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크랩] 어느 풍경.2

전봉석 2006. 8. 6. 18:35

어느 풍경.2




걸어가다가 내가 걸어가다가
주웠다 조그만 돌멩이 하나
모쫄한 게
꼭 국어 책이나 산수 책의 무게 만한
조그만 돌멩이 하나

해질 무렵 좁은 골목을
혼자서 걸어가다가 무심코 걸어가다가
주웠다 토끼풀 옆에 얌전히 앉은
조그만 돌멩이 하나

어쩌면 고구려 때
적국을 막아내기 위해 쌓은
성벽에 끼어 있었을

어쩌면 백제나 신라 때
아름다운 절이나 탑이었을
어쩌면 먼 머언 옛날
단군 할아버지가 처음 밟은
큰 바위였을


"뭔가요?"
"뭐가?"
"금방 당신이 웅얼거린…, 그거 시라는 거 맞죠?"
"시라는 거? 응… 시라는 거, 맞아."
"당신이 지은 건가요, 그거?"
"아니. 내가 지은 거 아니야."
"그럼?"
"오규원이란 시인이 지은, 「조그만 돌멩이 하나」라는 시야."
"아…"
잠시동안이지만 우리는 우울했습니다. 지난 추억은 때로 서로를
우울하게 하거든요. 말없이 걸음을 떼다 나는 웅얼거렸습니다. 그것을
듣고 조약돌이 말했던 것이지요.
"시란, 참 묘한 거예요."
묘하다? 나는 입안에서 조약돌이 말한 '묘하다'는 말을 천천히
발음해 보았습니다. '하긴, 시란 참 이상야릇한 것이긴 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이상야릇하단 말예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서 그렇게
보이게끔 하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니 말예요."
하는 거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이죠. 나는
조약돌의 말을 음미했습니다.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을 그렇게 본다는
것에 대해서 말예요.
"보세요, 도대체 누가 우리 같은 하찮은 돌멩이에게 그러한 역사가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하겠어요. 안 그래요? 시인이니까 그나마
가능한 거 아닌가요?"
마치 따지듯이 묻는 조약돌의 물음에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나는 조금
전에 조약돌에게 괜한 고백을 한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이 쓰였다고요.
그래요. 고작 하찮은 돌멩이에게 그런 나의 속엣 마음을 까발리듯이
다 털어놓다니요. 늘 빚진 마음을…! 자꾸 마음이 석연치가
않았습니다. 왜 그렇잖아요. 늘 말이란 게 너무 답답해서 훌훌
떨어내듯 쏟아놓고도 조금 지나면 금세 후회되고 뭐, 그러는 거
말예요.
아무튼 그래서 나는 기억나는 대로 시 한 편을 중얼거렸을 뿐인데
조약돌은 꽤 감동을 한 모양입니다.
"왜 말이 없으시죠? 내 말이 틀린 건가요?"
가만히 걷기만 하는 내가 서운했나 봅니다. 나는 조약돌에게
말했어요.
"아니야, 네 말이 맞아. 그래서 나도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단다. 시는 못쓰더라도 시인처럼 살고 싶었거든."
마치 눈치를 보는 아이처럼 자신 없게 말을 했지요. 그런데,
"깔깔깔"
하면서 조약돌은 웃는 거예요.
나는 그래도 꽤 진지하게 한 말인데… 조약돌이 그만 웃는 거 있죠.
처음에는 내 말을 듣고 피식- 웃더니 급기야는 "깔깔깔" 아주 큰
소리로 말예요. 그래서 조금 기분이 나빠서 물었습니다.
"너, 뭐니! 왜 웃는 거지? 내 말이 웃겼단 말이지?"
그러자 조약돌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한껏 찌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더니만 데굴데굴 구르면서까지 웃는 거였습니다. 나는
진짜 기분이 나빠질 거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다시 발걸음을 옮겼죠.
그랬더니 조금 있자 조약돌이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것입니다.
