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크랩] [시집] 꿈꿀 권리

전봉석 2006. 8. 6. 18:22
 

    

[시집] 꿈꿀 권리

 

 

 

 

 

 

 

 

 



덧정



그대 머물 수 있도록

내 마음 한 자락 비워 두었네

더불어 그대 고운 숨길 차지하려

벌써부터 나의 상처 도맡아 두고

지나온 시간 속의 숱하고 숱한

가래 끓는 소리에 귀 익혀 두었네

그런들 내 마음 비좁기만 하여

편치 못할 그대 자리 어쩌면 좋아

미련도 삭혀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그대 편히 고일 수 있다면

주저 않고 삭혀내고 솎아낼 것을

그대 머물기를 바라기엔

나의 마음 분절로 들어 찬 것 많아

절로 한숨 내차며 오후 맞는데

비워 둔 한 자락 마음으로

살그머니 깃들다 가시는 소낙비

채 마르지 않은 하늘가에

무지개로 서 계셨다

뽀얀 얼굴로 부끄러워하시니

저토록 수줍음 많으시니 어쩌면 좋아

마음이 가난하여 옹색한 얼굴로

낯 돌려 애써 눈물 감추고 그저

분주하기만 한 태도이지만

그대 머물러 주신다면

한량없는 덧정으로 두루 머무신다면

내 낯뜨거운 미련 채 솎아들진 않았어도

그대 고운 숨길에 단잠으로

離苦 질 터인데







*이고(離苦):[불]고통에서 벗어나는 일.











輓歌



일찍이 떠나온 고향

기억조차 없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면 노론리 420번지


그 산자락에는 어느

바람이 머물다 가곤 한다


田畓을 놓을 수 없어

賦役으로 몇 사람 다치게도 하고

붉은 완장으로 무장을 하기도 한 것이

모두 田畓 때문이었다


너나없이 바람의 변덕쯤으로

죄를 묻지 않았는데 나의

祖父는 헛돌다

술에 취해 누운

강원도 어느 산자락에서

그 값을 치르느라 헛돌다

헛돌다 가곤 하는데


田畓은 바람으로

연고 없이

찾곤 하는 고향















갈 수 없는 나라



예배당 아래,

아름드리 소나무가 섰다


그 늙은 소나무 엉덩판에

낡은 타이어를 동여매고

해가 지기까지

야구방망이로 후려쳐 댔다


날이 기울며 맹꽁이 배처럼

까맣게 부픈 이슬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가리 벌린 타이어 속에는

깨알같은 글자들이

안개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수취인 불명의 엽서가 된 것은

나의 느닷없는 이사 때문이 아니다


오후 한 때 곧추세우는 말들 너머에

그 너머 종 탑 뒤편으로 오소리 한 마리가

재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낡은 타이어 속에 저토록 많은 글자들이

숨어 있을 줄이야


서로가 확인할 수 없는 안부처럼

그동안 지내왔던 시간들이

잠깐 지나던 안개이거나

오소리이거나 전혀 다를 게 없었다








46번 국도



엇갈리듯 비껴 지나치는

굉음 속의 자동차들


100키로 이상

가라앉는 46번 국도에서


몇 번이고 뒤돌아

굽이치듯 낮게 이어지는

저 산과 들을 만나


산을 닮아

들을 가로지르는

검은 강줄기 위로


표면에 닿는 요란한 소리와 상관없이

과속방지 무인 카메라에 찍히는

지나온 순간들


현재는 언제나 지나온 것에 대해

만만찮은 과태료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속도에 비례하는 벌점과 함께 우리는 서로

