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똥한 바지자락
성급하게 다이어리 속지를 갈아 끼우는 것으로, 나는 ‘회피’를 정당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홀가분할 거야 없겠지만, 지난 것에 대한 미련을 애써 부인하지 않으려는 데는 아무래도 표정관리가 필요하겠다. 간단없이 떠나보내는 것은 나의 오랜 특징이기도 하지만.
잊어버리기, 잊은 듯 태연한 척 하기, 절연한 설렘. 나는 나의 이런 특징을 굳이 마다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한 줄을 고스란히 여백으로 두고 있는 2005년도 새 달력에 무의식적으로 27, 28,… 31, 올해의 남은 날짜를 적어놓다가 순간 마음 저편이 울컥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그런 적이 있다. 고3 끝자락에 대한 기억이 송두리째 증발해버린 사건.
몇 해 전, 그맘때 사귀었던 사람으로부터 나를 찾는 이메일을 받았었다. 자신이 누구이고 그때 우리가 어땠는지, 그 사람은 이메일에 소상히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하얀 여백의 기억이 전부였다. 띄엄띄엄 어떤 이미지와 표상이 단서가 되어주기는 하였지만, ‘우리’에 대한 기억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몇 차례 그 사람을 만나면서 ‘아, 그랬었지’ 하는 정도는 기억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대놓고 그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나는 하얗게 지워진 그때의 기억을 더듬거려야 했다(앞서 밝혀두지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다. 고마움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새삼 어떤 감정을 키웠더라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경우에 대해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함으로, 그랬었어? 하고 묻기를 거듭하며, 마치 부러 그러는 사람처럼 시치미 떼고 능청을 떨듯. 그 시절 우리가 함께 새벽예배를 다녔었고 예비고사를 앞두고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를 했었으며 심지어 나의 친누나와 ‘쫄면’을 같이 먹기도 했다는… 나는 그런 기억에 대해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째서 이와 같은 기억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정말 기억이 안 나? 하고 묻는 그 사람에게 나는 무안할 정도로 도리질을 했었다. 이는 정신분석가 스콧 팩이 말한 ‘해리’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고통스런 감정을 의식으로부터 떨어버리려는 것.’
아마도 그 사람은 서운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부분기억상실(정확한 용어인지는 모르지만) 때문에 모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사람을 만날 때도 이 정도의 이해도 갖고 있지 못했다. 정작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었던 ‘어느 기억’, 도리어 그 사람보다 한 발 앞서 내게 주어졌던 ‘어느 충격’이 그 사람을 통해 상당한 위로를 받았던 게 사실이면서도.
그런데 어쩌자고 그 사람에 대한 기억까지 소멸된 것일까?
우리가 어떻게 헤어지게 된 것인지, 어느 정도로 친했던 사이인지, 간헐적으로 다시 만나면서 그 사람은 인내를 갖고 내게 설명해주었었다. 나는 그럴수록 염치없이 묻고 따지듯 확인을 거듭해야 했다.
어쨌든 좋은 친구로, 혹여 엉뚱한 관계로 발전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그 사람의 친절 앞에서 나는 미처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올해의 가장 큰 사건은 내 삶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어떻게 다시 다니게 된 ‘조직’(회사 혹은 협회라는 표현보다 나는 조직이라는 용어가 적절해 보인다)에서 스스로 이탈하고는, 자처해서 잔인한 여름을 보낸 셈이 되는데.
그즈음, 그 사람 뿐 아니라 내가 치근덕댈 수 있는 대상이란 대상에겐 모조리 칭얼대며, 누구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어 했던 시기였다(유아적의존성).
난데없이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친구의 전화를 받고 퍽, 울음을 터뜨렸던 일처럼. 했던 말 또 하듯 지루하게 보채며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냥 ‘헛손질’만 했던 시기.
그 사람은 내게, ‘그대가 나를 기억 못할 때 이미 그대는 내게 아무런 감동도 아니었다.’는 담백한 메일을 보내왔고(내가 어떻게 징징거렸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나는 그와 같은 메일에 토라져서 ‘굳이 뭘 바란 건 없었다…’며, 야멸치게 단절을 약속했다.
