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에 대한 단상
선생을 만났다. 노을 때문이다.
노을을 등지고 학교를 가야 한다는 건 참 잔인한 일이다.
간간이 룸미러로 번지는 수줍은 하늘을 보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리움이라니,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는 참을 수 없어 선생에게 전화를 넣었다.
"오, 봉돌! 어디냐?"
선생의 음성은 언제나 유쾌하다.
"학교 가는 길이지요!" 그리고는 룸미러를 보며, "노을
이, 죽여요." 라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래?" 하고는, 담배를 한 대 빼는지 꼼지락대는 소리
가 들린다. 곧이어, "죽인다고 죽을 수 있다면 좀 좋으냐?"
란다.
"쳇."
"왜 임마?"
"아니에요."
"뭐가?"
"뭐든!"
"짜식. 얼른 와."
해서 나는 서울에 갔다.
역시, 허름한 식당. 오늘은 중국음식이다.
선생을 만나면 분주하다. 늘 그렇듯, 질문과 대답은 함축
적이다. 툭 치며, "얼굴이 왜 그리 상했냐"고 묻는다.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물러선다. 그러면 선생은 "연애 하냐"고
되묻는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선생은
"역시! 넌 훌륭해"라고 하고는, "씨발, 존나 부럽다!" 란다.
이쯤 되면, 둘 다 까르르 웃는다.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온다.
기사를 쓰다 말고 나왔다느니, 내일은 두 배로 뺑이 쳐야
한다느니 하며 한껏 너스레다. 알았다, 내가 술값 낸다고
하자 당근이지 하시며 그제서야 수저를 든다.
아, 좋다.
사랑은 좋다. 자극이며 흥분이다. 모순이며 기호이고, 끊
임없이 풀어야 하는 함축된 언어이다. 그로 인해 나는 영원
한 현재를 산다.
결코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나로 하여금 사랑되기를 기
다린다. 예상치 못한 어느 접점은 당혹스럽다. 느닿없는 느
낌, 참을 수 없는 확신들 때문에 재차 거듭되는 신선함이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 앞에서 능동적이지 않다. 사랑
이 끄는 대로 나를 놓아두는 것, 사랑된다는 것은 황홀경이
다. 이유 없이 사랑되는 것에는 언제나 자연스럽지 않다.
말투, 표정, 어떤 몸짓 혹은 그녀(혹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풍경들…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지 않다. 이렇듯 사랑
됨은 복합적이다. 강요할 수 없는 그 무엇, 사랑의 자유는
늪이다. 내 안의 늪.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사랑으로 놓아두지 않는다. 끊임없
이 강요하고 억압한다. 오로지 정점을 위한 사랑으로 목적
을 두기 때문에 그러하다. 한낮의 정점은 찰나이다.
마치 몇 억 광년을 사이에 놓고 벌이는 찰나의 순간이다.
그럼에도 사랑되는 것에는 소홀하다. 아, 이 어처구니없는
단절.
해독불능.
선생의 볼이 빨갛다.
사랑하는 데에는 두 가지의 끔찍한 오류가 있다. 하나는
부당 긍정의 오류이고, 다른 하나는 부당 부정의 오류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전체의 느낌 가운데 하나만 부정이라
해도 결과는 부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전체 모
두가 긍정일 때에만 결과도 긍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향한 다툼이며, 자신을 향한 짧은
호흡이다. 고작 그렇다.
그러나 사랑되는 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의 다툼
만 있을 뿐, 정작 상대에 대한 그 어떤 요구도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자신의 호흡은 길어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의 사
유의 폭은 넓어진다. 벅찬 해독만이 남는다.
선생은 가끔, 나를 친구라 한다.
친구란 관조적이다. 서로가 나눌 수 있는 우정은 매우 안
락한 의자이다. 편하고 편한 것, 대화를 양분 삼아 자라며
공유하는 세계, 더없이 편한 것, 우정이다.
