?”
“근데, 그 목사님이 소록도까지 갔다 왔다는 거 아니냐. 직접 병에 걸려서….”
“엥? 그, 그럴 수도 있어?”
“몰라. 나도 들은 얘기야. 왕초가 끝까지 반대하니까, 목사님도 포기했나 싶었는데, 한 일 년쯤 뒤에 다시 나타났대. 여기 사람들이랑 똑같이 병에 걸려서 소록도에서 치료받고 나왔대.”
“와. 그럴 수가 있어?”
“몰라. 자기 팔에 직접 병균을 주사했대나…?”
“와…….”
“그치? 대단하지? 그 목사님이 젊었을 땐 공사판을 떠돌던 목수였단다. 맨 깡패 짓만 하고 그랬던 분이래. 그러다 목사 되고 아주 작정을 한 거지.”
“……?”
“니네 그 집도 그 목사님이 지은 거래. 처음엔 부엌 딸린 방 있지? 그거 하나만 짓고 혼자 살다가 하나하나 넓힌 거래. 처음엔 니네 마루에서 예배보고. 교회 짓기 전에. 그랬다가 저 교회도 그 목사님이 지었대.”
“와, 그럼 가족은?”
“가족 얘긴 못 들었어. 혼자 저 언덕 다 밀어내고… 하여튼 여기 동네 집들 거의 전부가 그 목사님이 지은 거래.”
“그래서 따로 그 분 묘를 저기에 세운거로구나?”
살갗이 찌릿할 정도로 건한이는 민택이의 말을 들으며 감동을 했다.
“치, 말마라. 이건 우리 아빠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그런 건데, 왕초가 그렇게 그 목사님을 싫어했더란다. 사사건건 시비에 뭔 꼬투리만 잡히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
“아니 왜에? 그렇게 훌륭한 분을?”
“그러게 말이다. 아빠도 지금 와서 하는 말이라던데, 하긴 지금도 그렇지만, 왕초가 이 동네의 이거 아니냐? 이거.” 하고 또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더니, “그때는 더했나봐. 아무튼 저 묘도 목사님 돌아가시고 그냥 내다버린다는 걸 동네 사람들이 그것만은 말려서 간신히 마을 뒤에 무덤을 만들 수 있었대. 지금은 거의 동네 애들 놀이터가 됐지만…. 흐흐.”
건성으로 훑어주는 민택이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건한이는 아… 그랬구나, 하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 닭서리
▣
“야! 민탱이! 알지?” 하고 성철이 형이 민택이를 지목하자, 민택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넌 수박! 야, 넌 참외.” 하는 식으로, 성철이 형은 둘러앉은 아이들 몇을 향해 마치 하나씩 지령을 내리는 우두머리 같이 굴었다. 그런 성철이 형을 향해 아무도 뭐라 군소릴 하는 아이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지목한 것에 즐거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럼 쟨?” 하고 누가 묻자, 모였던 아이들이 일제히 건한이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성철이 형도 가만히 건한이를 쳐다보더니, 작은 돌멩이를 하나 집어던지며 “쟨 뭐? 그럼 쟨 성경책 가져오랴?” 하고, 그 아이를 향해 대뜸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모였던 아이들은 비굴하리만치 킥킥 웃으며, 그 애와 건한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대체 뭘 갖고 그러는지… 건한이는 알지 못했지만, 은근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게 뭔데?”
막상 민택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건한이도 혼자 멀뚱히 앉아있기가 뭐해서 얼른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하지만 민택이는 축 쳐진 어깨로 발길을 옮길 뿐이었다.
한참을 더 마을 쪽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침을 퉤 뱉더니 맨바닥을 발로 툭 걷어차면서, “에이, 씨.” 하고 민택이가 욕을 했다. 건한이는 그런 민택이를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민택이는 좀체 말을 하려하지 않았다.
민택이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 그냥 어정쩡하게 뒤만 따라가던 건한이는 더 이상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응, 왜 그러는데? 뭐 하러 가는 건데?”
민택이의 어깨를 잡아채듯 툭 치며 묻자 민택인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더욱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각자 가서, 아까 시킨 거 구해오는 거야. 수박이면 수박, 참외면 참외.”
“어디서?”
“알게 뭐야. 자기 집에서 가져오든 남의 밭에서 서리해 오든 알아서들 만들어오는 거지.”
“…….”
“쯧, 오늘은 안 올까 했는데… 그럼 또 두고두고 뭐라 그럴 거 같아서 왔더니… 에이, 씨. 너 데리고 가면 오늘은 좀 다를까 했더니… 에이, 씨. 퉤.”
민택인 화가 단단히 났는지 침을 또 퉤 뱉으며 욕을 했다.
“그럼 넌 뭘 가지러 가는 건데?”
막상 민택이 얘길 들었어도 건한이는 퍼뜩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작 고등학생인 형이 저처럼 구는 것도 좀 아니꼽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놀이로 생각하면 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한 것이, 건한이는 도통 민택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한데….
“어휴, 왕초만 아니면 확….”
민택인 하려던 말을 꾹 참고 더욱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넌 그럼 뭘 가지러 가는 건데?”
“…….”
“응?”
“닭!”
“닭?”
▣
이미 눈에 익은 닭장 앞에서 건한이는 집안을 살피고 있었다.
“넌, 망 좀 봐. 혹시 울 엄마 나오면 큰 소리로 인사하고. 알았지?”
하고 민택이는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자기네 양계장으로 몰래 들어가며 혹시나 몰라 신호를 가르쳐주었다. 도대체 왜 꼭 그래야 하는지, 그냥 자기네 걸 엄마아빠한테 말하고 가져가면 안 되나? 싶었지만, 아무튼 민택이가 시킨 대로 건한이는 닭장 옆에 몸을 숨기고 집안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용케도 건한이를 알아보는 검둥이가 건한이의 발밑에 와서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체를 해주었다. 건한이는 허리를 굽혀 늙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나마 곁에 있어줘서 덜 무섭고, 그래서 고맙다는 마음으로.
무사히 교회 뒷길로 해서 언덕을 넘기 시작했다. 민택이가 닭장에서 나오고도 한참을 더 지체한 다음이었다. 연신 퍼덕거리는 닭의 주둥이와 날개를 틀어쥐느라 민택이는 도둑걸음을 떼면서도 여간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니었다.
“왜 꼭 그래야 돼? 차라리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
뭔가 게임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처럼, 건한이는 자꾸 눈치 없이도 물었다. 그러니 민택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삐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얼마쯤 지나 건한이 스스로도 자신이 물었던 말을 잊고 있을 쯤 민택이가 불쑥 아까 물은 건한이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어른들이 알면, 죽어. 그나마 우리 집 닭은 내가 직접 한다 그랬어. 괜히 오밤중에 또 닭들이 놀라기라도 해 봐. 전에 그랬다가 아주 동네가 발칵 뒤집혔었어. 한 번 놀라면 며칠 동안 물알만 지리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내가 하겠다고 했더니, 이젠 아예 대놓고 우리 닭장만 넘봐.”
“……?”
“왕초만 아니면… 죽기 살기로 한 판 붙어보고도 싶다만… 우리 집을 무슨 꼬봉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애고 어른이고, 확. 에이, 씨. 퉤.”
굳이 건한이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민택이는 종종걸음을 치며 혼잣말처럼 서둘러 말했다. 그렇게 앞서 걷던 민택이가 교회 아래 후미진 개울가로 내려서면서 순간 걸음을 멈추고는 건한이를 향해 말했다.
“안되겠어. 야, 이거 잠깐만 들고 있어봐.”
하고 건한이에게 건넨 건 또 한 마리의 닭이었다. 민택이가 틀어쥐듯 안고 있던 닭은 모두 두 마리였다. 하지만 건한이는 파닥거리며 금세 날개 짓을 하는 닭을 선뜻 받아 쥘 수가 없었다.
민택이도 그런 건한이를 더는 기다리지 않았다. 건한이에게 내밀던 닭을 신경질적으로 길바닥에 패대기를 치더니, 동시에 닭의 모가지를 휙 잡아 틀었다. 그리고 발로 짓이기듯 닭의 모가지를 사정없이 밟았다. 그러자 꼭꼬꼬꼭, 하는 소릴 내지르며 잠시 파닥거리던 닭은 잠깐 더 날개 짓을 하다 이내 잠잠해졌다.
민택이는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닭도 똑같은 방법으로 허공으로 휙,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번엔 양손으로 닭의 모가지를 뚝 꺾으며 비틀었다. 그것을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똑 같은 방법으로 짓이겼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건한이는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저절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는 것 같더니 급기야 욱, 하고 토악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건한이는 아랑곳도 않고, 민택이는 밟고 있던 닭을 더욱 세게 짓이기며 바닥에 비벼댔다. 그 모습은 너무나 잔인하고 거침이 없었다.
결국 풀숲을 향해 허리를 꺾고 건한이는 저녁으로 먹은 걸 한꺼번에 다 토해냈다. 웩웩거리며 눈물이 쑥 빠질 정도로 몇 번을 더 토악질을 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토악질은 거듭됐다. 민택이는 그런 건한이를 쳐다보며 가소롭다는 듯 헤헤 웃었다.
닭들은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처럼 둘 다 바닥에 엎드린 채 기척도 없었다.
“괜찮아? 어휴, 누가 서울 놈 아니랄까봐, 하하.”
순간 건한이는 민택이가 너무 무섭고 낯설었다. 하지만 민택이는 억지웃음으로 하하 웃더니, 한쪽 다리로 밟고 있던 닭을 다시 집어 들려고 했다. 그때, 민택이가 발을 떼는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닭이 푸드덕, 하며 날개 짓을 하고 껑충 솟구쳐 앉았다. 그와 동시에 건한이는 “엄마야….” 외마디 비병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나자빠졌다.
모가지가 축 늘어진 채 바닥에 꼿꼿하게 서 있는 닭은 뭐라 표현할 수 없게 섬뜩하고 흉측했다.
“으… 으…!”
엉덩이를 질질 끌며 건한이는 뒤로 도망쳤다. 그쯤 되자 민택이도 당황했던지, 순간적으로 닭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하지만 그 반동은 목이 축 늘어진 닭의 몸에 고스란히 전달되면서 푸드덕, 하는 날개 짓과 함께 정확히 건한이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으아악!”
아예 벌러덩 드러눕듯이 건한이는 나자빠졌다.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덜덜 떨었다. 어떻게 다시 닭을 잡았는지, 죽긴 죽었는지 아니면 도로 살았는지, 건한이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민택이가 어깨를 흔들 때까지 건한이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야, 정신 차려! 괜찮아? 야!”
민택이가 어깨를 흔들고 나서야 멍하니 눈을 떴다. 건한이의 몸은 덜거덕거리듯 제멋대로 마구 떨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고 싶은데,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 상황에서 도저히 어두운 길을 뚫고 집엘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민택이의 손에 들려있는 닭을 쳐다보며,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민택이를 따라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
다시 무덤 밭에 도착한 것은 꽤 시간을 지체한 다음이었다. 벌써 돌아온 아이들은 둘러 앉아 수박을 쪼개거나, 참외를 돌 위에 올려놓고 당수를 한답시고 얍, 얍, 소리를 지르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 앞에는 쪼개진 수박과 두 동강이 난 참외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걸렸냐?”
성철이 형이 깐죽거리듯 민택이를 향해 물었다. 민택이는 그런 형 앞에 축 늘어진 닭을 내던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새끼가, 죽을라고?”
어디선가 누가 툭, 하고 욕을 뱉었다.
“뭐, 자식아?”
민택이도 참았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구석진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어쭈구리! 한 번 해볼래?”
어둠 속에서 또 누가 말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건한이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그게 다 꿈처럼 몽롱했다. 하지만 둘러앉은 아이들은 더 이상 아무도 참견하지 않았다.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누구는 낄낄거리며 한 판 붙어, 한 판 붙어, 하고 부추기기는 아이도 있었다.
“조용히 안 해?”
성철이 형이 삐딱하게 앉으며 말했다. 민택이는 씩씩거리며 서 있다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야, 진흙 엉기고 불 놔.”
