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정
그대 머물 수 있도록
내 마음 한 자락 비워 두었네
더불어 그대 고운 숨길 차지하려
벌써부터 나의 상처 도맡아 두고
지나온 시간 속의 숱하고 숱한
가래 끓는 소리에 귀 익혀 두었네
그런들 내 마음 비좁기만 하여
편치 못할 그대 자리 어쩌면 좋아
미련도 삭혀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그대 편히 고일 수 있다면
주저 않고 삭혀내고 솎아낼 것을
그대 머물기를 바라기엔
나의 마음 분절로 들어 찬 것 많아
절로 한숨 내차며 오후 맞는데
비워 둔 한 자락 마음으로
살그머니 깃들다 가시는 소낙비
채 마르지 않은 하늘가에
무지개로 서 계셨다
뽀얀 얼굴로 부끄러워하시니
저토록 수줍음 많으시니 어쩌면 좋아
마음이 가난하여 옹색한 얼굴로
낯 돌려 애써 눈물 감추고 그저
분주하기만 한 태도이지만
그대 머물러 주신다면
한량없는 덧정으로 두루 머무신다면
내 낯뜨거운 미련 채 솎아들진 않았어도
그대 고운 숨길에 단잠으로
離苦 질 터인데
*이고(離苦):[불]고통에서 벗어나는 일.
輓歌
일찍이 떠나온 고향
기억조차 없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면 노론리 420번지
그 산자락에는 어느
바람이 머물다 가곤 한다
田畓을 놓을 수 없어
賦役으로 몇 사람 다치게도 하고
붉은 완장으로 무장을 하기도 한 것이
모두 田畓 때문이었다
너나없이 바람의 변덕쯤으로
죄를 묻지 않았는데 나의
祖父는 헛돌다
술에 취해 누운
강원도 어느 산자락에서
그 값을 치르느라 헛돌다
헛돌다 가곤 하는데
田畓은 바람으로
연고 없이
찾곤 하는 고향
갈 수 없는 나라
예배당 아래,
아름드리 소나무가 섰다
그 늙은 소나무 엉덩판에
낡은 타이어를 동여매고
해가 지기까지
야구방망이로 후려쳐 댔다
날이 기울며 맹꽁이 배처럼
까맣게 부픈 이슬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가리 벌린 타이어 속에는
깨알같은 글자들이
안개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수취인 불명의 엽서가 된 것은
나의 느닷없는 이사 때문이 아니다
오후 한 때 곧추세우는 말들 너머에
그 너머 종 탑 뒤편으로 오소리 한 마리가
재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낡은 타이어 속에 저토록 많은 글자들이
숨어 있을 줄이야
서로가 확인할 수 없는 안부처럼
그동안 지내왔던 시간들이
잠깐 지나던 안개이거나
오소리이거나 전혀 다를 게 없었다
46번 국도
엇갈리듯 비껴 지나치는
굉음 속의 자동차들
100키로 이상
가라앉는 46번 국도에서
몇 번이고 뒤돌아
굽이치듯 낮게 이어지는
저 산과 들을 만나
산을 닮아
들을 가로지르는
검은 강줄기 위로
표면에 닿는 요란한 소리와 상관없이
과속방지 무인 카메라에 찍히는
지나온 순간들
현재는 언제나 지나온 것에 대해
만만찮은 과태료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속도에 비례하는 벌점과 함께 우리는 서로
엇갈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46번 국도에서
서로를 지나치며
7번 국도
길 따라 굽어 다만
길 굽어
그대는 자리하는가
들어앉은 마을
포구마다
동해를 중심으로
누웠다
언제나 푸른
저 초록의 언덕으로
우리는 닿지 못할
수평이었다
친숙하게 뒤채며 맴도는
갈매기처럼
점점이 찍어 놓는
포구…
포구…
포구…
그대 눈물
동해 따라 누워
여러 번 누워
돌아눕기만 하는
7번 국도에서
11월의 비
물고기의 비늘 같은
코발트빛 물줄기
역류하는 11월의 비는
고된 숨결이다
무어라 뻐끔대며
말 건네는
물고기의 입술이다
스며들지 않고
흘러가지도 못하는
11월의 비는
물고기의 언어다
소리 없는, 말
조용한 수다
자신을 등에 지고 떠나는
낙엽들의 행렬을 탓하지 않는다
11월의 비는
고단한 몸부림으로
조용하게 선다
기다림으로
기다림으로
마른 낙엽의 소리가 되어
잘게 부서지다
일렬로 떠도는
가늘게 떨다 허공으로 치오르기까지
노란 잔디의 헝클어진 모습을 보았다
아차, 덧없음에 깃들다 가는
우리 사랑의 뒤척임
바람결 그 마디마디에
기다림으로 멍든
저, 푸른 눈의 하늘을 보았다
들까불다 흩어지고
낙엽으로 날다 한 낮의 기록으로
짧은 역사가 되는 저 바람과
하늘과
입안 가득
베어 물린 그 기록의
숨가쁜 오후의 저 수선스러움을
등져 서 있는,
등 시린 나뭇가지들과 서로
일궈내는 애끓는 행위로
그러므로
기다림으로
기다리다 지쳐 제자리에서
기록이 되는
한낮 사라짐의 흔적으로
귀가연습
아무 때나 돌아가 등대고 누울 수 있는
귀가연습을 한다
반듯이 누워 일으켜 세우는 사람도 없이
넉넉한 무관심으로 떠도는 희망이 되고 싶다
위안보다 강한 피로는 없다
실명전환 하던 날,
나는 연습한다
더 이상 내보일 것 없는
희망은 두렵지 않다
낯설지 않은 흉내처럼
혼자 아슬아슬하다
물먹은 솜 같이
딛고 서면 삐쳐나는 미련 때문에
언제나 헛발질이다
돌아가 눕고 싶다
미련조차 희망을 갖게 하는
그 넉넉한 무관심에서
찔뚝거릴 필요조차 없는
본래의 내가 그립다
말 줄임표가 말없음표에게
말이 하고 싶어
자질구레한 것을
곰씹으며
하늘에 걸리는
반달로 뜨고 싶어
마른 입술
연신 혀끝으로 적시며
되돌 듯 감기는 반달처럼
네 기억이 아픈 거야
아주 오래 지켜온 순결
나는 이제 너를 범하고 싶어
한 기억으로
그 만큼 너에게 내주고 싶어
반달로 걸린
나머지 감춰진 곳을
알면서 번번이
말 줄임표가 말없음표에게
강요하고 내주던
바로 그 자리
너에 대한 그리움은
수박껍질 무늬처럼
가지런하지 않다
말없음으로
말 줄임표를 대신하면서
나는 너를 범하고 싶다
고목
마음 한복판 아주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기웃거리는 사람마다
실을 널고 합장하는가
저마다 이웃이고
가족이었다
볼썽사나운 꼬락서니하고는
귀찮다
도대체 나에게 바라는 게
사는 날 수만큼
늘어나는 것 같다
그저 고목이어도 좋겠다
적당히 틀어져 볼품 없어도
팔 벌려
하늘 어딘가를 향해
익숙하게 서 있을 수 있다면
어느 날 참새 날아와
굿판처럼 소란스럽게
놀다가도 좋겠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손가락이 긴 여자와 사랑하고 싶다
손가락이 긴 여자와
사랑하고 싶다
언제쯤 해서
지난 시간을 낱낱이 고백해도
전혀 괜찮은 사이가 되었을 때
무심하게
그 긴 손가락으로 나의
기억의 갓끈을
풀어줄 수 있는,
손가락이 긴 여자와 사랑하고 싶다
잇짚 쌓아 올린 기억의 지붕 너머
기억의 달빛이
볏짚 틈새로 번지는 동안
(손가락이 긴 여자는 신경질이 많다)
고백이 머무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마음껏 살갗에 닿는 순간을
망설일 줄 아는
팽팽한 긴장으로 느끼며
사랑하고 싶다
날이 차고
수면 위로 철새들 날아오르면
저만치
맑은 하늘에 줄긋는 가늘고
긴 기억을 따라
흔적도 없이
선명하게 지워지고 싶다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면서
사랑하고 싶다
낮달
낮달 떴다 저기
낮달 떴다
읽다가 덮어둔 책장처럼 언제든
뒤적이다 다시 덮어두어도
그 모습 참 만만하다
쓰다만 편지를 다시 읽으며
철지난 남방이며 면바지를 다림질하면서
언제고 풀썩 주저앉아도 반가울 것 같은
아 저 낮달 오늘도 혼자다
관심의 목적을 잃은 것일까?