그런데 내가 선생을 대하는 것은 사랑이다. 만일 선생이
나로 인해 편하다면, 나는 선생 때문에 불편하다. 그의 사
유, 그 넓은 세계를 탐내는 마음으로 온통 힘든 벅찬 해독
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숱한 기호
들을 통해 스스로가 민감해지는 것이다. 해석하고 재해석하
며 무언의 해석을 거듭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됨으로써
허우적거리는 놀라운 늪이다. 언제 그렇듯 내 안에 복잡한
기호들이 뒤엉켜 있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어수선함>
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어떻게든 해독해 보려는 노
력이 곧 사랑이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정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잖니? 누군 그걸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이라 그러더라만,
<말없음>이 되려 말된 것들보다 더욱 선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관계를 우리는 꿈꿔야 한다는 거지."
그러는 선생의 표정이 더 좋다.
"살갗이 먼저 아는 말, 그런 거요?"
"그렇지. 그래서 우린 사랑을 하면, 바로 엎어지는 거지."
"푸…"
오랜 이별 뒤에도 남아 있는 손끝의 감각은 솔직하다.
그러므로 사랑의 처음과 끝은 없다. 처음도 끝도 없다. 오
로지 영원한 현재이다.
"누구야, 연애하는 게?"
"누군들? 어쩌시게요?"
"나 줘!"
"크아…, 얼마든지요."
"훌륭해."
"물론! 그러나 저는 느낌만 먹는 거 알죠?"
"물론! 그러니 나머진 나 줘."
"하이구."
"상납하는 사회에 살자!"
"얼씨구."
내 안의 사랑은 진화한다. 어제의 그것이 곧 오늘의 그
것과 같다.
난데없이 찾아드는 느낌, 그 느낌은 선물이다. 그간 내
안에 축적되어 온 것으로, 정점을 향한 <오름>이며 또 하나
의 힘겨운 과정이다. 그것과 맞서 싸우는 것이 바로 우정이
다. 사랑을 우정 되게 하는 것은 안락한 의자로의 유혹이다.
해독이 필요 없는, 그저 푹신한 은신처다.
나도 우정이 좋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나를 쉴 수 없게 한다. 그토록 숨막
히게 하는 암호가 사랑이다. 강요와 타협의 갈등 속에서 스
스로 녹초가 되게 하는 것. 나를 녹초 되게 하는 그녀(혹은
그)는 참으로 귀한 선물이다. 새삼 선사된 값진 선물이다.
그로 인해 나는 한없이 예민해진다. 이에 맞서는 적 또한
사랑이다. 간섭하려는 것, 그녀(혹은 그)에게 나를 투영하
려는 것, 그러므로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리게 하고, 나로
개조하려 하는 것.
사랑은 복합적인 나를 대상으로 한다.
고량주 한 병을 거반 혼자 드신 선생의 표정이 우울해 보
인다(우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최초의 감정이다. 외롭다는
것은 그래서 때로는 남루한 외투이다. 낡아빠진 것인데도
가장 먼저 손이 가는 아주 오래된 외투이다. 가장 익숙한
자세이다).
"저는요, 사랑하다 미치는 게 소원이에요."
나의 말에 선생은 말이 없다. "그래서 그것이 미친 것인
지 조차 모를 정도로 온통 사랑투성이였으면 좋겠어요."
그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선생은, "안 힘드니?" 하고
묻는다.
힘든가? 힘들지. 어차피 힘든 게 산다는 거 아닌가? 그렇
다면 사랑 때문에 힘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선물이야?
"힘들죠, 물론."
사랑은 영원한 현재다. 나를 현재로 있게 하는 것, 그래
서 그녀는 값진 선물이다.
"가자, 그만."
돌아오는 길, 까만 하늘이 넓다.
2. 아름다운 이름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라" 전도서 7장 3절
바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라 합니다.
가만히 되뇌듯 부르다 가슴 벅찬 이름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이름짓고, 서로에게서
저만이 불리워지는 이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
릅니다.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면 꼬리를 물고 일어서는 희
뿌연 먼지의 등살에 볶이듯, 때때로 우리는 울퉁불퉁
사랑의 담론이 뒤엉켜 켜켜히 쌓여 있는 자신을 마주
대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무에 그리 말이 고팠던 것
인지. 좀처럼 말(言) 위에 말이 놓이기 무섭게 말을
이으며 말되어지는 서로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내 종종걸음 치듯 앞으로만 내달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잠깐이나마 머물 수도 없는.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섬을 닮아가는가 봅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안개를 그리워하면서도, 한 곳
에 홀로 서 있을 때에야 비로소 둘러 선 안개와 맞닥
뜨릴 수 있으니, 사랑의 담론과도 같습니다.
