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
아주 가끔은 미치도록 슬픈 영화를 보고 싶어. 눈물이 쑥 빠질
정도로, 억장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래서 꼬박 며칠은 그
줄거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잔인하게 우울해서 정신을 놓아야 할
정도로. 꼬박. 며칠은.
그것이 비록 나와는 상관없는 삶이라 해도 말이지.
얼마 전부터 나는 자정을 넘기고 산책을 하는 버릇이 생겼어.
산책이랄 거까진 없지만. 좀 멀리 떨어진 곳까지 비디오를 빌리러
가게 되는 날이면, 오며 가며 때로는 더 멀리까지 돌아서 걷곤 하는
정도야. 풍경도 없는 어두운 공원을 지나기도 하고. 술집이 즐비한
골목길에 서서 취객들의 객쩍은 수작을 곁눈질로 잠깐씩
건너다보기도 하면서. 그리고 이삼십 분이 넘도록 서성거려 빌려온
비디오는 채 반도 못 보고 돌려주기 일쑤면서. 아주 슬픈 이야기를
찾곤 해.
다만. 그런 날이 잦아진다는 게 문제야.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이라는 소설에서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가 왜 그토록 '억장이 무너지는' 아주 슬픈 연애 소설만을
읽으려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 그것도 일흔이
넘은 노인이 말야.
정작 잔인한 것은 어느 한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생각이. 시선이.
돌아오는 길에 어깨 위 달빛이 머물고. 뭐든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돼. 숱한 불빛들 때문에 달빛은 그 따스함을
전할 겨를도 없어.
어릴 적에 술래잡기를 할 때처럼. 동무들이 숨어 있는 달빛 든
볏단이 어쩜 그리도 고왔는데… 누렇게 익은 담 너머 감나무는 또
어떻고… 그랬던 적 있잖아. 한참을 멍하게 서 있다가 못 찾겠다
꾀꼬리, 하고 나면 기껏 숨었던 녀석들이 투덜거리며 하나둘씩
달빛을 이고 나타나곤 하는. 신비롭고. 환한 공터로 나오면 술래는
싱거워져.
가끔 난폭 운전을 하게 돼. 운전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속도를
내곤 하는 거야.
운전은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돼야 하는데. 무언의 신호로 지시
등을 켜기도 하고, 앞지르기를 하면 미안하다는 시늉으로 비상등을
깜빡이기도 하고. 앞서다가도 어느새 내 닿는 차가 있으면 슬그머니
옆 차선으로 비켜주기도 하면서.
배려 없는 질주는 폭력이잖아. 그런데 내가 요즘 서슴지 않고 내
닿기에만 급급한 거 같아. 지시 등도 없이 무턱대고 끼어 들지를
않나… 일정한 흐름을 훼방 놓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심술부려.
못되게 굴고 있어.
아무래도 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전에 3박 4일 일정으로
전국을 한 바퀴 돈 적도 있잖아. 서해 쪽으로 해서 남해, 동해를 거쳐
잠자는 시간 빼고 꼬박 운전만 했던, 참 이상한 여행. 그땐 정말 왜
그랬는지. 유독 그 여행은 기억에 남아.
이번에는 남해금산으로 갈 생각이야. 그렇지 않아도 어제 친구를
만났는데, 여행 계획을 말했더니 자기도 가겠다는 거야. 뭐 술김에 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좋다 그랬어. 하지만 너 안 가도 난 간다, 라는
단서를 붙여서.
글쎄. 언제부턴가 나 혼자 움직인다는 게 좀 미안하긴 한데. 이번엔
이래저래 나 혼자 가야 할 것 같아. 당장 3월 2일이 신학기 첫째
날이 되니까 아이들이 학교를 빼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3월 1일
하루만 움직이자니 그것도 그렇잖아. 그래서 좀 무리를 해서라도
토요일 일요일 모두 시간을 내볼 생각이야. 혼자서.
음, 목요일 밤에 출발을 할까, 아니면 금요일 오전에 일찍 출발을
할까.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갈까, 아니면 대전에서 빠져
통영간고속국도로 갈까. 내려가는 길은 국도로만 갔다가 올라올 때
고속도로를 탈까. 지리산 쌍계사에서 하루를 묵고 남해금산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바로 남해금산으로 갈까.
가는 길에 만약 비가 온다면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운전해야지. 아니면 뉴트롤즈의 아다지오를 듣던가. 날씨가 맑다면
파파야니의 레게음악도 괜찮겠다. 테이프를 몇 개 사야겠어. 아아,
시노자키의 연주 테이프는 꼭 사야지. 등등.