엇갈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46번 국도에서

서로를 지나치며













7번 국도



길 따라 굽어 다만

길 굽어


그대는 자리하는가


들어앉은 마을

포구마다


동해를 중심으로

누웠다


언제나 푸른

저 초록의 언덕으로

우리는 닿지 못할

수평이었다


친숙하게 뒤채며 맴도는

갈매기처럼


점점이 찍어 놓는

포구…

포구…

포구…


그대 눈물


동해 따라 누워

여러 번 누워


돌아눕기만 하는

7번 국도에서







11월의 비



물고기의 비늘 같은

코발트빛 물줄기


역류하는 11월의 비는

고된 숨결이다


무어라 뻐끔대며

말 건네는

물고기의 입술이다


스며들지 않고

흘러가지도 못하는

11월의 비는


물고기의 언어다

소리 없는, 말

조용한 수다


자신을 등에 지고 떠나는

낙엽들의 행렬을 탓하지 않는다


11월의 비는

고단한 몸부림으로

조용하게 선다














기다림으로



기다림으로

마른 낙엽의 소리가 되어

잘게 부서지다

일렬로 떠도는


가늘게 떨다 허공으로 치오르기까지

노란 잔디의 헝클어진 모습을 보았다


아차, 덧없음에 깃들다 가는

우리 사랑의 뒤척임


바람결 그 마디마디에

기다림으로 멍든

저, 푸른 눈의 하늘을 보았다


들까불다 흩어지고

낙엽으로 날다 한 낮의 기록으로

짧은 역사가 되는 저 바람과

하늘과


입안 가득

베어 물린 그 기록의

숨가쁜 오후의 저 수선스러움을


등져 서 있는,

등 시린 나뭇가지들과 서로

일궈내는 애끓는 행위로

그러므로


기다림으로

기다리다 지쳐 제자리에서

기록이 되는

한낮 사라짐의 흔적으로









귀가연습



아무 때나 돌아가 등대고 누울 수 있는

귀가연습을 한다


반듯이 누워 일으켜 세우는 사람도 없이

넉넉한 무관심으로 떠도는 희망이 되고 싶다


위안보다 강한 피로는 없다


실명전환 하던 날,

나는 연습한다


더 이상 내보일 것 없는

희망은 두렵지 않다


낯설지 않은 흉내처럼

혼자 아슬아슬하다


물먹은 솜 같이

딛고 서면 삐쳐나는 미련 때문에

언제나 헛발질이다


돌아가 눕고 싶다


미련조차 희망을 갖게 하는

그 넉넉한 무관심에서

찔뚝거릴 필요조차 없는

본래의 내가 그립다










말 줄임표가 말없음표에게



말이 하고 싶어


자질구레한 것을

곰씹으며

하늘에 걸리는

반달로 뜨고 싶어


마른 입술

연신 혀끝으로 적시며

되돌 듯 감기는 반달처럼

네 기억이 아픈 거야


아주 오래 지켜온 순결

나는 이제 너를 범하고 싶어


한 기억으로

그 만큼 너에게 내주고 싶어

반달로 걸린

나머지 감춰진 곳을


알면서 번번이

말 줄임표가 말없음표에게

강요하고 내주던

바로 그 자리


너에 대한 그리움은

수박껍질 무늬처럼

가지런하지 않다


말없음으로

말 줄임표를 대신하면서

나는 너를 범하고 싶다










고목



마음 한복판 아주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기웃거리는 사람마다

실을 널고 합장하는가

저마다 이웃이고

가족이었다


볼썽사나운 꼬락서니하고는

귀찮다

도대체 나에게 바라는 게

사는 날 수만큼

늘어나는 것 같다


그저 고목이어도 좋겠다

적당히 틀어져 볼품 없어도

팔 벌려

하늘 어딘가를 향해

익숙하게 서 있을 수 있다면

어느 날 참새 날아와

굿판처럼 소란스럽게

놀다가도 좋겠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손가락이 긴 여자와 사랑하고 싶다



손가락이 긴 여자와

사랑하고 싶다


언제쯤 해서

지난 시간을 낱낱이 고백해도

전혀 괜찮은 사이가 되었을 때

무심하게

그 긴 손가락으로 나의

기억의 갓끈을

풀어줄 수 있는,

손가락이 긴 여자와 사랑하고 싶다


잇짚 쌓아 올린 기억의 지붕 너머

기억의 달빛이

볏짚 틈새로 번지는 동안

(손가락이 긴 여자는 신경질이 많다)