또한 누구는 그런 나의 상태가 겁이 났던지(말할 수 없음) 흐지부지 연락을 두절하기도 했고 누구는 애써 바쁜 척, 누구는 부러 싱거운 척, 저마다 나에 대한 싫증을 달리 표현했었다.
그랬었다. 올 여름은 내게 그렇게 지나갔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은 여름 동안 나는 낚시에 미쳐있었다. 땡볕 아래에 앉아 미동도 않는 찌를 바라보다 뜬금없이 퍽, 쏟아지는 눈물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정작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 따로 <격리>해둔 채, 나는 그것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올 여름, 내가 퍼부었던 낚시에 대한 열정은 다분히 <전치>고, 엉뚱한 화풀이였다. 마치 생을 종치듯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낚시터를 전전긍긍하면서(돌이켜보면 이 또한 '대행'이다, 싶지만).
새삼 다 지난 일을 끄집어내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는 나는 나를 치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하는, 심보 고약한 어투로 나는 여전히 나를 먼저 두둔한다.
한데 막상 한 주를 남겨놓고 뭐에 미련이 더 남았는지 무의식적으로 새 다이어리에 올해의 남은 날짜를 날름 적어놓은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회피>에 능한 사람이란 걸 인정한다. 소위 학창시절에는 ‘땡땡이’가 능사였고, 그래서 무작정 학교 담장을 넘었었다. 급기야 가출도 해봤고, 졸업 후에는 애써 들어간 출판사를 2년 새 서너 곳이나 옮겨 다니기도 했었다. 그런 내게 ‘글짓기그룹지도’는 탁월한 직업이 되어주었고, 언제든 자유로울 수 있다는 조건이 나를 편하게 하는 <격리>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하다가 지난해에 다시 ‘조직’에 편입한 것은, 나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되어준 셈이 된다. 아울러 올 여름의 실직과 오늘의 ‘글방’은 그래서 더욱 넉넉하다(그럴 리 없다는 걸, 애써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 그러는 동안 곁에 있던 ‘좋은 사람’을 몇이나 잃은 것인가! 문득 저들을 떠올리면, 하나마나한 소리겠지만 용서를 빌고 싶다. 그런들… 나를 설득시킬 자신도 없으면서. 미련은 진흙을 발에 묻히고 걸어야 하는 낭패감과 같다.
이는 유아기 적, (뒤늦게 신학에 심취한 아버지와 함께 교회 일에 바빴던)‘엄마에 대한 결핍’에서 오는 허기가 분명하다. 혹은 친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빨리 늙어서 노인이 되고 싶다’는 환상을 불러오는 것과도 같다.
입버릇처럼 ‘육시랄놈’, ‘웬수같은놈’으로 나를 천덕꾸러기 대하듯 했던 조모에 대한 기억. 용한 의원이 있다거나, 어느 절에 신통한 보살이 산다거나 하면 짧게는 며칠씩 혹은 몇 개월씩 나를 데리고 그 곳에서 생활하던 조모. 그녀에 대한 부채감이 남다른 환상으로 동일시되어 어릴 적부터 노인이길 꿈꾸게 하였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단서는 해묵은 사진첩에서 찾을 수 있다. 고작 초등학생인 아이가 조숙한 표정을 짓고 웃는다던가, 중고등학생 때의 어울리지도 않는 ‘기지바지’와 어설픈 ‘정장’차림, 혹은 20대를 40대 복장으로 ‘노인흉내’를 내며 지냈던 일 등등.
나의 ‘회피’는 노인과 ‘동일시’되어 스스로를 <상징화>하고 <객관화>한다. 이는 전형적인 ‘반동현상’으로 무의식에 의한 방어기제 때문으로 풀이된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도 점점이 기억해내면서 어느 부분(다 자란 뒤의 기억)에서는 망각을 자처하여 백지와 다름없는 기억을 안타까워하면서.
문득, 2005년도 다이어리 속지를 갈아 끼우며… ‘깡똥한 바지자락’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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