몇 번씩 지도를 보며 계획을 바꿔. 여행이란 그 날의 즐거움보다
며칠 전서부터의 설렘이 더 즐거운 법이야. 이쪽 길로 갔을 때는
여기를 들르고. 저쪽 길로 갔을 때는 저기를 들르고. 몇 끼 정도는
손수 밥을 해 먹을까? 혹시 모르니까 낚싯대를 준비해 가볼까?
등등까지.
며칠 전 한 아이에게서 메일이 왔어. 전에 가르쳤던 아인데, 뭐 그냥
설 잘 쇠라는 안부 정도의 내용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그런.
그런데 그 편지를 읽으면서 괜히 슬퍼지더라. 가슴이 턱 막히는 게
숨을 쉴 수가 없는. 그리움 같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그에
따른 절망감 같은, 그런.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그런.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것들. 선생님을 잊지 못할 거예요, 라는 데서.
나는 무너졌어. 잊을 수 없다는 것의 잔인함 때문에. 잊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그리고 내가 그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기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순간 두려워졌어. 과연 그래도
되는 건가, 하는. 지금 나를 돌아보면 전혀 누군가의 기억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 같은데, 하는
엄살인가?
사실 얼마 전부터, 뭔가 길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막막한
기분이 들곤 해.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면 참
난처한 일인데. 이제와 돌아가기에는 좀 먼 길을 와 버린 것도 같고,
그렇다고 계속 가자니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무얼 해야
한다는 뚜렷한 바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정작 내가 꿈꿔왔던
삶이란 게 고작 이런 건가 싶은.
알아. 이럴 경우 묵묵히 그냥 가던 길을 재촉하듯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던가(어쩔 수 없어서라도), 아니면 과감하게 다른 쪽
길을 선택하던가(아직 기회가 있다 싶을 때), 둘 중의 하나 뿐이라는
건.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의 경우보다 전자의 경우로
살아가고들 있다는 것도 알아.
문제는 사람들이 어떠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지.
그럭저럭 편하게만 생각하면, 고민거리도 아니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뭔가 내 안에서 보내오는 신호가 아닌가 싶어.
마치 감기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기침이 나거나 콧물이 흐르는
것처럼. 분명 신호인 건 확실한데.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지. 그냥 약 먹고 쉰다고 해서
낫는 병도 아니잖아.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게 뭘까. 내가 가장 익숙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즐거운. 여기서부터 생각의 첫 단추를 다시 껴볼까
생각하는데. 하나 더 추가해서, 그래서 보람 있는 건 뭘까 싶은. 뭐.
그런.
해가 지니까 바람이 차다. 아직은 쌀쌀해. 해가 들 때는 그래도 제법
따뜻한 게 봄이구나 싶은데. 아닌가 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땅거미가 내리고 있어. 그나저나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안 그래도, 감기가 오려나 봐.
생각이, 몸보다 예민했으면 좋겠다.
그냥. 보고 싶어.
라고까지 썼다가, 콧등이 시큰하다.
참 나란 사람은 재미있는 거 같아. (또 말이 길어지지만)어제는
작정을 하고 마셨어. 이미 회사 동료와 전작이 있던 친구는 내가
오늘은 좀 마시겠다고 하자 그냥 웃더군. 그래봐야 네가 무슨, 하는
표정으로. 얼마든지 대작을 해주겠다 이건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작정을 하고 마시면, 저들만 못할까 봐. 비록 작정을 하는 날이
일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해서 탈이지만.
정말 많이 마셨어. 아니 잘 마셨어. 전혀 속이 부대끼지도 않고.
손수 자작까지 해 가며 마셔댔지. 얼마쯤 지나자 몸은 술기운이 도는
거 같은데, 도통 정신이 말짱해서. 이게 원. 얼마쯤 마셔야 생각이
흐려지는 거야? 점점 또렷해지는 게 영 마땅치 않더라고.
아, 그런데. 노래방에서 김장훈의 '혼잣말'을 부르는데,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 있지.
추억이 소중한 이유
흐름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
수줍게 두 손을 잡던 너와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아무리 그리워도
두 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에
조금 더 잘해주지 못하고
울리던 일들만 마음에 남아
이젠 내가 눈물이 날까
아직 내 맘속엔 하루에도
천 번씩 만 번씩 네가 다녀가
잊어도 잊어도
눈물이 흐를 너인데
친구도 될 수 없는 너
둘이 되어 흘러가는 구름처럼
괜찮아 말하며 혼자 더 슬퍼져
죽을 만큼 힘들어
혹시나 어리석은 마음에
네 편지도 사진도
버리지 못하는 나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고
전하지 못한 말 혼자 되뇌며
눈물 속에 널 보냈지만
아직 내 맘속엔 하루에도
천 번씩 만 번씩 네가 다녀가
잊어도 잊어도
눈물이 흐를 너인데
눈물 속에 널 보냈지만
아직 내 맘속엔 하루에도
천 번씩 만 번씩 네가 다녀가
잊어도 잊어도
눈물이 흐를 너인데
도대체 천 번씩 만 번씩 하루에도 그렇게 몇 번씩 생각이 난다면
과연 어떻게 살까.