노랗게 고여 있는 한낮부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핏기 없는 얼굴로 침묵하는가?
등에 엑스선 긋고 고속도로 비질하는
청소부처럼
아랑곳없이 흩어지며 나는
무수한 참새 떼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데
저 정신머리하곤,
무슨 생각으로 산에 앉았나?
거뭇거뭇 어둠이 찾아오는 줄도 모르고
바짝 마른 전신 줄에 걸려
천천히 수음하는 꼴이라니
한낮 참 쓰레하다
소래 포구
출렁이는 물결 따라
등살 벌겋다
어물전 근처 기웃대다 설쳐대고
오가는 사람마다
말참견 다 해주고
한시름 놓고 소주라도 한 잔 걸쳤는지
발그레한 얼굴
한량없기 그지없다
갯벌 위 분주하게 흩어지다
날다 도리질하고
조가비 껍질에 반짝여
제 눈 시려하더니
뱃전에 걸터앉아 깜빡 졸았나?
투덜대며 들어서던 협궤 열차는 간데 없는데
뒷걸음 쳐 철길 따라 누워
시치미 떼고 있는
저, 속도 좋아라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
처진 어깨마다
곧추 세워 다독이느라
연신 부산스럽고
제풀에 밀려 못내 서운했는지
응달에 가 한숨짓는
언제나 근심 어린 어머니 같다
갈매기 무심하게 날아드니
소래 포구 참 넉넉하다
설거지를 하다
개수대 물 속 요지경 세상
입 쩌억 벌리고 있는
고등어 대가리
저 눈깔 뽈록하니 나를 쏘아본다
뒤엉켜 똬리 틀 듯 쌓여 있는 그릇들 속에서
고등어 살점만 둥둥 떠다니고 있다
대가리로만 멀쩡하게 헤엄치다
제 살점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물에 반쯤 잠긴 시금치는
기름때를 벗고 흐늘대며 춤추는가 하면
토막난 무 조각들 층층이 서로 기대 있어
복잡하여라 뜯겨진 상처마다
처절한 비밀이 숨어 있다
다 살아가는 흔적이 다른 것이다
가소로운 것들 수세미로 빡빡 문지르다
무엇으로 먼저 닦아내야 하는지, 나는
흔적 없이 살다가고 싶다
서둘러 거품을 내고 설거지를 하다
수챗구멍에서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고등어의 눈길과 마주친다
빙어
눈을 떠보니 아찔하였다
거실 한가운데로 길이 나 있고
훤히 속 들여다보이는
빙어 떼가
몰려다니고 있었다
만나지 못하고 고여 있는 길,
길 위에서
황색 빙어가 입질하다
저수지처럼
작은 움직임조차
번거롭고 따분하였다
고정된 사람들 내 거실에 가득하다
우리는 너무
서로의 속을 드려다 보며 사는가 보다
또 한 장의 마른 낙엽
가끔씩 아이들 손에 이끌려
가 앉았다 들어오곤 하는 놀이터에서
가을이 왔다 그랬는가 싶더니
작은 입자 우주 하나 툭 떨어져
기적이다 어김없이
아스라하게 날다 툭 떨어지는 한 날,
자판기 커피를 뽑듯이
가을이 간다
실로, 누런 낙엽 한 장 주워
책갈피 속 어디 다른 낙엽 위에
포개 넣는다
또 똑같은 가을이다
서른이 되었을 때 분명 내 인생은
뭔가 확신에 찬 모습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굳이 서둔 것은 아니지만
둘째를 두면서부터 자신이 없어졌다
그것은 이미 서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너무도 뻔한 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마른 생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서른 살의 내 아버지는 너무도
당당하게 나의 아버지이셨는데,
나는 초조해진다
대부도
(1)
바지락 칼국수 먹고 싶어서
이른 아침 서둘러 대부도 간다
바다에서 건져진 섬,
대부도
안개는 몸풀듯 일어나
달라붙는데
와이퍼를 3단에 놓고
천천히 다가가지만
저만치 물러서서
숨 고르고
자맥질하는
모래 안개 대부도
끼르르-- 끼르르--
안개 너머
대부도 운다
(2)
희뿌연 먼지 안고 몸 뒤척이다
대부도의 겨울 하늘은 낮기만 하다
덤프트럭 가로질러 헤쳐 놓는 섬
제방 쌓고 다리 놓아 건져 올린 섬
섬멍구럭 조여 질러 섬 가두고
한 섬 한 섬 내다버려 엮어 만든 섬
섬 아닌 섬에 앉아,
바지락 칼국수 먹고 오던 날
또 다시
모래 섞인 안개는
자맥질하고
..*섬: 사면이 물로 둘러 쌓인 작은 육지
섬: 곡식을 담기 위하여 짚으로 엮어 만든 멱서리
섬멍구럭: 섬을 묶어서 친 얽이
다림질
너를 생각하면
구겨진 기억들이 아프다
밤마다 잘 다려진 어둠에서
유혹적인 것은 삐쳐 나온 나무들이다
석조 건물 뒤로 숨기나 하지
노란 가로등이 깔깔대도록
무심히 서 있는 꼬락서니하고는
어둠에 가려 제 몸 잃기까지
너에게서 온 마지막 편지는
아직 뜯지도 않았다
마지막인 것을 안다는 건
여느 망설임보다 잔인하다
10여 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그 망설임으로 네 사연을 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밤길보다 낯설다
너무 반듯한 어둠은 두렵지 않다
너로부터 나의 기억들이 구겨져 있다
몇 번을 더 사랑하느라 비로소
다림질을 배웠다고 생각하였는데
펴 본들 또다시 구겨지는 것을 보면
구겨진 것을 펴기 위해 나는
너를 기억하게 되었다
기다림으로
혀끝의 말
농익어 무겁다
어둠이 내려
촛불 밝힌 방안에서
말끝마다 어둠이
뒤챈다
지나고 보니,
상처 있는 곳에
그대 고인다
비근대는 촛불에 맞춰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어지러운 어둠 사이에
그대 함초롬하다
내 어찌 더
말을 이을까
그저 어둠을 태워
그대 만나지 않을까
기다리다
촛농으로 흐른다
날이 차가웠다
세상이 돌았던가
짊어지고 가야할 것들
아랑곳 않고
날이 저물면서
바람만 차가웠다
아마도 그때
사랑을 잃었다
먼 산 찍어내며 거리에 흩뿌리던
세상이
흔들렸다
빈 웃음만 순간으로
머문다 머물면서
가끔은
그때처럼 사랑하고 싶다
겨울 풍경
-어느 특수학교에서
모로 기운 담벼락에 아이들은
담쟁이 풀로 기대어 서 있다
제각각 신발 끝에 바른 볕 와 닿았지만
젖멍울 선 겨울 바람 우울한 시선으로 날려가고
도로 휘감겨 도는 그 따스함이 무심하다
휠체어에 앉은 녀석은
도대체 허옇게 벌어진 입가의 맑은 침이
연신 마르지 않는 샘 같다
열린 대문 밖으로 사람들이 기웃댄다
누런 라면상자가 쌓여 있고
아이들은 어김없이 그림자처럼 구겨져
담벼락에 기대 있는 걸 보면
연말은 연말인가 보다
오빠 난 사진 찍히는 게 너무 싫어!