민택이를 노려보고 있는 성철이 형을 대신해서 누군가 얼른 말을 거들었다. 그걸 신호로 아이들은 다시 부산해졌다. 개울 쪽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흙을 물에 으깨어 닭을 통째로 덮어씌웠다. 턱턱 진흙을 눌러 바르며, 아이들은 다시 낄낄거렸다. 저만치 물러나 앉은 민택이와 성철이 형만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흙덩이는 금세 눈사람만 해졌다. 그것을 다시 구덩이에 묻고 그 위에 흙을 살짝 덮은 뒤, 아이들은 불을 놓았다. 마른 나뭇가지는 금세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이 옮겨 붙었다. 이글거리는 불더미 앞에서 아이들은 인디언 흉내를 내듯 춤을 추거나 개울물에 뛰어들어 첨벙거렸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건한이는 몽롱한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은 둥둥 허공을 떠오르는 것 같았고,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그런 건한이에게 누군가는 참외를 하나 건네기도 하고, 쪼개져 볼품없는 수박조각을 내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건한이는 눈이 풀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형!”
그때 갑자기 민택이가 누굴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소릴 듣지 못했는지, 아이들은 왁자하게 떠들고만 있었다. 그러든 말든, 민택이는 계속 말을 했다.
“이제 우리 건 안 돼! 공평하게 다른 애들도 돌아가면서 하던가, 아니면…!”
민택이는 느릿느릿 힘없이 말했다. 그러자 떠들고 있는 줄만 알았던 아이들은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안 되면? 안 되면 어쩔 건데?”
불 저편에 앉아 있던 성철이 형이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민택이는 말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누가 먼저 말을 하는 아이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탁,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민택이의 머리에 부딪친 참외가 박살이 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성철이 형이 던진 거였다.
“에이, 형 왜 그래…?”
누가 얼른 나서서 그런 성철이 형을 말리는 것 같았다.
“너, 많이 컸다, 응? 오냐오냐 했더니, 이제 아주 기어올라?”
언제 다가왔는지 성철이 형은 민택이의 따귀를 때리며 말했다.
그러는 동안 건한이는 옆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시 몸이 떨리는가 싶더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뚝 안 그쳐?”
민택이의 따귀를 때리며 성철이 형이 소리쳤다.
“에이 형, 다 익었어. 형, 여기 소금하고 쌈장 있는데, 어떻게? 형?” 누군가 그런 성철이 형의 어깨를 끌면서 비굴할 정도로 아부를 떨었다. 건한이는 토하고 싶었다. 메슥거리는 속을 참으며 헛구역질을 몇 번 했다.
성철이 형은 못이기는 척 자리로 돌아갔다. 불씨를 헤치고 어떤 아이가 묻어두었던 진흙덩이를 꺼냈다. 순간 노린내가 진동을 하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것을 돌로 탁탁 치자 바짝 마른 흙덩이가 쪼개지면서 거짓말처럼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꽝꽝 굳은 채 쪼개진 흙덩이에는 닭털이 지저분하게 박혀있었다.
민택이는 울음을 그치고, 그대로 발을 모아 앉은 채 흩어진 불씨만 노려보고 있었다.
“먹어! 뒈지고 싶지 않으면…!”
성철이 형이 또 민택이를 향해 빽 소리쳤다. 그러자 이번에도 어떤 아이가 대신 다리 한 쪽을 쭉, 찢어다 민택이에게 주었다.
“오늘 넌, 건한이가 있어서 이쯤 다행인 줄 알아. 쯧.”
혀까지 차면서 성철이 형은 거드름을 떨었다.
“건한이한테 우리만의 전통을 구경시켜주려고 했는데, 에잇.”
성철이 형은 전혀 딴 사람이 된 양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건한아! 이거 먹어라. 어디 가서 이런 거 못 먹어본다.” 하며 새로운 다리 한 쪽을 쭉 찢어서 건한이에게 건넸다.
어쩔 수 없이 성철이 형이 건네는 닭다리를 받아 들고 건한이는 멍하니 민택이만 쳐다보았다. 훌쩍거리며 불씨만 노려보던 민택이가 우악스럽게 닭다리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런 민택이를 따라 건한이도 닭다리를 입에 가져갔다. 그러자 또 웩, 하고 토악질이 올라왔다.
▣
꿈속을 쫓기다 눈을 뜨면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살갗에 닿는 이불마저 쓰리고 아플 정도로 건한이는 며칠 동안 끙끙 앓았다. 목이 꺾인 닭들에게 쫓기다 눈을 뜨고, 휘청거리듯 달려드는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다 눈을 떴다. 민택이 대신 따귀를 맞고 있는 사람이 자신일 때도 있었고, 딱딱한 진흙에 엉겨있는 게 자신인 것 같아 가슴이 조이고 숨이 막히기도 하였다.
그런 건한이 곁에서 엄마와 누나는 교대로 병간호를 했다. 천사에게서 온 또 다른 편지를 대신 읽어줄 때는, 그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멀찍이 펼쳐진 꽃밭 위로 하얀 날개를 단 천사가 꽃밭을 날아다니는 꿈만 꾸었다.
“도대체 얘가 무슨 일이야? 너 혹시 몰라?”
아버지는 주일이 지났는데도 학교엘 가지 못했다. 누나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여보, 병원엘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물수건을 갈아주며 엄마가 아빠한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김 약사가 놀라서 그런 것 같다 그러네. 애들 경기하듯이 말이야….”
“…….”
“도대체 그 날 저녁에 어딜 갔었는데, 그래? 혹시 조 집사님한테 안 물어봤어?”
“왜요?”
“금요일 밤에 민택이랑 나가서 그런 거 아냐? 그때 몇 시에 들어왔지, 얘?”
“…….”
가족들이 둘러앉아 걱정하는 소릴 들으면서도 건한이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빨리 눈을 뜨고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 같아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몸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땅속으로 푹푹 꺼져 내리는 것처럼 팔다리가 노곤했다. 천장이 낮게 짓누르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여태 쌓였던 게 한꺼번에 터진 모양이에요. 우리 건한이가. 흐흑.”
기어코 엄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그렇잖아요. 지난 일 년 동안… 누가 언제 얠 위로나 해줬어요? 그냥, 석이 그렇게 된 것에만 다들 정신이 팔려서는… 저 혼자 그 책임을 다 뒤집어쓰고 지냈을 거 아니에요? 불쌍한 것….”
“…….”
“당신이라도 좀 따뜻하게 대해주지… 우리 가족 모두 은근히 얘를 원망했던 게 사실이잖아요. 흐흑.”
엄마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 그 말이 또 서러운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야, 엄마… 나 괜찮아… 엄마아빠가 괜찮으면, 난 괜찮아… 내가 잘못한 거잖아… 괜찮아, 아… 엄마가 다시 슬퍼하면 안 되는데… 어서 눈을 떠야 하는데… 하면서도, 건한이는 눈을 감은 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눈꺼풀이 무거울 수 있다는 걸 건한이는 처음 알았다. 그래도 눈물은 저 혼자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더 잠속을 헤맸다.
“괜찮니?”
건한이가 몸을 꿈틀거리며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초췌한 얼굴로 건한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엄마의 볼이 한 뼘은 더 홀쭉해진 것 같았다. 금세라도 눈물이 또 흐를 것처럼, 엄마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엄마, 나 배고파.”
건한이는 비스듬히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도합 닷새가 지난 뒤였다.
서둘러 죽을 내오네, 아빠를 부르네, 하는 통에 갑자기 집안이 활기를 띠는 것 같았다.
“엉아!”
민이가 뛰어 들어오면서 그대로 건한이가 누워있는 이불 위에 안겼다. 그런 동생을 꽉 껴안으려니까, 건한이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안녕?
너 혹시 ‘데이지’를 아니? 한 포기에서 여러 송이의 꽃이 피는 이 데이지는 저녁 무렵이면 제일 먼저 꽃잎을 반쯤 오므리고 어두움을 부끄럽게 맞이한단다.
수풀의 요정 베리디스가 다시 태어난 꽃, 데이지.
과수원의 신인 베루다므나스는 숲 속의 요정 베리디스의 춤을 보고 한눈에 반했대. 베리디스의 춤은 평소에도 모두가 반할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니까. 베루다므나스는 한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베리디스에게 친절을 베풀었대. 그녀에겐 이미 결혼할 약혼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그런 신의로 끝까지 친절을 잃지 않는 베루다므나스에게 어느덧 베리디스도 사랑을 느끼게 되었지. 하지만 자신은 이미 정혼한 몸인 걸 어쩌니?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게 된 베리디스는 차라리 꽃이 되어 볕 고운 물가에서 홀로 피어나기로 했단다.
그 데이지의 꽃말은 ‘겸손한 아름다움’이란다.
건한이는 비스듬히 벽에 기대 앉아 먼저 누나가 읽어주었던 천사의 편지를 다시 읽고 있었다. 꿈속에서 마주했던 천사가 어쩌면 베리디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몇 통의 편지를 읽는 동안 건한이는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다.
너는 아니? 슬픔이란 본래 겉으로 들어날 때 아름다운 법이란 걸…
혹시 보리새우에 대한 얘길 들어보았니? 보리새우는 몸이 자라면서 자신의 등껍질도 함께 자란단다. 처음엔 등껍질이 그리 두껍지가 않아서 몸이 그 껍질을 벗기며 조금씩 자랄 수 있지만, 결국엔 자신의 등껍질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그 속에 갇혀 끝내 생을 마감한다는… 슬프지 않니?
어쩌면 우리도 그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점점 자라면서 자신이 이겨낼 수도 없는 딱딱한 등껍질에 갇혀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편지를 들고 있을 힘조차 없어 건한이는 다시 이불 속에 누웠다. 보리새우라…? 그런 게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천사의 편지를 마저 읽었다.
나는 늘 버스를 타거나 내릴 때 저 위 삼거리로 올라간단다. 사실은 그런 게 나 뿐만은 아니지만, 세상으로 나가고 다시 세상에서 돌아올 때면 왜 그리도 우리 마을 앞에서 내리거나 탈 수가 없는지… 마치 낙하지점을 잃고 배회하는 새처럼 삼거리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늘 다짐을 한단다. 다음엔 꼭 마을 앞에서 버스를 기다려야지. 다음엔 꼭 마을 앞에서 버스를 내려야지. 그리고는 또 나도 모르게 삼거리로 가거나 삼거리에서 돌아오는 꼴이지.
아, 마치 내가 꼭 보리새우만 같단다. 어쩌면 너는 그런 나를 벌써 눈치 챘을 수도 있겠다. 아니, 너라면 반드시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단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너 또한 보리새우만 같으니까!
- 보리새우를 닮은 사람들
▣
건한이는 운동회가 끝나고 그 다음 날 학교에 등교를 했다. 누워있는 동안에는 더 이상 무엇에도 관심이 없을 것 같았다. 운동회 날에도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차라리 잘 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학교엘 가고, 아이들과 어울리고, 교회 형들을 만나고 할 자신이 없었다. 건한이는 아이들을 만난다는 게 자꾸 마음에 꺼려졌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도 엄마는 한사코 건한이를 학교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하였다. 약간 어질어질한 것이 엄마 말처럼 하루 이틀 더 쉬고 싶었지만, 건한이는 사실 민택이가 너무 궁금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아이들도 궁금했고, 그 일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아픈 동안 민택이가 한 번쯤은 병문안을 올 줄 알았었다.
마치 비몽사몽간의 일처럼 그날 건한이는 민택이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뭐라고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그래서 민택이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는데, 건한이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민택이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는 그렇게 늦은 밤길을 모르는 척, 못 본 척, 그저 제 길만 따로 걸었었다.
건한이가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냉랭한 시선으로 건한이를 쳐다보았다. 참으로 낯설고 서먹서먹한 시선이었다. 누구 하나 나서서 반기는 아이가 없었다. 건한이는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보다 더 어색하게, 아이들을 둘러보며 자리에 가 앉았다.