아무튼. 취하고 싶은데, 추하기만 하지 취하진 않더라.
대리운전을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던 남자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대우 자동차 영업사원이라면서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이 일을 한다는 거야. 그것도 한 달에
보름정도밖에 못한다고 하면서. 못해 먹겠다고. 조만간 그만둘
생각인데,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투덜투덜 늘어놓는 얘길 듣고 있자니 왜 그리 서글프니. 우리
동네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 그럼 어떻게 돌아가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이쪽에서 또 나가는 손님이 있다는 연락이 올 때까지
대기한대. 새벽 다섯 시까지. 아니 그럼, 추워서 어디서 기다리느냐고
물었더니, 피씨방에 가 있으면 된대. 이런 젠장.
차에 오르기 전에 친구 녀석이 먼저 대리운전 요금을 지불했다는 걸
알면서. 술에 취한 척.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냈어. 그냥. 모르는 척.
돈을 건네며 키를 돌려 받으려는데. 아까 친구 분이 계산하셨습니다,
하는 거야. 순간 잠깐 계면쩍어서. 그럼 반만 받으세요, 하고 돈을
쥐어주고는 돌아섰어. 고작. 그거야.
의외로 참 사는 게 힘든 거 같아. 난들. 뭐 난 것도 없으면서.
생각을 다스릴 수 없는 것처럼. 엄살을 부리며 살 수 있다는 게,
저들보다 부유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직까지는. 그만큼
여유가 있는. 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늘 없는 것에 엄살이니.
나란 사람은 도대체 언제 철이 들까.
혼잣말처럼, 그렇게 다녀가는 사람이 여전히 기억 속에 있다는 것이
어쩌면 부유한 건데. 어쩌면.
아주 가끔은 미치도록 슬픈 영화를 보고 싶어. 눈물이 쑥 빠질
정도로, 억장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래서 꼬박 며칠은 그
줄거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잔인하게 우울해서 정신을 놓아야 할
정도로. 꼬박. 며칠은.
그것이 비록 나와는 상관없는 삶이라 해도 말이지.
얼마 전부터 나는 자정을 넘기고 산책을 하는 버릇이 생겼어.
산책이랄 거까진 없지만. 좀 멀리 떨어진 곳까지 비디오를 빌리러
가게 되는 날이면, 오며 가며 때로는 더 멀리까지 돌아서 걷곤 하는
정도야. 풍경도 없는 어두운 공원을 지나기도 하고. 술집이 즐비한
골목길에 서서 취객들의 객쩍은 수작을 곁눈질로 잠깐씩
건너다보기도 하면서. 그리고 이삼십 분이 넘도록 서성거려 빌려온
비디오는 채 반도 못 보고 돌려주기 일쑤면서. 아주 슬픈 이야기를
찾곤 해.
다만. 그런 날이 잦아진다는 게 문제야.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이라는 소설에서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가 왜 그토록 '억장이 무너지는' 아주 슬픈 연애 소설만을
읽으려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 그것도 일흔이
넘은 노인이 말야.
정작 잔인한 것은 어느 한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생각이. 시선이.
돌아오는 길에 어깨 위 달빛이 머물고. 뭐든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돼. 숱한 불빛들 때문에 달빛은 그 따스함을
전할 겨를도 없어.
어릴 적에 술래잡기를 할 때처럼. 동무들이 숨어 있는 달빛 든
볏단이 어쩜 그리도 고왔는데… 누렇게 익은 담 너머 감나무는 또
어떻고… 그랬던 적 있잖아. 한참을 멍하게 서 있다가 못 찾겠다
꾀꼬리, 하고 나면 기껏 숨었던 녀석들이 투덜거리며 하나둘씩
달빛을 이고 나타나곤 하는. 신비롭고. 환한 공터로 나오면 술래는
싱거워져.
가끔 난폭 운전을 하게 돼. 운전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속도를
내곤 하는 거야.
