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온다
어느새 봄이다. 울긋불긋 봄꽃이 환하다. 어제 내린 봄비는 그래서
고인 물마다 꽃 띠를 이룬다. 비록 누런 황사가 덮였긴 하지만,
봄이라는 사실만으로 괜찮다. 보잘것없는 우리 마을 도로변도 벚꽃
천지다. 그것만으로 또한 봄은 위대하다.
몸을 뒤채고 흐르는 새로운 기운 또한 봄 탓이 아닌가 싶다. 뜻하지
않게 맡아 하게 된 일이 조금 성가시고 바쁘긴 해도, 좋다. 정신 없는
만큼 재밌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붙인다는 게 자칫 가벼운
말장난이나 되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 긴장하고 있지만, 새롭다는 건
사뭇 봄처럼 싱그럽기까지 하다.
지난 토요일에는 저네들의 녹음실이란 곳엘 직접 가야 했다. 내가
붙인 노랫말로 가수가 노래를 할 때는 정말 새로운 느낌… 그랬다.
처음 데모 곡을 받아 며칠은 끙끙 앓으며 말을 고를 때는 꽤나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주 슬퍼야 한다'는 주문을 받고는 주어진
곡에 맞는 상황을 설정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었다.
못 다한 말
빛 바랜 한 장의 사진 다 지난 일인데도
이 말 한 마디를 해주고 싶어 날 봐요 사랑해요
못 잊을 나의 첫 사랑 다시 또 되돌릴 수 없어
무심코 살아가다 만나는 추억이 너무 그리워져
그제야 못내 내가 싫어요 그러는 게 아니었죠
후회해도 이젠 소용없어 차라리 날 지우고 살아가요
*이것만은 알아줘요 나 그대 사랑해요
아름다운 지난 시간 다시 올 수 없는 날들
이제와 되돌릴 수 없나요
해준 게 너무 없어요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려
한없이 그댈 바라보고 싶어
잊지 말고 간직해요 나 처음 하려던 말
사랑해요 지난 시간 다시 돌아가고 싶어
나를 만나 미안해요 시간이 지나가면
나 같은 건 잊고 가길 바래요 그 동안 고마웠어요
못 다한 한 마디 말은 "나 그대 사랑해요"
멜로디가 없는 노랫말은 괜히 더 유치하게 느껴진다. 유치하다는
것이 그래서 대중적일 수 있다는 논리에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라는 게, 그래서 다소
유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도 그럴 것 같아서다.
한껏 감정을 실어 노래를 부르던 가수는 몇 번씩 쉬었다 하자고
하며, 담배를 찾는다. 너무 슬프다고 하면서… 그것이 주어진
멜로디가 그렇다는 것인지, 내가 쓴 노랫말이 그렇다는 것인지.
스튜디오 밖에 앉아 있던 나는 못내 서러운 생각이 듣다. 결국 이런
식으로라도 내가 묻어두려 했던 말을 내뱉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에서, 구슬픈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노랫말이 가슴을 쓸어
내린다.
가수가 노래를 하는 동안 입에 붙지 않는 말을 한두 곳 고쳐주고,
녹음실을 빠져나온 게 자정을 훨씬 넘긴 뒤다. 저녁 8시에 시작된
녹음은 그렇게 네 다섯 시간을 넘겼다. 부르고 또 부르고. 그러는
내내 나는 안절부절 괜히 마음이 불편하다.
알기나 하는 것일까? 유치하달 수밖에 없는 저 노랫말 속에 담긴
결코 가볍지 않은 사연을. 누군들 저마다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것일
테지만. 혹시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 때문에 연신 볶인다.
심지어 눈물이 날 것 같아 혼났다고 한다면, 꽤나 유난을 떠는 것일
테지만. 나 역시도 어지간하다.
중순께로 연기된 새로운 곡에 노랫말을 붙여야 하는데, 자꾸만 나도
모르게 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말이란 이렇듯 내뱉고 나면
증폭되는 뭔가가 있긴 하다. 속에 담고 있을 때와 겉으로 드러냈을
때의 차이란 사뭇 다른 것이다. 더러 과장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감정의 골을 깊게 하면서.
문득 새롭다. 낯설지 않은 슬픔이 오히려 새로운 데는
부정적이기보다 긍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뭐랄까,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 다 지난 일이고, 그래서 식상한 것이 여전히 새롭게 느껴진다는
것일 테니까. 그 또한 그렇다. 다 지난 일이고, 그래서 다 잊혀진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더 잔인하고 슬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나의 이와 같은 슬픔이, 그런 대로 괜찮다고
한다면… 나는 다분히 병적이다. 그와 같은 슬픔을 즐기는. 못
말리는. 마음의 감옥으로부터의 자유.
바람이 불고 황사가 짙은 어느 봄날, 과연 나의 마음에도 봄꽃은
피는 것일까. 지난 기억의 슬픔은 오늘의 틈새에서 비집고 나와
오늘과 상관없이 꽃을 피운다. 나는 슬프다, 라고 할 수 없게끔
오늘은 오늘대로 놓아둔 채 저 혼자 피우다 떨어진다. 그리고 잠시
오늘이 고인 자리에서 꽃 띠를 이루며 흐르다 만다. 누런 오늘의
먼지를 부옇게 덮어쓴 채.
그래도 싫지는 않다.
출처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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