이젠 제법 눈도 마주치고 더러 수업시간엔 말도 건네곤 하던 해란이가 눈에 띌 정도로 건한이를 피하며 시선을 돌렸다. 창가 쪽에 앉은 민택이도 건한이가 교실에 들어설 때부터 창밖만 쳐다보고 모르는 척 하였다. 무슨 일이지? 건한이는 어색해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더욱 낯설고 어색했다.
수업시간 내내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느린 말투로 수업을 했다. 쉬는 시간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은 잘도 떠들어댔다. 그러다 막상 건한이와 눈이 마주치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눈길을 돌렸다. 갑자기 왜 나만 쏙 빼고 저렇듯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일까? 건한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며칠 아파서 등교를 못했으니까 이젠 괜찮은지, 많이 나았는지, 하며 물어봐주길 건한이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민택이조차도 쉬는 시간이면 어디론가 훌쩍 나가버리며 애써 건한이를 피하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건한이는 일부러 도시락을 들고 민택이 자리로 갔다. 쉬는 시간마다 일찍 자리를 뜨는 바람에 그때껏 민택이와는 말도 한 마디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건한이가 다가가자 민택이는 도시락을 꺼내다 말고 화장실이 급하다며 얼른 또 나가버렸다. 잠시 머쓱해진 건한이는 그렇게 민택이 자리에 서 있다가 도로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해란인 다소곳이 앉아 언제나처럼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 해란이의 모습은 쌀쌀맞기도 하고 도도해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평소에도 허투루 구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무도 그런 해란이를 만만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것이 누구 때문이라기보다 해란이 자체가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아이였다. 결코 서둘지 않고 언제나 차분하게, 하지만 먼저 나대지 않으면서도 누구에게나 주저함이 없이. 또래들 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누나처럼 구는 그런 아이였다.
건한이는 시무룩하게 도시락뚜껑을 열다말고 해란이에게 물었다.
“저…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언제나 그렇지만, 어쨌든 같은 학년인데도 건한이 역시 해란이한테는 선뜻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아니!”
꼿꼿하게 앉아 젓가락질을 하던 해란이는 짧게 대답을 하고 그만이었다. 뭘 궁금해 하는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신호로, 딱 잘라 그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괜히 무안하고 조급한 건한이는 수저를 든 채 다시 말했다.
“저기… 그러니까… 애들이 좀 이상한 거 같아서… 잘은 모르겠는데… 민택이도 괜히 나를 피하는 거 같고… 또, 그러니까….”
손가락을 비비적거리며 건한이는 계속 어눌하게 말을 끌었다. 그렇다고 상식이를 의식해서는 아니었다. 둘이 어떤 사이든,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든, 건한이는 그런 데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그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해란이가 어렵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해란인 자기 스스로 도도하게 구는 아이었다. 그것은 감출 수 없는 분위기였다. 다른 아이들도 해란이한테는 까불거리듯 함부로 대하질 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데, 그게 뭔지… 애들이 좀 이상해서….”
“…….”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젓가락질만 하고 있는 해란이였다. 건한이는 그런 해란이가 더욱 어렵고 불편했다. 그러다 불쑥, 아무 말도 않을 것처럼 굴더니 해란인 혼잣말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난 니들 일에 관심 없어. 몰려다니면서 뭔 짓을 하든!”
“……?”
난데없이 툭 튀어나온 말에 건한이는 다시 이마를 짚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지?
“난! 너까지 그런 데 꼈다는 게 좀 실망스럽다. 넌 좀 다를 줄 알았거든.”
아, 그날 밤 무덤 밭에서의 일을 두고 하는 소리구나! 건한이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어두웠긴 해도 여자애는 없었는데… 얘가 어떻게 알지? 건한인 여전히 이마를 짚고 있었다.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쭈뼛거리고 있는데, “그러고들 싶니?” 하면서 해란인 반 이상 남은 도시락을 탕, 소리 나게 닫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가버렸다.
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젠 아이들의 행동이 이상한 게 아니라, 해란이의 반응이 더 황당했다. 도대체 뭐야? 건한이는 괜히 억울했다. 새삼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무나 좀 붙들고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아이들은 어느 선까지만 그렇게 허용하고 있었다. 건한이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딱 고만큼 한 구역이 처음부터 매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할 때도, 어딜 갈 때도, 넌 이방인이야, 하는 식으로. 아이들의 경계는 표 나지 않게 처음부터 건한이를 주눅 들게 하였었다. 늘 손님을 대하듯 하는 마을 어른들처럼.
그것과 상관없이, 그래도 허물없이 건한이를 대해주었던 사람이 민택이었다.
건한이는 책상에 그대로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뭔가 해야 할 것만 같은 조바심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도시락을 비우기 무섭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교실에는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있는 소영이와 건한이, 단 둘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은 잔뜩 찌푸려있었다. 아이들은 공 하나를 놓고 운동장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였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는 기를 쓰고 공을 차겠다는 기세였다. 건한이는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서 있었다. 왠지 모를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민택이를 그냥 둬. 너 때문에 민택이만 혼났잖아.”
한참을 그렇게 창밖만 보고 있는 건한이를 향해 책상에 엎드려있던 소영이가 뜬금없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소영이와는 제대로 말을 나눈 적도 없는 서먹한 사이였다. 덜렁거리듯 잘 웃고 잘 노는 아이였다. 하지만 유난히 건한이한테만은 말을 섞지 않는 아이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은 왠지 시무룩하다 싶더니, 뜬금없이 건한이에게 말을 붙이는 거였다.
“무슨 소리야?” 하고 건한이가 되묻자, 소영인 텅 빈 교실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몰라서 물어? 너 아픈 거, 그게 왜 민택이 때문이야? 어제 운동회 때 동네 어른들한테 민택이만 욕먹은 거 알아? 선생님들도 민택이만 갖고 뭐라 그러고. 치. 보나마나 동네 오빠들한텐 더 당했겠지.”
“……!”
얘가 무슨 소릴 하나 싶게 소영이의 말은 엉뚱했다. 도대체 왜 민택이가 나 때문에 어른들한테 욕을 먹었다는 것인지, 또 선생님들까지 왜 뭐라 그랬다는 건지, 건한이는 점점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넌 너네 아빠 따라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 민택인 아니야. 싫든 좋든 여기서 살아야 돼! 알아? 괜히 순진한 애 너 때문에 또 힘들게 하지 마!”
“무슨 소리야? 그게?”
“뭐가 자꾸 무슨 소리야야? 말귀 못 알아듣니? 너 여기서 얼마나 살 건데? 일 년? 십 년? 치.” 비아냥거리듯 입까지 비틀며 흐흐 웃고는, “내가 보기엔 길어야 일이 년이겠다. 모르지, 전에 살던 애처럼 몇 달도 못 살고 도망칠지…. 피.” 하면서 소영이는 삐딱하게 말을 했다.
건한이는 괜히 억울했다. 뭐 때문에 다들 저러는지, 못되게 구는 말투로 또 뭘 따지겠다는 건지.
“내가 뭘 잘못했니?” 하고 따져 물은 건 건한이었다. 그러자 소영인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건한일 째려보며 픽, 웃었다.
“치. 늘 그런 식이지. 니가 뭘 잘못했겠니?”
“…….”
“바보 아니니, 너? 착한 척 굴지 마. 민택일 헷갈리게 하지 말란 말이야. 전에도 민택이만 당했어! 알아?”
“당해? 전에 언제?”
“너처럼 교회 애한테! 혼자 나서서 잘해주다가 동네 오빠들한테 얼마나 따돌림을 당했는지 알아? 너흰 그러다 다른 동네로 가면 그만이지? 하지만 여긴 아냐. 민택인 여기서 살아야 해. 알아? 그러니까, 우린 너랑 달라. 너 때문에 또 민택이가 따돌림 당하지 않게, 그냥 조용히 살다 가란 말이야!”
“……!”
막말을 쏘아붙이듯 소영이는 거침이 없었다. 도대체 어쨌다고 저러는 건지, 건한이는 그런 소영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영이가 혼잣말처럼 했던 마지막 한 마디, “내가 그래서 교횔 안 가.” 라던 말이 건한이의 귓가에 한참 동안 맴돌았다.
속에선 부글부글 할 말이 끓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건한이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연속으로 해란이와 소영이에게 얻어터지는 기분이었다.
소영이는 싸늘하게 웃어 보이더니 관두자는 식으로 퍽,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저기…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몇 발짝 다가서며 건한이가 멈칫거리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때 상식이가 뒷문을 벌컥 열고 교실로 들어왔다. 그것을 신호로 창밖에서는 후드득거리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뒤미처 아이들이 쿵쾅거리며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 안은 삽시간에 와글와글해졌다. 더 이상은 소영이한테 물을 수는 없었다.
▣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학교가 끝나고 건한이는 요령껏 민택이를 따라잡으며 말했다. 청소당번이었던 민택이를 기다리느라 건한이는 교문 밖 계단 위에서, 가는 몸을 휘청거리며 비에 젖고 있는 코스모스만 세고 있었다. 학교 앞에서 저만치 무덤 뒤쪽까지는 마흔여덟 송이였다. 그 뒤로 사료창고 앞까지는 서른두 송이였다. 세고 또 세고, 대여섯 번은 넘게 확인한 것이었다.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 가운데 낯이 익은 아이들이 적잖았다. 하지만 아무도 혼자 서 있는 건한이를 아는 체 하지는 않았다. 미리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건한이도 그런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줄지어 서 있는 코스모스만 세고 있었다. 상식이도, 해란이도, 잠시 건한이를 건네다 봤을 뿐, 종종걸음을 치듯 사료창고 앞에서 사라졌다. 더 뒤쪽으로는 까치발을 떼도 한 송이 한 송이 따로 셀 수 없게 겹쳐지는 코스모스였다.
“응? 민택아!”
우산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민택이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건한이가 다시 말했다.
“뭘?”
민택인 귀찮다는 듯이 건한이가 받쳐주는 우산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퉁명스럽게 다시 묻고는 그저 땅만 보고 걸어갔다. 무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건한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민택이에게 우산을 받쳐주며 따라 걸었다.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관둬. 대충 감은 잡았으니까.”
“…….”
“하지만 너 때문이 아니잖아. 난 그냥, 놀라서 그랬는지, 몸이 좀 아팠을 뿐이야.”
도대체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이대로 아무 말 없이 돌아가면 다시는 민택이와 놀지 못할 것 같아서, 건한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혼자 말했다.
“딴 사람은 몰라도, 넌 알잖아.”
“…….”
“나, 너한테 많이 고마워.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어. 응?”
물이 고였는데도 첨벙첨벙 걷고 있는 민택이의 걸음과 보폭을 맞추느라 건한이는 신발이 다 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민택이 때문에 건한이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성철이 형이 또 뭐라 그랬어? 그날 이후에 또 맞았어?”
“…….”
“나 때문에 어른들한테 욕먹었다는 건 무슨 말이야? 응? 운동회 날 왜 니가 나 때문에 욕을 먹어?”
그러자 갑자기, “누가 그딴 소릴 해?” 하고, 민택이는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휙 돌아보며, “하여튼 나서기는, 바보 같은 게!” 하며 소릴 빽 질렀다. 그때까지 소영이가 빠짝 따라오고 있었다. 민택인 그런 소영일 향해 뭐라 더 말을 하려다가 그냥 팩 돌아섰다. 더욱 겅중겅중 걷는 민택이와 걸음을 맞추느라 건한이는 종종걸음을 쳐야했다.
그렇게 말없이 우산을 받쳐주고 걷다보니, 먼젓번 밤에 건한이가 토악질을 하던 풀숲을 지나고 있었다.
“너, 나랑 친구 맞지?”
“…….”
“난, 너 좋은데. 너랑 계속 친구하고 싶은데.”
“…….”
“그러지 마. 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 때문에 그런 거니까, 미안해. 진짜야.”
건한이는 그대로 서서 울고 싶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나 때문에 그렇다면 용서를 빌고 싶어, 하는 말을 하려는데 가슴이 먼저 울컥, 서러웠다.
