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혀 끝의 말(言),
농익어 무겁다
촛불 속에 흔들리는
방(房),
말 끝에 고이는
어둠,
상처난 곳에 그대 고인다
비근대는 촛불에 맞추어
했던 말 또 하고…
밤새 어둠을 태우다 보면
그대 만나지 않을까
.........................
노란 항아리
(자정이 넘어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노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밑도 없이 까마득한
심혈(深穴),
하나 하나 알갱이로 떠도는
깊은 숨결
나의 생각도
말(言)도
꿈도
(그리고 창을 열면)
분절(分節)되어 날리는
머리, 가슴, 두 눈 그리고
그리고 그리움까지
이대로 허공이었으면
차갑게 볼을 타고 흐르는
허공이었으면
(눈을 감는다)
어둠 속으로
(핸들을 놓고)
가벼운 한숨
허공은 닿을 곳이 없다
기억할 것도
만지고 느낄 것도 없는,
나로만 떠도는
노란 항아리
.......................
애읍
잠시 머물다 가 주었으면
이우고 가야할 길
을 마다 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 차
이내 가뿐 단내로
잉걸불에 데인 가슴이고 보니
도두고 바라보아야 할
그대인 것은 알지만
내 일찍이
어리보기임을 알기에
한 눈에 접혀질러
끌탕이 될 줄이야
벼룻길에서나 그대 얼굴 떠올라
다지르듯 내 갈 길 재촉한대도
잠시만 내 안에 머물도록
그대 스스로 허락해 주었으면,
벋서 다그치는 마음을 어찌하라는 것
이 아니라
그러려니 놓아만 두어
한참을 참아왔던 애읍을
토할 수 있게만 해 주었으면,
잠시 동안
머물다가
..........................
금요일의 비
외길로 뻗은 일상중에
치장을 서두는 공회전의
하루
오로지, 하루
금요일
은 내 여인처럼 운다
창 밖 너머
물안개가 번지고 있듯
스스럼없이 볼에 감기는
그녀의 고른 숨소리
를 듣는다
"엉덩이가 참 이뻐!"
시트로 온몸을 감춘
등 뒤의 금요일,
젖꼭지가 선다
목을 감는 혀,
혓바늘이 돋았다
입술이 차다
그리고 강가,
희뿌연 안개를 걷어올리면
마을이 뜬다
길따란 숲으로
경운기가 지나가는
한복판의 시간, 금요일
......
적금을 깨고
번호표를 뽑아 순번을 기다리는
年利 14.5%의 하루
과장된 고백이 이어지면
체위를 바꾸어야 한다
일 주일 단위의
原罪
창 밖으로,
금요일의 비
내 여인처럼 운다
낙서처럼
꿈꾸는 逸脫
새로운 자세로 누워있는
만만한 내 여인의 단잠
디프테리아균,
금요일의 아리아
......................
물왕저수지
어디에 멈춘 것일까?
흔들리는 찌에는
과거가 있다
멈춘 돌
멈춘 波長
하늘 어디
사사로운 점
어디로 흐르다 멈춘 것일까?
손끝의 기다림은
흐르지 못한 이유와 닿았다
........................
해심(垓心)
-어느 절에서
기와 지붕 위로
성큼성큼 걷는 솔나무는
얼크러진 기왓고랑 타고
툭 툭 떨어지는 그리움이다
맨 마룻바닥에 엎쳐 뵈는
일렬로 서는 먼지는
정지되어 닿을 수 없는
엇턱 이음 틈새의 율동이다
대갈빼기 노란 동자승은
제깃물 치는 소리에 해쓱하다
풍경따라 번지는 낯빛
마당밭의 노을이 너무 고와
법당 가운데 부처는
해죽거리고만 앉았다
너를 두고
나를 두고
해심(垓心)으로
............................
그대의 12월
12월의 하늘은
나무 밖으로 나온다
송곳니가 이쁜 12월의 하늘은
다프네(Daphne)의 펄럭이는 옷깃으로
언나처럼 빈가지만 흔들고
生의 팡텔레이몽(St. Panteleimon)에서
그대를 만난다
힘에 겨운 곱사등이처럼
모로 누운 12월의 하늘은
그대를 얼싸 안고 덩싱덩실 춤을 추고 있
는
저 다프네를 떠오르게 한다
屈膝치 마소서
아, 나의 聖者여
生의 팡텔레이몽에서
그대의 12월은 춤을 추고 있다
*언나: 어린아이.
*다프네(Daphne):그리스 신화의 巫女,
아폴로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고 월계수가 됨.
*팡텔레이몽(St. Panteleimon):러시아 정교회의
최대 수도원.
*굴슬屈膝:무릎을 꿇고 절을 함.
..................................
계단에 눕다
높낮이가 다른 접혀진 하늘
자춤발이 비둘기는
검댕이 육교 위의
빗디뎌 미끄러운 그늘에 선다
손 재어논 채 가년스러워
슴벅이며 눈길 주면
가만히 내 쉰 한숨만 제풀에 겨운지
맞받이 거리 재고 등 보이며
계단에 눕다
머물다 잦는 오후에서
허방 허방 딛는 걸음
어긴 데서 시작되어
허수히 지는 하루해로
남은 반 마장 더 채운다 해서 손 끝에나 닿
을 리 없다
내려서자니
뻗대고 선 무수한 선들
어깃장으로 계단에 눕다
.........................
두 팔로 걷는 나무
두 팔로 걷는 나무가 있었다
무거운 체중을 지탱하느라
연신 삐그덕 대면서도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좀체 하염없던,
두 팔로 걷는 나무가 있었다
책상 위 골 깊은 삼팔선을 그어놓고도
마루 밑에 지우개가 떨어질 때면
꺼내라며 쥐어주던, 그 애의 두 팔
한 손을 이마에 대고
먼 하늘을 쳐다보다 슬그머니 내밀던,
두 팔로 걷는 나무가 있었다
지워야 할 것이 늘어나는 나이가 되어서야
떨구고도 꺼내지 못하는 것이 많아지면서야
여전히 바라보아야 할 하늘을 찾지 못한 것
이 부끄럽기만 하다
................................
겨울비가 듣는 꽃집
-열매가 달린 꽃
딸애 생일 선물을 사려고
겨울비가 듣는 꽃집에 갔습니다
조막만한 항아리에 담긴 해마리아가
진갈색의 우단 잎사귀를 수줍게 틀고 있었습
니다
창 밖으로는
세찬 겨울비가 듣고
텁텁한 실내 온기로
금세 달아나는 암호(暗號),
언 하늘이 풀어지고 있었습니다
뭘 갖고 싶니?
-꽃
무슨 꽃?
-열매가 달린 꽃
그리움이 다니는 길을 피해
당신이 욕심내던 꽃,
겨울비가 듣는 꽃집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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