고백이 머무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마음껏 살갗에 닿는 순간을

망설일 줄 아는

팽팽한 긴장으로 느끼며

사랑하고 싶다


날이 차고

수면 위로 철새들 날아오르면

저만치

맑은 하늘에 줄긋는 가늘고

긴 기억을 따라

흔적도 없이

선명하게 지워지고 싶다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면서

사랑하고 싶다









낮달



낮달 떴다 저기

낮달 떴다


읽다가 덮어둔 책장처럼 언제든

뒤적이다 다시 덮어두어도

그 모습 참 만만하다


쓰다만 편지를 다시 읽으며

철지난 남방이며 면바지를 다림질하면서

언제고 풀썩 주저앉아도 반가울 것 같은

아 저 낮달 오늘도 혼자다


관심의 목적을 잃은 것일까?

노랗게 고여 있는 한낮부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핏기 없는 얼굴로 침묵하는가?


등에 엑스선 긋고 고속도로 비질하는

청소부처럼

아랑곳없이 흩어지며 나는

무수한 참새 떼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데


저 정신머리하곤,

무슨 생각으로 산에 앉았나?


거뭇거뭇 어둠이 찾아오는 줄도 모르고

바짝 마른 전신 줄에 걸려

천천히 수음하는 꼴이라니


한낮 참 쓰레하다







소래 포구



출렁이는 물결 따라

등살 벌겋다

어물전 근처 기웃대다 설쳐대고

오가는 사람마다

말참견 다 해주고

한시름 놓고 소주라도 한 잔 걸쳤는지

발그레한 얼굴

한량없기 그지없다


갯벌 위 분주하게 흩어지다

날다 도리질하고

조가비 껍질에 반짝여

제 눈 시려하더니

뱃전에 걸터앉아 깜빡 졸았나?

투덜대며 들어서던 협궤 열차는 간데 없는데

뒷걸음 쳐 철길 따라 누워

시치미 떼고 있는

저, 속도 좋아라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

처진 어깨마다

곧추 세워 다독이느라

연신 부산스럽고

제풀에 밀려 못내 서운했는지

응달에 가 한숨짓는

언제나 근심 어린 어머니 같다

갈매기 무심하게 날아드니

소래 포구 참 넉넉하다










설거지를 하다



개수대 물 속 요지경 세상

입 쩌억 벌리고 있는

고등어 대가리

저 눈깔 뽈록하니 나를 쏘아본다


뒤엉켜 똬리 틀 듯 쌓여 있는 그릇들 속에서

고등어 살점만 둥둥 떠다니고 있다


대가리로만 멀쩡하게 헤엄치다

제 살점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물에 반쯤 잠긴 시금치는

기름때를 벗고 흐늘대며 춤추는가 하면

토막난 무 조각들 층층이 서로 기대 있어

복잡하여라 뜯겨진 상처마다

처절한 비밀이 숨어 있다


다 살아가는 흔적이 다른 것이다


가소로운 것들 수세미로 빡빡 문지르다

무엇으로 먼저 닦아내야 하는지, 나는

흔적 없이 살다가고 싶다


서둘러 거품을 내고 설거지를 하다

수챗구멍에서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고등어의 눈길과 마주친다











빙어



눈을 떠보니 아찔하였다

거실 한가운데로 길이 나 있고

훤히 속 들여다보이는

빙어 떼가

몰려다니고 있었다


만나지 못하고 고여 있는 길,

길 위에서

황색 빙어가 입질하다

저수지처럼

작은 움직임조차

번거롭고 따분하였다


고정된 사람들 내 거실에 가득하다

우리는 너무

서로의 속을 드려다 보며 사는가 보다




















또 한 장의 마른 낙엽



가끔씩 아이들 손에 이끌려

가 앉았다 들어오곤 하는 놀이터에서

가을이 왔다 그랬는가 싶더니

작은 입자 우주 하나 툭 떨어져

기적이다 어김없이

아스라하게 날다 툭 떨어지는 한 날,


자판기 커피를 뽑듯이

가을이 간다


실로, 누런 낙엽 한 장 주워

책갈피 속 어디 다른 낙엽 위에

포개 넣는다

또 똑같은 가을이다


서른이 되었을 때 분명 내 인생은

뭔가 확신에 찬 모습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굳이 서둔 것은 아니지만

둘째를 두면서부터 자신이 없어졌다

그것은 이미 서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너무도 뻔한 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마른 생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서른 살의 내 아버지는 너무도

