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크랩] [수필] 덧정에 대한 반성

전봉석 2006. 8. 6. 18:23
 

덧정에 대한 반성




  반성


  여기 지금, 내가 들어앉아 있는 공간은 채 두 평이 넘지 않는다. 겨울철이라 글방 사이의 문을 닫아둔 때문이다. 그래봐야 도합 십여 평 정도에 지나지 않는 곳이지만, 나는 여기서 하루를 보낸다. 때론 이것이 독방에 수감돼 있는 수감자 같기도 하다. 일체의 출입도 없이 마침하니 쳐진 쇠창살 안에서. 외롭지 않니? 하고 누가 물으면 나는 과장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평일에는 띄엄띄엄 수업이 있고 주말에는 연달아 수업이 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다. 눈이 내려도 어울리겠다. 나는 천천히 운전을 했다. 본래부터 바쁠 게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골방에 들어서면 오전 10시 남짓. 창문을 열고 커피포트에 전원을 켠다. 컴퓨터를 연결하고 메일을 확인한다. 따로 걸러진 스팸메일까지 확인하고 나면 담배 생각이 난다.

  한글파일을 불러 쓰고 있던 글을 다시 읽는다. 점심때까지는 늘 이 짓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쉽지가 않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지겹고 답답하다. 김훈의 현의노래, 김형경의 성에, 그리고 다시 자전거여행1, 2를 읽은 까닭이다.


  쓰던 글은 머릿속을 맴돈다. 줄거리와 이야기 구성이 저 혼자 보챈다. 현실은 답답하다. 아, 이곳이 도피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한 달이 조금 넘으면서부터다. 어디에 글을 보낸답시고 설레발을 친 것도 ‘독방’이 싫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래봐야 11시 12시가 넘도록 글방에 남아 한 일이라곤 지난 글을 손질하는 것뿐이었다. 내키지 않아 거반은 도로 처박아두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밖에 없는 일이 글쓰기라는 게 절망적이다. 흥에 겨워해도 모자랄 판에, 때론 혼자 이러고 있는 게 지겹다. 사회성 결여니 폐쇄주의자니 하는 따위의 말엔 이제 관심도 없다. 현실이 어쩌니 하면서 구질구질한 소릴 하고 싶지 않다. 그걸 긍정적으로 희석해 나름의 위안으로 삼을 생각도 없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게 글쓰기밖에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얼마 전 모 시에서 벌인 무슨 대회에 원고를 냈다. 덕분에 상을 받았고 돈도 받았다. 나는 그 자리에 가지 않았고 주민등록증을 들려 아내를 대신 보냈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하고 아이들에게 주접만 떠는 꼴이 됐다. 나는 돈 되는 곳에 원고를 보냈다. 때론 아내 이름으로, 때론 내 아이 이름으로. 돈이 입금되거나 상품권이 우송됐다. 또 어디 없나, 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고상한 척, 아이들을 가르칠 땐 부끄럽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거지 뭐, 하고 나를 위로하지만 부끄러운 마음은 근본의 척도가 되어 나를 찌른다.


  “선생님, 장 당 얼마씩으로 다른 데선 다 써준다는데요?”

  어느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무슨 큰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됐다고, 입상이라도 하면 특기생으로 어떻게 좀… 어쩌고 하는 소리를 덧붙였다.

  “수업시간에 원고를 써오면 제가 봐주겠습니다.”

  “아니요, 선생님이 써주면 안 될까요?”

라며, 그 엄마는 아예 노골적으로 얼마를 제시했다. 대충 두 팀 수업료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고작 여남은 장에 불과한 글에 비하면 섭섭한 액수는 아니었다. 다들 그런다는데, 하긴 누구는 으레 상장은 아이가 갖고 상금은 선생이 갖는다는데…….