저들 서랍 어디에서 혹은 사무실 벽 어딘가에서
멀쩡하게 웃고 있을 내 모습이 처량 맞아
라고 하던 어느 아이의 말이
귀밑신경을 쑤신다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저 폼하고는 그래도 좀 웃어라
구두 끈 풀린 볕들 들락대며
까불락 대고
대문 밖 저 무심한 소리들
청맹과니 겨울 속에
쩌렁쩌렁 울린다
소녀
양계장 끼고 돌아 언덕배기 오르면
소녀의 집이었다
정방형 마당 건너
곧게 흔들리는
떡갈나무는 기억한다
이른 새벽이면
마을 이편에서 닭울음소리 얼얼하였다
삼거리상회까지 허옇게 뿌려지던
희뿌연 달빛 부스럼
씨부렁대며 돌아눕는
논두렁 따라
바스락대다 풀풀 날리는
구구한 흔적은
싸늘한 바람으로
새벽녘에 눈이 내렸다
그리고
한 시간째 버스가 오지 않았다
길 저편 세상에서
건너오지 못하고 있던 아침,
소녀는 교복을 입고 종종걸음 치다
새벽을 매암 돌다 흩어지던
눈꽃송이가 된다
그리고 투덜거리며 버스가 왔다
아침해가 배시시 얼굴을 내밀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은 이 모든 것이
순간으로 스치며 연속된다
가을 밤
어스름 날이 저물고
하나 둘씩 가로등 돌아누워
사람들 귀가를 서둘고
낮 동안 들고 다니던
오래된 편지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한 뼘이나 까맣게 물든
그 알 수 없는 허공 속으로
망설이던 걸음
다시 또 내 마음
검은 果肉의 흔적으로
미련에 두지나 않을지
멀 긴 참 먼 길이었습니다
이제야 몇 자 적어두고
간직하려는데
바람은 무겁게 땅을 구르고
가만있던 낙엽들 덩달아 들까부는
가을 밤
저 무심하던 외면에서
짐짓 꾀똥 마려운 것은
가을밤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입맞춤
젖버듬히 물러서는 산그늘에서
찝찌름한 것이
혀끝
파르르 떨며
달콤새콤해라
사시나무 샘 바르는 통에
봉긋한 무덤 위
털썩 주저앉는 달빛
애끓는다
바퀴벌레
싱크대 모서리 타고
바퀴벌레 걸어간다
그 걸음이 어찌나 느리고
지루하던지 나는
꼼짝 할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승부를 내고 싶지만
저 지친 걸음걸이를 보라 비록
옮기기조차 힘든 다리들로
노려다 보는 데도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서늘한 對面도 과분하게
두 발로 걸음을 떼기조차 힘든 세상에서
번거로운 것이 어디 너만할까
손끝으로 번져나는
황갈색 푸른 기운
시간의 자국으로 남겨두자
발소리를 잃고 살아야 하는
나의 시간을 위해
저무는 하늘에서
저무는 하늘에서
한 때의 기억이
늙는다는 거다
더 가 봐야 또 같은 길이고
그제야 지나온 것이
한 땀은 소중한 법이다
서로는 기억의 통로를 따라
어둠으로 내리는 거다
어차피 달랠 수 없는 허기라면
어둠 속에 가만 두는 것도
누구 탓이 아니다
미련조차 고마운 것
저무는 하늘에서
하루살이 떼가 분주하게 떠 있는 이유도
다 그런 거다 그리움에 대한
짧은 기록의 몸짓인 거다
한 때의 기억이
그저 고마운 거다
저무는 하늘에서
사탕수수
손을 베기 쉬운
껍질을 까고
대롱을 씹는다
한 입 가득 침이 고이고
단맛을 느끼기도 전에
번지다 씹히고 뱉는
반복적인 리듬이 떫다
첫 맛을 못 잊고
다시 한 입 베어 물게 되는 것이고 보면
설마
우리 같다
서로를 안다는 건
손을 벨 각오를 해야 한다
조심스레
반복적인 리듬으로
떫다 떫어
죄의식
돌아보지 마라
견디기 어려운 목마름이라
두고 온 것은 죄의식이다
자신의 몸이 사라지기 전
눈물이었다면
조금 늦게 만난 까닭이다
뺨을 스치고
천 년의 시간을 더 견디어
그대 안에서
소금 기둥으로 서 있는
나는 죄의식이다
마른 기억 푸석대고
참았다 한꺼번에 터뜨린
흐르다 마르지 않는
그대가 떠난 자리
혼자 남은 두려움이다
未練
뒤돌아보지 않게
未練도
그대에게 미안하다
용서는 시작이다
사라져 가는 지난 시간의
소돔과 고모라
그 소용돌이 속에서
잔인한 물푸레나무여
부디 산기슭 습지에 묻혀
살 속에 고이
한낱 시간에 불과한 것으로
오늘은 소금 기둥이다
어제
어제는,
하루종일 서 있다
나무도
빌딩도
그 곁을 부는 바람도
어제 곁에서는 모든 게 다
서
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오늘에 머무는가
너무 오래도록
한 곳에 서 있다보면
凝視의 목적을 잃고
희망은 休止다
길 잃은 바람에는
소금기 배 있다
새벽 네 시
(1)
새벽 네 시
낙타가 걸어간다
내려놓을 수 없는
등짐을 지고
잠든 낙엽의
빛을
밟으며 낙타가 걷는다
한동안 모래 바람은 뜸하다
다시 불고 사흘 밤낮을
헤매 다닌 사막은
낯익은 길이다
(2)
젖은 눈길에 그대 눕는다
그대 곁에 누운 흐린 날
낙타는 혼자서 걷는다
두 눈을 떴다 감는 동안씩
그대가 밟힌다
사모곡
밤길마다 사뿐히
여미는 당신
산과 나무는
저 혼자 사랑한다
산에게 묻는다
나무더러
나무인 것을
다짐하느라 산이 되고
모자란 것은
언제나 당신
먼길 떠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밤길마다 사뿐히
당신 여민다
내 안 가득 여민다
빗소리를 닮은
끊겼다 울려 다시 울려
빗물은 가년스러운 접합
기척도 없는 만남이다
넘나들기 쉼 없는
고대한 적 쓸쓸함이다
임의로 멈출 수 없어
셀 수도 없어
연연하지 않고 헤아리지 않고
그대 그리는 마음
빗소리를 닮았다
마음
다다르면 머뭇거려
산허리 질끈 동여매는 안개
하염없는 구름
또는 합장(合掌)으로
청명한 하늘
고된 산행이 멀다
마음은 머뭇거려 버릴 것 숱해
흔들리는 그늘조차 곧추세우고
짧게 지나가는 여름 햇살에서
山寺의 동자 마냥
제풀에 겨운 合掌이 된다
게 눈 속의 연꽃 구경하러 가던 길
그대 눈 속
짙은 綠陰의 비밀
지상의 房
누우면 허름한 헛간
방 한 칸 빌려
작업실로나 쓰다
마땅한 명분이 생각나거든
소망이라도 굳이 마다하지 않을 터
들라면 들고
내라면 내는 시늉으로
소박한 꿈이다
가난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족히 사랑할 수 있겠다
지상의 방 한 칸
너는 나의 방(房)
설거지
물방울 듯듯다
말끔하니 포개진 그릇
무엇이든 다시 담을 수 있어
부끄럽지 않은
그릇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步道 틈새
개미 행렬을 좇다 저들의 門이
활짝 핀 것을 보았다
단아하게 오므려 피어난 꽃
암사슴 똥구멍 같기도 하던
잰걸음 쳐 내빼고 내모는
무수한 점들 門의 경계에서
저들의 무게를 느꼈다
수챗구멍은 우리가 일궈낸
일용한 境界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또 다른
通路에서
門으로
씻어 둔 자리
투명한 門이 열리면
활짝 오므리는 門
들어간다
그래 늘 그래
배시시 잠에서 깨면
언제나
머리는 산발이다
이상도 하지 밤새
놀다가는 그대
한 번도 만날 수 없다
하얗게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
눈부시게 탐스러워
한 입 베물고 누가 버린 것일까
저만치 구르다 불규칙적으로
멈춰 서는 그 선연한 잇자국
누가 베물다 버린 것일까
색 바랜 잇자국
불규칙적인 구른 상처다
제가 딛고 서는 선연한 상처인지
술에 취하고
친구 앞에서
뭔들 부끄러울 게 있는가
헛발 딛고 휘청거렸기로서니
흉이나 되려고
안겨도 보고
품안 가득
온기 따스하다
그러나 고백으로
목마르다
미처 갚지 못한 負債
이제 못 다한 고백으로
사는 데마다 골 깊다
미뤄 둔 탓에
빚이다
찬바람 일고
찬바람 일고
감기처럼
그대 향한다
수화기 저편 반송되듯 돌아오는 묵음
달빛은 이별처럼 시리다
칭얼대지도 않으면서
그대 생각 들어 까치발로
머리맡까지 걸어오는 날선 바람
찬바람 일고 그대
감기처럼 왔다
며칠 이러다
쉬면 곧 낫겠지
산책
하늘은 버려진 승용차 위에
꽃무늬로 박살이나 있었다
그 무수한 선들
내 얼굴은 잘게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외면하는 방향에서
아무렇게나 흩어지다 쌓이지도 못하고
저 혼자 맴돌면서 흩어졌다
마른기침을 하듯 나무들이
바람을 흔들고 있었다
몇 개의 낙엽은 눈발보다 멀리
날아가고 나의 시선 속에서
서성이다 박살나는 하늘에서
맴돌고 있었다 잘게 부서지며
점점이 선을 긋고 있었다
섬
섬이 있다
바다를 흐르는 바람에도
제물로 바쳐진 딸에게
입다는 무슨 말을 했을까?
