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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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석 2006. 8. 6. 18:53



산책
-추석 날, 도토리를 줍다





발치께의 이불을 끌어올리다 잠이 깬다. 모처럼 달게 잤다. 멀리서
새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어슴푸레하니 창이 훤하다. 모두 잠든
집안은 고즈넉하다. 새벽까지 음식을 만드네, 카드놀이를 하네,
싶더니만 다들 곤하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서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딸애와 마주친다. 아빠, 어디가? 딸애가 묻는다. 산책, 너도
갈래? 한껏 목소리를 죽이며 내가 말한다. 딸애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얼른 옷 입어, 그럼. 도로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간
딸애를 기다린다.
눈 괜찮아? 딸애가 묻는다. 응,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내가 말한다.
눈이 너무 피로해서, 저녁을 물리고는 작은 방에 누워 있었다. 모처럼
다들 모였는데, 연신 '눈물'을 넣어야 했다. 노트북을 펴고 있자니
아내가 잔소리다. 견딜 만 하면 같이 좀 어울리지 그러냐고
타박이었다. 그러다 곧바로 잠이 든 것인지….
참 좋다, 딸애가 말한다. 나도 좋다. 풀이 촉촉하게 이슬을 머금고
있다. 저만치 산을 내려오는 노인 내외와 마주치기도 한다.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렸다. 시적시적 딸애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른다. 손이
따뜻하다. 멀찍이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 보인다. 저들은 숲을 더듬고
있다. 뭐 하는 거야? 딸애가 묻는다. 글쎄, 우리도 그들 쪽으로 간다.
앗, 이게 뭐야? 딸애가 놀라며 묻는다. 도토리다. 아이 엄지손톱만
하다. 여기저기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딸애가 도토리를 줍는다.
나뭇가지를 주워 나뭇잎들을 헤친다. 설핏, 도토리가 이슬에 젖었다.
딸애와 금세 한 주먹을 줍는다. 저만치 누가 나무를 발로 찬다.
커다란 돌로 밑동을 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퉁퉁, 여기저기 나무에
생채기가 났다. 왜 저래? 딸애가 묻는다. 도토리를 더 많이 떨구려고
저래? 다시 묻는다. 괜히 내가 무안하다. 아프겠다, 딸애가 또 말한다.
뒷짐을 지고 나 먼저 산을 오른다. 제법 낙엽이 쌓였다. 조그만 바위
위에 다람쥐도 앉았다. 아, 새롭다. 딸애도 보았는지, 어느새 내 손을
꼭 잡는다. 우리는 가만히 다람쥐를 본다. 말아 올린 꼬리를 부르르
떨다 숲으로 사라진다. 더러 물통을 든 사람이 그 길로 내려온다.
서울 하늘 아래 이런 곳이 있다니, 참 새삼스럽다. 더 위쪽에는 절이
있는 모양이다. 은은한 염불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발성연습이나
하는지 누가 내지른 소리를 오래도록 참으며 끈다.
딸애는 자꾸 허리를 숙여 도토리를 줍는다. 어느새 바지 주머니가
불룩하다. 느릿느릿 오르는데도 자꾸만 발이 미끄러진다. 구두라
불편하다. 여전히 먼 소리, 가까울 것도 같은데…. 인적이 뜸하면,
괜히 무섬증이 인다. 지극히 도시인이 다 됐다. 늘 시골을
동경하면서도, 어림없다. 그만 올라가자, 내가 말한다. 딸애는
도토리를 줍느라 정신이 없다. 뱀에 물릴까봐, 벌에 쏘일까봐…. 나는,
걱정도 팔자다.
미처 삼십분도 오르지 않고 도로 내려온다. 내려오다, 평평하게 다진
곳에서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나는 그들 근처에서
도토리를 줍는다. 웃음이 난다. 머리로 그리는 모습과 실제의 나는
너무 다르다. 겁쟁이다. 딸애가 눈치 채지는 않았겠지? 괜히 시치미
떼듯 도토리만 줍는다. 아빠는 이런 데서 살고 싶다고 했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딸애가 짓궂게 묻는다. 집안에 날벌레가 하나
들어와도 호들갑스레 손을 휘젓기 일쑤면서. 이처럼 시골스러운(?)
걸 꿈꾸며 살다니! 내가 괜히 우습다. 나무 의자에 앉아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리고 도토리 줍는 딸애를 본다. 담배
생각이 난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밥을 앉히는지, 주방을 서성인다. 동생 댁이
나를 보고 계면쩍게 인사를 한다. 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아내를
깨운다. 아내는 몇 번 더 뒤척이다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는다.
나는 세면도구를 들고 나온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아버지가 잘
잤냐고 묻는다. 산에 가서 도토리를 주웠어요, 딸애가 대신 말한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한다. 턱밑이 꺼칠하다. 부스스한
얼굴로 아내가 들어온다. 일회용면도기로 턱밑을 밀며, 아내를 못 본
척 한다.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변기 뚜껑을 열고 앉는다. 그리고
옆에 서서 양치질을 한다. 어, 어디, 갔었어? 한 입 가득 치약거품을
물고 아내가 묻는다. 산책, 비눗물을 찔끔거려 면도를 마저 하다 나는
짧게 말한다. 멋있는 사람이야, 하고 아내가 내 엉덩이를 툭 친다.
나는 면도를 끝내고 화장실을 나온다.
자, 얼른 예배드리자, 아버지가 먼저 성경을 들고 거실에 앉으신다.
