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백나무가 있는 풍경
널따란 마당 한편
뒷짐지고 비스듬히 서 있는
측백나무 그늘
싸리나무 가지 울타리에는
바람이 엄살부리듯 서 있다
손바닥만큼 하늘 가리우고
들랑대는 하얀 와이셔츠 소매에는
조각구름도 상긋댄다
생각은 낯설다. 마음은 생각과 맞선다. 언제부턴가 내 안의 수고가
이중으로 느는 셈이다. 현실과 상관없이 생각은 늘 꿈꾸기를
좋아한다. 측백나무가 있는 풍경, 고요가 낯설지 않은 아침을 꿈꾸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어도 어느 누가 그립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날을 꿈꾼다.
마음은 조급해서 연신 헛발질이다.
세 시간이 비었다. 평촌에 있는 영풍문고에 간다. 방학이어서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들까지 북적댄다. 이층으로
올라간다. 거기도 똑같다. 우왕좌왕 서성이는 사람들 통에 복날의
장터거리 같다. 두 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생각이 무리다.
보던 책을 도로 꽂고 밖으로 나온다.
영풍문고 옆의 화단에 가 앉는다. 해는 뜨겁다. 조금 더 옆으로는
손바닥만한 나무그늘이 있다. 그 자리에는 자전거가 묶여 있다.
자전거를 조금 옮기고 그만큼 자리가 생긴 나무그늘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즐거워 보인다. 반바지에 샌들을 신은 모습이
시원하다.
건물 그늘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나 보다. 하얀 원피스가
간헐적으로 바람에 펄럭인다. 샌들 속의 발가락이 가지런하다.
저만치 한 무리의 남학생이 걸어온다. 교복을 풀어헤친 모습이
불량스럽다. 슬리퍼를 끌며 팔자걸음으로 지나가다, 누가 뱉은 것인지
엄지손톱 만한 침이 햇볕에 눈부시다. 그 뒤를 따르는 또 한 무리의
여학생들도 교복차림이다. 어림잡아 앞서 간 남학생들과 일행으로
보인다. 까르르 웃는 어느 여학생의 웃음소리가 시원하다. 한껏 멋을
낸 얼굴들이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를 한 여학생이 퉁명스레
노려본다.
시선을 거두고 가만히 발끝을 본다. 낡은 랜드로바가 허옇게
일어났다.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인가 보다. 오른 발을 빼내 양쪽
랜드로바를 문지른다. 땀에 젖은 양말 때문인지, 금세
반질반질해졌다. 기분이 한결 낫다. 도로 신발을 신으며 고개를
들었다.
담배 생각이 난다.
무심히 다시 건물 그늘 속의 여자를 본다. 여자도 나를 보고 있었나
보다. 서로는 눈이 마주친다. 나는 무안해서 얼른 시선을 돌린다.
멀찍이 핸드폰 가게 앞에서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 둘이 춤을 추고
있다. 땡볕과는 상관없어 보인다. 아까부터 들렸을 소란한 음악이
그제야 귀에 들어온다.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나? 사람들도
무심하다. 지나치는 사람에게 무어라 말을 건다. 음악소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햇볕 때문에 왼쪽 어깨가 뜨겁다. 자전거를 조금 더 밀고 비껴간
그늘을 따라 앉는다. 시원한 음료수라도 하나 살까 생각하다
그만둔다.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그늘을 따라 돌아앉는 일 외엔
일체의 움직임도 귀찮다.
눈이 아프다. 빛이 너무 강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금세
눈물이 날 것처럼 눈이 쓰리다. 다시 눈을 뜨고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을 관찰하기 위해 나온 공무원처럼 반듯한 자세로 앉아 저들을
본다.
그늘 속에 서 있는 여자 역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가지런히
모은 발과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원피스, 여자의 시선은 춤을 추고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뒤로 동인 머리카락이 너풀댄다.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하나 보다. 여자는 시선을 돌리다 나와
마주친다. 가만히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말을 걸어주었으면,
무어라도 좋으니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자 괜히
가슴만 저리다 무안해져서 하늘을 본다.
새떼 구름이 지나가고 있다.
한 이십 년을 훌쩍 건너뛰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닿는 것을
실천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에 이는 소리가 무뎌졌으면
좋겠다. 살아갈 날을 염려하기 보다 살아온 날을 되새기며 살았으면
좋겠다. 명분이 있는 고독, 혼자가 익숙한 시간, 오전 내내 마당을
쓸면서도 조급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멀찍이 예배당 종 탑 위로
비질하는 소리는 노 깃처럼 재다
까부라지는 마음을 추슬러 일어선다. 한 뼘의 그늘을 두고 가기가
아깝다. 누가 나처럼 저 자리를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여 모르는
일이어서 자전거를 본래 그늘 안으로 밀어 넣어둔다.
나무는 걷는다
선 채로 걷는 나무의 걸음은
긴 햇살에 몸을 맡긴 채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그 걸음은 언제나 정직하다
몸 가눌 겨를도 없이
그저 선 채로
가만히 걸음을 떼는 나무
그늘은 나무의 걸음이다
조각난 하늘이며
얼더듬는 언어이다
온전치 못한 걸음걸이며
하늘로 쥔 몸부림이다
모든 색을 버리고
길 위에 누워,
길을 걷는 나무
한 발 한 발 얼더듬어
하늘을 가슴에 품는,
길은 나무의 언어를 듣는다
출처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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