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은 시간의 사랑으로
어쩌면 우리는 후회하며 사는 것으로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
다고 확신하면서, 오늘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인지
도 모르고, 남은 시간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나온
후회를 간직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주간, 나는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는 생
각으로 자꾸 새로운 내일을 계획하였다. 내일을, 내
일의 또 내일을….
그럼으로 해서 마치 다시는 후회하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허비하고 있는 꼴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 해 봄, 사랑한다고 고백했어야 한다는, 후회…
진지한 삶을 위해 결국 나는 혼자였어야 한다는, 후
회…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좀더 솔직했어야 한다는…
그 애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내 길을 갔어야 한다는…
후회. 후회. 후회.
아, 이 후회 투성이!
그러기엔 어느새 인생의 반을 걸어왔다. 물론 지
금의 내 나이에 어줍잖게 할 소린 아니라는 걸 안다.
고작 반인데. 아직도 반이나 남았는데.
어릴 적, 나는 진지한 종교인이 되고 싶었다.
무조건, 그랬다. 누구의 강요도 없지만, 그래야만
할 거 같았다. 내가 이 땅에 있게 된 이유, 그 실존
적 이유가 곧 내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할 거 같았던
확신이 있었다.
그러한 나의 꿈은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대학을 앞
두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네 꿈이
뭐냐?"고 누군가 묻기라도 하면, 나는 단박에 "목사
요!"라고 대답했다. "왜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내가 있는 이유'니까요!"라고, 재
차 확신했다.
그러나 나의 꿈은, 어느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산
산조각이 났다. 고아였고, 전신마비였고, 여기 저기
버려지듯 복지시설을 전전긍긍 하며 떠돌다, 우연히
내가 찾아 가곤 하던 어느 특수 학교에서 만났을 뿐
인, 아주 흔하디 흔한 불쌍한 아이였다.
"오빠…!" 그 아이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간신히
제 목 하나 가눌뿐인 그 아이에게서 소리가 나오고
그 소리가 언어 체계를 갖춰 나를 행해 "오빠…" 라
고 부르던, 그것은 신비였다. 세상에 태어나 주어진
자신의 몸 가운데서 고작 사람답게 활용할 수 있었
던 것은, 언어뿐이었다. 그것도 부르르 떠는 살갗의
경련으로 한껏 일그러진 표정이 되고서야 간신히 낼
수 있는 소리, "오빠…!"였다.
나는 매주 토요일, 그 애의 "오빠…"를 듣기 위해
가느다란 그 애의 손을 잡고 한참이고 기다리곤 했
었다.
그런데, 그 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보모 선생으로
부터 전해 듣던 날, 비로소 나는 그 애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진지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애도 사람이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러기까지 나는 그 애를 어쩌면 '신기한 그 무엇'
쯤으로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애처로움으로 위장
한 강한 호기심….
순간, 그 애의 부재는 나의 꿈을 흩어 놓았다. 나
를 있게 하는, 그 '어떤 이유'에게 있어 그 애의 존
재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강한 의문이 생겼다. 고작
그 애는 아홉 살이었고, 나는 그 애보다 열 살이 많
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제 인생의 반을 걷고서야 신
학을 공부한다. 그 또한 신기한 것이, 그토록 멀리
도망치려 했던 나의 꿈으로부터 다시 발목을 잡히게
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어느 통신에서의 우연한 만남. 그 분은 내게 신학
을 통해 그간 미뤄왔던 꿈을 찾도록 하였다. 그 분
의 진지한 삶과 그에 따른 봉사활동, 어쩌면 나로서
는 애써 외면하던 방향으로 그 분이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도, 극구 목사가 되려는 건 아니다;라는
것을 자신에게 되뇌이며, 역사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나는 나의 됨됨이를 의심하기 때문이
다.
'역사신학'은 참 그 자체로 상징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생의 족적이 아닌가. 신학은
무엇인가? 신에 대한 강한 탐구의 족적이 아닌가.
그보다 앞서 내 나이 열 살 하고 너댓쯤. 나는 또
한 무리의 엉뚱한 사람들을 만났다. 저들을 흔히 나
환자라고 불렀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진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외따로이 무리지어 살던 곳이
었다.
그것은 순전히 내 아버지의 강한 신념, 신을 향한
충정어린 자세 때문이었다. 당신의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에는 상관할 바 없이, 신념
이 갖는 투철한 헌신에 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도, 여느 또래의 아이들이
걷고 있는 사춘기라는 늪지대를 지나야 했고, 한 소
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렇고 그런 첫사랑을 앓아
야 했다. 누군들 사춘기가 절절하지 않겠나만.
며칠 전, 나는 아내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2년은 역사신학을, 그리고 또 2년은 사회
복지를, 그런 뒤 정식으로 3년간의 목회신학을 공부
하겠다고 했다.
그랬을 때 우리 아이들은 어느 정도 어른이 되어
있을 테고 그때쯤 해서 목사가 되든가, 복지사가 되
든가. 어쨌든 나는 그제서야 '저들'과 함께 살고 싶
다;는 뜻을 말했다.
그것은…
나는 나의 강한 신념만으로, 아이들에게 아이들의
지향하는 바를 억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강한 신념이란 것에 대한 확신
이 불충분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억압받았던 그래서 여전히 억압받고 있는 나의
'지향하는 것'에 대한 확신처럼 내 아이들에게도 그
와 유사한 성질의 억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
다.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을 하든.
자신들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
그러나 이것은 나의 불충분한 신념에 대한 궁색한
변명인 게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그래야 할 거 같
은'에서, '그래야 하는' 에 대한 선물로, 내 아이들
이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얼른 내 나이가 마흔 아니면 쉰 쯤으로 껑충 뛰었
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면서.
이렇게 한 주간을 전혀 엉뚱하리만치 무거운 주제
의 몽상에 시달려야 했던 것은…….
어느 친구의 너무도 무거운 일상의 것 때문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축복이다;는 나의
확신을 송두리채 뒤흔들기에 충분한, 친구의 고통에
대해, 나는 보다 못해 쓴소리를 했다.
이제 그만, 그쯤 했으면 됐다. 어찌 칼날을 쥐고
손이 베지 않기를 바랄 것이며, 숯불을 가슴에 안고
옷이 타지 않기를 바라겠냐….
나의 되먹잖은 충고는 분명 그 친구에게 깊은 상
처가 됐을 것이다. 어찌 그 친군들 모를까.
사랑한다는 것이 어디 제 의지대로 되는 것이던가.
물 불을 가릴 줄 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닌지
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감내 해야
하는 데 따른 베이는 쓰라림과 데이는 고통을 누군
들 마다하고 싶지 않을까만….
괜한 소리를 한 것인지.
이쯤 해서, 나는 고상한 사랑을 꿈꾸는 것으로 그
간의 내 사랑의 후회를 대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
른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리고, 남은 시간의 사랑으로 대신하려는.
하현.
출처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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