딸애가 날름 아버지 곁에 가 앉는다. 누이와 매형 그리고 동생내외와
돌 지난 조카녀석,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녀석과 결혼 전인 막내
동생까지…. 주춤주춤 자리를 찾아 앉자, 어머니는 뒤에 물러나
앉는다. 칙칙 칙칙, 압력밥솥이 저 혼자 운다. 우리는 차례(茶禮) 대신
예배를 드린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한다. 그런데, 성경이 잠언
31장 10절부터 31절까지다! 추석 날 아침 말씀치고는 예사롭지 않다.
현숙(賢淑)한 아내에 대한 내용이다.
오늘은 너희들에게 처음으로, 너희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처음 만나
함께 살게 되었는지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할까
한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강원도, 노론리 그 두메산골 어디. 오 대째 손이 귀한 독자(獨子)로
이어지던 전씨 집안에는, 아버지와 밑으로 두 형제분이 문중의
경사였을 터. 젊어서 경찰이던 조부(祖父)는 전쟁을 넘기면서, 역사의
피맺힌 사연으로 여생을 술로 지냈다는데. 조상 대대로 튼실하던
가산(家産)을 모두 탕진하고, 후처(後妻)까지 들였다나? 막내만
데리고 집을 나간 조모(祖母). 남겨진 형제분은 계모의 고초를 겪으며
유년을 보냈다지. 중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원주로 뛰쳐나온
아버지. 고학으로 공업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해로 갓 스물 된
어머니와 두 돈 짜리 금가락지를 빌려 혼례를 치렀다네! 누이를 낳던
해, 카투사에 자원입대 한 아버지는 제대 즈음에 나를 낳으면서,
사업을 시작하셨고. 삼사 년 번성하던 가재손수건과 자기(瓷器)장
사업을 서울 천호동으로 확대, 이주하게 되지만. 이듬해 1971년
대홍수로 모두 쓸려갔다네! 어머니 혼자 줄줄이 삼남매를 안고
전전긍긍, 태 중에는 막내 동생이 있었다지? 빚더미로 쫓기다 어느
날 문득 나타난 아버지는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라는데…!
이제야 장성한 자식들 앞에 놓고, 여종(어머니를 일컬음)의 헌신에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비로소 고백한다며…. 눈시울까지 붉히시는
아버지.
열 시가 다 되어 늦은 아침을 먹는다. 누이는 연방 우스갯소리로
딴청이다. 아버지는 돌 지난 조카녀석을 무릎에 앉히고, 괜히
헛손질이시다. 눈이 충혈 된 어머니는 국이 좀 짜다며 동생 댁만
타박이다. 아내는 둘째 녀석 수저에 살 오른 조기를 발려주고 있다.
딸애는 할아버지 곁에 앉아 송편 그릇에서 깨떡을 고른다. 서둘러
그릇을 비운 매형이 맛있다며 더 달라고 호들갑이다. 밑엣 동생은
새로 부임한 교회, 담임 목사에 대해 너스레다. 막내 동생은 속이
더부룩하다며 일찌감치 물러앉았다.
뭐라고 한 마디 해 드리고 싶은데, 어깨라도 다독여 드리고
싶은데…. 애써 드러내었을 그 마음 가늠하느라, 나는 자꾸
주춤거리다 만다.
하긴 내후년이면 매형도 밑엣 동생도 목사가 될 테고, 그
이듬해에는 막내 동생까지 목회를 할 테니… 비록 당신의 삶은 고된
길이었다 하나, 추수할 결실은 풍요롭다 아니 할 수 없겠다. 그러니
나에 대한 염려쯤은 잔가지 바람 치듯 그러려니 하셔도 될 법 한데,
상을 물리고 과일을 내오자 덥석 내 걱정부터 치시니, 거참 욕심도
과하시다. 꿀 먹은 듯 나는 가만히 앉았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달리 할 말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니 마저 신학을 마치라고
타이르다, 혼자 역정이시다. 딸애가 가만히 나를 건너다본다. 나는
피식 웃어 보인다. 누이가 점심나절에는 매형 댁을 찾아 봬야 한다며
일어서는 덕분에 나도 일어나 작은 방으로 건너온다. 혼자 앓듯 글을
쓴다는 게 못내 미덥지 않으신 모양인지, 나 없이 동생들만 앉혀두고
연신 내 타령이시다. 슬그머니 방문을 닫으려는데, 딸애가 포도를
받쳐들고 들어와 앉는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포도를 먹는 아이,
녀석도 마음이 쓰이는가보다. 비스듬히 누워 읽던 책을 펼쳐들다,
할아버지께 도토리 주우러 가자 그래라, 하고 말한다. 그제야 신이 난
듯 콩콩 딸애가 뛰어나간다.
바지춤을 양말 속에 말아 넣고, 운동화에 집게까지 챙겨 드신
아버지, 앞서 산을 오르신다. 뒤뚱대던 조카녀석 털 푸덕 주저앉기
일쑤. 딸애와 아들녀석은 일찌감치 할아버지 따라 앞장섰다.
동생내외가 그 뒤를 따르고, 막내 동생만 뒤쳐져 나를 기다린다.
아내는 어머니와 집에 남았다. 담배를 한 대 빼어 물자, 전도사인
막내 동생마저 핀잔이다. 나는 혼자 실없이 웃는다. 새벽녘에 오른
길이라, 이미 산책은 시적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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