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을 찾는 늑대
-아벨 서점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나는 아벨 서점에 간다.
동인천 어느 골목길에 접어들면 줄지어 서 있는
헌 책방들을 만날 수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짐짓 줄지어 서 있던 먼지들이 한꺼번에 코끝을
간지럽게 한다. 낯익은 주인 여자는 가벼운 눈인
사를 건네고, 그녀의 머리 한 뼘 위로는 아슬아슬
하게 꽂힌 무수한 책들이 먼지들과 함께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부분을 놓
고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결코 아벨 서점은
반듯하지 않다.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
으면, 언제 책 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지 모
르는, 위태로운 정렬이 아슬아슬하다.
"딱히, 찾으시는 게 있나요?"
사뭇 뒷짐지고 서성이던 나를 어색해 하며, 여
자는 말을 건넨다.
"아, 아닙니다."
여자의 참견이 싫지 않은데도 퉁명스레 말을 받
고는 구석진 서가(書架)로 몸을 돌린다.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까?' 서성이던 발길을 조급하게 구
는 엉뚱한 물음 때문에 차츰 조바심이 난다. 이렇
게 나는 가끔씩 조바심을 느끼려고 '아벨 서점'에
온다(?). 새 책들과는 달리 헌 책은 그 자체로도
갖는 의미가 무겁다. 누군가가 이미 펼쳐 보았을,
내용과는 상관없는 익명의 손길이 주는 교훈은 그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더러는 익명의 그
누군가가 거닐었을 선명한 밑줄을 따라 듬성듬성
읽어 내려가다 보면, 지금의 내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은 3월하고도 예니레가 훌쩍 지났는데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3월에 내리는 눈은 사연을
감추기에 제격이다. 그렇다. 눈 섞인 빗길을 뚫고
동인천까지 내달린 것은 달리 명명할 수 없는 사
연이 내 안에 있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리
움이든, 생활에 대한 목마름이든, 3월의 눈은 사
연을 묻지 않는다.
순간, 가슴을 쓸고 내리는 막막함을 느낀다. 서
가(書架)에 꽂힌 책들 가운데 『선(禪)을 찾는 늑
대』를 보았다. 겨울이 가기 전, 이사를 앞두고
책장을 정리하느라 내다 팔기로 한, 한 꾸러미의
책들 가운데 있던, 나의 책이다. 아니, 나의 책이
었었다. 손을 뻗어 책을 잡으려는데, 손가락이 가
늘게 떤다. 더러 접하게 되는 이런 상황 앞에서,
나는 민망하다. 그러고 보면 꽤 많은 양의 책들이
이 가운데 꽂혀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신포동에
있는 '할머니 칼국수'가 먹고 싶어서 두툼한 책
두어 권을 내다 판 적도 있다. 고작 5000원의 칼
국수 값을 대신하기 위해 아무런 미련도 없이 책
을 들고나서는 나의 당당함이라니…. 그 속을 누
가 알겠나만, 새삼 우울할 마음은 없다. 그런데도
지난겨울은 좀 너무 했다. 차 트렁크를 한 가득
채우고도 비좁아 뒷자리까지 가득 채웠던, 나의
책들. 그러나, 처음에는 신중하였다. 한 권 한 권
의 책을 골라내면서, '필요 없는 것들로만 하자',
'없어도 그만인 것들로만 하자', '있은 들 아무
상관없는 것들로만 하자'고 누차 되뇌며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한 권 두 권 비워지는 그 자리가
차츰 늘어나면서 어쩌면 그리도 시원하던지, 어느
순간부터는 무작위로 책을 뽑아 묶었던 것이다.
'미련을 두지 말자', '어차피 그런 대로 나와는
인연이 다했다고 생각하자'며 위로까지 해 가면서….
그 뒤로 나는, 갈 바를 알지 못할 때면 아벨 서
점에 온다?.
"1992년 12월 23일 주안역 앞, 롯데리아. 사람
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그 사이로 눈이 쌓인다.."
첫 장을 넘기자 자음과 모음들이 어색한 형태소를
이루고 있는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참 나쁜 버
릇이다. 책을 사고는 계산하기 무섭게 첫 장에 뭔
가를 기록하는 습관은 참 오래된 버릇이다. 어느
낯뜨거운 문구는 그 장을 떼 내었을 터인데도, 세
심한 주의가 미치지 못한 흔적이다.
"파이루스는 결코 타인에 의하여 길들여질 수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를 길들일 수 있는
외톨박이 늑대, 고독한 인간형을 상징한다." 다음
장을 넘기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옮긴이의 말이
다. 그리고 다시 몇 장 뒤, "인간은 언제나 자신
의 과거를 이해함으로써만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잊어버릴 수 있는 과거란 없는 것이다."
