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앞에서
이상한 일이다. 아이들과 아침을 먹고, 아들 녀석이 학예회 준비로
바이올린을 가져간다며 태워달라고 해서…. 녀석을 학교 앞까지
바래다줬다. 그리고 무심히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가을 앞에서, 햇살
고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이건 뭐지?
며칠 전부터 나는, 지난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생각도,
말투도, 걸음걸이까지. 쓰고 있는 글 속에 빠져버린 셈이다.
에이, 이거 다 선생님 얘기네, 뭘, 이게 무슨 소설이야?
딸애 수학을 봐 주기도 하는, 녀석(이라고 하기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 쓸 호칭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에겐 그렇게 뵌다)이
글방에 와서, 기껏 읽어보라고 했더니 한다는 말이 저렇다.
그렇지, 뭐.
하고는, 거다 아니다 대대거리지도 못하고 있다, 문득 우습다. 글을
쓴다는 게 새삼 매력이다. 나는 난데 내가 아닌, 나. 잃어버렸던 나?
두고 온 시간 속에 저 혼자 머물고 있는 나. 그 곳을 찾아가는 길,
어쩌면 문학은 그래서 중독이다.
변변하니 등단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똥찬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허섭스레기 같은 마음을 달래며, 소일거리로나
여기는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이건 또 뭐지?
창 밖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다. 눈이 아프다. 호들갑스럽게
안구건조가 어떠네 하며 설치더니, 이젠 집에 굴러다니는 안약을
대충 넣으며, 또 하나 생긴 통증 정도로만 여긴다. 가을이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술렁대는 노래가 있듯, 말을 꺼낼 때마다 이가 시린
것처럼 괜히 찡한 그리움이 있다. 이젠 뽀얗게 먼지가 덧대져 후후
불어도 잘 떨어지지 않을 이야기일 뿐인데도, 저 혼자 또 술렁댄다.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통증도 잦으면
대수로운 게 아니다. 오히려, 안 아프면 이상하다.
아, 맞아, 그랬었지? 그런 게 있었어! 하며, 마치 서랍 정리를 할 때
새롭게 발견하는, 오래된 물건 같다. 솔직히, 아프기나 한 건지….
통증이 없는 상처는 잊혀진 기억을 더듬게 한다. 회상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무대다. 지난 것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우겨도, 어림없다. 강하게 머문 통증이 아니고는 전후좌우
휴대공간을 상상을 통해 짜깁기해야 한다. 퍼즐 같다. 가장 완벽하게
기억을 복원하는 일, 이게 소설 아닌가?
요즘, 뭐해? 하고 친구가 물으면, 잠시 주춤거리다 응, 소설 써, 하고
말한다. 그럼 대뜸 한다는 소리가 시(詩)는? 하고 되묻는다. 시를
쓰겠다고 오물거린 게 사뭇 오랜 시간이었나 보다. 시? 써야지! 건
앞으로 쭉 써야지! 하고 대답한다. 그럼 소설은? 하고 묻지 않기를
바라면서. 웃긴다. 우스운 건 서로 같은가 보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수필이면 수필, 그래 너 다 해라, 하고 야로다. 더 뭐라
대답하려다 관둔다. 게 어찌 따로 놀 수 있는 건가? 난, 여전히
모르겠다. 누군 쓰기 위해 쓰나? 써야 해서 쓰지! 나 혼자 변명이다.
어쨌든 다시 글 머리로 돌아가서, 운동장이 참 넓었던 것 같다.
철봉, 정글짐, 시소, 그물… 담벼락과 느티나무와 나란히 서 있던
저것들. 주로 나는 관찰을 하는 입장이다. 여느 아이들처럼 저것들을
마음껏 소유하기에는, 불편하다. 체육시간에도 교실에 남아있기
일쑤였고, 하니 나는 주로 본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아이가
신기하다. 고작 나는 엉덩이 밑으로 고개 숙여 거꾸로 보는 게
전부다. 대롱대롱 흔들리는 세상은 그러므로 상상이 필요하다.
그물이나 밧줄을 타고 오르는 것도, 미끄럼틀 위에 오르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런 적이 있다는 거지, 뭘 새삼 어쩌고 말하려는 게
아닌데. 내 아이가 뛰어 들어가는 그 운동장에서, 어린 내가 가을
앞에 서 있었다?
