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황선미의『늘 푸른 나의 아버지』와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한 아이가 물었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아이들까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아이의
질문은 그만큼 엉뚱했다. 주어진 주제에 따라 나름대로 궁리를
하다가 왜 문득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일까?
물론 대답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왜, 글을 잘 쓰려고 하니?"
라고 되물었다.
그 아이가 '왜'라는 부분에 대해 답을 찾는 동안, 나는 '어떻게'에
대한 답을 생각하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대답했다.
"상 타려고요!"
상을 타려고, 글을 잘 썼으면 한다는 그 아이의 대답이 또 한번
엉뚱하였다. 뻔히 알 것도 같은 대답인데, 나의 대답은 여전히
궁색하다.
"상?"
하며 되물었던 것도, 전혀 뜻밖의 대답이어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생각을 좀더 듣고 싶어서였다.
"네. 어차피 글을 잘 쓰려고, 지금 글짓기를 배우는 거 아니에요?"
라고 그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래?"
하며, 나는 마치 의아한 답이기나 한 것처럼 조금은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너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니?
라고 묻자,
"네!"
라며 선뜻 대답하는 아이들. 이거 참, 곤란해졌다. 상을 타기 위해,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아이들. 그래서, 글짓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상을 타려고 하지?"
"그래야 점수 잘 받고, 좋은 대학에 가서 훌륭한 사람이 되잖아요."
한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잠시 멍하다. 이것은 우리 어른들이 만든
세계다. 나 또한 그 세계에 속았고,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어렴풋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안 뒤, 허상에서 깼다. 결국 눈가림의
세계다. 닫힌 세계다.
그만큼 이 아이들 역시 속고 있는, 세상. 점수가 관리하는 세상.
아이들의 세계가 허구의 세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슬프지만, 분명한 오늘이다.
나는 하나 하나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어줍잖지만, 말했다.
"우선, 좋은 대학을 가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아.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고, 그래서
좋은 대학을 가려고 한다고 해야 옳은 생각이겠지.
그리고 상을 타기 위해, 또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도 옳지 않아. 솔직하고 진지하게 글을 쓴다면, 그 글이
좋은 글로 뽑혀 상을 탈 수 있는 건 모를까, 상을 염두에 두고 좋은
글을 쓰려고 한다는 건,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 해.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상을 타기 위해서'도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도'는 아니라는 답이 나온 셈이지?
자 그럼, 다시 정리해 보자.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질문했지? 그런데 나는 '왜'
잘 쓰려고 하느냐고 다시 되물었고!
여기서 '어떻게'와 '왜'라는 부분의 대답은 하나여야 할거야.
'어떻게'는 '왜'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답이어야 하고, '왜'는 '어떻게'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이어야겠지. 결국 그 답은 하나여야 하고.
너희가 '어떻게'에 대한 방법적인 의문을 던진 이유가 상이나 좋은
대학을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라면, 나로서는 그런 너희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봐.
글 쓰기는 생활이라는 것. 생활 속의 거울이 돼 주는 것이 글이어야
한다는 것. 언제든 쉴 수 있는 안락의자가 되어 주는 것이 바로 글
쓰기라는 것을 나는 말해주고 싶어. 그것은, 그러므로 글읽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답은 다 나온 셈이지?
'어떻게'는 '바르게 사는 것'으로, '왜'는 그게 곧 '바르게 사는
것이다'로.
언젠가 나는 인터넷 글방을 만들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첫 대문에
정리하였다.
글 쓰기는/ 생활입니다./ 생활 속에서/ 거울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바로 글 쓰기입니다.// 글 쓰기는/ 즐거움입니다./ 하루하루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들로부터/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안락의자입니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향해 우리는/
늘 달음박질합니다.// 그러다 때론 넘어지고/ 그래서 지쳐 쓰러질 때/
우리는/ 꿈을 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꿈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잃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바른 꿈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글 쓰기는 늘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참된 사랑을 배우게
합니다./ 모든 허다한 슬픔 속에서도/ 용기와 사랑을 잃지 않게 하는/
이정표입니다.
-하현 글방
○ 닫힌 세계
황선미의 글 세계는, 그러므로 세상으로 열린 닫힌 세계이다.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이다.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문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아들'로 축약할
수 있다. 어제의 '나(아버지)'는 내일의 '나(자식)'와 같은 오늘의
'나'다. 그것은 소망이다. 한 세계를 세상으로 이루는 통로이며, 또한
다른 무수한 '나'들에게로 열린 세상, 바로 그 자체이다.
찬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활(세상)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성숙한 소년이다. 그것은 때로 열등감(세계)으로
비춰지고, 그래서 반장선거를 포기하거나 같은 반 친구 은아와
해일의 호의를 거절하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열등감은 아니다.