에도 또한 밑줄이 그어져 있다. 이 또한 옮긴이의
말 중에서다. 두 번째 것에서는 재차 덧댄 흔적이
있다. 어색하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후루룩 책
장을 넘긴다. 몇 군데, 밑줄이 여럿이다. 그러다
첫 장에 있는 글자형태의 삐뚤대는 메모를 발견한
다. "자신 속에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은 숨긴 채로 숨어 있어야 마땅하
다."라고 적혀있다. '왜 이 같은 메모를 적어둔
것일까?' 앞장을 넘겨 성큼성큼 읽는다. 그리고
메모가 되어 있는 다음 장까지 다 읽고 난 뒤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만, 92년도면….', '아!
딸애가 천식을 앓던 해이던가?', '아닌데….' '…
맞나?' 사뭇 진지하게 궁리해 보았지만, 너무 오
래 전 일이다. 메모는 몽상의 징검다리일 뿐, 몽
상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체념하듯 다음다음 장을
넘기자, "칸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들에게 감
각 데이터를 제공하는 객관 세계는 변하지 않았지
만 그것의 선험적인 개념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그 결과는 압도적인 것이었다.(139쪽)"는 문장 밑
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젠장!' 슬슬 짜증이 난
다. 짜증의 이유는, 없다. 다만 부끄러운 것이다.
거칠게 책장을 넘기다 또 밑줄을 만난다. "과거는
우리들의 기억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우리들의 계
획에만 존재한다. 현재만이 우리들의 현실인 것이
다.(249쪽)"라는 것. 턱 소리가 날 정도로 책을
던진다. 주인 여자가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민망하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것이었던 것
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물리고 싶다. 물릴 수만 있
다면, 시간이라도 물리고 싶다. 담배 생각이 났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쾨쾨한 먼지구덩이에 있다 나와서인지 쌀쌀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돌연 재채기가 났다. 그렇게
한참을 허리를 숙여 재채기를 하다, 토악질이 일
었다.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만 같았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재채기를 한 뒤에야, 담배를 빼어
물었다. 습한 허공으로 흰 물결이 와락 흩어졌다.
한 모금 한 모금, 토해야 하는 것을 도로 짓누르
듯 연거푸 두 대의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3월의
눈이 그친 거리 위로 흉물스런 어둠이 내리고 있
었다.
하현.
-아벨 서점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나는 아벨 서점에 간다.
동인천 어느 골목길에 접어들면 줄지어 서 있는
헌 책방들을 만날 수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짐짓 줄지어 서 있던 먼지들이 한꺼번에 코끝을
간지럽게 한다. 낯익은 주인 여자는 가벼운 눈인
사를 건네고, 그녀의 머리 한 뼘 위로는 아슬아슬
하게 꽂힌 무수한 책들이 먼지들과 함께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부분을 놓
고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결코 아벨 서점은
반듯하지 않다.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
으면, 언제 책 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지 모
르는, 위태로운 정렬이 아슬아슬하다.
"딱히, 찾으시는 게 있나요?"
사뭇 뒷짐지고 서성이던 나를 어색해 하며, 여
자는 말을 건넨다.
"아, 아닙니다."
여자의 참견이 싫지 않은데도 퉁명스레 말을 받
고는 구석진 서가(書架)로 몸을 돌린다.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까?' 서성이던 발길을 조급하게 구
는 엉뚱한 물음 때문에 차츰 조바심이 난다. 이렇
게 나는 가끔씩 조바심을 느끼려고 '아벨 서점'에
온다(?). 새 책들과는 달리 헌 책은 그 자체로도
갖는 의미가 무겁다. 누군가가 이미 펼쳐 보았을,
내용과는 상관없는 익명의 손길이 주는 교훈은 그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더러는 익명의 그
누군가가 거닐었을 선명한 밑줄을 따라 듬성듬성
읽어 내려가다 보면, 지금의 내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은 3월하고도 예니레가 훌쩍 지났는데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3월에 내리는 눈은 사연을
감추기에 제격이다. 그렇다. 눈 섞인 빗길을 뚫고
동인천까지 내달린 것은 달리 명명할 수 없는 사
연이 내 안에 있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리
움이든, 생활에 대한 목마름이든, 3월의 눈은 사
연을 묻지 않는다.