운전은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돼야 하는데. 무언의 신호로 지시
등을 켜기도 하고, 앞지르기를 하면 미안하다는 시늉으로 비상등을
깜빡이기도 하고. 앞서다가도 어느새 내 닿는 차가 있으면 슬그머니
옆 차선으로 비켜주기도 하면서.
배려 없는 질주는 폭력이잖아. 그런데 내가 요즘 서슴지 않고 내
닿기에만 급급한 거 같아. 지시 등도 없이 무턱대고 끼어 들지를
않나… 일정한 흐름을 훼방 놓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심술부려.
못되게 굴고 있어.
아무래도 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전에 3박 4일 일정으로
전국을 한 바퀴 돈 적도 있잖아. 서해 쪽으로 해서 남해, 동해를 거쳐
잠자는 시간 빼고 꼬박 운전만 했던, 참 이상한 여행. 그땐 정말 왜
그랬는지. 유독 그 여행은 기억에 남아.
이번에는 남해금산으로 갈 생각이야. 그렇지 않아도 어제 친구를
만났는데, 여행 계획을 말했더니 자기도 가겠다는 거야. 뭐 술김에 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좋다 그랬어. 하지만 너 안 가도 난 간다, 라는
단서를 붙여서.
글쎄. 언제부턴가 나 혼자 움직인다는 게 좀 미안하긴 한데. 이번엔
이래저래 나 혼자 가야 할 것 같아. 당장 3월 2일이 신학기 첫째
날이 되니까 아이들이 학교를 빼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3월 1일
하루만 움직이자니 그것도 그렇잖아. 그래서 좀 무리를 해서라도
토요일 일요일 모두 시간을 내볼 생각이야. 혼자서.
음, 목요일 밤에 출발을 할까, 아니면 금요일 오전에 일찍 출발을
할까.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갈까, 아니면 대전에서 빠져
통영간고속국도로 갈까. 내려가는 길은 국도로만 갔다가 올라올 때
고속도로를 탈까. 지리산 쌍계사에서 하루를 묵고 남해금산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바로 남해금산으로 갈까.
가는 길에 만약 비가 온다면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운전해야지. 아니면 뉴트롤즈의 아다지오를 듣던가. 날씨가 맑다면
파파야니의 레게음악도 괜찮겠다. 테이프를 몇 개 사야겠어. 아아,
시노자키의 연주 테이프는 꼭 사야지. 등등.
몇 번씩 지도를 보며 계획을 바꿔. 여행이란 그 날의 즐거움보다
며칠 전서부터의 설렘이 더 즐거운 법이야. 이쪽 길로 갔을 때는
여기를 들르고. 저쪽 길로 갔을 때는 저기를 들르고. 몇 끼 정도는
손수 밥을 해 먹을까? 혹시 모르니까 낚싯대를 준비해 가볼까?
등등까지.
며칠 전 한 아이에게서 메일이 왔어. 전에 가르쳤던 아인데, 뭐 그냥
설 잘 쇠라는 안부 정도의 내용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그런.
그런데 그 편지를 읽으면서 괜히 슬퍼지더라. 가슴이 턱 막히는 게
숨을 쉴 수가 없는. 그리움 같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그에
따른 절망감 같은, 그런.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그런.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것들. 선생님을 잊지 못할 거예요, 라는 데서.
나는 무너졌어. 잊을 수 없다는 것의 잔인함 때문에. 잊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그리고 내가 그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기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순간 두려워졌어. 과연 그래도
되는 건가, 하는. 지금 나를 돌아보면 전혀 누군가의 기억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 같은데, 하는
엄살인가?
사실 얼마 전부터, 뭔가 길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막막한
기분이 들곤 해.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면 참
난처한 일인데. 이제와 돌아가기에는 좀 먼 길을 와 버린 것도 같고,
그렇다고 계속 가자니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무얼 해야
한다는 뚜렷한 바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정작 내가 꿈꿔왔던
삶이란 게 고작 이런 건가 싶은.
알아. 이럴 경우 묵묵히 그냥 가던 길을 재촉하듯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던가(어쩔 수 없어서라도), 아니면 과감하게 다른 쪽
길을 선택하던가(아직 기회가 있다 싶을 때), 둘 중의 하나 뿐이라는
건.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의 경우보다 전자의 경우로
살아가고들 있다는 것도 알아.
문제는 사람들이 어떠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지.
그럭저럭 편하게만 생각하면, 고민거리도 아니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뭔가 내 안에서 보내오는 신호가 아닌가 싶어.