"아, 당신은 정말 철이 없는 어른이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말예요. 시를 못쓰더라도 시인이 되고 싶다니요? 그게 어디
말이나 돼요? 글쎄, 요리 못하는 요리사 봤어요? 운전 못하는 운전사
봤어요? 달리기 못하는 축구선수 보셨나요? 아이 참. 도대체 시
못쓰는 시인이라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이마를 바싹 들이대며 따지듯이 묻는 조약돌이 정말 얄미워지려고
했습니다. 물론 조약돌의 말이 다 틀린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을 몰아세워서야 뭐라고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입을 쭉 빼물고는 얼굴을 돌렸습니다. 한껏 삐진 표정으로
말예요. 그랬더니 조약돌이 다시 웃더군요.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이
오냐오냐하면서 말예요.
"너, 정말…"
중지와 엄지를 동그맣게 모아 조약돌의 머리를 톡 하고 건드리면서
말했어요.
"요리는 못해도 요리사로 살 수 있는 거고, 운전은 못해서
운전사처럼 살 수 있는 거고, 또 뭐라고? 어, 축구 선수라고 꼭
달리기를 잘 해야 하는 건 아니지. 골키퍼가 잘 뛰면 뭐하냐? 골만
잘 막으면 되지."
나는 말을 하면서도 꽤 억지를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지부리지 마세요. 뻔히 아시면서 뭘 자꾸 그러세요. 당신은 이미
시인이세요. 이미 시인이면서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하니까 우스울
수밖에요!"
"뭐라고? 나는… 시를 못 쓰는 걸…?"
그래도 조약돌의 말이 위로가 되긴 했지만, 부끄러울 정도로
면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약돌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다시
묻더군요.
"누가요? 당신이요?"
하고 말예요. 그래서 나는 더욱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응…"
하고 말했죠. 그랬더니 조약돌은 한층 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이쿠. 당신은 정말… 바보로군요."
하고까지 말하더군요.
"뭐? 바보?"
"그렇지 않고요. 시를 왜 꼭 쓴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쓰는 건
글자를 깨우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쓰는 거, 그런 거 아닌가요?"
"응…, 그야 그렇긴 그렇지만."
나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시를 쓴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한
것일 테지만, '왜 꼭 써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거든요. 늘 '쓴다'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생각으로
멀리 시선을 떨군 나에게 조약돌이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시를 못쓴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당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라고 말이지요. 마치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나는 조약돌을 더욱
가까이 바라보며 물었어요.
"확신?"
"네, 확신!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
조약돌의 말은 너무 아리송합니다. 보고 있는 것,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라니요. 그러면서도 조약돌의 말을 되새기며 고개를
갸웃했어요.
"그런가?"
"그럼요. 우리 같은 돌멩이와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우리 같은 돌멩이에게 역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안 그래요?"
"그런가?"
"그런가라니요? 저랑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아… 그런가?"
"다만, 당신은 확신이 없는 것뿐이라고요.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러니까
그걸 못쓴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나는 마치 착한 학생처럼 조약돌의 말을 들었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것 같았거든요. 더욱이
나에게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도 같았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를 자꾸
확인하려고 하였던 것이나, 무엇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이 바른
것인가에 대해 재고 따지기를 좋아하였던 거 같아요. 다시 말하면,
믿음이 그만큼 없었던 거가 되는 건가요?
"다시 말해서 확신이 없다는 건 믿지 못한다는 것과 같아요."
조약돌은 나의 생각을 읽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보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듣고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이것처럼 불행한 게 또 어디 있어요? 이것은 곧 보는 것을 보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예요. 들리는 것을 그대로 듣기보다 무언가와
자꾸 연상 짓는 것과 같은 거예요."
조약돌의 논리대로라면, 그럼 결국 우리 모두는 시인이어야 한다는
거겠지요. 바라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을
들리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곧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말이 지금 앞뒤가 맞는 건가요?"
나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그런가, 조약돌이 물었습니다.
"응…, 아마도!"
"아마도? 후후. 그래도 자존심은 지키겠다 이거로군요."
"음…."
"제가 너무 무례한가요?"