아이를 낳고
검정 비닐봉지에 넣으며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섬은 있다
혼자 떠 있는 바다에도
가슴 위에 섬이 있다
섬 위로
바람이 분다
섬의 말을 듣고 싶다
그 생각이 머무는 곳에서
※ 입다: 이스라엘의 용장으로 승리의 약속으로
딸을 제물로 바친 인물
밥, 蒙學선생
밥은
蒙學선생
고무튜브 속 잘린 하체로
뱃가죽으로나 시장 통을 쓸며
기어가는 남자를 본다
때로 무심한 발들 사이에 엎드려
김 이는 이밥이나
달게 먹는 그의 모습에서
한 수저씩 떼어 넣는
입안 가득 처절한
삶을 엿볼 수 있다
밀어 넣어야 하는
채울 수 없는 허기
대숲
허리 모로 꺾어 누워버린다
대숲은 늘 그렇다
곧게 찌를 듯이 닿아 있는
늑장부리던 오판화의 먹장구름도
이파리조차 없이
낯붉히며 길게 드러눕는
그림자로 무성하여
대숲 사이
어둠으로 부산하여
조각난 하늘
언제 봐도 퀭하다
주뼛거리던 어깨
고스란히 비어있는 대숲의 좁은
빈 곳
떨구다 잠드는 곧은 잎새들
고백
네가 옳다
그것이 내 마음이다
세상이
너 있어 세상이다
더 세상일 수 없는
세상이 세상일 수 있는
이유도
고백한다
그래서 너이다
해바라기
나를 딛고
나만 바라보기를
멀고 어지러운 길
돌아 온 길 어디쯤에서
달이 기울면
아침은 마다할 수 없는 것
걸음으로 날개 짓 대신
저 새벽, 닭 울고 나면
당신의 시선 언제나 낯설다
나의 마당 비좁아
그 한 귀퉁이 담 너머
바라보고 서는
허리 고이 펴 딛고 설
당신의 마당으로나
그 시선 닿기까지
서야 하는 자리되어
머무신다면
46번 국도
엇갈리듯 비껴
지금은 사라진다
100키로 이상
46번 국도에는
몇 번이고 뒤돌아보는
굽이쳐 낮게 이어져
산과 들, 산을 닮아
들을 가로지르는 강줄기
가 사라진다
표면에 닿는 소리가 어지럽다
과속방지 무인 카메라에 찍힌
지나온 시간의 지금,
꾸며내야 얻을 게 있는
오늘의 시계탑에서
현재는 꼭 그만큼의
만만찮은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늘 지금은 아니다,
애써 아니다
골목길
몸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골목길을 걷다보면
건물 틈새
지린내 나는 적막감이 배어 있다
마지못해 길을 터주는
집들
몇 천만 년 전부터
이어져 있었을 외줄
골목을
빠져나와야 할 때가 있다
빈틈으로 흘러드는 소문 넘실대다
석 줄 넉 줄 주름 짓는,
골목길
주름진 얼굴 환한 미소 담아
내밀한 혼란
견줄 데 없는 착오
외면하듯 어림잡을 수 없는
견고한 틈새,
그 빈혈 같은
습관의 통로를
구석구석 스며들고 있는
한나절의 소음
우리는 익숙하다
백년 전 휴게소
어쩔 수 없어
그래서 주체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어
끊어질 듯 이어져
때때로 갈라지며 흐르는
46번 국도에서
백년 전 휴게소를 만난다
어디쯤에서
다시 이어질 것을 알고 있는 듯
도도하게 흐르는 물줄기에도
곁에 한 점 그림자로만 머물고 있는
백년 전 휴게소
언제 발치께로 걸어왔는지
덩치가 어마어마한 어둠이 흔들어 놓는
저기 멀리 개 짖는 소리
무서운 속도로 스쳐 가는
짙은 어둠의 어질증
인연으로 닿을 여기
백년 전, 휴게소에서
정지된 하늘을 만난다
나 대신 머무는 메아리
듣다 흐르다 멈춘
백년 전 휴게소
迷兒
서서히 길을 잃는다
처음부터 낯선 길로 접어드는
어리석음은 아니다
무심한 길에서
길들의 유혹은 낯선 이어짐이다
바닥 없는 길 위를 걸어보았는가?
겉돌고 있는 그런 난처함
자신을 발견하는 그 곳
그 전의 길 위에서
무심함에 기인한다
한 번도 대한 적 없고
손끝 한 번 스친 적 없음에도
일듯 일어나는 사랑을
경계하지는 않는다
수만 갈래의 길 위에서
또 하나의 길이 놓여 있었다고 해서,
단 한 길만을 겉돌듯 헤매는 것으로
배회는 시작된다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가 닿을 목적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길 위에 있다 해도 내딛을 바닥이 없고
뻗어 찰 허공이 없다면
익명의 사랑이 그처럼 잔인한 것을 아니다
철길 위로
가평 역전 허름한 다방
차 한 잔을 마신다
와 앉는 가벼움으로
멀쩡한 입심 노닥거리다
창 밖 내보이는 역전 가득한
기다림은 잊을 수 없다
야멸친 기운을 이겨낼 수 없다
길게 기적 울리며 들어서는
청량리행 열차
비워내고 도로 떠나는 자리마다
서성이는 오후
스침을 어찌 기다림으로
제 멋 겨운 외로움으로
털어 내듯 흔들 수 있을까
나뭇가지 저 선명한 하늘에서
엉거주춤한 2월은
아둔하기만 하다
철길 위로
쓰라린 사실처럼
기차가 달린다
닿지 못할 간격 이어가는
스침 내몰리듯 다시 떨어지는
긋고 지나는 맞닿음으로
2월은
비워짐을 채우기 위해
대합실을 서성거리고
광장을 맴돌다
제한된 시간으로 숨막히다
꽃
채워도 비워지는
러브호텔
곤두선 채 흔들리어 남들 눈 피해
들끓는 감정
과부하에 걸린 사람들
재충전을 시도한다
죄를 묻지 말자 문을 열고 들어서
인간다움에 숙연히
거리로 뒹굴던 자리 내어주자
엥겔 계수는 사랑의 몫이다
화단에 시든 꽃 시들어야 꽃이지
꽃이어서 시든다
강촌에서
치잣빛 고운 저 산을 좀 보셔요
옥양목 두른 그 어깨는 또 어떻고요
어림잡아 달려 온 치기 어린 사랑으로
닿지 못할 기다림에 조바심 내고
저의 마음을 품듯
한참이고 마주하시니
염치없어 고개 떨궈
한숨짓는데
사람들 발길 유난히 잦아
태연하게 서 계실 틈도 없는데
드나드는 하루 해 날품 대하듯
어둠 내려 相距 멀어
까만 선으로 받치고 서신
그 자리 숱한 세월
빗겨간 바람들
떨어낸 잎들은 또 얼마고요
이루고 선 하늘 멀다 해도
붙박아 엎은 강촌에서
굵은 선으로 그어 지키시는
그 자락이나 밟고
물줄기 돌아드는
저기 저 산을 좀 보셔요
만화방
(은행에 들려 대출 신청을 하던 날
사람들은 한사코 그만큼만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번호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뽀얀 담배연기로
스무 자 남짓 만화방은 수중 세계 같다
벌쭉이 입질해대 듯 빠져드는
기죽은 사람들
잊기로 작정한 시간을 위해
모래알을 씹고 있다
무협지 위의 먼지를 털며
흥얼거리시던 어머니의 찬송가 소리
낮게 어깨를 두르며 쓸려 다니다
잠들곤 하는 먼지투성이,
어항 속이다
널브러진 책을 주워
탁자에 올리려다 건네 본 시선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오후 햇살
(보증인을 한 분 더 세우셔야 합니다
요즘 가계대출은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꼭 어항이었으면 좋겠다 모래 씹으며
태연한 첫 웃음 짓는 꼴로
무심하게 살고 싶다
입김
앞서 걷는 어머니에게서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입김