당당하게 나의 아버지이셨는데,

나는 초조해진다












대부도




(1)



바지락 칼국수 먹고 싶어서

이른 아침 서둘러 대부도 간다


바다에서 건져진 섬,

대부도


안개는 몸풀듯 일어나

달라붙는데


와이퍼를 3단에 놓고

천천히 다가가지만

저만치 물러서서

숨 고르고

자맥질하는

모래 안개 대부도


끼르르-- 끼르르--


안개 너머

대부도 운다





(2)



희뿌연 먼지 안고 몸 뒤척이다

대부도의 겨울 하늘은 낮기만 하다


덤프트럭 가로질러 헤쳐 놓는 섬

제방 쌓고 다리 놓아 건져 올린 섬

섬멍구럭 조여 질러 섬 가두고

한 섬 한 섬 내다버려 엮어 만든 섬


섬 아닌 섬에 앉아,

바지락 칼국수 먹고 오던 날


또 다시

모래 섞인 안개는

자맥질하고


















..*섬: 사면이 물로 둘러 쌓인 작은 육지

섬: 곡식을 담기 위하여 짚으로 엮어 만든 멱서리

섬멍구럭: 섬을 묶어서 친 얽이














다림질



너를 생각하면

구겨진 기억들이 아프다


밤마다 잘 다려진 어둠에서

유혹적인 것은 삐쳐 나온 나무들이다

석조 건물 뒤로 숨기나 하지

노란 가로등이 깔깔대도록

무심히 서 있는 꼬락서니하고는

어둠에 가려 제 몸 잃기까지


너에게서 온 마지막 편지는

아직 뜯지도 않았다

마지막인 것을 안다는 건

여느 망설임보다 잔인하다


10여 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그 망설임으로 네 사연을 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밤길보다 낯설다

너무 반듯한 어둠은 두렵지 않다


너로부터 나의 기억들이 구겨져 있다

몇 번을 더 사랑하느라 비로소

다림질을 배웠다고 생각하였는데

펴 본들 또다시 구겨지는 것을 보면

구겨진 것을 펴기 위해 나는

너를 기억하게 되었다










기다림으로



혀끝의 말

농익어 무겁다


어둠이 내려

촛불 밝힌 방안에서

말끝마다 어둠이

뒤챈다


지나고 보니,

상처 있는 곳에

그대 고인다


비근대는 촛불에 맞춰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어지러운 어둠 사이에

그대 함초롬하다


내 어찌 더

말을 이을까


그저 어둠을 태워

그대 만나지 않을까


기다리다

촛농으로 흐른다











날이 차가웠다



세상이 돌았던가

짊어지고 가야할 것들

아랑곳 않고


날이 저물면서

바람만 차가웠다

아마도 그때

사랑을 잃었다


먼 산 찍어내며 거리에 흩뿌리던

세상이

흔들렸다

빈 웃음만 순간으로

머문다 머물면서


가끔은

그때처럼 사랑하고 싶다






















겨울 풍경

-어느 특수학교에서



모로 기운 담벼락에 아이들은

담쟁이 풀로 기대어 서 있다


제각각 신발 끝에 바른 볕 와 닿았지만

젖멍울 선 겨울 바람 우울한 시선으로 날려가고

도로 휘감겨 도는 그 따스함이 무심하다


휠체어에 앉은 녀석은

도대체 허옇게 벌어진 입가의 맑은 침이

연신 마르지 않는 샘 같다


열린 대문 밖으로 사람들이 기웃댄다


누런 라면상자가 쌓여 있고

아이들은 어김없이 그림자처럼 구겨져

담벼락에 기대 있는 걸 보면

연말은 연말인가 보다


오빠 난 사진 찍히는 게 너무 싫어!

