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석부리기
창 밖의 하늘이 맑다. 모처럼 햇살이 곱다. 나뭇가지의 파란 새순이
그래서 선명하다. 턱을 괴고 그는 창 밖을 본다. 벌써 한 시간째다.
아이들이 원고지를 들고 와 어깨를 툭 칠 때까지도, 그는 물끄러미
창 밖을 본다.
오늘 주제는 '재해예방'과 '기초질서확립'이다. 칠판에는 그와 관련된
예들이 개요작성을 돕기 위해 정리 돼 있다. 각자 원고지 흰 면에
그것을 적고, 알아서 글 쓰기를 하면 된다. 이렇듯, 요즘은 학교에서
주제를 정해주고 한 달에 두어 번씩 글 쓰기 숙제를 낸다. 그러면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 칠판에 적어둔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원고란 게 다 고만고만해서 글감을 찾기만 하면, 끌어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그는 다시 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덩그러니 빈 한낮의 놀이터는 생각하기에 참 좋은 응시의 대상이다.
갓 걸음마를 배운 아이와 허리를 숙여 엉덩이를 쭉 뺀 애 엄마의
걸음걸이가 우습게 엉켜있는 그림자, 벚꽃나무와 개나리 울타리를
등지고 홀로 벤치에 앉아 있는 꾸부정한 노인의 정지된 모습 그리고
꼼짝도 않는 그네와 시소, 정글짐까지….
귀에 익은 소음이 고맙다.
그는 생각한다. 사는 것, 살아가는 것에다 '어떻게'를 붙여가며,
생각한다. 고루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겹기도
하다. 뻔히 그걸 알면서도, 그는 또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살다 가는 게, 사는 걸까?
아! 생각하기가 지겹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한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어쩌면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아닌 거지? 그럼 뭐가 긴
거야?
지난 주 일요일, 어쩌면 그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난 뒤 다시 이런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다. 청주에 있는 어느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했다는 소식은 한 주전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저녁 예배를 모두
마치고 12시가 다 돼 서울로 올라오면서 전화하는 동생의 목소리가
왜 또 그를 자극한 것인지, 그는 모른다. 칠 개월 된 아이와 아내를
뒤에 태우고 운전을 하고 있을….
내용이야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고. 그래, 힘들겠다, 조심해서
운전해라… 고작 그가 한 말은 이게 다였는데, 형이랍시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자신이 새로 맡게 된 사역에 대해 설명을 하는
동생의 길이 사뭇 그를 안달하게 했다.
문득문득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길'이 왠지 어중간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살기 위해, 살아가는.
그래서 가끔 어릴 적 자신의 꿈을 생각한다. 왜, '의미 있는 삶'… 뭐
그런 꿈을 가졌던. 아버지의 완고한 걸음이 막연한 존경의 대상이
되던. 그래서 자신의 꿈 또한 뭔가 확신에 찬 인생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그러나. 살기 위해 살고 있는 것밖에는 달리 의미가 없어 보이는
오늘의 생활이 마땅찮은 것이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생활이 안달 나는 것이다.
돈 벌어 집 늘리고, 애들 건강하게 잘 키우며 오순도순 오늘에
만족하며 살면 되는 거지, 싶은 작위적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삶이 결코 의미 없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그에 끌려가는
삶이 못마땅한 것이다.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고 도리질을 쳐보지만, 아니지가 않다.
이런 거 보면,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응석꾸러기인지 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늘 그래왔다. 칭얼대고 응석부리면서. 늘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그 아이'가 죽었을 때, 그의 건강한 꿈은 병들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막연하게 아버지의 확신을 본떠
흉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그의 꿈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직업으로의 그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으로의
그것이 그에게는 목사라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우회하였고, 좌절되었다.
'작은 목사'처럼,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그곳을 찾았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정상적이지 못한 몸뚱이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살던, 그곳. 어쩌면 그는 토요일마다 자신의 행보에 있어
적잖은 확신과 보람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그곳까지 갈 차비가 없을
때도 한 시간 반을 걸어가곤 하면서.
그러나 아이의 죽음은 별스러운 게 아니다. 예삿일처럼 더러는 그런
일이 있어왔다. 전신마비, 정신박약, 지체장애… 저들을 뭐라 부르던,
죽음이 그리 낯선 게 아닌 터다. 다만, 그가 직접 목격한 죽음이 '그
아이'였다는 것이 별스러운 거다.
인천으로 오고 한참을 힘들어하던 어느 토요일, 우연히 학생회에서
찾게된 그곳은 그에게 별다른 경험이었고, 그래서 어쩌면 혼자서도
토요일이면 그곳을 찾았던 것일 테고.
눈동자가 맑던 아이. 늘 잔병치레로 얼굴은 핼쑥했지만 그를 보면
유난히 해맑게 웃어주던 아이. 처음으로 '오빠'라고 발음하던 날, 그는
아마 눈물을 흘렸지 싶다. '오빠'라는 두 글자를 발음하기 위해 온
얼굴 근육이 일그러져야 하고, 몇 번은 입을 더 씰룩거려야 하지만.
그는 그 아이에게서 '오빠'하는 말을 듣기 위해 매 주 토요일이면
그곳에 갔다.
전혀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죽고 난 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막연한 '의미'의 허상을 되묻게 되었고. 일편단심으로
지녀왔던 꿈이 흔들리고. 학업에 흥미를 잃고. 가출을 하고. 말수가
줄어들면서. 기호화된 언어를 의지하게 되고.
오늘의 부채(負債)는 원인이 분명한 법이다. 빚진 마음의 짐이 그를
억압하듯이.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다. 한 아이가 벚꽃가지를 꺾어 모래장난을
한다.
그러니 어쩌자는 게 아니다. '그 아이' 때문에 건강한 꿈을 잃었다고,
칭얼대려는 게 아니다. 그래서라도 그는 건강하다. 아직도 그는 앓고
있다. 이와 같이 고민을 안고 갈 힘이 있는 것이다. 병이 든 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병과 맞설 수 있는 건강을 반증한다.
그가 안달 부리는 데는, 이마저 않고 살까 봐서다. 매일 그 타령으로
안주할까 봐서다. 오히려 그는 차츰 무뎌지는 자신을 느낀다. 느낄 수
있을 때,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그래서, 아프다.
오늘도 그는 응석부린다. 그냥, 그렇다고 하면서. 익숙하게 칭얼댄다.
자신을 보챌 뿐.
출처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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