소영이 말처럼 지난번에 있던 애가 어떻게 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건한이는 그냥, 민택이가 좋았다. 편하게 대해주는 이 애의 마음이 좋았다.
건한이에게는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넘겨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면, 내가 이랬을 때 저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서부터 오히려 친구들이 멀리하고 어려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막말을 하고, 막대해도 좋았을 때보다 친구들은 그런 건한이를 슬슬 멀리하고 따돌렸었다. 그걸 알면서도, 먼저 앞서 생각하는 버릇은 아예 습관이 되었고, 이제는 건한이의 성격이 되어버렸다.
엄마에게 이 말은 해도 될까? 그럼 엄마는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대해주겠지? 욕먹을 게 빤한데도, 아빠한테 이 말을 하면, 아빤 저런 야단을 치면서 이렇게 대해주겠지? 하는 식으로.
동생이 그렇게 되고 난 뒤부터 건한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두 인물로 사는 것 같았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걸 요구하고, 저걸 하려고 했다가 이걸 선택하고….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그게 네 마음이라면 기꺼이 나는 그것을 우선 맞추겠다는 식으로. 먼저 방어를 하고 상대를 대하는 성격이 생겨난 거였다.
지난 일 년은,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어린 게 뭘 알아,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건한이는 그렇게 어른도 애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헷갈려했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어느새 그걸 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면, 건한이는 그게 어쩌면 동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은, 따로 행동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행동은, 생각 없이는 한 치도 움직이려 하질 않았다. 그런 자신을 두고 누구는 사춘기가 빨리 왔다고 했다. 애가 너무 조숙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건한이는 생각하는 자신이 지겨울 정도로 생각에 허덕이며 지냈었다.
그런 건한이에게 있어 이곳에서의 생활은 마치 선물과도 같았다. 널찍한 집이 그랬고, 엄마의 환한 웃음이 그랬다. 아빠의 잔소리와 누나의 참견이 그랬고, 동생의 어리광이 그랬다. 전엔 어땠든, 이제는 달라지는 것 같았다. 침묵으로 침몰해버리는 줄 알았는데 차츰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생활이 좋았다. 그런데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이게 다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아, 건한이는 그게 무서웠다. 이러다 정말 민택이도 잃고, 소영이 말처럼 또 이사를 가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렇게 맥없이 침몰하지 않기 위해서는 민택이를 잡아야 했다. 민택이는 건한이에게 있어, 항구에 정박할 수 있는 단단한 동아줄과 같았다.
“저기, 민택아!”
“…….”
“우리 집에 갈래? 우리 집에 가서 라면 끓여 먹자, 응?”
▣
천사에게서 온 편지는 이제 예닐곱 통이 넘었다. 각각의 편지마다 꽃에 대한 전설과 그 꽃말을 빌어 은근히 건한이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거였다. 하지만 또 하나의 공통점은 발신인 주소가 없다는 거였다. 우표가 붙어 있고, 의정부우체국 소인이 선명하게 찍혀는 있었지만, 발신인 주소 대신 ‘너의 천사로부터’ 라는 글자만 동글동글 적혀 있었다.
건한이는 며칠째 누구하고라도 말이 하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만 같아 속이 타들어갔다. 왜 자신은 늘 외톨이여야 하는지, 외톨이인 지금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무슨 말이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은 제외였다. 가족은 속 시원하게 말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못되었다. 엄마는 행여 걱정을 사서할 게 분명했고, 누나는 왠지 어색하면서도 낯간지러웠다. 그렇다고 동생에게 뭔 말을 했다간 대중없이 아무 때나 불쑥 말을 꺼낼 게 분명했고, 아빠는 더욱이나 어렵고 불편했다.
아…! 아무나 좀, 말을 할 수 있었으면… 건한이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무나 붙들고 말이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절로 숨이 턱, 막히고는 하였다.
민택인 결국 그냥 돌아갔다. 그래도 여지를 남긴 게, “니가 나중에 우리 집으로 와.” 라고 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나중이라는 게 언제를 두고 하는 말인지,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건한이는 당장 집에 들렀다가 뒤미처 민택이네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막상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마루에 가방을 던지려는데, 어차피 자신 때문에 민택이가 지금 곤란한 거라면 그렇게 눈치 없이 민택이넬 찾아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건 민택이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아서였다.
민택이를 그냥 둬, 라고 했던 소영이의 싸늘한 말을 떠올리며, 누구보다 소영이가 민택일 더 위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한이는 그대로 마루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만사가 귀찮기도 하고 서글펐다.
엄마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빈집에 건한이가 혼자 있을 거라는 건, 건한이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참에 엄마가 돌아올 때쯤이면 부러 뒤뜰로 나가 소나무 밑에 앉아 있다 들어오곤 하였다. 행여 엄마가 아는 날이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엄마를 이해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걱정에 걱정을 사서할 게 불을 본 듯 빤한 일이니까!
그렇듯 마루에 앉아 있던 건한이가 깜빡 했다는 듯 떠올린 것은 천사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와 동시에, 나도 천사에게 편지를 쓰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어떻게든 민택이에게 다시 편지를 쓸 생각도 하였었다. 하지만 개다리소반을 끌어다 앉으니까 멍하니,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전에도 편지를 썼다가 천사인 게 금세 들통이 났는데… 뭐라고 쓸지, 공연히 엉뚱한 말을 해서 오히려 더욱 서먹해지는 건 아닐지… 천사처럼 편지를 잘 쓸 자신도 없는데… 하면서, 그냥 맥없이 연필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더랬다.
엄마는 여느 날처럼 동생을 데리고 어디 집사님 댁이라도 간 게 틀림없었다. 아빠가 집에 없는 일주일 동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빠 대신 엄마가 교인들을 챙겼다. 병문안도 가고, 허드렛일도 돕고, 그럴 때면 번번이 밑반찬에 쓸 나물이며 돼지고기 몇 근을 얻어오기도 하고. 다 저녁이 되어서 엄마가 돌아오기까지 빈집은 통째로 건한이의 몫이었다.
천사님.
보세요. 누군지 알면 더 편하게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누군지 몰라서 한참 망설이다 써요.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나에 대해 적어 보내주는 내용 때문에 나는 혼자 부끄러워하곤 해요. 근데 신기한 건, 그걸 꼭 한 번씩 따라한다는 거예요. 정말 내가 그런 것처럼,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흉내 내기도 하면서요. 그러다 보면 나는 하난데 내가 둘, 또는 셋 이상은 되는 거 같아요.
사실 너무 할 말이 많아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래서 이야기 할 사람이 없나 봐요.
나는 늘 외톨이예요. 어릴 땐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언제부턴가 외톨이가 돼요. 더 친구들이랑 잘 지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하는 만큼 외톨이가 돼요.
이사 와서 사귄 친구가 민택이예요. 민택인 참 좋은 친구예요. 나는 그 애가 좋아요. 같이 있으면 편해요. 잘해줘요. 그런데 요즘 민택이랑 어려워졌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일은 학교 가서 먼저 아는 체 하고, 친하게 지내야지, 생각하지만 민택이 앞에만 서면 조심하게 돼요. 나 때문에 또 혼나면 어쩌나 걱정이 돼요. 생각을 하다보면 또 외톨이가 돼 있어요.
조금 무서워요. 난 여기서 오래 살고 싶어요. 이 집에서 말예요. 아빠가 공부를 끝내면 목사가 되고, 그럼 아주 오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무서워요. 또 이사를 가게 되면 어쩌나 하고요.
천사님.
전에 보내준 ‘보리새우’에 대한 얘기는 참 이해하기 힘들어요. 끝에다 그렇게 썼지요? 나도 보리새우 같다고요? 그 말 때문에 많이 생각해요.
내가 갇혀 있는 내 등껍질은 무얼까? 하고요.
우리가 살면서 다 그렇게 자신의 등껍질에 갇혀 사는 거라면, 끔찍하지만 어렴풋이는 알 것도 같아요. 근데 내 등껍질은 뭔지 모르겠어요. 남들 건 알 거 같은데, 내 건 모르겠어요.
참! 세 번째 편지에서 들려준 ‘민들레’ 이야기가 좋아요. 민들레꽃을 좋아하기로 했어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할 때 다른 식물들은 비가 온다고 좋아하는데, 민들레만 그 비의 의미를 알았다고요? 민들레의 기도를 듣고, 민들레 씨를 하늘 높이 훨훨 날 수 있게 했다고요?
민들레 꽃말이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이라고요?
아, 나도 훨훨 날고 싶어요.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어요. 민들레처럼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도 들어줄까요?
건한이는 누나의 색 볼펜을 몰래 꺼내 천사의 편지를 흉내 내듯 편지를 썼다. 편지지에 나비도 그리고 담쟁이덩굴도 그렸다. 쓰는 동안 몇 장의 종이를 그냥 구겨버리고 새로 써야 했다. 그렇게 쓴 편지를 다시 또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엄마와 동생의 말소리가 들렸다. 건한이는 서둘러 뒷마무리를 해야 했다.
아, 아무튼 오늘은 이만 펜을 놓을게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그래도 좀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그럼, 안녕.
“건한아! 집에 있었니?”
부엌에서 부르는 엄마 때문에 건한이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고 안절부절 어쩌지를 못하고 있었다. 책갈피에 넣어두자니 혹시 누나가 볼 것 같고, 가방 밑바닥에 넣어두자니 누가 또 열어보면 어쩌나 싶었다. 그렇듯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민이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엉아, 뭐해?”
“응? 응… 숙제.”
건한이는 급한 대로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민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건한이 너, 방에 있었으면서 왜 대답도 안 해?”
엄마는 골란 시늉을 하며 물었다.
“어? 어… 숙제하느라 못 들었어.”
주머니가 뿔룩 튀어나온 것 같아 건한이는 몸을 비틀면서 엄마를 보고 피식 웃었다. 엄마는 신문지에 둘둘 말려진 살코기를 바가지에 담으면서, “최 장로님네 갔었어. 편찮으시대서. 꿀을 좀 갖다 드리러 갔는데, 엊그제 돼지를 잡았다는구나. 운동회 날 말이야!” 하는 거였다.
“…….”
건한이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민택이를 생각하니까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것도 같았다.
건한이는 졸졸 따라다니는 막내를 잠시 떼어두고, 슬그머니 쪽문으로 나갔다. 편지를 어디에 감추어야겠는데, 마땅히 둘 곳이 없나 궁리를 했다. 그러다 퍼뜩 생각난 곳이 쪽문 앞에 있는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였다. 까치발을 떼고 손을 뻗으면 주먹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나 있다는 걸, 전에부터 이미 보아둔 까닭이었다. 웬 새집인가? 싶어 들여다본 것인데, 그 오래된 틈은 아래쪽으로보다 위쪽으로 한 뼘은 더 깊이 패여 있는 그런 구멍이었다.
건한이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감추었다. 앞으로 이곳은 나만의 우체통이야, 하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흐뭇한 느낌도 드는 것 같았다.
- 구리 장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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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밑에 나가 앉아있는 시간이 잦아졌다. 건한이는 자신이 쓴 편지뿐 아니라, 천사에게 받은 편지들도 한데 그곳에 모아두었다. 그리고 이사 오던 날처럼, 한참을 그렇게 앉아 천사의 저번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러다 지치면 부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이번 편지를 도로 읽곤 하였다. 자신이 쓴 편지가 천사에게서 받은 편지보다 서너 통은 더 늘어난 다음이었다.
막상 편지를 쓰기 시작하고부터, 말이 하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줄어들었다. 답답한 마음도 줄어들고, 외톨이라는 생각도 자주 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마음껏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편지쓰기는 수다쟁이를 만드는 것 같았다.
한 장을 다 채우기도 힘들던 편지쓰기가 앉은 자리에서 두세 장은 너끈히 쓰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 쓰면 쓸수록 할 말이 뭐가 그리 많은지, 써 내릴수록 늘어만 가는 말이 참 신기한 일이기도 하였다.