나는 잠시 뜸을 들였습니다. 조약돌이 뭔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눈치 챘거든요. 그것이 조금 전에 들려주었던 나의 기억
때문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아니야, 무례한 건 아냐. 우린 이미 예사로운 사이가 아닌 걸…?"
"예사롭지 않다?"
조약돌은 내 말을 흉내내고는 나와 똑같이 입을 쭉 내밀었어요.
그리고는 다시, 예사롭지 않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더군요. 그리고
물었어요.
"예사롭지 않다는 확신이 드시나요?"
나는 쭉 내민 입술을 오므리며,
"물론이야, 그런 확신이 들어! 너와 난 결코 예사로울 수 없지!"
라고 말예요. 조약돌은 금세 밝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행복해
보였어요. 물론 나도 그렇게 말하고 절로 기분이 좋아졌고요.
"그럼 이제 당신에게 내 기억을 말해도 될 것 같네요. 아니지, 저의
하늘을 보여드려도 될 거 같아요."
하면서 환하게 웃는 거예요. 나는 그 웃음이 참 좋았습니다.
"조약돌의 기억! 조약돌의 하늘이라!"
나는 손바닥 위에 놓인 조약돌을 더욱 높이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어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아주 편한 자세로 하얀 나비가 한 마리
날아가고 있었어요.
"당신의 기억, 당신의 하늘에는 그 분이 있다고 하셨죠?
그 소녀!"
나는 문득 시선을 멈추며 대답했어요.
"응…"
저만치 멀어지는 나비를 보며 말했어요. 그런 나의 시선을 좇으며
조약돌이 말했습니다.
"저에게도 있답니다. 제가 사랑하는… 하늘이 말예요!"
하고는 아주 지긋한 시선으로 멀리까지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하였어요.
좀 의외다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직까지 조약돌의 사랑을 눈치챌
만큼의 이해력은 없었거든요. 조약돌의 사랑이라니요.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어요?. 나는 가만히 조약돌을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하지만 조약돌은 여전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힘드니?"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물었는지. 그냥 힘들어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한 마디 더 했죠.
"그래, 사랑은 힘든 거더라. 그런 거 같아. 몇 번의 사랑을 하면서…
아니, 사랑이란 게 어디 하나뿐이겠니? 그러니까… 곧 또다른 사랑을
하곤 하는데… 번번이 힘들었던 거 같아. 흔히들 사랑은 아름답고
행복한 거라고들 하지만… 사실들 힘들어하는 이유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랑 때문이더라고…"
나는 괜히 조약돌이 좇고 있는 깊은 시선을 따라잡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어요.
"굳이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렇더라는 거야. 자식에 대한
사랑도 늘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는 거야. 이래서 걱정, 저래도 한숨…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도대체 힘든 거더라고…"
하면서 자꾸만 덜 여문 말을 늘어놓았지요. 어쨌든, 여기까지 말을
하고 가만히 조약돌의 눈치를 살폈어요. 조약돌이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말을 하려다 말고 하는 거 같았거든요. 그래서 나는 조약돌을
다시 나의 오른쪽 뺨에 대고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말하는 사랑과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다른 것 같아요. 사랑은 아름다운 거예요. 아주 행복하고
평화로운 거예요. 사랑이 힘들고 사랑 때문에 괴로운 건 뭐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예요."
나는 조약돌을 쳐다보며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어요. 그리고
물었지요.
"뭔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힘든 거라고?"
그러자 조약돌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 말하였습니다.
"네. 자신의 욕심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던가 아니면 자기
뜻대로 사랑을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조약돌이 하는 말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듣기 위해 나무 그늘로
들어가 앉았습니다. 제법 햇살이 따가웠거든요.
"마치 당신이 시를 못쓴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시인이고는
싶은데 시를 못쓴다고 생각하는 것 말예요. 그렇게 말씀하셨죠?"
"응…"
"그것도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것도? 사랑에 대한? 확신?"