생선을 팔기 위해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는 어머니의 고된 아침과
떠돌이 잡일로 며칠씩 집을 비우는 아버지의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든
함께 짊어지려는 몸부림이다.
어렵게 마련한 아버지의 자전거포에서 손님이 맡긴 펑크난 자전거를
수리하다, 찬우는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다. "너는 배워서 그걸 써먹는
사람이 되어라. 배운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더라"(『늘푸른
나의 아버지』, 두산동아, p129.)는 아버지의 말뜻을 찬우는 모르지
않는다. 배우는 것이 왜 '땅콩 따는 일'이나 '튜브 때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인지…, 아버지가 바라는 세상으로의 통로가 무엇인지
찬우는 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가난은 결국 찬우가 배워야 하는 세상 읽기의
하나이다. 소망을 위한 닫힌 세계이다.
그것은 늘 따뜻한 은아의 관심에서도 배울 수 있는 세계이며, 속
깊은 찬우의 배려에서도 느낄 수 있는 세계이다. 더한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는, 배움으로의 세상이 소망이다. 모두가 '자기만 보는
것 같은 기분에서 빨리 벗어나'(p159)기 위해 초대받은
음악회에서조차 어울리지 못하는 찬우이지만, 그것은 스스로 배워야
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닫힌 세계 또한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망을 이룬다.
○ 열린 세상
폐계 '잎싹'은 버려진 암탉이다. 더는 알을 낳을 수 없어, 그래서
닭장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던 잎싹은, 비로소 세상으로 나온다.
비스듬히 열린 닭장 문 밖을 바라보며 늘 꿈꾸었던 세상, 늙은 개와
늙은 개 또한 쩔쩔매는 수탉 부부와 '괵괵' 거리며 뒤뚱대는 오리들과
청둥오리가 사는 문밖 비스듬한 마당으로, 잎싹은 난용종 암탉의
구실을 더는 할 수 없어 폐계가 되어 비로소 쫓겨 나온 것이다.
'고기값도 받을 수 없는 몸'으로 버려지는 신세지만, 앞싹은 꿈이
있다. 세상을 그리는 꿈, 알을 품어 새끼를 얻고자 하는 꿈. 그래서
잎싹은 버려져 죽은 암탉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된
것이다.
꿈은 소망이며, 소망은 출구다. 닫힌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열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고통도 희망이다.
잎싹이 합류하고자 했던 마당은 철저한 사회구조를 반영한다.
사회는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닫힌 세계만큼이나 닫힌 구조를 띤다.
'닭장을 나오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마당 식구들이 조금도
낯설지 않은데…….
"그리고 나도 마당에서 살고 싶었어, 오래 전부터."
"무슨 소리! 너는 양계장 암탉이잖아. 그러면 닭장에서 알이나
낳아야지!"
"그렇지만 나는……."
잎싹은 마당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버텼다.'
(『마당을 나온 암탉』, 사계절, pp36, 37.)
하지만 결국 저들과는 살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르는
족제비의 위험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그런 잎싹의 처지를 아는 건
집오리 떼와 섞이지 못하는 청둥오리뿐이다. 그래도 한가지 꿈은
이룬 셈이다.
어쨌든 세상으로의 귀환에 성공한 잎싹은 찔레덤불 속에서 알을
하나 발견한다. 그것이 비록 자신이 낳은 알은 아니라 해도, 두 번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어미가 올 때까지만. 그래, 그때까지
만이라도!" 잎싹은 덤불 속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알 위에
엎드렸다.'(p61)
비록 더는 알을 낳을 수 없는 폐계였지만, 잎싹은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훗날 청둥오리의 알이었고, 오리의 어미가
되어 족제비의 위험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다, 성장한
청둥오리(초록머리)가 제 무리와 합류할 때까지…….
잎싹은 닫힌 세계로 열린 세상을 받아들임으로 행복하다.
'초록머리'의 성공적인 비행을 위해 자신의 몸을 족제비에게
내어주기까지….
"한 가지 소망이 있었지.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그걸 이루었어. 고달프게 살았지만 참 행복하기도 했어. 소망 때문에
오늘까지 살았던 거야. 이제는 날아가고 싶어. 나도 초록머리처럼
훨훨.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p189)
○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상으로의 출구는 소망이다
바르게 사는, 소망을 잃지 않는 생활로의 글 쓰기를 황선미의 두
작품에서 여실히 느낀다.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어차피 써야 하는
글이라면, '왜' 잘 쓰고 싶어하는 것일까? 삶이란, 이 두 개의 답을
얻기 위해 치열함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황선미의『늘 푸른 나의 아버지』와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한 아이가 물었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아이들까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아이의
질문은 그만큼 엉뚱했다. 주어진 주제에 따라 나름대로 궁리를
하다가 왜 문득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일까?