속엣 얘길 이처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게, 건한이로서는 새로운 위로이면서 즐거운 놀이와도 같았다. 민택이에 대해 쓰다보면, 친구란 무얼까에 대해 묻게 되었다. 보리새우 등껍질에 대해 쓰다보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석이에 대해 쓰다보면, 어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무얼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편지쓰기란, 저 혼자 이야기의 꼬리를 물고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마술놀이 같은 거였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분명히 자신이 쓴 글인데도 종이에 적힌 글을 다시 읽다보면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그 안에 담긴 느낌을 새롭게 이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울먹거리며 자신의 쓴 글을 다시 읽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혼자 있는 시간이 하나도 외롭지가 않았다. 외톨이만 같아 답답하던 마음도 쓰거나 읽다보면 풀어지곤 하였다.
건한이는 저 아래 버스정류장을 중심으로 무엇이든 숫자로 세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마을의 양계장 수를 세고, 집들을 세고, 배나무를 세고, 그렇게 헤아리던 숫자가 엉키면 다시 버스정류장을 쳐다보았다. 더 멀리 의정부나 동두천을 가늠해 보면서 마음껏 날아다녔다.
엄마는 늘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할 때쯤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건한이는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쪽문으로 몰래 나갔다. 그리고 예배당으로 해서 대문으로 돌아들어왔다. 부러 숨이 턱까지 찬 것처럼 하면서, 대문을 박차고 호들갑스럽게.
마루를 뒹굴며 동생과 요란하게 레슬링을 하고,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호들갑을 떨고, 누나를 골려주다 핀잔을 듣고 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이 외톨이라는 걸, 엄마가 알아서는 안 되었다.
“얘, 건한아! 저 위에 왕 장로님네 알지? 이것 좀 갖다 드리고 와. 지금 댁에 계실 거야. 좀 전에 만나 뵀거든.”
그렇게 부엌 앞으로 가서 실컷 놀다온 시늉을 하자, 엄마는 건한이를 붙들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게 뭔데?”
건한이는 과장되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물었다.
“낼모레 아빠 오시면 드리려고 괐는데, 장로님네 집사님이 통 뭘 못 드신대. 노인 분들이 그러다 이제 환절기에 병이라도 나면 어쩌니? 사골이야. 얼른 갔다 와. 쏟지 않게 잘 들고 갈 수 있겠어?”
엄마는 건한이에게 들통을 하나 들려주며 설명을 길게도 했다.
“치. 이 까짓것. 내가 애야?” 하며 입을 삐쭉 내민 건한이는 장난스럽게 건들거리며 대답했다.
“어휴, 다 컸네. 우리 아들.”
“참나.”
“엄마. 나도 엉아랑 같이 가.”
“안 돼. 넌 엄마랑 좀 씻어. 엉아 금방 갖다 올 거야.” 뒤늦게 칭얼거리며 따라나서겠다는 민이를 붙들고 엄마가 말했다.
“너, 아까 멍멍이도 만지고 돼지우리도 들어갔잖아. 얼른 안 씻으면 나쁜 병균이 아야야, 해! 알아?”
하지만 민이는 아예 흙바닥에 드러누우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채는 막내를 억지로 끌어안으며 엄마가 말했다.
“조심해서 갖다 와. 쏟지 말고.”
“치. 걱정 마.”
건한이는 막상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엄마가 준 조그만 들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뚜껑을 열어보니 뽀얀 국물이 울어나 금세 식욕이 도는 곰국이었다. 찰랑찰랑 담겨있는 것이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건한이는 태연스럽게 들통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래, 엄만 몰라, 나만 잘하면 돼, 내가 외톨이란 걸 가족들이 알 필요는 없는 거야, 그래, 그것뿐이야…! 건한이는 스스로 다짐을 하듯 힘차게 발을 구르며 걸어갔다. 그럴 때마다 국물이 쿨럭쿨럭, 요동을 쳤다.
마을 중앙에 있는 공판장을 지나 미로처럼 얽힌 닭장과 돼지우리 사이로 들어섰다. 그 비탈길은 언제나 좁고 지저분했다. 공판장까지는 시멘트바닥으로 포장이 되어 있었지만, 공판장 위쪽 비탈길은 꼬불꼬불 좁고 불결했다. 경사진 면이 너무 가팔라 국물이 자꾸 새어나왔다.
“어, 경건한! 너, 어디 가냐?”
조심스럽게 비탈길을 오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건한이를 불렀다.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성철이 형이었다. 성철이 형은 후후 잘 걸렸다는 표정으로 알 듯 모를 듯 건한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디 가냐니까?”
성철이 형은 제멋대로 들통 뚜껑을 열어보면서 다시 물었다.
“네? 저기… 왕 장로님 댁이요.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래서요.”
건한이는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호, 그래?” 하더니, 성철이 형은 대뜸 들통을 움켜쥐며 “내가 들어줄게. 이리 줘.” 하였다.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방을 아예 건한이 쪽으로 툭, 떨어뜨리고는 한사코 들통을 받아들었다. 성철이 형의 가방은 가볍고 얇았다.
“어휴, 이거 생각보다 무거운데?”
“…….”
성철이 형은 건한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성철이 형 뒤에서 건한이는 잔뜩 겁을 먹은 아이처럼, 어정쩡하게 비탈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쯤 걷기에만 열중하고 있는데, “요즘 민택이, 너랑 안 놀지?” 하고 성철이 형이 툭, 던지듯 물었다. 너무 뜻밖의 질문인데다, 갑자기 묻는 바람에 건한이는 딸꾹질이 났다.
“……!”
“애새끼, 또 그런다니까…. 하여튼 어휴.”
성철이 형은 저 혼자 묻고, 저 혼자 대답했다. 그리고 또 저 혼자 골을 냈다. 건한이는 딸꾹질 때문에 어깨만 움찔거렸다. 서너 집을 비껴 오르는 동안, 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 안 나게, 두세 걸음에 한 번씩 건한이는 딸꾹질을 했다.
“야, 여기.”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성철이 형은 또 불쑥 들통을 돌려줬다. 건한이는 그런 성철이 형의 겨드랑이 사이에 가방을 먼저 끼워주고, 들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고개만 푹 숙이며 고맙다는 시늉을 하려는데, “이거 주고, 우리 집으로 와!” 하고는 성철이 형은 팩, 돌아섰다.
“네…? 왜, 왜요?”
“그럼 여기까지 왔다 그냥 갈래? 우리 집 알지? 저기!”
턱짓으로 건너편 집을 가리키느라 성철이 형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그냥 먼저 가버렸다.
▣
“뭐 하는… 거예요?”
벌써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혼자 성철이 형네 집에 올 줄은 몰랐다. 건한이는 장로님께 들통을 전해주고 어쩔까, 잠시 망설이다 성철이 형네 집으로 왔다. 전에 민택이랑 왔을 땐 몰랐는데, 유난히 허름하고 좁은 집이었다. 부엌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형태의 집 구조였다. 밖에서 들여다보면 부엌부터 한 눈에 들어오는 그런 식이었다. 성철이 형은 그 좁은 통로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사료포대를 찢어서 그 안쪽을 편편하게 눌러주고 있는 중이었다.
“어, 왔어? 마침맞게 왔다. 야, 너 거기 좀 잡아.”
성철이 형은 하나도 거침이 없었다. 묻거나 재는 거 없이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건한이는 그런 형이 무서우면서도 멋있어 보였다.
“……?”
“저기 안에 보면 코일뭉치 있어. 자 이리 들어가.”
부엌으로 해서 내부로 통하는 좁은 통로에서 성철이 형은 엉덩이만 들어 길을 내주었다. 그리고 더 안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빈 계란 판들이 여기저기 어지러웠다. 오랫동안 걸레질을 하지 않은 손잡이와 문틀에는 꾀죄죄한 땟물이 얼룩져 있었다. 문지방에는 벗어둔 신발짝이 납작 뒤집힌 채였다.
건한이는 성철이 형이 턱짓으로 가리킨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이든 어머니와 함께 산다고 들은 것 같은데, 집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코딱지만 한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이 안방이고 마루였다. 오른편은 돼지우리, 왼편은 쓰지 않는 닭장이었다. 닭털과 닭똥이 지저분하게 엉겨있었다.
“거기, 아니 더 안쪽으로. 그래 그거.”
수돗가에는 빨랫감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그 앞으로 신문지에 감겨있는 구리선을 가리키는 거였다.
“이거요?”
“응! 이제 여기서부터 내가 슬슬 붙이면서 갈 테니까, 니가 그쪽에서 그 끝을 좀 잡고 있어?”
낚싯줄처럼 가는 구리선을 조심조심 곧게 펴면서 성철이 형은 말했다. 그리고 미리 펴둔 포대 위에 그것을 에스 자 모양으로 천천히 풀어갔다. 이 끝과 저 끝을 일정한 간격대로 펴는 거였다.
“좀 더 풀어. 느슨하게. 아니 천천히. 그래, 잘하네? 니가 좀 뒤로 가야지. 그래. 이쪽으로. 잠깐만….”
고작 코일이 감긴 신문뭉치를 들고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인데도, 건한이는 조심조심 안간힘을 썼다. 물러섰다, 당겼다,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일을 거든답시고 애를 쓰느라, 건한이는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상냥한 말씨의 성철이 형이 다소 거북하면서도 정이 느껴졌다.
“뭐 만드는 건지 아니?”
“네…? 아뇨.”
아무 말이 없는 건한이를 두고 성철이 형이 물었다.
“근데 왜 안 물어 봐?”
“네?”
“뭐 만드는 거냐고, 왜 안 물어봐? 궁금하잖아?”
“…….”
건한이는 할 말이 없었다. 시비를 거는 것 같지는 않은데, 별 걸 다 트집이다 싶었다. 그런데 또 막무가내로 물었다.
“너, 나 무섭지?”
“…….”
“대답해 봐. 너 나 싫지?”
“…….”
이럴 땐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거야? 건한인 더욱 난처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후후, 자식. 다 안다, 임마.”
“……!”
“하지만 그럴 거 없다.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 그렇게 나쁜 놈 아니다.”
“……?”
가는 구리선은 생각처럼 잘 펴지지가 않았다. 에스 자로 돌리면 도로 한쪽이 구겨져 울고, 다시 그걸 펴느라 꼼지락거리면 또 다른 쪽이 울었다. 이 빠진 노인의 주름진 입가처럼 연신 후물거렸다. 그런데도 성철이 형은 무슨 재미난 놀이를 하는 사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지금, 뭐 만드는 건데요?”
기껏 무서워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새삼 반응을 보인다는 게 좀 우스웠지만 건한이는 그냥 그렇게 물어보았다.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투로, 조금 늦었지만.
“어? 하하. 빨리도 묻는다. 이거? 니가 보기엔 뭐 같냐?”
“……?”
본래는 이처럼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왜 이런 형을 무서워하는 걸까? 건한이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형은 친절했다. 그게 다 오해라고 알려주듯이 성철이 형은 더욱 따뜻하게 웃으면서, “모르겠어?” 하고 재차 물었다.
“네… 아뇨. 음… 큰 방패연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뭐? 방패연? 하하. 또?”
“흠… 어디 문풍지로 쓸 튼튼한 벽지를 만드는 것도 같고요….”
“오호? 그리고 또?”
어느새 건한이는 성철이 형의 말투와 자상한 인상에 슬슬 마음이 놓였다. 기분이 한결 편해지고 그러니까 슬슬 즐겁기까지 하였다.
“흠… 잘 모르겠어요. 헤헤.”
“하하하.”
이처럼 시원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건한이는 덩달아서 크게 웃었다.
“넌 참, 어른스러운 데가 있어.”
“헤헤… 제가 뭐….”
성철이 형의 말에 건한이는 꾸김없이 헤헤거렸다.
“이거, 구리 장판이야!”
“네?”
“전기장판 알지? 그거랑 똑같은 거야.”
“아….”