저들 서랍 어디에서 혹은 사무실 벽 어딘가에서

멀쩡하게 웃고 있을 내 모습이 처량 맞아

라고 하던 어느 아이의 말이

귀밑신경을 쑤신다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저 폼하고는 그래도 좀 웃어라

구두 끈 풀린 볕들 들락대며

까불락 대고


대문 밖 저 무심한 소리들

청맹과니 겨울 속에

쩌렁쩌렁 울린다





소녀



양계장 끼고 돌아 언덕배기 오르면

소녀의 집이었다


정방형 마당 건너

곧게 흔들리는

떡갈나무는 기억한다


이른 새벽이면

마을 이편에서 닭울음소리 얼얼하였다

삼거리상회까지 허옇게 뿌려지던

희뿌연 달빛 부스럼

씨부렁대며 돌아눕는

논두렁 따라

바스락대다 풀풀 날리는

구구한 흔적은

싸늘한 바람으로


새벽녘에 눈이 내렸다

그리고

한 시간째 버스가 오지 않았다


길 저편 세상에서

건너오지 못하고 있던 아침,

소녀는 교복을 입고 종종걸음 치다

새벽을 매암 돌다 흩어지던

눈꽃송이가 된다


그리고 투덜거리며 버스가 왔다


아침해가 배시시 얼굴을 내밀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은 이 모든 것이

순간으로 스치며 연속된다







가을 밤



어스름 날이 저물고

하나 둘씩 가로등 돌아누워

사람들 귀가를 서둘고


낮 동안 들고 다니던

오래된 편지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한 뼘이나 까맣게 물든

그 알 수 없는 허공 속으로

망설이던 걸음


다시 또 내 마음

검은 果肉의 흔적으로

미련에 두지나 않을지


멀 긴 참 먼 길이었습니다


이제야 몇 자 적어두고

간직하려는데


바람은 무겁게 땅을 구르고

가만있던 낙엽들 덩달아 들까부는

가을 밤

저 무심하던 외면에서


짐짓 꾀똥 마려운 것은

가을밤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입맞춤



젖버듬히 물러서는 산그늘에서


찝찌름한 것이

혀끝

파르르 떨며

달콤새콤해라


사시나무 샘 바르는 통에

봉긋한 무덤 위

털썩 주저앉는 달빛

애끓는다



























바퀴벌레



싱크대 모서리 타고

바퀴벌레 걸어간다


그 걸음이 어찌나 느리고

지루하던지 나는

꼼짝 할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승부를 내고 싶지만

저 지친 걸음걸이를 보라 비록

옮기기조차 힘든 다리들로

노려다 보는 데도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서늘한 對面도 과분하게

두 발로 걸음을 떼기조차 힘든 세상에서

번거로운 것이 어디 너만할까


손끝으로 번져나는

황갈색 푸른 기운

시간의 자국으로 남겨두자


발소리를 잃고 살아야 하는

나의 시간을 위해














저무는 하늘에서



저무는 하늘에서

한 때의 기억이

늙는다는 거다


더 가 봐야 또 같은 길이고

그제야 지나온 것이

한 땀은 소중한 법이다


서로는 기억의 통로를 따라

어둠으로 내리는 거다

어차피 달랠 수 없는 허기라면

어둠 속에 가만 두는 것도

누구 탓이 아니다


미련조차 고마운 것

저무는 하늘에서

하루살이 떼가 분주하게 떠 있는 이유도

다 그런 거다 그리움에 대한

짧은 기록의 몸짓인 거다


한 때의 기억이

그저 고마운 거다


저무는 하늘에서














사탕수수



손을 베기 쉬운

껍질을 까고

대롱을 씹는다