물론 대답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왜, 글을 잘 쓰려고 하니?"
라고 되물었다.
그 아이가 '왜'라는 부분에 대해 답을 찾는 동안, 나는 '어떻게'에
대한 답을 생각하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대답했다.
"상 타려고요!"
상을 타려고, 글을 잘 썼으면 한다는 그 아이의 대답이 또 한번
엉뚱하였다. 뻔히 알 것도 같은 대답인데, 나의 대답은 여전히
궁색하다.
"상?"
하며 되물었던 것도, 전혀 뜻밖의 대답이어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생각을 좀더 듣고 싶어서였다.
"네. 어차피 글을 잘 쓰려고, 지금 글짓기를 배우는 거 아니에요?"
라고 그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래?"
하며, 나는 마치 의아한 답이기나 한 것처럼 조금은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너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니?
라고 묻자,
"네!"
라며 선뜻 대답하는 아이들. 이거 참, 곤란해졌다. 상을 타기 위해,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아이들. 그래서, 글짓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상을 타려고 하지?"
"그래야 점수 잘 받고, 좋은 대학에 가서 훌륭한 사람이 되잖아요."
한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잠시 멍하다. 이것은 우리 어른들이 만든
세계다. 나 또한 그 세계에 속았고,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어렴풋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안 뒤, 허상에서 깼다. 결국 눈가림의
세계다. 닫힌 세계다.
그만큼 이 아이들 역시 속고 있는, 세상. 점수가 관리하는 세상.
아이들의 세계가 허구의 세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슬프지만, 분명한 오늘이다.
나는 하나 하나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어줍잖지만, 말했다.
"우선, 좋은 대학을 가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아.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고, 그래서
좋은 대학을 가려고 한다고 해야 옳은 생각이겠지.
그리고 상을 타기 위해, 또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도 옳지 않아. 솔직하고 진지하게 글을 쓴다면, 그 글이
좋은 글로 뽑혀 상을 탈 수 있는 건 모를까, 상을 염두에 두고 좋은
글을 쓰려고 한다는 건,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 해.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상을 타기 위해서'도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도'는 아니라는 답이 나온 셈이지?
자 그럼, 다시 정리해 보자.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질문했지? 그런데 나는 '왜'
잘 쓰려고 하느냐고 다시 되물었고!
여기서 '어떻게'와 '왜'라는 부분의 대답은 하나여야 할거야.
'어떻게'는 '왜'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답이어야 하고, '왜'는 '어떻게'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이어야겠지. 결국 그 답은 하나여야 하고.
너희가 '어떻게'에 대한 방법적인 의문을 던진 이유가 상이나 좋은
대학을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라면, 나로서는 그런 너희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봐.
글 쓰기는 생활이라는 것. 생활 속의 거울이 돼 주는 것이 글이어야
한다는 것. 언제든 쉴 수 있는 안락의자가 되어 주는 것이 바로 글
쓰기라는 것을 나는 말해주고 싶어. 그것은, 그러므로 글읽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답은 다 나온 셈이지?
'어떻게'는 '바르게 사는 것'으로, '왜'는 그게 곧 '바르게 사는
것이다'로.
언젠가 나는 인터넷 글방을 만들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첫 대문에
정리하였다.
글 쓰기는/ 생활입니다./ 생활 속에서/ 거울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바로 글 쓰기입니다.// 글 쓰기는/ 즐거움입니다./ 하루하루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들로부터/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안락의자입니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향해 우리는/
늘 달음박질합니다.// 그러다 때론 넘어지고/ 그래서 지쳐 쓰러질 때/
우리는/ 꿈을 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꿈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잃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바른 꿈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글 쓰기는 늘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참된 사랑을 배우게
합니다./ 모든 허다한 슬픔 속에서도/ 용기와 사랑을 잃지 않게 하는/
이정표입니다.
-하현 글방
○ 닫힌 세계
황선미의 글 세계는, 그러므로 세상으로 열린 닫힌 세계이다.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이다.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문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아들'로 축약할
수 있다. 어제의 '나(아버지)'는 내일의 '나(자식)'와 같은 오늘의
'나'다. 그것은 소망이다. 한 세계를 세상으로 이루는 통로이며, 또한
다른 무수한 '나'들에게로 열린 세상, 바로 그 자체이다.
찬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활(세상)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성숙한 소년이다. 그것은 때로 열등감(세계)으로
비춰지고, 그래서 반장선거를 포기하거나 같은 반 친구 은아와
해일의 호의를 거절하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열등감은 아니다.