퍼뜩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건한이도 전에 옥상 방에서 쓰던 전기장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왜 그걸 만들어요?” 하고 묻고는, 건한이는 어색하게 먼저 씩 웃었다.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다니! 하지만 성철이 형은 전혀 바보 같지 않다고 말해주듯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제 슬슬 아침저녁이면 춥잖아! 나야 괜찮지만…! 한 장씩 나눠주려면 좀 서둘 필요가 있지.”
“……?”
무슨 말인가 알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그걸 직접 만들어 쓴다는 게 신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만들어서 전기를 끼우면 위험하지 않나, 건한이는 멀뚱히 서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 동넨 물 값, 전기 값이 다 공짜잖아!”
“……!”
“아, 여긴 그래. 그런 거 면제거든.”
한쪽 다리로 앞에 펼쳐둔 전선을 밟고, 다른 무릎으로 뒤에 선들이 흩어지지 않게 누르고, 성철이 형은 꽤나 꼼꼼하게 구리선을 펼쳐놓으며 말했다.
“이것도 여기만의 방식이야.”
“……?”
한 줄로 길게 이어지는 가는 구리선은 두 폭 정도의 포대 위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그재그로 나란히 줄지어 이어졌다. 성철이 형은 그 위에 이제 색칠을 하듯 조심스럽게 본드 칠을 하기 시작했다.
“넌, 잘 모르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피부에 감각이 없어. 그러니까 이런 장판을 만들어서 온돌대신 바닥에 까는 거야. 이제 여기다 일정하게 온도가 유지되도록 조절기만 달면 돼. 알겠어?”
“아아….”
건한이는 대충은 알아들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전기가 통한다는 건지, 왜 피부에 감각이 없다는 건지, 솔직히 그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알아듣겠어?” 하고 다시 묻는 성철이 형한테, “네…. 아, 아뇨.” 하고 바보처럼 대답을 했다.
“하하, 자식.” 하면서 성철이 형은 어른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은 말이다, 다 궁하면 통하게 돼 있다. 비록 이게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이렇게 구리선을 돌린 장판이 몇 백만 원하는 온돌보다 여기 사람들한테는 훨씬 좋은 거란다. 알겠느냐?”
“……?”
점점 더, 장난스럽기까지 한 성철이 형의 설명을 건한이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건한이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인지, “넌, 아마 이해 못할 거야. 하긴 열에 아홉은 다 이해 못할 거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한겨울에 사람들은 불을 때고 따뜻하게 자잖아? 그치”
“네.”
“근데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잠들었다간 자기 살이 시꺼멓게 타는 것도 몰라.”
“왜요?”
“감각이 없거든!”
“……?”
건한이가 도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성철이 형은 허리를 펴면서 다시 설명을 했다.
“너, 엄지발가락에 굳은 살 배겼냐?”
“네? 아, 아뇨. 하지만 아빠가 가끔 칼로 잘라내는 건 본 적 있어요.”
“그래 그런 거야. 분명히 몸에 붙어 있는데, 감각이 없는 거. 칼로 잘라내도 아프지 않는 거….”
“……?”
“아무튼…!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살이 데고, 상처가 짓물러도 감각이 없어. 알아? 자기 살이 다 타도 모른다고!”
“설마. 진짜로요? 왜, 왜요?”
“어휴, 답답해. 그걸 내가 아니? 그런 병인 걸?”
“……?”
성철이 형은 다시 본드를 구리선 사이로 일정하게 바르느라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 일에만 신경을 쓰다, “아픈 걸 느끼지 못한다는 건, 불행한 거야!” 하고 불쑥 말을 뱉었다. 건한인 허리를 굽히며 성철이 형이 정성껏 바르고 있는 본드 자국을 보면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
“어때? 내 말 알겠어? 아프다는 건, 생명이 있다는 소리잖아. 아픈 걸 못 느낀다는 건 죽었다는 소리고! 그러니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아프다, 싶으면… 아, 내가 살아있는 거로구나, 여겨! 누가 어쨌는데도 전혀 아프지가 않아? 아, 그럼 내가 죽은 거로구나, 하고!”
“……?”
도대체 알듯알듯한 소리만 한다. 건한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만 굴렸다.
“그치? 짓물러서 고름이 질질 나오고, 살이 터져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아프지가 않아? 그거 참, 끔찍하지 않겠니?”
“……아.”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픈 걸 느낀다는 건 그래도 좋은 거라는 소리였다. 건한이는 그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느라, 아버지의 굳은살을 떠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지금 내가 아픈 건, 살아있다는 거로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갑자기 또 싸하게 민택이 생각이 났다. 조금 있자니 석이 생각도 났다. 울컥거리며 마음이 아팠다. 아, 이런 게 살아있다는 거로구나! 싶었다.
조심스럽게 펼친 구리선 사이사이에다 접착제를 바르느라, 성철이 형은 더욱 신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여기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야.”
“……!”
“나도 사실은 잘 몰라. 실제 내 몸이 그런 건 아니니까!”
“아…….”
“하지만 그게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정도는 너보다 좀 알지. 자기 손가락이 쑥 빠지는데도 아픈 걸 모르면서 산다고 생각해 봐! 그런 걸 곁에서 보며 산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지 않니?”
“……!”
자상하면서도 왠지 슬픈 목소리였다. 성철이 형은 강한 접착제 냄새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고루 본드를 문지르느라 정성을 다했다.
저런 모습을 알기나 할까? 형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건한이는 새삼 그런 형이 좋아졌다. 그동안 나쁘게만 생각했던 자신이 괜히 미안할 정도였다.
“내가 가끔 화가 나는 건, 불공평하다는 거야.”
“……!”
갑자기 또 다른 목소리로 말을 잇는 성철이 형 때문에 건한이는 꾸부정하게 서서 형의 뒷모습만 곁눈질하고 있었다. 이리 같다 저리 같다, 자꾸 흩뜨려지는 구리선처럼 성철이 형의 말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치 않니? 불공평하잖아?”
“…….”
“다른 사람보다 너무 많이 아픈 게 불공평하고, 많이 아픈데 전혀 고통을 못 느끼니까 불공평하고, 죽을 때까지 불공평하게 살다가 죽어야 하니까 불공평하고, 흐흐.”
약간 혀 꼬부라진 소리로 성철이 형은 슬프게 말했다. 성철이 형의 목소리가 슬픈음악 같았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느라 더욱 그런 것 같아다. 어쩌면 역한 냄새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전엔 미안했다.”
“네?”
또 갑자기 툭! 성철이 형은 제멋대로 말하는 대장이었다.
“그때 너 왔을 때, 내가 그러는 게 아닌데….”
아, 무덤 밭에서의 일을 두고 하는 소리 같았다. 건한이는 성철이 형의 등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꼭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정말이야.”
“…….”
“너, 아팠다며?”
“…….”
“놀라서 그런 거지? 흐흐. 내가 민택일 때린 건… 하, 난 말이야. 민택일 보면 왜 자꾸 나를 보는 거 같니? 어쩔 땐 그게 너무 화가 나. 괜히 민택이만 보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
“잘해줘야지, 잘해줘야지 하다가도… 그 앨 보면 먼저 화부터 나! 바보처럼 굽실거리는 그 집 어른도 그렇고! 지 생각 하나 제대로 말 못하는 민택일 봐도 그렇고…….”
성철이 형은 길게 한숨을 쉬며 다시 허리를 펴며 말했다.
“걜 보면, 꼭 어릴 때 나 같아…….”
느릿느릿 말을 하다, 의미 없이 웃는 성철이 형의 손등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배겨있었다. 형도 참,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건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 일하면서, 혼자 말하고.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서둘듯 말하고. 그런 형한테도 편지쓰기를 좀 가르쳐주면 나을 텐데……. 건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 다 된 것 같다. 와. 너 이런 거 처음 보지?”
“네….”
“흐흐. 이 세상엔 사료포대 한 장이면 행복한 사람들도 있는 거다.”
그것은 고작 한 평 남짓한 크기였다. 가늘게 구리선이 펴지고 촘촘하게 본드 칠이 된 포대였다. 그 위에 또 다른 포대를 한 장 덧붙이니까, 말 그대로 멋진 장판이 된 것 같았다. 건한인 성철이 형이 시키는 대로 그냥 구리선만 잡고 있었을 뿐인데도 마치 자신이 다 한 것처럼 뿌듯하고 기뻤다.
“됐다. 이제 싹싹 문질러. 와, 훌륭한데?”
성철이 형도 스스로 대견스러운지 멋쩍게 하하 웃었다.
“자, 됐다. 건한이 덕분에 장판 한 장 만들었다. 야, 너 내 조수해라.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리 집에 와서 좀 도와줄래? 하하.”
“네? 이걸 또 만들어요?”
건한이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하하. 왜? 오기 싫으냐?”
“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몇 장 더 만들어야지. 곧 겨울일 텐데. 내가 기술을 조금만 발휘하면 몇 사람은 더 따뜻하게 잘 텐데… 하하.”
“……?”
성철이 형은 기분 좋게 하하 웃었다. 그러다 또 불쑥, “저녁 안 먹었지?” 하고 물었다. 가뜩이나 비좁은 부엌은 구리 장판 하나 때문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네? 아뇨. 이제 가서 먹어야죠.”
“가긴 임마, 나랑 라면 먹고 가. 내가, 라면 맛있게 끓여줄게.”
뜻밖의 호의에 건한이는 반은 싫고 반은 좋았다. 하지만 선뜻 그럴 수는 없었다.
“엄마가 기다리는데요?” 하고 말하자, 성철이 형은 후다닥 방으로 기어들어가며 건한이를 불렀다.
“이리 들어와. 집에 전화하자.”
“네?”
성철이 형은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검정수화기를 냉큼 들어올렸다.
“사택이 몇 번이지?”
“네?”
“너 말고, 응? 왜긴 왜야. 건한이 와 있어. 알았어. 바로 연결해봐.” 하면서 수화기에 대고 저 혼자 떠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성철입니다. 네… 어머닌 그냥 누워 계시죠, 뭐. 네… 아, 다른 게 아니고요. 건한이가 지금 저희 집에 있거든요. 제가 장판 만드는데 좀 도와 달라고 그래서요. 네… 그래서 저랑 저녁 먹고 가면 안 될까 하고요. 네… 걱정 마세요. 이따 제가 데려다 줄게요.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고는 수화기를 탁 놓았다. 건한이는 제멋대로인 형의 행동이 싫지가 않았다.
마을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전화선이라고 했다. 수화기를 들고 찾는 집을 교환이 연결해주거나, 외부로 전화를 돌려주는 거였다. 그걸 ‘뿌러찌’해 쓴다고 하였다. 공판장 누나가 성철이 형네 누나라는 진작 알고 있었다.
“라면 괜찮지?”
성철이 형은 부엌으로 나가며 물었다. 건한이는 그런 형의 방에 앉아 홀가분한 기분으로 물었다.
“엄마가 괜찮대요?”
“응. 아예 안 들어와도 된다는데? 하하.”
“에이…. 거짓말.”
“진짜야 임마. 하하.”
“…….”
건한이는 성철이 형의 밝은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너 두 개 먹을 수 있지? 라면 네 개 끓인다?”
“으아, 그걸 어떻게 다 먹어요?”
“자식. 남자가 그 정돈 먹어야지. 이따 찬밥도 말아 먹을 건데?”
“으악.”
“하하하.”
건한이는 책상 위에 흩어진 잡동사니들을 쭉 둘러보다, 옆에 놓인 기타를 보고 물었다.
“와. 형, 기타도 칠 줄 알아요?”
“응? 아… 그거? 전에 목사님한테 조금 배웠어. 주법은 아직 잘 모르고, 코드는 보면서 좀 칠 줄 알아. 왜? 가르쳐줄까?”
부엌에서 울리는 성철이 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진짜로요?”
“그래. 돈만 내. 하하.”
새로 김치를 썰었는지, 묵은 냄새 때문에 뱃속이 꼬르륵거렸다. 아차, 싶어서 건한이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성철이 형을 불렀다.
“저기, 형!”
“어?”
손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한 입 물다말고 성철이 형이 건한이를 돌아봤다.
“저, 민택이도 오라 그러면 안돼요?”
“……!”