순간, 가슴을 쓸고 내리는 막막함을 느낀다. 서
가(書架)에 꽂힌 책들 가운데 『선(禪)을 찾는 늑
대』를 보았다. 겨울이 가기 전, 이사를 앞두고
책장을 정리하느라 내다 팔기로 한, 한 꾸러미의
책들 가운데 있던, 나의 책이다. 아니, 나의 책이
었었다. 손을 뻗어 책을 잡으려는데, 손가락이 가
늘게 떤다. 더러 접하게 되는 이런 상황 앞에서,
나는 민망하다. 그러고 보면 꽤 많은 양의 책들이
이 가운데 꽂혀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신포동에
있는 '할머니 칼국수'가 먹고 싶어서 두툼한 책
두어 권을 내다 판 적도 있다. 고작 5000원의 칼
국수 값을 대신하기 위해 아무런 미련도 없이 책
을 들고나서는 나의 당당함이라니…. 그 속을 누
가 알겠나만, 새삼 우울할 마음은 없다. 그런데도
지난겨울은 좀 너무 했다. 차 트렁크를 한 가득
채우고도 비좁아 뒷자리까지 가득 채웠던, 나의
책들. 그러나, 처음에는 신중하였다. 한 권 한 권
의 책을 골라내면서, '필요 없는 것들로만 하자',
'없어도 그만인 것들로만 하자', '있은 들 아무
상관없는 것들로만 하자'고 누차 되뇌며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한 권 두 권 비워지는 그 자리가
차츰 늘어나면서 어쩌면 그리도 시원하던지, 어느
순간부터는 무작위로 책을 뽑아 묶었던 것이다.
'미련을 두지 말자', '어차피 그런 대로 나와는
인연이 다했다고 생각하자'며 위로까지 해 가면서….
그 뒤로 나는, 갈 바를 알지 못할 때면 아벨 서
점에 온다?.
"1992년 12월 23일 주안역 앞, 롯데리아. 사람
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그 사이로 눈이 쌓인다.."
첫 장을 넘기자 자음과 모음들이 어색한 형태소를
이루고 있는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참 나쁜 버
릇이다. 책을 사고는 계산하기 무섭게 첫 장에 뭔
가를 기록하는 습관은 참 오래된 버릇이다. 어느
낯뜨거운 문구는 그 장을 떼 내었을 터인데도, 세
심한 주의가 미치지 못한 흔적이다.
"파이루스는 결코 타인에 의하여 길들여질 수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를 길들일 수 있는
외톨박이 늑대, 고독한 인간형을 상징한다." 다음
장을 넘기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옮긴이의 말이
다. 그리고 다시 몇 장 뒤, "인간은 언제나 자신
의 과거를 이해함으로써만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잊어버릴 수 있는 과거란 없는 것이다."
에도 또한 밑줄이 그어져 있다. 이 또한 옮긴이의
말 중에서다. 두 번째 것에서는 재차 덧댄 흔적이
있다. 어색하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후루룩 책
장을 넘긴다. 몇 군데, 밑줄이 여럿이다. 그러다
첫 장에 있는 글자형태의 삐뚤대는 메모를 발견한
다. "자신 속에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은 숨긴 채로 숨어 있어야 마땅하
다."라고 적혀있다. '왜 이 같은 메모를 적어둔
것일까?' 앞장을 넘겨 성큼성큼 읽는다. 그리고
메모가 되어 있는 다음 장까지 다 읽고 난 뒤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만, 92년도면….', '아!
딸애가 천식을 앓던 해이던가?', '아닌데….' '…
맞나?' 사뭇 진지하게 궁리해 보았지만, 너무 오
래 전 일이다. 메모는 몽상의 징검다리일 뿐, 몽
상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체념하듯 다음다음 장을
넘기자, "칸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들에게 감
각 데이터를 제공하는 객관 세계는 변하지 않았지
만 그것의 선험적인 개념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그 결과는 압도적인 것이었다.(139쪽)"는 문장 밑
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젠장!' 슬슬 짜증이 난
다. 짜증의 이유는, 없다. 다만 부끄러운 것이다.
거칠게 책장을 넘기다 또 밑줄을 만난다. "과거는
우리들의 기억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우리들의 계
획에만 존재한다. 현재만이 우리들의 현실인 것이
다.(249쪽)"라는 것. 턱 소리가 날 정도로 책을
던진다. 주인 여자가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민망하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것이었던 것
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물리고 싶다. 물릴 수만 있
다면, 시간이라도 물리고 싶다. 담배 생각이 났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쾨쾨한 먼지구덩이에 있다 나와서인지 쌀쌀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돌연 재채기가 났다. 그렇게
한참을 허리를 숙여 재채기를 하다, 토악질이 일
었다.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만 같았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재채기를 한 뒤에야, 담배를 빼어
물었다. 습한 허공으로 흰 물결이 와락 흩어졌다.
한 모금 한 모금, 토해야 하는 것을 도로 짓누르
듯 연거푸 두 대의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3월의
눈이 그친 거리 위로 흉물스런 어둠이 내리고 있
었다.
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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