새로 쓰기 시작한 글을 뽑았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불쑥
아내에게 내밀며 좀 봐 줘, 한다. 다 쓴 거야? 아내가 묻는다. 아니,
더 써야 해, 하고 수저를 든다. 아내는 종이 뭉치를 소파에 던지고
수저를 든다. 뻔히 읽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자꾸 보챈다. 졸려,
당신 글은 뭔 소린지 모르겠어, 하기 일쑤다. 조금 머쓱하던지 어떤
내용이야? 하고 물어준다. 응? 나는 신난다. 그게 말이야, 하고 한참
떠든다. 말로 하려니까 어렵다. 다 아는 내용이네 뭐, 아내가 톡 쏜다.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괜히 심통이 난다. 널 죽였어, 나랑 애들만
나와, 하고 나는 볼멘소리를 한다. 푸, 그래, 날 죽여도 좋으니까,
이번엔 좀 내라, 아내가 또 쏜다. 그래서, 응? 그래서? 앞에 앉았던
아이들이 되레 관심이다. 고추장을 달래서 나는 맨밥을 썩썩 비빈다.
아내는, 무심하다. 산문은 길어서 졸리고, 시는 뭔 소린지 몰라서
졸리고. 생각할수록 약오른다. 벌겋게 비벼서는 반도 안 먹고 남긴다.
돈이 나와, 밥이 나와? 아내가 또 톡, 혼잣말이다. 애는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연신 재채긴데, 뭐? 지겨워, 아파트로 이사 갔으면
좋겠어, 난! 식탁을 치우며 아내는 저 혼자 주절댄다. 소파에는 종이
뭉치가 흩어져 있다. 쫌만 있어봐, 그래, 아파트로 이사가자, 가, 그래,
내, 이제, 써서 낸다, 아무데나 내서, 돈 번다, '교차로'고
'벼룩시장'이고 돈준다면 다 낸다, 됐니? 소파에 앉으며 나도 톡 쏜다.
종이 뭉치가 구겨진다. 하긴, 그나마 일을 자꾸 미루면서 글을 쓴다고
하니, 답답하겠지. 저번 달엔 반도 못 벌었다. 그러니 늘 나 먼저 할
말이 없다. 괜히 썰렁하다. 아내는 뚱하니 설거지를 한다. 못 본 척,
나는 텔레비전을 본다. 정신 좀 차려, 혼자 놀 듯 신나 하지말고 애들
생각 좀 해, 한다. 달그락대는 소리에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아내가
뚱한 이유를 안다.
젠장! 부자는 싫고, 그래도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딱
반년만 어디 가서 글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잠자리에 누워 혼자
뒤척이다, 잠든다.
나, 혼자, 논다? 무심히 던진 아내의 말이 남는다. 남아서 내 안에서
맴돈다. 쓰던 글을 다시 읽기만 한다. 더 쓰려는데 자꾸 나, 혼자,
노는 것 같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지난번에 쓴 글도 그 전의
것처럼, 뭉그적대고만 있다. 내긴 뭘 내? 말뿐이다. 생각뿐이다.
애가 그 애하고만 노는 거야, 그 앤 욕도 잘 하고, 학교도 잘 안
나와, 그런데 학교에서 그 애가 하도 얠 끼고 도나 봐, 청소할 때도
기다리고, 어디 소풍갈 때도 그렇고, 한 애 엄마가 전화를 했는데…,
얘가 그 애랑 놀면서 이상해졌대, 욕도 잘 하고, 같이 놀던 애들이랑
어울리지도 않고, 그 집 애가 집에 가서 우리 앨 걱정했대나 봐, 그
애 엄마가 우리 앨 좋아하거든, 걱정돼서 전했다고 하면서
말하는데…, 다 그 애 때문이지 뭐, 전에도 그 애랑 놀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 애가 자길 잘 이해해 준대나? 얜 그 애가 좋대, 어떡해?
멀뚱히 앉아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해서 애 타령이다. 애가 좋다는데
걸 뭐라 그래? 하고 내가 말하자,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말이 없다.
그 애랑 한번 집에 놀러 오라 그래, 하고 다시 말하니까 아내는
뭐라고, 뭐라고 저 혼자 떠들더니 전화를 끊는다.
참나.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거야! 서로 자기가 좋은 걸하며 살면
되는 거 아닌가? 하긴! 어쨌든 난, 아빠고. 아빠면 아빠 구실도 해야
하는 거지? 애가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도 잘 지내야 하는 거고?
아이, 참. 도대체 모르겠다. 나 하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감당을
못하겠는데. 애들, 아내, 부모, 친구, 애인, 일, 그리움, 사랑, 추억,
젠장…. 뭐가 이리 복잡한 거야!
것도 가만 보면, 다 내 휴대공간에 속하는 또 다른 나다. 나만 나인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도 나다. 나를 있게 하는
나이면서, 내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가능한 나다. 숫제 나, 덩어리다.
내남없이 누군 그렇게 안 사나? 사네 못사네 하면서도 또 다 사는
게, 나다. 그래그래. 같잖게 꿀꿀할 거 없어. 저게 없으면 이것도 없고
이게 없으면 나도 없는 거고 내가 없으면 지들은 또 어떻게 있어?
아, 좋다. 가을볕.
출처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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