한 입 가득 침이 고이고

단맛을 느끼기도 전에

번지다 씹히고 뱉는

반복적인 리듬이 떫다


첫 맛을 못 잊고

다시 한 입 베어 물게 되는 것이고 보면

설마

우리 같다


서로를 안다는 건

손을 벨 각오를 해야 한다


조심스레

반복적인 리듬으로

떫다 떫어


















죄의식



돌아보지 마라

견디기 어려운 목마름이라

두고 온 것은 죄의식이다


자신의 몸이 사라지기 전

눈물이었다면

조금 늦게 만난 까닭이다


뺨을 스치고

천 년의 시간을 더 견디어

그대 안에서

소금 기둥으로 서 있는

나는 죄의식이다


마른 기억 푸석대고

참았다 한꺼번에 터뜨린

흐르다 마르지 않는

그대가 떠난 자리

혼자 남은 두려움이다



















未練



뒤돌아보지 않게

未練도

그대에게 미안하다


용서는 시작이다


사라져 가는 지난 시간의

소돔과 고모라

그 소용돌이 속에서

잔인한 물푸레나무여

부디 산기슭 습지에 묻혀

살 속에 고이

한낱 시간에 불과한 것으로

오늘은 소금 기둥이다





















어제



어제는,

하루종일 서 있다


나무도

빌딩도

그 곁을 부는 바람도

어제 곁에서는 모든 게 다

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오늘에 머무는가


너무 오래도록

한 곳에 서 있다보면

凝視의 목적을 잃고

희망은 休止다


길 잃은 바람에는

소금기 배 있다
















새벽 네 시



(1)


새벽 네 시

낙타가 걸어간다


내려놓을 수 없는

등짐을 지고


잠든 낙엽의

빛을

밟으며 낙타가 걷는다


한동안 모래 바람은 뜸하다

다시 불고 사흘 밤낮을

헤매 다닌 사막은

낯익은 길이다




(2)


젖은 눈길에 그대 눕는다

그대 곁에 누운 흐린 날


낙타는 혼자서 걷는다


두 눈을 떴다 감는 동안씩

그대가 밟힌다










사모곡



밤길마다 사뿐히

여미는 당신


산과 나무는

저 혼자 사랑한다


산에게 묻는다

나무더러

나무인 것을

다짐하느라 산이 되고


모자란 것은

언제나 당신


먼길 떠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밤길마다 사뿐히

당신 여민다


내 안 가득 여민다


















빗소리를 닮은



끊겼다 울려 다시 울려

빗물은 가년스러운 접합

기척도 없는 만남이다


넘나들기 쉼 없는

고대한 적 쓸쓸함이다

임의로 멈출 수 없어

셀 수도 없어

연연하지 않고 헤아리지 않고


그대 그리는 마음

빗소리를 닮았다


























마음



다다르면 머뭇거려

산허리 질끈 동여매는 안개

하염없는 구름

또는 합장(合掌)으로

청명한 하늘

고된 산행이 멀다


마음은 머뭇거려 버릴 것 숱해

흔들리는 그늘조차 곧추세우고

짧게 지나가는 여름 햇살에서

山寺의 동자 마냥

제풀에 겨운 合掌이 된다


게 눈 속의 연꽃 구경하러 가던 길


그대 눈 속

짙은 綠陰의 비밀



















지상의 房



누우면 허름한 헛간

방 한 칸 빌려

작업실로나 쓰다


마땅한 명분이 생각나거든

소망이라도 굳이 마다하지 않을 터

들라면 들고

내라면 내는 시늉으로

소박한 꿈이다


가난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족히 사랑할 수 있겠다


지상의 방 한 칸

너는 나의 방(房)