아름다운 이름, 사랑입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아무나 전할 수는 없
는, 아무나 간직할 수 있겠으나 누구나 나눌 수는 없
는, 그러므로 아름다운 이름,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당신은 늘 저에게 뭔가를 주려고 합니다. 받을 때마
다, '아, 나도 언제고 갚아야 하는데...'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연신 저는 받기만 합니다.
당신에겐 늘 뭔가를 주게 됩니다. 돌아서면서부터
이미 다음에 주어야 할 것을 염두에 두고 헤어지곤 하
게 하였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주고도 주고도
되짚어 다시 주어야 할 것이 남아 있고 받고도 받고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참으로 공평한 이름입니다.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마는 것이 좋습니다. 우
리는 이미 이 모든 것으로도 놓임 바 되는, 한 아름다
운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자신의 자세를 염려하곤 하지만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세와는 무관하게 변함없
이 머물다 가는 안개처럼 그렇게 어느 날 문득 가만히
우리를 둘러 서 있곤 하는 것입니다.
늘 처음이면서 늘 마지막인 이름으로.
저에게 들리는 것이 당신에게 보이고 당신에게 보이
는 것이 저에게는 들려오는, 사랑의 담론은 결코 서로
로하여금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사랑은 은유입니다. 저로하여금 당
신의 극히 사랑스러운 모습만을 보도록 하는 상징적
약호이기 때문입니다.
은유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향해 끊임없는 움직
임이게 하는 이해이며, 눈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라
해도 반복되는 고백의 단위로 서로의 존재를 가늠케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끝은 시작보다 낫습니다. 시작에의
사랑은 자꾸만 자신을 풀어 사랑을 가꾸려고만 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아름다운 이름인 것입니다.
사랑의 끝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예감입니다. 되풀
이 하듯 거듭되어지는 자신의 고백으로 사랑의 잔흔을
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아름다운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늘 처음이며 늘 마지막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아름다운 이름, 사랑입니다.
끝.
선생을 만났다. 노을 때문이다.
노을을 등지고 학교를 가야 한다는 건 참 잔인한 일이다.
간간이 룸미러로 번지는 수줍은 하늘을 보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리움이라니,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는 참을 수 없어 선생에게 전화를 넣었다.
"오, 봉돌! 어디냐?"
선생의 음성은 언제나 유쾌하다.
"학교 가는 길이지요!" 그리고는 룸미러를 보며, "노을
이, 죽여요." 라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래?" 하고는, 담배를 한 대 빼는지 꼼지락대는 소리
가 들린다. 곧이어, "죽인다고 죽을 수 있다면 좀 좋으냐?"
란다.
"쳇."
"왜 임마?"
"아니에요."
"뭐가?"
"뭐든!"
"짜식. 얼른 와."
해서 나는 서울에 갔다.
역시, 허름한 식당. 오늘은 중국음식이다.
선생을 만나면 분주하다. 늘 그렇듯, 질문과 대답은 함축
적이다. 툭 치며, "얼굴이 왜 그리 상했냐"고 묻는다.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물러선다. 그러면 선생은 "연애 하냐"고
되묻는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선생은
"역시! 넌 훌륭해"라고 하고는, "씨발, 존나 부럽다!" 란다.
이쯤 되면, 둘 다 까르르 웃는다.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온다.
기사를 쓰다 말고 나왔다느니, 내일은 두 배로 뺑이 쳐야
한다느니 하며 한껏 너스레다. 알았다, 내가 술값 낸다고
하자 당근이지 하시며 그제서야 수저를 든다.
아, 좋다.
사랑은 좋다. 자극이며 흥분이다. 모순이며 기호이고, 끊
임없이 풀어야 하는 함축된 언어이다. 그로 인해 나는 영원
한 현재를 산다.
결코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나로 하여금 사랑되기를 기
다린다. 예상치 못한 어느 접점은 당혹스럽다. 느닿없는 느
낌, 참을 수 없는 확신들 때문에 재차 거듭되는 신선함이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 앞에서 능동적이지 않다. 사랑
이 끄는 대로 나를 놓아두는 것, 사랑된다는 것은 황홀경이
다. 이유 없이 사랑되는 것에는 언제나 자연스럽지 않다.