등에 업힌 동생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벽마다 나서시는
단내 나는 언덕바지 예배당으로
안개 속 멀찍이 내 볼에 와 닿는
어머니의 날숨
누이와 막내가 잠들어 있을
지하 단칸방에서 어스름 날 밝으면
되짚어 서두시다 허방다리
닿을 곳 없는 이슬이 되시기도 하셨을
주인집이 깨기 전에
나와 동생은 돌아가야 하던 길,
그 식지 않는 어머니의 입김이
이모 집에 들어 언 볼 녹이며 쉬어들던
들숨으로나 눈물이 되곤 하였을
이제와 자식이 많다는 이유로
방을 세주지 않는 주인도 없을 텐데
여전히 뜨거운 입김 쏟으며
어머니 새벽 엎치신다
그 날숨의 뜨거운 입김으로
오늘의 내 지상의 房이시다
滿月
방 안 가득 밀려와
하얀 가루로 일렁이는
넘쳐 마르지 않는 샘
잠겨보는 子宮 속 가득
옴짝달싹 못하는 농밀한 사투
똬리 튼, 사랑
언제고
잘게 부서져 흩뿌려질
예상치 못할 분말이지만
차면 기울 것을 염려하기에
서로 다른 上弦으로 왔다 얼른 돌아서는
순간의 입맞춤
기울 곳은 스민 것의 세상이다
베어 물린 자국마다
고스란히 채워야 하는
그리움
꽉 차 넘쳐흐르는
사랑의 溫情
미처, 발 담가 들어 설 수 없는
이유가 되는
滿月은
순간에서 머문다
晩花
그림과 글자만 있는
소리 없는 구역
언젠가 비껴갔을 해학의 바람처럼
붓질 자국은 선명하게
꽃들은 향기 없는 소리로
서로의 눈 마주친다
글자로 피어나 만개한 꽃
한때의 기억을 곰삭아 엮어 치고
얼룩이 되어 번지는
晩花
선긋기 좋아하는 사람들
그 안에 갇혀
설정된 인물들로 정지된 얼굴로
무심하게 저들을 가두어놓고
정착지원금으로
자신들의 눈알을 하나씩
빼어 주고 사는 어느 나환자촌
그 헤픈 양계장 틈새에서
서로는 해프닝처럼 산다
겉뜨물에 젖어 풀어 오르는 바람에도
눈알 없이 탁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 없는 말(言)들 그렇게 비처럼
하늘을 적시고 선을 그으며
번져 하늘 아래에서
그 외진 어느 정착촌에서
만개한 꽃으로나 살다
추억
낯붉히며 찾아든 허름한 햇살이
저물어 고이 묻힐 농후한 비밀을 안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오르는
언덕배기의 숨찬 정상만큼이나
우리의 기억은
낡은 앨범 속 같다
손마디에 걸린
피로한 하루가 풀리기도 전에
내 여자의 가슴에 묻힌
추억의 방주를 회상하듯
떠 있어야 하는
물 위에서 과연 우리는
不可近不可遠이 아닐까
추억은 談論으로나 가능한
기다림의 낯선 자세로
하루의 언덕 꼭대기에서
결국 서로의 수고를 비껴
지나쳐 가는 하루해처럼
이제 다시 날이 기울면서
그편으로 저물 듯 날아오르는
저 한가로운 새들처럼
물왕 저수지에서
어디서 흘러와
찌 흔들어 놓은 기다림이 있다
저 기다림의 波長은
주름이 참 곱다
낚아 채 보면 낯설지 않은
허탕이지만 허탕이 익숙해질 때
멈춘 시선으로
하늘(물에 드리운)을 잡고
섰다 흔들리는 바람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가늠하곤 한다
波長은 기다리는 마음을 대신하는
돌출 간판 같다
꽉 찬 어둠에 덧씌워져
졸고 있는 안개 속의 야광 찌처럼
선명하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건져 올릴 수 없는
하늘의 波長에서
나의 손끝이 고요하다
기다림은 그래서 더 곱다
책상은 책상이다
며칠씩 쌓여 있는 책들은
포개져 열리지 않는 단절이다
제 무게에 겨워
생겨나는 조바심이 싫다
율무가루처럼 나의 기대는
먼지만 쌓인다
이물감 드는 지나온 사연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조바심의 잔금을 비집고 나오는데
좁은 공간이나 거니채고
며칠씩 기다려 본들
책상은 책상이다
사랑
눈물 한 방울에
담겨 있는
품안 가득한
온기
늘 허기진
고백
골 깊은
한숨
패여 뚫린
생각의 구멍
사랑
은행잎 쌓이고
밤새 수북히 쌓여 있는
눈부신 은행잎들
한 뼘 남짓한
地面의 두께가 부끄러워
고스란히 두고 온 나뭇가지만
올려다보고 있다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일이 얼마나
고된 숨결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앙상하게 뼈만 드러난 나뭇가지들은
건들거림을 통해 홀가분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까맣게 물들였다가
고스란히 놓아두는 일 없이 거두어 가는
사라질 때를 아는 어둠처럼
번번이 마음에 걸리는 일은
바로 그 어둠의 방식이다
과연 홀가분하기만 한 것일까
겨우내 혼자 보내야 하는
그 긴 시간을 건들거리며 무심하게
견뎌낼 수 있을까
채 어디에 쓸려가지도 못하고
은행잎들 한 자리에 쌓여
나뭇가지만 올려다본다 자꾸만
자꾸만 머뭇대며
아직은 그 자리에서
애써 외면하는 나무
왠지 얄밉다
暗示
들창으로 몇 줄
볕이
선을 긋고
어머니
먼지 앉은 만화책
닦고 계신다
미닫이 틈새 사람들
어깨 위로 셀로판지 엇대
볕들만 듯듯다 사라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일렬로 줄짓는 무수한 입자
펼쳐 놓은 책 사이로
머리카락처럼 피어나는
얇은 막 걷어내며
하나의 그림이 된다
행상 여인의 악다구니
거드는 말참견에
한 데 어우러져 씨근벌떡한 거리
어머니 머리맡에
보채듯 일어나는데
쉼 없이 걸레질 치다
스스로 암시가 되어
먼지 앉은 만화책
닦고 계신다
노을
노을진 하늘 위로
바람은 더디기 마련이다
싱겁게 낯붉히며 맴암 돌다
엇베듯 출렁이는 바다의 노을이라면
싫증도 우리의 엇보다
긴 호흡 사이로 번져나는 여백을
난데없이 돌아오는 길에 깨닫게 되었으니
순간 이별조차 간소하다
낮 동안 쬔 볕에 그을렸을 저 까만 갯벌 너머
밀물 들어 무던한 미련이 남는가 보다
이별은 탐스럽도록 고운 사랑의 목적
남길 것 없는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타드는 열병 또 한 차례의 매혹,
빚을 내어서라도 차지할 작정이다
흔히 그렇듯 노을은 순간이다
지고 난 볕 뒤로 숨겨지기까지
낮 동안의 행적은 묘연하다
탁구를 치듯
받아 넘겨야 할 것은 작고 보잘 것 없겠으나
받아내야 할 것은 터무니없이 무겁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해도
찰나적으로 내 안에 머물다 가는 생각은
굼뜨고 살갗은 날렵하다
그어진 선은 있으되 넘나들 수 있는 것,
서로의 자세로 받고 되돌려 주는 것이
의도치 못할 범주임을 인정하는 셈이다
건널 수 없는 선이란 되돌아 올 동안의
우리의 기다림의 자세가 엇대어 선을 긋고 그어
서로를 확인하려 들기 때문이다
탁구를 치듯, 사랑도
받고 되돌려 주는 것이
의도치 못할 범주라면
우리가 주저할 게 무언가?
