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면
-낚시터에서
짙은 오판화의 배꽃 향기가 간절합니다
그대의 마을은
5월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낯선 아침,
어디선가 들려오는 하모니카 선율처럼
안개에 젖고 있습니다
그대를 떠올리면
배꽃 물이 하얗게 든
긴 사연이 눈물겹게 찰랑댑니다
고마운 당신,
사랑은 추억할 수 있어서
더욱 찰나적이라며
곁에 있어 마음껏 볼 수 있을 때
한 번 더 보고 싶다던
당신의 마르지 않은
눈동자를 기억합니다
그 맑은 눈 속으로
한아름 배꽃이 피어있었습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서도
그리고 고이 잠든 아내의 이마를 쓸어주는
자상한 남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대를 떠올리면
짙은 오판화의 배꽃 향기가 간절합니다
미안함이 없이는
그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써 놓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찌가 바람에
흔들린다. 낚시터의 한가로움은 늘 예사롭다. 큰 애가 곁
에 와 앉으며 묻는다. 고기 안 잡고 공부해? (공부? 베시
시 웃음이 샌다.) 아니, 꼭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건 아
냐. 그냥, 이게 좋아. (아이가 멍하니 갸웃거린다.) 그래
두. (싱겁다는 듯, 가만히 수첩을 넘겨보자, 슬그머니 수
첩을 감춘다.) 심심해? (어색하게 물었다.) 아니. (조금
퉁한 표정이다.) 고마워! (더욱 어색하다.) 뭐가? (더욱
퉁한 표정이다.) 그냥. 다.
그냥. 다. 그냥 다 고맙다. 비가 올 거라던 날씨가 그
나마 푸르른 채 구름에 가려서 고맙고, 두 아이가 건강하
게 곁에 있어서 고맙고, 늦은 점심을 차리며 흥얼대는 아
내의 밝은 표정이 고맙고.
나의 글쓰기는
그대의 향기를 더듬기 위한 것인지도,
나의 시는
배꽃의 그 화사한 오판화를 흉내내기 위한 것
인지도,
어쩌면 나는 이처럼
그대를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처음 그대의 마을에 당도했을 때
알 수 없는 서러움으로
금방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습니다
'일그러진 사람들'의 향기가
어쩌면 그리도 화사하던지…
다리 너머 휘청이며 걷던 아주머니의
무게 있는 디딤발에서도,
휑하니 한쪽 눈이 빈
외눈박이 아저씨의 미소에서도,
탁탁 소리내어 먼지를 털고는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악수를 청해오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도
아니었겠지요?
그 짙은 배꽃 향기는…
두 녀석이 뛰어온다. 저만치 아내가 손짓하며 수저뜨는
시늉을 한다. 수첩을 의자 밑으로 구겨 넣었다. 그리고는
빈 낚싯대를 거둬 새로 이긴 떡밥을 꿰어 던져둔다.
아, 이 한가로운 오후.
밤새 써두었던 사연이
이슬에 젖습니다
그대에게 처음 내가 적은 글들을
보여주었을 때
소리내지 않으려 애쓰던
그 긴 한숨소리가 여전합니다
그리고부터 그대는 쉴새없이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답장을 바라지도 않는 긴 긴 편지를
하루에도 두 통씩
빼곡하니 적어 주었습니다
아빠 우리도 낚시하면 안 돼?
두 녀석이 보챈다. 작년에도, 그래서 위험하다며 안 된
다 했었는데. 입술을 굳게 물고 잠시 망설이다 2.5m 짜리
낚싯대를 두 대 꺼내 펴주며 또 망설인다. 조심해라는 말
을 그냥 삼킨다. 바늘에 찔려보는 것 또한 즐거운 추억일
수 있지 싶다.
당신의 마을을 떠나오던 날
이불보따리 위에 앉아
흔들리는 트럭만큼이나 심하게
앓고 또 앓던 서러움,
그것이 여태 나를 앓게 합니다
진득하니 앉았지 못하고 연신 낚싯대를 건졌다 담궜다
하는 통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글
쓰기의 화두가 제발저리게 한다. 녀석들을 옆에 앉히고도
태연하게 나의 글을 잇다니.
미안함은 곧잘 염치없는 타협이다.
몰랐는데
몰랐는데 여태
나는 그대의 마을에 머물고 있습니다
참으로 염치없는
미안함입니다
하현.
출처 : 비공개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강을 걷는 나무 (0) | 2006.08.06 |
---|---|
[스크랩] 어느 풍경.2 (0) | 2006.08.06 |
[스크랩] 사랑에 대한 단상 (0) | 2006.08.06 |
[스크랩] 당신의 마을 (0) | 2006.08.06 |
[스크랩] 나는 스킨십이 좋다 (0) | 2006.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