설거지



물방울 듯듯다

말끔하니 포개진 그릇


무엇이든 다시 담을 수 있어

부끄럽지 않은

그릇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步道 틈새

개미 행렬을 좇다 저들의 門이

활짝 핀 것을 보았다


단아하게 오므려 피어난 꽃

암사슴 똥구멍 같기도 하던


잰걸음 쳐 내빼고 내모는

무수한 점들 門의 경계에서

저들의 무게를 느꼈다


수챗구멍은 우리가 일궈낸

일용한 境界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또 다른

通路에서

門으로


씻어 둔 자리

투명한 門이 열리면

활짝 오므리는 門

들어간다









그래 늘 그래



배시시 잠에서 깨면

언제나

머리는 산발이다


이상도 하지 밤새

놀다가는 그대

한 번도 만날 수 없다


하얗게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

눈부시게 탐스러워

한 입 베물고 누가 버린 것일까

저만치 구르다 불규칙적으로

멈춰 서는 그 선연한 잇자국


누가 베물다 버린 것일까

색 바랜 잇자국

불규칙적인 구른 상처다


제가 딛고 서는 선연한 상처인지
















술에 취하고



친구 앞에서

뭔들 부끄러울 게 있는가

헛발 딛고 휘청거렸기로서니

흉이나 되려고


안겨도 보고

품안 가득

온기 따스하다


그러나 고백으로

목마르다


미처 갚지 못한 負債

이제 못 다한 고백으로

사는 데마다 골 깊다


미뤄 둔 탓에

빚이다

















찬바람 일고



찬바람 일고

감기처럼

그대 향한다


수화기 저편 반송되듯 돌아오는 묵음

달빛은 이별처럼 시리다

칭얼대지도 않으면서


그대 생각 들어 까치발로

머리맡까지 걸어오는 날선 바람


찬바람 일고 그대

감기처럼 왔다


며칠 이러다

쉬면 곧 낫겠지



















산책



하늘은 버려진 승용차 위에

꽃무늬로 박살이나 있었다

그 무수한 선들

내 얼굴은 잘게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외면하는 방향에서

아무렇게나 흩어지다 쌓이지도 못하고

저 혼자 맴돌면서 흩어졌다


마른기침을 하듯 나무들이

바람을 흔들고 있었다


몇 개의 낙엽은 눈발보다 멀리

날아가고 나의 시선 속에서

서성이다 박살나는 하늘에서

맴돌고 있었다 잘게 부서지며

점점이 선을 긋고 있었다



















섬이 있다

바다를 흐르는 바람에도


제물로 바쳐진 딸에게

입다는 무슨 말을 했을까?


아이를 낳고

검정 비닐봉지에 넣으며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섬은 있다


혼자 떠 있는 바다에도

가슴 위에 섬이 있다


섬 위로

바람이 분다


섬의 말을 듣고 싶다

그 생각이 머무는 곳에서










※ 입다: 이스라엘의 용장으로 승리의 약속으로

딸을 제물로 바친 인물







밥, 蒙學선생



밥은

蒙學선생


고무튜브 속 잘린 하체로

뱃가죽으로나 시장 통을 쓸며

기어가는 남자를 본다


때로 무심한 발들 사이에 엎드려

김 이는 이밥이나

달게 먹는 그의 모습에서

한 수저씩 떼어 넣는

입안 가득 처절한

삶을 엿볼 수 있다


밀어 넣어야 하는

채울 수 없는 허기























대숲



허리 모로 꺾어 누워버린다

대숲은 늘 그렇다


곧게 찌를 듯이 닿아 있는

늑장부리던 오판화의 먹장구름도

이파리조차 없이

낯붉히며 길게 드러눕는

그림자로 무성하여

대숲 사이

어둠으로 부산하여

조각난 하늘

언제 봐도 퀭하다


주뼛거리던 어깨

고스란히 비어있는 대숲의 좁은

빈 곳

떨구다 잠드는 곧은 잎새들






















고백



네가 옳다

그것이 내 마음이다


세상이

너 있어 세상이다


더 세상일 수 없는

세상이 세상일 수 있는

이유도


고백한다

그래서 너이다
























해바라기



나를 딛고

나만 바라보기를


멀고 어지러운 길

돌아 온 길 어디쯤에서

달이 기울면

아침은 마다할 수 없는 것


걸음으로 날개 짓 대신

저 새벽, 닭 울고 나면

당신의 시선 언제나 낯설다


나의 마당 비좁아

그 한 귀퉁이 담 너머

바라보고 서는

허리 고이 펴 딛고 설

당신의 마당으로나

그 시선 닿기까지

서야 하는 자리되어

머무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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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하현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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