금요일의 아리아
그녀를 안는다 외길로
뻗은 일상
눈을 뜨고 치장을 서두는 아침
출근에 맞춰 오로지 하루
밤새 나누었을 까마귀 떼
눅눅한 침대 위에
잠들어 있다
물안개로 번져 창가에 서면
스스럼없이 볼에 감기는 아침 공기
바스락거리며 돌아눕는
곡선 가지런한 내 여자의 뒷모습 같다
혓바늘이 돋아
안개 거두며 파닥대는
굴뚝 너머 줄짓는
연기 등을 쓸어 내리는
손끝의 낙서
팔베개를 풀어 사사로운 동침을 깨고
체위를 바꾼다 일 주일 단위로
元利 균등한 우리의 原罪
창 밖으로 금요일의 비
여인처럼 운다
낙서 같은 자세로
누워,
오로지 하루
디프테리아균
금요일의 아리아
移越
한참을 걷는다 걷기에 익숙해질 동안
걷는 일에만 충실한 저 그림자들
사탕수수 밭 뻗어 있는 길 위로 잦아들 듯
스스로 걷고 또 걷는다
후박나무 아래 성글대는
잡목 떼를 만나기도 하여
성글고 누런 논두렁도 훌쩍 넘어
걷는데 익숙한 오후 반갑다
버찌를 따먹느라 정신이 팔려
입가에 까만 웃음으로 열린
목안으로 감겨드는 찌르르한 맛
까마귀 녀석 간식을 다 먹었다
낯이 익는데도 서로 고개 돌려 외면하는
낮달 뒤미처 햇살은 미안한 모양이다
동네로 들어서기까지 꼼짝도 않고
서 있다 아무렇게나 뒤돌아 서서
서로를 확인하는 서낭당 나무
그냥 지나쳐 가는 그림자도 뭐라 않는데
나뭇가지를 꺾어 표라도 남기는지
장작 타드는 소리로 한 무리 참새 떼
저편으로 날아오르고 뒤늦게 따라온
바람을 무심히 지나쳐 가는 사탕수수는
따돌림에 익숙한 표정이다
뒤집어 읽기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밤늦도록 뒤집어 읽는다
낯설기 짝이 없는
의도적인 은유의 덫에 걸려
바둥바둥 골 깊은 문장 사이에서
놓여나지 못할 때쯤 우리의
완료되는 사랑처럼
예사롭지 않은 사랑이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턱없이 힘든 이별 또한 결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던 바로 그 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장보다 숨찬
내 사랑의 태도가 정직하였다는 것을
온당 될성부른 비망록이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가당찮게 되새김질이나 해대는
그 자체로 이미 나의 사랑은 유머였다 해도
살면서 사랑만큼 익숙한 게 또 있을까
고집스런 태도만큼 진부한 결과다
그러니 우리의 문장 안에서
빳빳하게 완료되는 유머처럼
내 사랑의 체험담을
뒤집어 읽기
단추 구멍
이미 예감했던 것인데도
돌이켜 생각하고
바꾸어 말해 본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확인시켜 돌려보내고
갸웃거리는 습관으로
애태우며 솎아내다 다시 보면
뚫린 구멍이 둘이면 두 구멍으로
셋이면 세 구멍으로,
둘이면 어떻고 셋이면 어떻고
어차피 보이는 건
하나였다
작은 구멍 안으로 여럿의 세상이면
그보다 숱한 단추 구멍이라 해도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모르지, 일 개의 단추 구멍 만한 세상이었는지
그건 상관없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번번이
단추 구멍 같다
곰보빵 아주머니
곰보빵 아주머니가 있었다
소쿠리에 아무렇게나 주워담은 것처럼
신호등이 바뀌면서
건너지 못하고 서 있는 자동차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오가며 검지와 중지를
동시에 폈다 오므렸다
다시 검지를 펴 올리면서
곰보빵 아주머니 다가왔다
가끔씩 스스로 내려진 차 창 속으로
아주머니의 손이 들어갔다
날렵하게 손에 들렸던 곰보빵이 사라지고
천 원 한 장 말아 쥔 아주머니의 손은
부끄럽게 허공을 가르면서
無言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곰보빵 아주머니 다가왔다
수작을 부리는 사이
신호등이 바뀌는 동안 아주머니는 태연하다
저 건너 목적지로 나가기까지
곰보빵 아주머니가 노리는 것은
허기의 찰나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곰보빵 아주머니의 실룩거리는
궁둥이가 자동차 사이를 아무렇게나
비껴 다니는 동안 무언의 흥정은
곰보 난 하루의 허기를 담보한다
황해 미용실
두 달에 한 번 혹은 석 달에 두 번
나는 시장 귀퉁이 황해 미용실에 간다
테이블 위에는 두 달 전 혹은
석 달 전의 잡지가 놓여 있다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으로
나는 황해 미용실 앞을 지나간다
셔터가 올려져 있거나 혹은
내려져 있거나 간판에 그려진
노랑머리의 여자는 색 바랜 얼굴로
웃음 짓고 있다
유리 안으로 누런 海面의
일용할 양식이 갯솜처럼 빨려든다
길 건너 3층 집 남자가 부도내고
폭음으로 죽었다는데 여자는
한 달 새 다른 남자를 들여 살림났다고 하고
송도슈퍼 김씨가 놀음으로
가게를 저당 잡혔고 찬가게 할머니는
밤마다 분칠하고 나간다지 아마
텔레비전을 켜면 부쩍 전라도 사투리뿐이고
옆 집 새댁은 웬 이쁜이 수술을 했다는데
5부 이자를 준대도 사채 빌리기 어렵다고
갈보 밑구멍 값만도 못한 퇴직금을
주식으로 날렸다고 하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동안
누룩을 넣어 빚은 말들이 부푼다
부풀어 황해 미용실은 IMF시절을 나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 항아리 같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해
습관처럼 자라는 희망을 자르면서
황해 미용실은 부유하다
당신은 폭력
마음을 거니챈 시간으로
당신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다
차라리 조간신문의 記事가 되고 싶었다
말 줄임표 없는 사실로
당신을
내 紙面에 담아둘 수만 있다면
引用으로 채워야 하는
記事가 되어도 좋았다
거니챈 시간만큼이나 익숙하게
당신을 인용하고 당신을 담아
간밤에 세차게 불던 바람도
두레상 받아 놓은 듯 당신 앞에
얌전히 모셔 올 수 있었다면
정작, 빗 길에 왔었을
당신을 그토록 터무니없이
외면하지는 않았을 텐데
引用 되어져 오는 나의
오랜 기억으로
댑싸리 밭의 바람 이는 소리같이
引用 되는 당신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다
달의 알몸
홑이불 걷어내어
하염없이 농후한 달의 알몸
호기롭게 기웃대며 엿보는
달무리 짙은 자정으로
잔 나뭇가지들은
왜 저리도 보채는지
먼발치에서 이맛살 찌푸리며
괜히 돌아앉기나 하고
살갗이 먼저 독백처럼 설레기 일쑤
연신 코방아찧는 앞산은
실눈 뜨고 숨 고르다
무심하도록 보드기 가지에
밤새 새순 돋는데
어지간히 물올라 끙끙 앓는지
홑체 받아 하얗게 흩뿌리고
딴전부리고 있는 달의 알몸
겨우내 다져먹은
인동 덩굴 같은 다짐이라
혀끝이 닿지 못할 마음이고 보면
차면 기울 너만 못할까
초 한 자루
바람에 건들건들 불꽃만 요란하여
긴 대롱은 쉬 타들고 언제나
촛농만 하염없다
그러니 까맣게 일어나는 끄름만 못해
갈피 못 잡는 그림자만
언제나 빙충맞다
제 한 몸 건사하면서도
촛농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심지 위에 뜬 불꽃으로
몸 하나 감출 그림자로 산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의지대로 의도되는
심지 곧은 사랑이 또
얼마나 될까 싶어
타들고 보면
초 한 자루의 불꽃,
불꽃뿐이었는데
타드는 내내 숨 고르던
남겨질 흔적이고 보면
벗고 싶은 것이 저 혼자
불꽃의 보늬였나
종점 여행
교회 전도사였던 그는
나를 데리고 41번 종점에 갔다
한 눈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그 아래 목재소들은
즐비하게 허연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우리의 종점 여행은 간질병을 앓던 그처럼
계속 거품을 물고 흩어지는
무질서한 연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고요한 미소를 띠고 있어 나는 전혀 몰랐다
알 지 못했을 종점 여행을 몇 차례 다녀온 뒤
그때서야 그가 찾아 헤맸을
검은 바다 너머 달의 표면으로
반사되어 오던 그림자를
주목하게 되었다
시간을 놓곤 한다는 것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넘나들며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물고
입 없는 그림자로 표면에 닿는 것이었다
띠무늬 고운 41번 종점 하늘에는
일찍부터 나온 낮달
그가 머물곤 하는
그림자가 되어 주었다
나는 통과한다
(1)
문을 열고 들어가
껌을 두 개 집었다
바지 주머니에
눈깔사탕 하나를 더 넣었다
주인 여자는
주말 연속극을 본다
문을 밀고 나오는 동안
문은 나를 방관한다
(2)
사람들이 많다
『천재와 광기』를 들고
매장을 두 바퀴 돈다
시집도 한 권 든다
『천재와 광기』를 가방에 넣고
시집(詩集)만 계산한다
사람들 사이를 나오는 동안
사람들 무방하다
(3)
사람들과 문이
닮았다
나는 통과한다
나를 방관해도 무방하다
포장마차
슬리퍼를 끌고 들어서는 포장마차에는
후끈하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서는 찬 기운이다
주인 남자는
휴대용 텔레비전 본다
부풀어오르는 허연 김
저 혼자 동글동글 자유롭다
벌쭉이 열린
비닐 틈새로 들어서던
찬바람도 저 혼자 신났다
슬리퍼 뚫린 구멍으로
저들끼리 움츠러든, 발가락
오물오물 긴장 푼다
무심한 주인남자 같다
잔병치레
흉내내는 것도 아닌데
마음은 연속적이다
터널 속을 주행하는 것과 같이
이어지는 노란 불빛 속으로
앞 선 것을 踏襲한다
뒤따른다는 것은 舊習인가?