말투, 표정, 어떤 몸짓 혹은 그녀(혹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풍경들…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지 않다. 이렇듯 사랑
됨은 복합적이다. 강요할 수 없는 그 무엇, 사랑의 자유는
늪이다. 내 안의 늪.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사랑으로 놓아두지 않는다. 끊임없
이 강요하고 억압한다. 오로지 정점을 위한 사랑으로 목적
을 두기 때문에 그러하다. 한낮의 정점은 찰나이다.
마치 몇 억 광년을 사이에 놓고 벌이는 찰나의 순간이다.
그럼에도 사랑되는 것에는 소홀하다. 아, 이 어처구니없는
단절.
해독불능.
선생의 볼이 빨갛다.
사랑하는 데에는 두 가지의 끔찍한 오류가 있다. 하나는
부당 긍정의 오류이고, 다른 하나는 부당 부정의 오류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전체의 느낌 가운데 하나만 부정이라
해도 결과는 부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전체 모
두가 긍정일 때에만 결과도 긍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향한 다툼이며, 자신을 향한 짧은
호흡이다. 고작 그렇다.
그러나 사랑되는 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의 다툼
만 있을 뿐, 정작 상대에 대한 그 어떤 요구도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자신의 호흡은 길어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의 사
유의 폭은 넓어진다. 벅찬 해독만이 남는다.
선생은 가끔, 나를 친구라 한다.
친구란 관조적이다. 서로가 나눌 수 있는 우정은 매우 안
락한 의자이다. 편하고 편한 것, 대화를 양분 삼아 자라며
공유하는 세계, 더없이 편한 것, 우정이다.
그런데 내가 선생을 대하는 것은 사랑이다. 만일 선생이
나로 인해 편하다면, 나는 선생 때문에 불편하다. 그의 사
유, 그 넓은 세계를 탐내는 마음으로 온통 힘든 벅찬 해독
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숱한 기호
들을 통해 스스로가 민감해지는 것이다. 해석하고 재해석하
며 무언의 해석을 거듭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됨으로써
허우적거리는 놀라운 늪이다. 언제 그렇듯 내 안에 복잡한
기호들이 뒤엉켜 있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어수선함>
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어떻게든 해독해 보려는 노
력이 곧 사랑이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정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잖니? 누군 그걸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이라 그러더라만,
<말없음>이 되려 말된 것들보다 더욱 선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관계를 우리는 꿈꿔야 한다는 거지."
그러는 선생의 표정이 더 좋다.
"살갗이 먼저 아는 말, 그런 거요?"
"그렇지. 그래서 우린 사랑을 하면, 바로 엎어지는 거지."
"푸…"
오랜 이별 뒤에도 남아 있는 손끝의 감각은 솔직하다.
그러므로 사랑의 처음과 끝은 없다. 처음도 끝도 없다. 오
로지 영원한 현재이다.
"누구야, 연애하는 게?"
"누군들? 어쩌시게요?"
"나 줘!"
"크아…, 얼마든지요."
"훌륭해."
"물론! 그러나 저는 느낌만 먹는 거 알죠?"
"물론! 그러니 나머진 나 줘."
"하이구."
"상납하는 사회에 살자!"
"얼씨구."
내 안의 사랑은 진화한다. 어제의 그것이 곧 오늘의 그
것과 같다.
난데없이 찾아드는 느낌, 그 느낌은 선물이다. 그간 내
안에 축적되어 온 것으로, 정점을 향한 <오름>이며 또 하나
의 힘겨운 과정이다. 그것과 맞서 싸우는 것이 바로 우정이
다. 사랑을 우정 되게 하는 것은 안락한 의자로의 유혹이다.
해독이 필요 없는, 그저 푹신한 은신처다.
나도 우정이 좋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나를 쉴 수 없게 한다. 그토록 숨막
히게 하는 암호가 사랑이다. 강요와 타협의 갈등 속에서 스
스로 녹초가 되게 하는 것. 나를 녹초 되게 하는 그녀(혹은
그)는 참으로 귀한 선물이다. 새삼 선사된 값진 선물이다.