"물론예요, 확신!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확인하려고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요구하게 되고, 자신의 시각에 맞춰 해석하려고
하고, 그것에 맞지 않아서 <사랑은 힘들다>라고 하는 거예요."
"음…"
"내 말이 틀렸나요?"
"아니, 틀렸기 보다…"
"어휴, 또 그 자존심!"
"자존심이 아니라… 네 말의 뜻을 생각하는 거야. 네가 말하는
사랑을 말야."
"어쨌든. 당신은 참 인정하기에 인색한 분이시군요?"
"그런가…?"
"또!"
조약돌의 지적에 대해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거
같았거든요.
"사랑은 완전한 거예요. 사랑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거죠. 평화롭고
행복한 것 그 자체 말예요."
"…"
"아시겠어요? 그걸 인정하기 힘든 건, 당신이 그런 사랑을 못해봐서
그런 것일 수 있어요. 늘 당신 입장에서 요구하고 간섭하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니까,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깐!"
"아마도…"
"또! 어휴… 저는 아니에요. 제가 사랑했던 그 분은 지금도 저를
충만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답니다."
"…"
"제가 여기저기 떠돌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은 것은 그 분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예요."
나는 잠시 조약돌의 말을 막아야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조약돌이
말하는 사랑이란 게 너무 추상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더욱이
돌멩이가 사랑을 한다는 게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건
사실이었거든요. 물론 조약돌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어쩌겠어요.
"그런데 말이다.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라고 물어야 할지 어려웠습니다. 자칫
내가 또 조약돌을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질문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나의 망설임을 아는 것일까요?
"당신은 착한 분이세요. 지금 저에게 무얼 궁금해하는지 알아요.
그걸 왜 묻지 못하고 계시는 지도 알고요. 어떻게 돌이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수 있냐는 거죠?"
"응? 아니 뭐…."
참 난처했습니다.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속시원하게 물어볼 수도
없었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그 분은 굳이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대상을 꼭
들자면 '숫돌'이라고만 해두죠. 아주 오래 전의 일예요. 당신이 들으면
까무러칠 정도로 아주 까마득한 옛날 말예요."
숫돌이라는 말이 조금 우습게 들렸지만, 우리가 소년 소녀 하듯이
아마 그런 표현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조약돌의 말대로 우리는
사랑에서 대상을 추억하는 데에 익숙하니까요.
"아주 먼 옛날?"
"네, 그보다 더 먼 옛날…"
"음… 상상이 안 가는데?"
"그럴 거예요. 당신들은 우주 폭발로 인해 이 지구가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걸 더 신빙성 있다고 보는 거 같더군요. 과학이라는 게 또
그렇다죠? 우주의 어느 작은 입자에 의해 태양계가 형성되고 그
우연의 하나로 이 지구가 생겨났다고 믿죠?"
"아마도…"
"그래서 천문대에서는 여전히 혜성을 연구하기도 한다지요?"
"응. 그렇다 그래. 별자리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혜성이 별들
사이에서 조금씩 움직인다고 하더군. 핵이 있으면 그 둘레를 에워싼
희미한 코마와 꼬리가 있다고 해. 나도 자세히는 몰라. 천체에 대해
공부하지는 않았거든. 다만 중요한 건, 왜 과학자들이 여전히 혜성을
연구하느냐 하면 그것에는 태양계의 탄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있다고 하더구나."
상식적인 것밖에 모르고 있는 나로서는 얼버무리듯이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도 그렇게 믿고 계신 건가요?"
그런데 나의 설명이 미흡했던지 조약돌이 그렇게 묻더군요.
"글쎄다. 나야 뭐, 과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사실은 상관없거든. 그렇든 말든 말야."
"어머? 정말예요? 당신!"
"응? 으응…"
정색을 하고 되묻는 조약돌의 물음에 당혹스러웠습니다. 마치
실망스럽다는 표정이었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하는 표정 말예요.
"하긴. 그건 아마 당신들의 수명이 너무 짧아서 그런 걸 거예요.
우주에 비하면 당신들의 생명이란 게 아주 찰나적이라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주에 비하면?"