- 우리도 이 마을 사람이야
▣
“너, 요즘 무슨 일 있니?”
모처럼 온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묻는데도 건한이는 딴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했다. 젓가락질만 깨작거리고 있는데, “얘! 아빠가 뭐라 하시잖아?” 하고 곁에 앉았던 엄마가 툭 치는 바람에 알았다.
“응? 나?”
하마터면 쥐고 있던 젓가락을 놓칠 정도였다. 그런 건한이를 돌아보며 아버지는 더욱 걱정스런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
“아, 아니요. 고민은 무슨. 헤헤, 어린애가 무슨.”
기껏 딴청을 부리며 건한이가 말했다.
“그런 거 같은데?”
“에에. 그런 거 없어요. 괜히 또 넘겨짚고 심문하려고? 치. 누가 모를 줄 알고?”
하면서 건한이가 부러 더 능청을 떨자, 아버지는 그냥 껄껄 웃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건한이는 요즘 더욱 난처해졌다. 성철이 형네를 몇 번 들락거리면서, 오히려 학교 애들은 그런 건한이를 두고 뭐라 쑥덕거리는 것 같았다. 좀처럼 말도 잘 안 붙이는 애들이 너 잘났다는 식으로 아예 비꼬는 것도 같고. 딱히 그렇다고 대놓고 누가 뭐라 그러는 건 아니지만, 건한이는 어쨌든 그런 아이들의 변화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민택이였다. 요 며칠 그나마 데면데면 말은 좀 하는 편이었는데, 며칠 전부터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보기만 하면 슬슬 피하는 것 같고. 순전히 나 혼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 건한이는 그렇게 생각하기 했다.
얼마 전부터 성철이 형은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너무 표 나게 장난을 걸었다. 언제부터 이랬나, 싶을 정도로 유독 건한이를 챙겼다. 그렇다고 애들이 왜 그럴까? 건한이는 그게 마음에 좀 걸렸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성철이 형이 뭐라 그래주면 오히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줄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괜히 비아냥거리는 것도 같고, 민택이는 더욱 퉁명스러워진 것도 같았다. 느낌이 그랬다. 건한이에게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 어려웠다. 아니, 자신이 어려웠다. 왜 수더분하게 굴지 못하는 건지……. 누구 탓을 할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참, 우리 저녁 먹고 목욕이나 갔다 올까?”
이런저런 생각에 공연히 젓가락질만 깔짝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뜬금없이 말했다. 건한이는 목욕탕에 가자는 소리에도 좋다, 싫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싫어, 나 안 가!” 하며 민이가 대신 끼어들어 입을 삐죽 내밀었다.
“큰 엉아도 가는데 넌 안 갈 거야? 그럼 아빠하고 큰 엉아만 콜라 사먹을 텐데?”
팩 돌아앉은 동생을 향해 엄마가 놀리듯 민이를 달랬다.
“그럼, 엄마도 가. 나, 엄마랑 갈래.” 하고 응석을 부리며 민이가 폴짝 뛰어 엄마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렸다.
“어휴, 이렇게 다 큰 애가 창피하게 엄마랑 여탕엘 가게? 넌 이제 아빠랑 같이 남탕엘 가야지.”
하지만 막내는 더욱 골난 사람처럼 삐쳐서 말했다.
“싫어. 아빤 아프게 밀어. 엄마랑 갈 거야.”
애기 짓을 하는 막내를 쳐다보다, 아빠는 숭늉으로 입을 헹구고 말했다.
“아! 그러지 말고 당신도 같이 가지? 목욕 간지 꽤 됐잖아?”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민이는 박수를 짝짝 치며 좋아라했다.
“됐어요. 우린 물 데워서 부엌에서 씻어도 되는 걸 뭘….” 하고 엄마는 손사래까지 치며 수저에 담겨 있던 밥을 동생의 입에 넣어주었다.
“에이, 엄마. 그러지 말고, 우리도 가자. 응? 갑자기 목욕 얘기 들으니까, 몸이 근질근질한 거 같다.” 누나가 보채듯 거들었다.
“얘가…! 목욕탕까지 갈 거 뭐 있어. 우린 그냥 부엌에서 씻으면 되지?”
“싫어, 이젠 추워. 그럼 엄만 혼자 씻어. 난 아빠랑 같이 목욕탕에 갔다 올래.” 하고 누나까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물 컵을 입에 대던 민이가 컥, 물을 삼키다 말고, “어? 누나 그럼 남탕에 따라가겠다고?” 하는 거였다. 덕분에 온 가족은 하하 웃었다. 그 걸로 다 같이 가는 게 결정이 났다.
상을 물리고, 안 가겠다던 엄마는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남자들 갈아입을 속옷과 때수건을 챙기네, 타월과 샴푸 따위를 챙기네 하면서. 누나는 이거 어디 있어? 저거 챙겨요? 하며 수선스레 마루를 오락가락 하였다.
건한이는 아버지를 따라 먼저 마당으로 나갔다. 민이는 급한 마음에 옷을 입히고 있는 엄마를 바동거리며 재촉했다.
“요즘도 민택이 하고 사이가 안 좋니?”
거뭇거뭇한 채마밭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난데없이 물었다. 건한인 깜짝 놀라서 딸꾹질이 나왔다. 어떻게 아셨을까? 내색을 않는다고 했는데도 아버지가 그렇게 묻는 게, 건한이는 신기하고 불안했다.
“아니, 뭐. 그냥….”
그러니 건한이는 할 말이 없었다.
“니가 먼저 화해하지 그래?”
“아냐, 그런 거. 민택이랑 누가 싸웠나?”
“그러니까! 그냥 니가 먼저 편하게 굴면 안 돼?”
“……?”
“곧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민택이가 꽤 명랑한 아이 같던데.”
건한이는 갑자기 명치끝이 찌릿, 하는 것처럼 뭔가가 울컥거렸다.
“알아.”
“아는데 왜 가만있어?”
“응?”
“알면, 니가 뭔가 해야지?”
“…….”
“……!”
잠시 그렇듯 아버지와 건한이는 채마밭만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언제 나섰는지 민이가 달려와 아버지에게 냉큼 안길 때까지.
“아빠, 어디로 가?”
앞서서 언덕을 내려가는 아버지를 향해 누나가 물었다.
“글쎄다. 요 위에 가리비 쪽으로 가면 있겠지, 뭐.”
아빠는 성큼성큼 걸으며 버스정류장을 향했다. 그 뒤를 엄마가 종종걸음을 치듯 따르고 있었고, 동생은 헤헤거리며 가족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산스러웠다.
“내년엔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래요? 강도사 시험이 아직 남았다면서요?”
“물론 그거 합격하면….”
두런두런 얘길 나누며 걷는 가족들 뒤에서 건한이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였다.
▣
아버지의 벗은 등은 유난히 굽어보였다. 막내는 물장난을 치고 있고, 건한이는 아버지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좀 더 세게 밀어.”
“벌써 빨간데?”
“괜찮아. 빡빡 좀 밀어봐.”
“헤헤. 난 책임 안 져?”
있는 힘껏 등을 밀면서도 건한이는 자꾸 마음이 걸렸다.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고 있던 것일까? 생각은 제멋대로 오락가락 했다.
성에가 낀 거울에 물을 뿌리고는 아버지가 건한이를 불렀다.
“건한아!”
“네?”
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부르면, 건한이는 어렵다.
“지낼 만 한 거지?”
“뭐, 뭐가?”
“여기 사는 거?”
“…….”
순간 건한이는 또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금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왜 자꾸 애기처럼 별 얘기 아닌데도 마음이 울컥거리는 걸까? 건한이는 더욱 힘을 주며 아버지 등을 밀었다.
친구가 없어서 힘든 건, 얼마든지 견딜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가족들이 웃으며 살 수 있다면, 더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건한이는 그게 다였다. 공연히 자기 때문에 부모님이 또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아빠가 한 말, 잘 생각해봐.”
“…….”
“니가 민택이한테 먼저 잘해주란 말. 다른 친구들한테도.”
“…….”
“알았어?”
“응. 근데요, 좀 이해가 안 가!”
“뭐가?”
“애들이… 왜 다를 나를 어려워하는지 모르겠어.”
“어려워 해?”
“응. 그런 거 같아요.”
“설마.”
“진짜야. 마을 어른들처럼 꼭 나를 손님 대하듯이 하는 걸?”
“흠….”
아버지는 다시 성에가 찬 거울에다 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서툴러서 그래. 다들, 서로를 받아들이기가 서툴러서.”
“……?”
“원래 그런 거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그만큼 외로워서 그런 거야!”
“뭘?”
“서로를…! 좋으면서도 두려운 거야.”
“…….”
“넌 안 그래?”
“모르겠어.”
“그런 거야. 사랑을 줘도 받을 수 없는 게, 그런 이유야. 예수님도 그랬잖아.”
“……?”
“자기가 태어난 고향인데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질 못했잖아.”
“아…….”
“그런 거처럼, 무서운 거겠지. 여기 애들 말이야.”
“뭐가?”
“기껏 정을 줬다가 또 금세 헤어질까봐.”
“……!”
“그럴수록 니가 확신을 줘.”
“어떻게?”
“친구라는 거! 난, 너희들과 친구라는 거!”
“치. 그렇게 말했는데도, 안되는데?”
“그게 말로 전달이 될까? 인내를 갖고, 계속 두드려야지. 닫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열리겠어? 친구란 마음으로 전달되는 거니까.”
“……!”
“다 똑같아. 그런 거야. 특히 여기 사람들은, 누구를 마음껏 받아들이며 산 사람들이 아니잖아. 아빠 말, 어렵니?”
“조금은. 하지만 알 것도 같아.”
“그래. 넌 이미 알고 있어. 충분히.”
“……!”
“…….”
“근데 그게 잘 안돼요.”
“흠… 안 되겠지.”
“……?”
“너 역시 활짝 열린 마음은 아니니까.”
“내가?”
“응. 아빠가 보기엔 그래.”
“피.”
“하하. 우리 건한인 그래도 잘 할 거야. 여태 잘했잖아.”
“……?”
“천천히 해. 급할 거 없어. 친구는 오래 가는 거지, 잠깐 가는 게 아니잖아. 어쩌면 평생을 같이 가야 하는 게 친군데… 안 그래?”
“응.”
“어쩌면 민택이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너처럼 불편하고 힘들 걸?”
“뭐가?”
“너랑 친구 되기가! 너처럼 계속 너를 살피면서 기회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건한이는 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럴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자신이 민택이 때문에 힘들고, 애들 때문에 서운하다는 생각은 했어도, 그 애들이나 자신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막상 아버지 말을 듣고 나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되면서 뭔가 엉킨 실타래가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애들도 나처럼, 나를 어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니?”
“…….”
아버지는 그대로 멈춰있는 건한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
“주민여러분! 지금 즉시 마을 앞, 버스정류장으로 모이세요. 하던 일 다 멈추시고, 지금 즉시 모이세요.”
난데없는 방송 소리에 서둘며 등교준비를 하던 건한이는 멈칫거렸다.
“엄마, 누구야?”
“이장님 같은데?”
“근데, 왜?”
“오늘 데모한다나봐. 마을 앞에서.”
“데모? 데모가 뭐야?”
“시위! 어휴, 얘. 넌 몰라도 돼. 학교 늦겠다. 신경 쓰지 말고 얼른 학교나 가. 얼른. 벌써 8시 반이야.”
엄마 말에 건한이도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막 신발을 신으려고 마루에 걸터앉는데, 아버지가 점퍼차림에 서둘러 나왔다.
“어머. 당신도 가려고요? 에이, 당신까지 뭘 나서요? 남들 이목도 있는데! 그리고 아까 보니까 벌써 경찰까지 쫙 깔렸던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네? 당신은 그냥 있어요.”
서둘러 신발을 신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엄마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더 나가봐야지.”
“꼭 가야 돼요?”
“어허. 무슨 소리야? 우린 이 마을 사람 아니야? 당신도 얼른 민이 데리고 따라 나서.”
“저도요?”