마치 감기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기침이 나거나 콧물이 흐르는
것처럼. 분명 신호인 건 확실한데.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지. 그냥 약 먹고 쉰다고 해서
낫는 병도 아니잖아.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게 뭘까. 내가 가장 익숙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즐거운. 여기서부터 생각의 첫 단추를 다시 껴볼까
생각하는데. 하나 더 추가해서, 그래서 보람 있는 건 뭘까 싶은. 뭐.
그런.
해가 지니까 바람이 차다. 아직은 쌀쌀해. 해가 들 때는 그래도 제법
따뜻한 게 봄이구나 싶은데. 아닌가 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땅거미가 내리고 있어. 그나저나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안 그래도, 감기가 오려나 봐.
생각이, 몸보다 예민했으면 좋겠다.
그냥. 보고 싶어.
라고까지 썼다가, 콧등이 시큰하다.
참 나란 사람은 재미있는 거 같아. (또 말이 길어지지만)어제는
작정을 하고 마셨어. 이미 회사 동료와 전작이 있던 친구는 내가
오늘은 좀 마시겠다고 하자 그냥 웃더군. 그래봐야 네가 무슨, 하는
표정으로. 얼마든지 대작을 해주겠다 이건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작정을 하고 마시면, 저들만 못할까 봐. 비록 작정을 하는 날이
일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해서 탈이지만.
정말 많이 마셨어. 아니 잘 마셨어. 전혀 속이 부대끼지도 않고.
손수 자작까지 해 가며 마셔댔지. 얼마쯤 지나자 몸은 술기운이 도는
거 같은데, 도통 정신이 말짱해서. 이게 원. 얼마쯤 마셔야 생각이
흐려지는 거야? 점점 또렷해지는 게 영 마땅치 않더라고.
아, 그런데. 노래방에서 김장훈의 '혼잣말'을 부르는데,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 있지.
추억이 소중한 이유
흐름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
수줍게 두 손을 잡던 너와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아무리 그리워도
두 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에
조금 더 잘해주지 못하고
울리던 일들만 마음에 남아
이젠 내가 눈물이 날까
아직 내 맘속엔 하루에도
천 번씩 만 번씩 네가 다녀가
잊어도 잊어도
눈물이 흐를 너인데
친구도 될 수 없는 너
둘이 되어 흘러가는 구름처럼
괜찮아 말하며 혼자 더 슬퍼져
죽을 만큼 힘들어
혹시나 어리석은 마음에
네 편지도 사진도
버리지 못하는 나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고
전하지 못한 말 혼자 되뇌며
눈물 속에 널 보냈지만
아직 내 맘속엔 하루에도
천 번씩 만 번씩 네가 다녀가
잊어도 잊어도
눈물이 흐를 너인데
눈물 속에 널 보냈지만
아직 내 맘속엔 하루에도
천 번씩 만 번씩 네가 다녀가
잊어도 잊어도
눈물이 흐를 너인데
도대체 천 번씩 만 번씩 하루에도 그렇게 몇 번씩 생각이 난다면
과연 어떻게 살까.
아무튼. 취하고 싶은데, 추하기만 하지 취하진 않더라.
대리운전을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던 남자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대우 자동차 영업사원이라면서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이 일을 한다는 거야. 그것도 한 달에
보름정도밖에 못한다고 하면서. 못해 먹겠다고. 조만간 그만둘
생각인데,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투덜투덜 늘어놓는 얘길 듣고 있자니 왜 그리 서글프니. 우리
동네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 그럼 어떻게 돌아가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이쪽에서 또 나가는 손님이 있다는 연락이 올 때까지
대기한대. 새벽 다섯 시까지. 아니 그럼, 추워서 어디서 기다리느냐고
물었더니, 피씨방에 가 있으면 된대. 이런 젠장.
차에 오르기 전에 친구 녀석이 먼저 대리운전 요금을 지불했다는 걸
알면서. 술에 취한 척.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냈어. 그냥. 모르는 척.
돈을 건네며 키를 돌려 받으려는데. 아까 친구 분이 계산하셨습니다,
하는 거야. 순간 잠깐 계면쩍어서. 그럼 반만 받으세요, 하고 돈을
쥐어주고는 돌아섰어. 고작. 그거야.
의외로 참 사는 게 힘든 거 같아. 난들. 뭐 난 것도 없으면서.
생각을 다스릴 수 없는 것처럼. 엄살을 부리며 살 수 있다는 게,
저들보다 부유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직까지는. 그만큼
여유가 있는. 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늘 없는 것에 엄살이니.
나란 사람은 도대체 언제 철이 들까.
혼잣말처럼, 그렇게 다녀가는 사람이 여전히 기억 속에 있다는 것이
어쩌면 부유한 건데.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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