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건너는 낙타
일산 판교간 고속도로를 타고 여행을 가듯 운전을 한다. 며칠 간
휩쓴 황사 때문에도 새삼스러울 것 없는 봄볕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임시 휴교령이 내려질 정도의 모래 바람은 다가온 봄을 사막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나의 안구 건조는 간헐적인 두통을 달고 며칠째 이어졌고,
하루 하루의 생활은 충혈 된 눈으로 연신 모래를 쓸어 끔뻑대는
것처럼 답답하고 초조하였다.
그런 모래 바람은 중국의 고비사막이나 타클라마칸사막에서부터
날아온 거라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석연치 않은 신비감마저
든다. 그 먼길을 날아와 저토록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이고 보면,
반가울 거야 없지만 신비롭고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녀석은 가끔 '아빠,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유난히 나의
어릴 적 이야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다 보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더하거나 빼지 않고 사실대로만 이야기하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다.
동화를 한 편 읽어줘도 '내 멋대로' 이야기를 오리고 덧붙여서
들려주기 일쑤였는데, 자칫 나의 앞 뒷 이야기를 한두 개정도 빼거나
더하다 보면 다음 번 이야기를 할 때 종종 난감해진다. 덧붙인
이야기와 사실이 한 데 뒤섞여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 이야기는 은근슬쩍 나의 또 다른 기억으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나 역시도 '내가 정말
그랬나?' 하는 식의 착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사막은 일정하지 않다. 모래 바람 때문이다. 일체의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버틸 것 같다가도 한번 휩쓸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래 바람은 제멋대로 형체를 뒤바꿔놓기 일쑤다. 굴곡과 음영을
뒤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없던 것을 있게도 하고 있던 것을 없게도
하면서 모래 바람은 사막의 질서를 무시한다. 아니, 사막의 질서는
모래 바람에서 시작된다.
어느 순간 오늘의 내 이야기를 녀석은 자신의 아이에게 들려줄 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나 역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는 생각에 젖는다는 것이
싫지만은 않다. 그런 대로 이야기를 찾기 위해 생각을 고른다는 것이
사뭇 즐겁기까지 한 것은 유독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해서 오늘이 따분하다는 것도
아니고, 새삼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밋밋하지 만도
않다는데 나는 나의 사막을 만족스럽게 여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내가 나의 지나온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녀석도 자신의 오늘이 심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때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면 언제든 다시 맞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낯설지 않고, 언제 한번은 꼭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묶어
스스로에게 먼저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아빠 어릴 땐 공기가 참 깨끗했어. 공기뿐 아니라, 물도 깨끗했고.
그래서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도랑에 흐르는 물을 그냥 떠 마시기도
할 정도로 아주 맑았지. 어제 그제는 정말 대단했잖아? 봄이면 그런
모래 바람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건 분명해.
중국 저 멀리 사막에서부터 날아온 모래 바람이었으니까, 계속되는
공업화도 문제지만 기껏 나무나 풀이 조금 자라는 스텝지역은 그
지역 양떼들이 다 뜯어먹어서 더 심하다고 하더라. 그러니 고작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것뿐이래. 한심하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얘기야. 매년 봄이 되면
편서풍이 불 테고, 그럼 그때마다 우린 꼼짝없이 모래 바람을
뒤집어쓰고 사막을 걸어야 한다는 소리야.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면 녀석은 놓치지 않고 다시 묻는다. "아빠,
아빠는 왜 학교 갔다 오면서 도랑물을 마셨는데?" 하고 말이다.
이런 식이다. 녀석은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유도할 줄
안다. 그러니, 도랑물을 왜 마셨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좀더
구체적인 정황 묘사가 필요하게 된다. 늘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마 네 나이 정도였던 거 같아. 우리 가족이 시골로 이사를 간 게
말야. 거기서 이삼년 있다가 오 학년말쯤에나 서울로 다시 왔으니까
정말 그렇겠다.
아빠 기억 가운데 가장 그림 같은 기억인데, 동네가 정말
조그마했어. 뒷동산 언덕배기에는 꼭 고만한 예배당이 있었고, 또 꼭
그거하고 아주 잘 어울리는 집이 한 채 예배당 옆에 붙어있었지.
그게 우리 가족이 새로 이사간 집이었어.
큼지막한 방이 하나뿐인 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부뚜막이던
집. 사람들은 그 집을 목사 사택이라고 불렀단다.