“그래. 이럴 땐 한 사람이라도 보태주는 게 돕는 거야. 얼른!”
아버지는 더욱 서둘면서 말했다. 건한이는 그런 아버지를 향해 쭈뼛거리듯이 물었다.
“아빠, 그럼 난?”
“……?”
“나도 이 마을 사람인데?”
“후후. 그럼. 너도 가야지. 가자, 여보 우리 먼저 가.”
아버지는 건한이의 가방을 대신 챙겨들고 문 밖으로 먼저 나섰다.
마을로 오르는 언덕길은 삼삼오오 짝을 이룬 마을사람들로 부산했다. 냄비, 부삽, 양동이, 부지깽이 할 것 없이 각자 하나씩 무언가를 챙겨들고 있었다. 뒤뚱거리며 어지럽게 내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건한이는 슬쩍 아버지에게 물었다.
“우리도 뭐 하나 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재미난 일에 끼어드는 것처럼, 건한이는 은근히 들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사람 저 사람과 목례를 하거나 직접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느라 바빴다. 그런 아버지의 표정은 왠지 어둡고 심각해보였다. 주일날 말고는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숫자보다 배 이상은 더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언덕을 내려서고 저만치 마을 앞 버스정류장을 보는 순간, 건한이는 저절로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벌써 도로를 점거한 채 일렬로 눕거나, 앉거나, 섰거나, 뒤뚱거리며 행진하거나… 도대체 저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한데 살았다가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 앞뒤로는 오도 가도 못하는 차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 사이에서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제야 긴장이 되는지, 건한이는 서둘러 아버지 곁으로 바짝 다가가 섰다.
“아빠, 왜 그러는 건데?”
대충, 무슨 마을 축제나 대청소 정도로만 여기고 있던 건한이는 덜컥, 겁부터 나서 물었다.
“데모하는 거야.”
“아이참. 데모가 뭐냐니까?”
“시위!”
“아니, 시위는 또 뭔데?”
“하하. 무섭니?”
“조금. 응? 아빠, 시위가 뭐냐니까?”
건한이는 점점 속이 타는 것처럼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힘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거야.”
“……?”
“거기, 버스정류장에 차들이 자꾸 서질 않는대. 분명히 여기도 사람이 사는 마을인데, 그냥 지나치고, 그냥 지나치고 하니까, 사람들이 참다못해 들고 일어난 거야.”
건한이는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누군가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그런 사람을 그냥 지나쳐버리던 버스를…….
아, 그 일이 처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천사의 편지를 떠올렸다. 마을 앞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서 삼거리에서 내리곤 한다던……. 아, 그것이 단지 창피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구나! 막상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건한인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경건한! 너도 왔냐?”
어른들 사이에 앉아 다 찌그러진 양은냄비로 길바닥을 두드리고 있던 경주가 아는 체를 했다. 그 옆으로 소영이, 주한이, 상식이도 보였다. 민택이는 더 위쪽에서, 어디서 났는지 호루라기를 빽빽 불어대고 있었다.
“야, 이리와. 너도 이거 두들길래?” 하며 주한이가 부삽을 하나 건네줬다. 건한이는 좀 어색해하면서 아이들 틈에 가 앉았다.
“서지도 않는 버스, 이리로 다니지 마라.”
“다니지 마라. 다니지 마라.”
“버스회사 사장은 무릎 굻고 사죄하라.”
“사죄하라. 사죄하라.”
“너희들만 사람이냐, 우리들도 사람이다.”
“사람이다. 사람이다.”
확성기에 대고 누군가 선창을 하면, 마을 사람들은 손에 쥔 걸로 바닥을 두드리며 목이 터져라 따라했다.
“경기도 군수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처음엔 쑥스럽고 어색하더니,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건한이도 덩달아 소리쳤다. 아이들은 운동회 응원이나 하듯이 깔깔거리며 어른들을 따라했다. 정복을 입은 경찰들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기가 죽어 아무 조치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호루라기만 빽빽 불어댈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만치 앞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그리로 몰려갔다. 건한이도 아이들과 함께 그리로 가보았다. 누군가 버스운사를 멱살잡이하고 있었다. 몇몇 어른들은 버스 유리창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서둘러 도망치고 있었다.
건한이는 그제야 사건의 심각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장난스럽게만 생각했는데,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멱살잡이를 당한 운전수는 하얗게 질려 맥도 못 추고 있었고, 경찰들이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뜯어 말리려 애를 썼다.
그 와중에 애기 손을 잡고 있던 마을 주민이 경찰들에게 밀려 둔덕 아래로 굴렀다. 그러자 사태는 점점 험악하게 변해갔다. 울부짖으며 경찰을 잡아채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걸 막으려고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도 있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겁에 질린 건한이는 아버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저만치에 있던 민택이가 건한이 쪽으로 다가와 무슨 일 때문인지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찻길을 점거하고 있는데도, 버스는 위협적으로 빵빵거리며 밀어붙이려고만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아예 버스 밑에 기어들어가 눕는 사람도 있는데, 운전사는 차를 건들거리며 되레 더 위협을 했다고 했다. 그쯤 되자 격앙된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닫힌 문을 강제로 열려고 하였고, 그런데도 운전사는 가소롭다는 듯 담배를 물고 실실 웃기만 하더라는 거였다.
“너 같으면 열 안 받겠냐? 이게 순전히 사람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민택인 건한이에게 자신이 본 것을 침을 튀겨가면서 설명을 했다. 건한이도 그런 민택이와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댔다.
▣
안녕?
예배당으로 오르는 언덕배기가 어느새 옷을 다 벗었구나. 곧 있으면 따뜻하고 보드라운 흰옷으로 갈아입겠지?
이곳에서 처음 맞는 가을이 어땠니? 지난번엔 많이 놀라지 않았니? 마을이 한 바탕 난리도 아니었지? 이 마을은 가끔, 그럴 수밖에 없단다.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으니까! 몸살을 앓듯 억지를 부려야 할 때도 있단다. 이해하겠니?
전에는 의정부 시외버스터미널을 점거한 적도 있단다. 노골적으로 승차를 거부하는 데야,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거였지. 누구도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아. 하지만 때론 어쩔 수 없는 때도 있는 거란다. 감기몸살을 앓는 것처럼 답답하고 서글픈 일이지만. 그거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몸 안에 있는 나쁜 기운을 밖으로 빼내는 몸살처럼, 우리는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걸?
네가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야. 너는 참 마음이 여리니까.
아, 지난 며칠은 또 시험 기간이었단다. 그래서 편지도 못쓰고, 진작 위로를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하지만 천사도 공부를 해야 상급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겠지?
그러는 동안 몇 번 너를 보았단다. 소나무가 서 있는 자리. 그 자리는 본래 내 자리란다. 나만의 자리. 혼자 자유로워지는 자리…. 계단 끝에 앉아 네 모습을 몇 번 보았더랬지. 도무지 기다려도 그 자릴 내어줄 생각은 않고, 너 혼자 생각의 물결에서 자유롭게 날고 있더구나.
아, 그런데 어쩌면 좋으니? 네 허락도 없이 너의 우체통을 열어보았단다. 네가 소나무 안쪽에 무언가를 넣거나 혹은 도로 꺼내어 읽는 걸 보고… 처음엔 그것이 네가 나무에게 건네는 선물인 줄 알았단다. 호기심도 생기고, 그래서 몰래 열어보았지 뭐니?
이처럼 아는 체를 해도 되는 건지…….
나 혼자 웃고, 나 혼자 울다가 더는 어쩌지 못하고 나 역시 고백을 하는 거란다. 이해하겠니? 용서하렴.
네 편지의 정당한 수취인이 되고 싶어. 막연한 대상이 아닌 실제 네 글의 천사로서, 정당한 수취인이 되고 싶어. 괜찮다면, 나는… 이번 주에 있을 천사게임에서는 너의 천사가 누구인지, 나는 나서지 않을 테다. 여전히 너의 천사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결코 나서지 않을 테다.
본래 우리는 모두 천사가 아니었을까? 낙원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천사가 아니었을까?
남을 위로한다는 게 곧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이번에야 알 수 있었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천사라는 걸. 모두가 서로에게 천사가 되어주며 살 수 있다면, 실제 우리는 낙원에서 추방당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이 곧 낙원이라는 걸.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부디 서로에게 천사가 되어 살 수 있다면, 지금 여기가 낙원이 된다는 걸.
네게 천사이면 내게도 천사인 걸. 내게 천사이면 네게도 천사인 걸. 다른 이에게 천사이면 자신에게도 천사인 걸. 자신에게 천사이면 다른 이에게도 천사인 걸.
우리는 서로에게 천사였구나.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니?
나는 끝까지 너의 천사란다. 네가 끝까지 나의 천사인 것처럼!
편지를 읽으면서 건한이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니라고 해도, 손은 저 혼자 이마를 짚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연신 주위를 살피며, 혹여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지 모를 천사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볼을 만졌다.
아, 그런 나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건한이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누가 자신의 행동을 다 보고 있었다는 데 따른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렇게 보아준 데 따른 고마움 때문이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혼자가 아니었다는 위로였다. 그런 응원이 마음 속 깊이 전해져오자 건한이는 더욱 든든하고 고마운 느낌마저 들었다.
천사의 기습적인 편지는 건한이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차피 돌아오는 토요일이면 누가 자신의 천사인지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누가 자신이 천사인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 천사가 끝까지 자신의 천사가 되어주겠다는 말이 고마웠다. 자신도 그에게 천사가 되고 있었다는 말이 더욱 고마웠다.
개다리소반을 끌어당겨 천사에게 답장을 쓸 생각이었다. 연필을 입에 물고, 어떻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막 첫 문장을 쓰려는데 밖에서 엄마가 건한이를 찾았다.
“건한아! 방에 있니?”
건한이는 잠시 생각을 미루고 대답했다.
“응, 왜?”
서둘러 편지를 가방에 넣었다.
“들어와. 건한이 집에 있다. 얘, 얼른 나와 봐. 민택이 왔다.”
건한이는 문을 열고 마루로 나오다, 민이 손을 잡고 마당에서 장난질을 하고 있는 민택이를 보았다.
“웬일이야?”
민택이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데모가 있던 날,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였지만, 그게 다였다.
“그냥… 심심해서, 놀러왔어.”
민택이는 어색하게 씩 웃으며 민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 말했다.
“무슨,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친구한테.”
엄마는 부러 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눈을 흘겼다.
“들어와, 어서. 너 오늘 여기서 놀다, 저녁 먹고 가라. 알았지? 사모님이 맛있는 콩나물밥 해줄게?”
엄마는 민택일 잡아끌듯 집안으로 들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건한이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워했다.
민택이는 마루에 앉아 멀뚱하니 사방만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불쑥 한다는 말이, “야, 여긴 그대로다.”였다.
“뭐가?”
“응? 여기만 오면 괜히 좋아.”
괜히 좋다는 말이, 건한이도 괜히 좋았다. 그래서 둘은 하하 웃었다.
“너 콩나물 밥 먹어봤어?”
상을 내려놓으며 엄마가 물었다.
“네? 히히. 아뇨.”
민택인 어색하게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민택이 엉아, 여기다 간장 넣고 썩썩 비벼서 먹는 거야.”
민이가 아는 체를 했다.
“오호, 그래? 어쩐지 그냥 먹으니까 비릿하더라. 헤헤.”
부러 너스레를 떨며 민택인 양념간장을 푹 퍼다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휴, 얘. 짜겠다.”
곁에 앉았던 엄마가 밥을 한 주걱 더 덜어주며 말했다. 그러자 민택인 엉덩일 들썩거리며, “어, 이따 더 먹을 건데요?” 하고 웃었다.
“후후. 얼마든지! 실컷 먹어.”
“헤헤. 네.”
“휴, 민택이 엉아 돼지.”
“하하.”
건한인 그런 민택이를 쳐다보며, 괜히 또 좋았다. 상을 물리고 잠시 또 머쓱해지려는 순간, 민택이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야, 우리 성철이 형네 놀러 갈래?”
끝. (원고지 50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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