"네. 그렇잖아요. 당신이 말씀하신 것대로라면 별들도 나이가 있다는
거 아니에요? 비록 수십 억 년의 긴 세월이지만."
"응, 그건 그래. 신성의 폭발로 어떤 가스가 우주 공간에 흩어져서
산광 성운 속에 섞인다 그래. 그렇게 되면 가운데로 몰리면서 짓눌려
뜨거워지고. 그러면 마침내 빛을 내는 거라고 하더군. 이때를
아기별이라고 해. 그러니까 산광 성운 속에서 떼지어 태어나는
셈이지. 아기별들이 말야. 그러다 다 자란 어른별은 몇 십 억 년 동안
수소가스를 태우게 되는데 그래서 빛을 낸대. 빛이 밝을수록 일찍
늙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개념으로는 이해가 어렵겠지.
네 말대로."
"음…"
"어쩌면 우리 지구도 그 가운데 한 별일 테고, 언젠가는 끝장이
나겠지만 말야."
사실 나는 이 정도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지요. 우주하면 제일 먼저
별들이 떠오르는데 그것으로 시간을 가늠한다는 게 백 년도 못사는
입장에서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거든요.
"이해해요."
"뭘 말이니?"
"당신의 시간에 대한 한계 말예요. 그래서 사실 저는 당신에게 저의
기억을 말씀드린다는 게 좀 두려워요."
"왜?"
"글쎄요…"
"아니야. 듣고 싶어. 너의 기억을… 그리고 너의 사랑에 대해서도…
너만 괜찮다면…."
마치 나는 조약돌이 나의 기억을 궁금해하였듯이 불현듯 조약돌의
꿈? 기억? 하늘? 그런 것이 궁금하였지요.
"그러니 말해 주라. 응?"
입을 삐쭉 내밀면서 어리광을 부리듯이 말했어요. 그러자,
"후후. 귀여운 당신!"
라고 하더군요. 나는 더욱 입을 삐쭉 내 물고는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알았어요. 하지만 저의 기억은 저에게도 너무 벅찬 기억예요.
어디서부터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러니 당신이 궁금한
것들을 하나 하나 질문하세요. 그러면 제가 그것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드릴게요."
조약돌이 이렇게 나오자 나는 더욱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죠. 어쨌든
단지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이 지구라는 별에서 나보다는
오래 살았을 건 분명하니까요. 잠시 망설이다 물었어요.
"넌, 나이가… 몇 살이니?"
좀 유치한가요? 하지만 뻔히 우리는 상대를 알려고 할 때 제일 먼저
나이부터 묻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조약돌은 아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어요.
"이 지구와 같아요. 몇 천? 혹은 몇 억?… 사실은 나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음…"
"왜요?"
"아니… 갑자기, 너에게 더는 너라고 하면 안될 거 같아서 말야.
당장 존칭을 새로 쓰고 존댓말을 해야 할 거 같아서 말야."
"후후. 우습군요. 그러지 마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어쩌면 저는
나이가 없다고 해야 옳아요.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니까요. 안
그런가요?"
"그런가?"
"세상이 처음 만들어질 때 저는 '첫째 날'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어요. 그건 분명해요. '첫째 날' 그 이전 말예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때, 바로 태초 말예요. 빛과 어둠을 나누시기 그
이전이기도 한 때 말예요. 그때가 언제인지, '첫째 날'이 있기 전의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어요. 사실 그때는 무질서밖에 없었거든요."
조약돌의 말을 아주 깊이 생각하며 들었어요. 하지만 참 어려웠지요.
이 세상의 첫째 날에서도 바로 그 전 날이라고 하니, 날 수에도
포함이 안 되는 그런 날이라는 건데 말예요.
왜냐하면 성서에서는 육일 동안 모든 만물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첫째 날에는 빛과 어둠을 만드셨고… 둘째 날에는 물과
물을 나눠 궁창을 만드시고는 하늘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식물을…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를… 그리고 여섯째 날이 되어서야 짐승과 육축과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내가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조약돌은 첫째 날, 바로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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