아빤 그 집이 제일 기억에 오래 남아. 왜냐하면, 그 집은 열 배나 더
큰 예배당 옆에 딱 그만큼 한 널찍한 마당이 있었거든. 예배당 종
탑을 경계로 하고 있는 아주 널따란 마당 말야.
아, 방이 하나였다는 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어. 방은 얼마든지
쪼갤 수 있었거든. 할아버지 책꽂이를 '일' 자로 놓으면 방이 두 개.
'오' 자나 '우' 자로 놓으면 방이 세 개. 방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지. 하지만 방을 세 개로 쪼갤 필요는 없었어. 바로 예배당
뒷문으로 난 쪽방이 하나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그 방을 쓰셨거든.
그러니까 고모하고 할머니가 한 방을 쓰고, 아빠하고 작은 아빠,
그리고 막내 삼촌이 한 방을 쓰면 되니까 방은 두 개면 됐어. 그래서
할아버지 책꽂이는 '일' 자로 길게 두었지.
하지만 아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왜냐하면 마당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것도 우리 집보다 족히 열 배는 더 너른 아주 커다란
마당이었거든. 그 마당은 또 온 동네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바로
그 언덕배기였거든. 그림이 그려지니?
사실 우리 집 옆은 뻘쯤 하니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한 언덕 때기에
불과했지만, 예배당 앞쪽의 마당은 정말, 한 폭의 그림이었어.
이른 아침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언덕 아래로 온 동네가
뿌옇게 안개를 벗고 있는 폼이라니… 멀찍이 기차라도 지나가면,
촐싹대고 참새 떼가 먼저 달리곤 하였거든. 저 멀리 사탕수수 밭의
수숫대는 삐죽삐죽 솟아 있는 꼴이 마치 학교 교무실 아래 잔디처럼
볼품 없이 파랗게 자라 있었으니까.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 아주 멋진 풍경이었거든.
녀석은 가만히 턱받침을 하고 앉아 듣는다. 물론 녀석은 나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따라 그리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멋진 풍경일까,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지난번에 다녀온 춘천
어디 낚시터쯤의 풍경으로 연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아빤 왕따였어. 서울서 전학 왔겠다, 예배당 전도사
아들이었겠다, 뭐. 아무래도 그런 저런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슬픈
눈으로 볼 건 없어. 너도 왜 너네 반 친구 원종이라는 애랑 안
논다며? 그 생각하면, 왜 아빠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지 알겠지? 네가
그런 저런 이유로 그 애를 싫다고 했듯이 그 동네 애들도 아빠가
싫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아빤, 동네에서 병딱지가 제일 많았고, 껌종이도 제일
많았어. 아, 병딱지는 병 뚜껑 있잖아? 그걸 쫙 펴서 딱지처럼 갖고
노는 거야. 껌종이도 그렇고. 또 아빤, 구슬도 제일 많았어. 쇠 구슬이
두 개나 있었으니까. 그것도 왕 구슬로. 그러니 조금 지나면서부터
애들도 아빠를 따돌리래야 따돌릴 수가 없었지. 그랬다간 병딱지도
껌종이도 어림없었거든.
아무리 그래도 녀석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한두 가지 이유나 그에
얽힌 이야기는 뺀다. 그런 것까지 다 이야기하기란 녀석이 손수
건너야 하는 사막은 아직 멀다.
아까 말했던 거처럼, 그때만 해도 물이 참 맑았어. 그래서 우린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도랑에서 놀곤 하였는데, 놀다가 그냥 그 물을
마시기도 했지. 아냐, 하나도 안 더러워.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나 빨래터 물도 다 그 물이었어. 분명히 우물물도 그 물이 땅
속으로 고여서 만들어진 게 틀림없어.
그러니 오늘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니. 그 흔한 물을 돈주고 사
먹어야 하고. 어쩌면 앞으로는 공기도 사 먹어야 할지 몰라.
정말이야. 끔찍하지?
이쯤 되면, 녀석은 더 몸이 단다. 그래서, 응? 그래서? 하고 또
묻는다.
그래서는 뭐가 또 그래서야, 하고 나는 애를 태우다 만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모래 바람을 길잡이로 삼는 법이다.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부는지, 낙타는 묵묵히 걸을 뿐이다. 모래 바람은
사막의 길을 없애고, 스스로 사막의 길이 된다.
출처 : 비공개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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