그로 인해 나는 한없이 예민해진다. 이에 맞서는 적 또한
사랑이다. 간섭하려는 것, 그녀(혹은 그)에게 나를 투영하
려는 것, 그러므로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리게 하고, 나로
개조하려 하는 것.
사랑은 복합적인 나를 대상으로 한다.
고량주 한 병을 거반 혼자 드신 선생의 표정이 우울해 보
인다(우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최초의 감정이다. 외롭다는
것은 그래서 때로는 남루한 외투이다. 낡아빠진 것인데도
가장 먼저 손이 가는 아주 오래된 외투이다. 가장 익숙한
자세이다).
"저는요, 사랑하다 미치는 게 소원이에요."
나의 말에 선생은 말이 없다. "그래서 그것이 미친 것인
지 조차 모를 정도로 온통 사랑투성이였으면 좋겠어요."
그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선생은, "안 힘드니?" 하고
묻는다.
힘든가? 힘들지. 어차피 힘든 게 산다는 거 아닌가? 그렇
다면 사랑 때문에 힘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선물이야?
"힘들죠, 물론."
사랑은 영원한 현재다. 나를 현재로 있게 하는 것, 그래
서 그녀는 값진 선물이다.
"가자, 그만."
돌아오는 길, 까만 하늘이 넓다.
2. 아름다운 이름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라" 전도서 7장 3절
바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라 합니다.
가만히 되뇌듯 부르다 가슴 벅찬 이름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이름짓고, 서로에게서
저만이 불리워지는 이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
릅니다.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면 꼬리를 물고 일어서는 희
뿌연 먼지의 등살에 볶이듯, 때때로 우리는 울퉁불퉁
사랑의 담론이 뒤엉켜 켜켜히 쌓여 있는 자신을 마주
대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무에 그리 말이 고팠던 것
인지. 좀처럼 말(言) 위에 말이 놓이기 무섭게 말을
이으며 말되어지는 서로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내 종종걸음 치듯 앞으로만 내달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잠깐이나마 머물 수도 없는.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섬을 닮아가는가 봅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안개를 그리워하면서도, 한 곳
에 홀로 서 있을 때에야 비로소 둘러 선 안개와 맞닥
뜨릴 수 있으니, 사랑의 담론과도 같습니다.
아름다운 이름, 사랑입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아무나 전할 수는 없
는, 아무나 간직할 수 있겠으나 누구나 나눌 수는 없
는, 그러므로 아름다운 이름,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당신은 늘 저에게 뭔가를 주려고 합니다. 받을 때마
다, '아, 나도 언제고 갚아야 하는데...'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연신 저는 받기만 합니다.
당신에겐 늘 뭔가를 주게 됩니다. 돌아서면서부터
이미 다음에 주어야 할 것을 염두에 두고 헤어지곤 하
게 하였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주고도 주고도
되짚어 다시 주어야 할 것이 남아 있고 받고도 받고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참으로 공평한 이름입니다.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마는 것이 좋습니다. 우
리는 이미 이 모든 것으로도 놓임 바 되는, 한 아름다
운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자신의 자세를 염려하곤 하지만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세와는 무관하게 변함없
이 머물다 가는 안개처럼 그렇게 어느 날 문득 가만히
우리를 둘러 서 있곤 하는 것입니다.
늘 처음이면서 늘 마지막인 이름으로.
저에게 들리는 것이 당신에게 보이고 당신에게 보이
는 것이 저에게는 들려오는, 사랑의 담론은 결코 서로
로하여금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사랑은 은유입니다. 저로하여금 당
신의 극히 사랑스러운 모습만을 보도록 하는 상징적
약호이기 때문입니다.
은유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향해 끊임없는 움직
임이게 하는 이해이며, 눈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라
해도 반복되는 고백의 단위로 서로의 존재를 가늠케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끝은 시작보다 낫습니다. 시작에의
사랑은 자꾸만 자신을 풀어 사랑을 가꾸려고만 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아름다운 이름인 것입니다.
사랑의 끝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예감입니다. 되풀
이 하듯 거듭되어지는 자신의 고백으로 사랑의 잔흔을
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아름다운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늘 처음이며 늘 마지막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아름다운 이름, 사랑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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