생선을 팔기 위해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는 어머니의 고된 아침과
떠돌이 잡일로 며칠씩 집을 비우는 아버지의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든
함께 짊어지려는 몸부림이다.
어렵게 마련한 아버지의 자전거포에서 손님이 맡긴 펑크난 자전거를
수리하다, 찬우는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다. "너는 배워서 그걸 써먹는
사람이 되어라. 배운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더라"(『늘푸른
나의 아버지』, 두산동아, p129.)는 아버지의 말뜻을 찬우는 모르지
않는다. 배우는 것이 왜 '땅콩 따는 일'이나 '튜브 때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인지…, 아버지가 바라는 세상으로의 통로가 무엇인지
찬우는 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가난은 결국 찬우가 배워야 하는 세상 읽기의
하나이다. 소망을 위한 닫힌 세계이다.
그것은 늘 따뜻한 은아의 관심에서도 배울 수 있는 세계이며, 속
깊은 찬우의 배려에서도 느낄 수 있는 세계이다. 더한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는, 배움으로의 세상이 소망이다. 모두가 '자기만 보는
것 같은 기분에서 빨리 벗어나'(p159)기 위해 초대받은
음악회에서조차 어울리지 못하는 찬우이지만, 그것은 스스로 배워야
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닫힌 세계 또한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망을 이룬다.
○ 열린 세상
폐계 '잎싹'은 버려진 암탉이다. 더는 알을 낳을 수 없어, 그래서
닭장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던 잎싹은, 비로소 세상으로 나온다.
비스듬히 열린 닭장 문 밖을 바라보며 늘 꿈꾸었던 세상, 늙은 개와
늙은 개 또한 쩔쩔매는 수탉 부부와 '괵괵' 거리며 뒤뚱대는 오리들과
청둥오리가 사는 문밖 비스듬한 마당으로, 잎싹은 난용종 암탉의
구실을 더는 할 수 없어 폐계가 되어 비로소 쫓겨 나온 것이다.
'고기값도 받을 수 없는 몸'으로 버려지는 신세지만, 앞싹은 꿈이
있다. 세상을 그리는 꿈, 알을 품어 새끼를 얻고자 하는 꿈. 그래서
잎싹은 버려져 죽은 암탉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된
것이다.
꿈은 소망이며, 소망은 출구다. 닫힌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열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고통도 희망이다.
잎싹이 합류하고자 했던 마당은 철저한 사회구조를 반영한다.
사회는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닫힌 세계만큼이나 닫힌 구조를 띤다.
'닭장을 나오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마당 식구들이 조금도
낯설지 않은데…….
"그리고 나도 마당에서 살고 싶었어, 오래 전부터."
"무슨 소리! 너는 양계장 암탉이잖아. 그러면 닭장에서 알이나
낳아야지!"
"그렇지만 나는……."
잎싹은 마당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버텼다.'
(『마당을 나온 암탉』, 사계절, pp36, 37.)
하지만 결국 저들과는 살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르는
족제비의 위험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그런 잎싹의 처지를 아는 건
집오리 떼와 섞이지 못하는 청둥오리뿐이다. 그래도 한가지 꿈은
이룬 셈이다.
어쨌든 세상으로의 귀환에 성공한 잎싹은 찔레덤불 속에서 알을
하나 발견한다. 그것이 비록 자신이 낳은 알은 아니라 해도, 두 번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어미가 올 때까지만. 그래, 그때까지
만이라도!" 잎싹은 덤불 속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알 위에
엎드렸다.'(p61)
비록 더는 알을 낳을 수 없는 폐계였지만, 잎싹은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훗날 청둥오리의 알이었고, 오리의 어미가
되어 족제비의 위험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다, 성장한
청둥오리(초록머리)가 제 무리와 합류할 때까지…….
잎싹은 닫힌 세계로 열린 세상을 받아들임으로 행복하다.
'초록머리'의 성공적인 비행을 위해 자신의 몸을 족제비에게
내어주기까지….
"한 가지 소망이 있었지.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그걸 이루었어. 고달프게 살았지만 참 행복하기도 했어. 소망 때문에
오늘까지 살았던 거야. 이제는 날아가고 싶어. 나도 초록머리처럼
훨훨.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p189)
○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상으로의 출구는 소망이다
바르게 사는, 소망을 잃지 않는 생활로의 글 쓰기를 황선미의 두
작품에서 여실히 느낀다.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어차피 써야 하는
글이라면, '왜' 잘 쓰고 싶어하는 것일까? 삶이란, 이 두 개의 답을
얻기 위해 치열함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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