거듭 재발하는 시간
사랑은 잔병치레다
남루한 외투를 걸치고
터널을 걷는
순간의 정점들
노란 불빛에 요동하는
놀라운 질주
때로는 비상등을 켜고
너 오기를 기다린다
한낮
한낮의 소리는 隔絶된다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대칭을 이루며 동그랗다
禁制의 원인은
찰나적인데 있다
가 닿는 순간 더 이상
의미가 되어 본래의 자유를 버려야 한다
내게 와 닿는 순간
당신도 같다
이미 당신이 아닌
그저 하나의 의미이다
시간 여행
모자를 벗으려는데
머리가 굴러 떨어진다
(신호가 없다)
머리를 주워 끼우자 눈알이 빠지고
(눈알을 찾기 위해 방안을 기어다니느라)
무릎이 접혀 꺾이면서 손이 부러진다
뱃가죽으로 바닥을 구겨 펴듯 앞으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여자가 걸어간다
(대낮, 여관 문을 나섰을 때의
그 암담한 우주)
마지막 전문; 스스로를 파기하시오!
가슴의 처마 끝에서
녹기 시작하는 우리의 기억
내리꽂히는 파열의 순간이다
쩡쩡 갈라지는 저 한낮의 강렬한 빛
구겨 넣은 것은
모두 토해내야 한다
낯선 갈증,
다시 녹기 시작하는
거대한 몸뚱이
재계약 조건; 사랑은 기호로 지불할 것!
이식되어 보내져 오는 마음; 송신완료
생존확인불능!
기억을 다시 넣으시오; 삭제되었습니다
재생완료; 즐거운 여행되십시오
얼음 꽃
하얀 별만큼
창백한 꽃
그리움
결핍
정물에게 말 걸기
슬픔
눈
흐린 날
에 걸린 낮달
내밀한 꽃,
얼음 꽃
내 마음의
꽃
어디서 오는 길예요?
(1)
봄비가 내린다
아교 같은 3월의 봄비가
느리게, 느리게 내린다
값을 지불하고 싶은 심정이다
밖으로 나갔을 때도 여전히
봄비는
아다지오로 추적거릴까?
핫초코를 비우고 식은 커피를
대신 마시고 일어서기까지
곁눈질로 나를 훔쳐보았을
안단테, 아다지오, 안단테,
아다지오…
반복적으로 타고 흐르는
무한한 율동을
나는 눈치챌 수 있었을까?
점점 사분음표
점점점 사분음표
결코 두 박자로는 떨어질 수 없어
땅에 닿으면서 포기를 배우는 빗방울처럼
하나도… 무수히 쪼개지며
한 박자 반의 반, 혹은
반에 반의 반 박자를 지키느라
길바닥에서 접미어가 되어
지상으로 비로소 둘, 셋, 넷, 다섯…
그 이상으로 머물다 가는데
(2)
머리가 아파요
속에서 무언가 자라는 거 같기도 하고
억지로 기억을 떼 내려다 보니
새롭게 자라난 기억일 수도 있고,
빗방울을 들으면 알 수 있어요
하나 하면, 하나가 아닌 반으로
그 반에 반의 순간으로
그러다 하나를 잊고
둘을 하나 대신 이고
둘 자리에 셋을 셋 대신 넷을
혹은 다섯을,
그렇게들 포기를 배우고 있어요
멈추고 싶기 때문에
하나라면 하나로
옮겨 뛰기 위해 무수히 갈라지는
반에 반의 반…
무수히 떨어지는 게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세상에서 나는
나 따로 그리고 나
당신 따로 그리고 당신
그 어느 것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은
그 움직임의 템포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거예요
먼저 닿고 나중 닿는 차이는
일정한 리듬의 반복에서
서로를 위로하기 위한 율동인지도 몰라요
각각 세상에 있을 동안은…
그건 아닐 거예요
내가 없다면 당신도
없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확인했을 때
비록 하나가 아닌 반으로나마 당신이
당신으로 거기 있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당신이 나를 확인하니까!
내가 당신에게 있어 비로소 나일 수 있는 것처럼
엇나가는 빗물 같으면서도
닿는 곳이 같다는 것만으로
비로소 포기를 익히는 거예요
하나가 하나로 있기 전부터
둘은 둘대로 셋은 셋대로
그 이전에 이미 하나도 둘도
하나이었고, 둘이었고 그래서
반은 반에 반이라 해도
같은 곳에 닿을 수만 있다면
고여 있는 것으로 숨가쁜 율동을
멈출 수는 있는 것이겠지요, 우선은
그러므로 포기를 배우는 것 아닐까요?
(3)
가눌 수 없는 빈자리의
닿을 수 없는 未知,
그 숨막히는 기다림 때문에
빗방울이 가 닿기까지
잠시 동안 울림의 값으로
지불해야 했던
기다림의 그것으로
"어디서 오는 길예요?"
꿈꿀 권리
몽상가 何某 씨는 낡은 일기장을 펼치듯
철제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조가비 속 같은 자신의
안락 의자에서 과감히 일어나
이력서를 쓰고 지방지 광고란을 오려
페인트칠이 벗겨진
공원 벤치에 가 앉는다
알고 있는 답을
적어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 어제라면
알 수 없는 길을 내키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 오늘이고
죽음으로 달려가는 게
내일이다,
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何某 씨가 해야 할 일은 꿈꾸는 것이다
우리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창세기 37장 7,9절)
오늘에는 何某 씨는 없다
자신을 확인하려 들수록 日記로나 사라지고
先代의 꿈으로 겁탈 당한다
신용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확인하는 일,
확인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日記로 남겨진다
何某 씨는 꿈꾼다
조가비 속 같은 과거의
안락의자에 앉아
모범답안을 베껴 쓰듯,
오늘을 살 수 없는 노릇이다
風磬 소리
안개는 塔門을 적시고
향내 자욱한 마당으로 내려와
비질하는 동자 승의 머리 위에서,
아침해가 된다
멀찍이 염불 소리 山間을 흔들어
가부좌 튼 부처의 시선 속으로 사라지고
그 눈가에 번지는 무심함이
風磬 소리되어 넉넉하다
대청 마루에 앉아 아침상 받은
風磬, 얼얼하니 생마늘이나 씹었는지
얼른 냉수 한 사발 들이켜
물방울로 듯듯다
희멀겋게 웃으며 숲으로 사라진다
다래나무 쓸고 가는
구부정한 오후의 볕에
아지랑이 들까불 듯
風磬 소리
연신 낙엽에 쓸려
늘푸른 소나무 곁에 서 있다
약수터
니콘 카메라 사서
새벽 뒷산 약수터 가던 날,
물통을 들고
허연 입김으로 줄지어 선 사람들은
목판화 같이 둔하다
그 주변의 뽀얀 새벽은
아직 잠에서 덜 깼다
조리개를 최대로 열고
셔터를 누른다
속도를 줄여,
처어얼-- 컥--
처어얼-- 컥--
모두 잠든 시간
약수터에 모인 사람들을
사진에 담고 싶었어
저들이 흔들어 목에 건
하루의 첫 기다림으로
(현상을 하고 보니
사람들 발치께 개구리 한 마리 있다
노려보는 낯선 기다림으로)
작은 여우
내 마음 밭을 파헤쳐 어지럽혀 놓는
작은 여우의 흔적이 있다
뒤돌아보고 확인하면서
썩은 것을 즐겨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되새김질인지 기억의 틈새로
지난 시간을 찾아 틈만 나면 파헤치는
감당치 못할 일이다
지나온 길을 자꾸 뒤돌아보며
지금의 나를
나로 있지 못하게 하고
그때의 너를 너로 두지 못하게 하고
내 마음 밭의 작은 여우는
곰살갑기 그지없다
메우고 다져 빈틈없이 살고 싶은데
뚫리고 파헤쳐지는
나의 울타리는 허술하기만 하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냥 두는 것이
혹시 누군가에게 있어 나도
작은 여우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흔들림에 대하여
꽃잎은
피고 지는 과정에서
바람을 따르며,
바람을 따라
예정된 一針을 허용한다
어느 한곳에도 붙들림이 없이
어디로 가는 지 흔적도 없이
꽃잎은 바람을 흉내낸다
사람들이 내 안에 머물면서
흔들리는 것과 같다
보람 있는 수고처럼
나는 내 것일 수 없는 이유처럼
지나고 난 뒤에야 확인이 가능한
바람, 저 흔들림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심히
나를 흔든다
발가락은 열 개다
열 개의 발가락으로 딛고
성큼성큼 내딛는,
저 나무를 본다
열 개의 발가락으로
아슬아슬하게 걸린
낙엽의 숨소리를
그 발가락으로
뒤따르다 지쳐 얼기설기
기댄 하늘을
새로운 날과
낯익은 허공을
그 싫증을 견디고
행적을 남기지 않는 구름을
안개를
연일 미세한 흔적을 감추느라
날개 짓 서툰 참새 떼의 분주함을
발가락은 열 개다
딛고 선 저것들이 골고루 평형을 이룰 때
나무는 한 곳에 서 있다
똥이 마렵다
너를 생각하면,
똥이 마렵다
너는 이미 그리움이다
사랑은 과거다
똥이다 그리움이다
그 마려움으로
너를 대하는 일은
加虐이다
차라리 똥을 싸듯
너를 사랑한다면
미련조차 없겠다 설마
뒤돌아보는 일 없이
너를 배설한다
회전문
들고나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잔꾀를 부려보지만 어림도 없다
문이란 통과하기 위한 것
회전문 그 좁다란 통 안에 갇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저
3 차원의 세계?