  망설임은 언제나 잔인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양심이 먼저 안 까닭이었다. 하면, 여태 해온 내 꼴은 무언가? 아내 이름으로 어디에 원고를 보내서 상품권을 받을 땐 몰랐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가르치는 자였다.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는 동안 나의 됨됨이는 싫든 좋든 어떤 식으로든 그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신학을 그만둔 까닭도 이에 있었다. 하물며 누군가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내 아이를 나무랄 때도 어김없이 이에 충돌하는 나로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는 반성이다. 내 글을 싸구려로 전락시킨 데 따른 반성이고 성찰도 없이 상금을 타먹기 위해 글을 쓴 것에 대한 반성이다.  


  이번 주엔 <수능부정에 따른 원인분석>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글을 쓰게 하고선, 나는 골방에 앉아 반성문을 쓴다.

  





  덧정


  새삼 이 말이 가슴을 울린다. 언제 써두었는지도 까마득한 시 한 편,

 

  그대 머물 수 있도록

  내 마음 한 자락 비워두었네

  더불어 그대 고운 숨길 차지하려

  벌써부터 나의 상처 도맡아 두고

  지나온 시간 속의 숱하고 숱한

  가래 끓는 소리에 귀 익혀두었네

  그런들 내 마음 비좁기만 하여

  편치 못할 그대 자리 어쩌면 좋아

  미련도 삭혀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그대 편히 고일 수 있다면

  주저 않고 삭혀내고 솎아낼 것을

  그대 머물기를 바라기엔

  나의 마음 분절로 들어 찬 것 많아

  절로 한숨 내차며 오후 맞는데

  비워 둔 한 자락 마음으로

  살그머니 깃들다 가시는 소낙비

  채 마르지 않은 하늘가에

  무지개로 서 계셨다

  뽀얀 얼굴로 부끄러워하시니

  저토록 수줍음 많으시니 어쩌면 좋아

  마음이 가난하여 옹색한 얼굴로

  낯 돌려 애써 눈물 감추고 그저

  분주하기만 한 태도이지만

  그대 머물러 주신다면

  한량없는 덧정으로 두루 머무신다면

  내 낯 뜨거운 미련 채 솎아들진 않았어도

  그대 고운 숨길에 단잠으로

  이고離苦 질 터인데


  *이고(離苦):[불]고통에서 벗어나는 일.


을 다시 읽은 건, 누가 보내온 메일 때문이었다. 고맙기보다 슬픈 감정이 먼저 든 편지였다. 덧정이란 더불어 생겨나는 마음으로, 나는 이를 사랑보다 귀히 여긴다.

   

  ‘나는 나의 과거를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해하는 순간 용서할 테고, 누군가에게 함께 있어달라며 조르게 될지도 모르니까. 모름지기 죄는 짓고 벌은 받는 것이니, 내 유일한 도덕은 고독이다. 서울에서 절두산 순교기념관의 이정표와 마주칠 적마다 나는 생각했다. 희생은 얼마나 가증스런 욕망인가.’ 이응준, [어둠에 갇혀 너를 생각하기] 중에서<문학동네 2004, 가을 호 수록>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 보잘것없는 내가 누군가에겐 첫사랑의 대상이기도 했을 테고, 선생이기도 할 테고, 아버지이기도 할 테고, 남자이기도 할 테고……. 왜 이런 온갖 것이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일까?


  며칠 전 나는 한 친구에게 말했다.

  “나, 연애하고 싶다.”

하자 그 친구는 툭, 던지듯 한 마디 했다.

  “위로가 필요해?”


  어차피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인데도 고독이 싫다. 죄는 모면하고 싶고 벌은 회피하고 싶다. 받을 수 있다면 이해를 구하고 싶다. 어쨌든 내가 덜 미친 까닭이다. 늘 잔고가 부족한 통장처럼. 허겁지겁 채워도 모자라기만 하는, 생에 지불해야 하는 값이 너무 혹독하다. 턱턱, 인터넷뱅킹에서 자동이체를 하듯 내 생의 모자란 값을 지불하며 살고 싶다. 부디 덧정으로 내 생의 부채까지 사랑하며 살고 싶다.

   

출처 : 하현글방
글쓴이 : 하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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