주저해 본들
들어가지 않으면 나온다
들고나는 것이
통과할 수 없어
머물기를 기대한다
같은 자리를 맴돌며
안으로도 바깥으로도
무심히 갇혀 있는,
정작 통과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를 통과하는 것들로 인해
남겨져야 하는
나는 여전히 맴도는
회전문이다
나팔꽃
혈관을 끊는 어긋나는 대야 속
흐드러짐을 보았다
살뜰한 색채
고운 가루 입힌 꽃술의 貞操보다
세 갈래로 갈라져 잎 고운
본래의 마음을 닮아
아침저녁으로 품는 이 너른 세상에서
하나는 둘을 위해
둘은 아래로
아래에서 서로 받치고 도는
고귀한 合掌
강을 걷는 나무
강을 걷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성큼성큼 앞서 걷는 빛을 따라
종종걸음치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지고 가을이 깊어간다는 것을
그 걸음걸이를 보고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했던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만큼
지루한 모습이었습니다
강을 걷는 나무처럼
걷는 데 익숙하지 못하고
무엇을 감추어야 하는지
어디서 주춤거려야 하는지
요즘은 자주 시선을 잃곤 합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든
그것이 나와 눈 마주치는 곳에
서로의 境界가 되었습니다
시선은 곧잘 길을 잃고
허공을 헤매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허공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길을 피해
새가 나는 길이 있고 새가 나는 길을 피해
물이 흐르는 길이 있고(그 길로만
비가 내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바람이 지나는 길이 있고
빛이 머무는 길이 있었습니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길이었습니다
빛이 지나는 길에서
무엇도 그늘이 되어
흔적을 남기며 길이 되었습니다
빛이 지나는 길에
꼭 그 만큼씩
꼭 그 만큼씩
강을 걷는 나무를 따라
긴 그림자로 눕는
산의 길과
구름의 길과
흐르다 멈춘 시간의 길들이
모두 서로의 길을 내주느라
스스로 피하고 멈추면서
그렇게 하나의 길이 되고 있었습니다
촛불
혀끝의 말(言)
농익어 무겁다
촛불 속에 흔들리는
房
말끝에 고이는
어둠
상처 난 곳에 그대 고인다
비근거리는 촛불에 맞추어
했던 말 또 하고…
밤새 어둠을 태우다 보면
그대 거기 있다
노란 항아리
(자정이 넘어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노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밑도 없이 까마득한
深穴 속으로
하나 하나 알갱이로 떠도는
깊은 숨결 속으로
나의 생각도
말(言)도
꿈도
(그리고 창을 열면)
分節되어 날리는
머리, 가슴, 두 눈 그리고
그리고 그리움까지
이대로 허공이었으면
차갑게 볼을 타고 흐르는
허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을 감는다) 어둠 속으로
가벼운 한숨에 빠진다
허공에는 닿을 곳이 없다
기억할 곳도
만지고 느낄 곳도
떠도는
노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계단에 눕다
계단은 높낮이가 다른 접혀진 하늘이다
자춤발이 비둘기는 검댕이 육교 위에서
빗디뎌 미끄러운 그늘에 서 있었다
손 재어논 채 가년스러워
슴벅이며 눈길 주면
가만히 내 쉰 한숨만 제풀에 겨운지
맞받이 거리 재고 등 보이며
계단에 눕는다
머물다 잦는 오후에서
허방허방 딛는 저 걸음걸이
어긴 데서 시작되어
허수히 지는 하루해로
남은 반 마장 더 채운다 해서 손끝에나
닿을 리 없다
내려서자니
뻗대고 선 무수한 선들 저 하늘이
어깃장으로 계단에 눕고 있다
그대의 12월
12월의 하늘은
나무 안으로 나온다
송곳니가 예쁜 12월의 하늘
다프네(Daphne)의 펄럭이는 옷깃으로
언나처럼 빈가지만 흔들고 있다
生의 팡텔레이몽(St. Panteleimon)에서
그대를 만난다
힘에 겨운 곱사등이처럼
모로 누운 12월의 하늘
그대를 얼싸 안고 덩싱덩실 춤을 추고 있는
저 다프네를 떠올리게 한다
屈膝치 마소서
아, 나의 聖者여
生의 팡텔레이몽에서
그대의 12월은 춤을 추고 있다
*언나: 어린아이.
*다프네(Daphne):그리스 신화의 巫女,
아폴로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고 월계수가 됨.
*팡텔레이몽(St. Panteleimon):러시아 정교회의
최대 수도원.
*굴슬屈膝:무릎을 꿇고 절을 함.
길을 걷는 나무
나무는 걷는다
선 채로 걷는 나무의 걸음은
바람을 의지하고
긴 햇살에 몸을 맡긴다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면
저만치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나무의 걸음은 언제나 정직하다
몸 가눌 겨를도 없이
바람이 부는 것처럼
그저 선 채로
가만히 걸음 떼는 나무,
그늘은 나무의 걸음이다
조각난 하늘을 껴안고
얼더듬는 나무의 언어이면서
온전치 못한 걸음걸이다
한줌의 하늘도 쥐고 서려는
그늘은 나무다
모든 색깔을 버리고
길 위에 누워
길을 걷는 나무다
한 장 한 장 얼더듬어
하늘을 가슴에 품은,
길은 나무의 언어를 듣는다
측백나무가 있는 풍경
널따란 마당 한편으로
뒷짐지고 비스듬히 서 있는
측백나무,
손바닥만한 그늘
싸리나무 가지 울타리 너머
자치기하는 동네 꼬마 녀석들
목청 돋우는 소리만 못해
스치는 바람에 엄살부리며
파르르 떠는 모습하고는
손바닥만큼 하늘 가리우고 들랑대는
아버지의 하얀 와이셔츠보다 작고
장대 끝에 매달려 상긋대는
눈부신 조각구름보다는 넓다
예배당 종 탑 위로
어머니 비질 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하늘은 削剝하다
이상도 하지
어머니 오늘은 노깃처럼 재시다
이때쯤 아버지 걸어오신다
※삭박(削剝)하다: 닳아서 벗어지다
출처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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