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크랩] [소설] 하얀거짓말

전봉석 2006. 8. 6. 18:57
잡담


정확히 눈을 뜨는 시각은 오전 열한시 반이다. 그것도 오차범위
플러스마이너스(±)이분 안에서 그렇다. 눈을 뜨기 전 나의 오랜 습관
가운데 하나는 귀에 익은 소리들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문을 여닫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자동차소리,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 그리고 가늘게 실눈을 떴다 감으며 빛의
밝기를 조율하다 퍼뜩 눈을 뜨면, 맞은 편 벽에 걸린 시계는
정확하게 오전 열한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통관의례인 셈이다.
무심히 돌아보면 아내가 누웠던 침대 한편은 황사바람의 진원지라고
하는 중국의 고비사막처럼 구겨져 있다. 서둘러 나갔는지 마치
구릉지대를 연상케 한다. 저만치 등짐을 이고 힘겹게 모래언덕을
오르는 낙타의 단내 나는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하자 뼈마디 관절들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밤새
피워댄 담배 탓인지 혀끝이 껄끔껄끔하다. 모래를 한 입 물고 있는
것만 같다. 온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요즘 들어 부쩍 피로가 풀리지
않는 느낌이다. 운동을 하긴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뿐이지 습관을
바꾸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침실에서 나와 내 방으로 건너온 나는 창을 열기 무섭게 책상 위에
놓인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오랜 습관이 지배하는 단적인 예다.
책상 위에는 온통 구겨진 종이와 담뱃재로 엉망이었다. 어딘가에
글을 내보겠다는 생각으로 글 쓰기를 시작한 게 벌써 이태를 넘기고
있었으나, 변변한 한 편의 글도 완성하지 못하면서 늘 밤마다 책상만
어지럽히고 있는 꼴이다.
그러니, 아내의 무던함도 어지간하다.
고작 두어 모금도 피우지 않고 나는 담배를 눌러 끈다. 식전에
피우는 담배는 첫 모금이 제 맛이다. 입안 가득 물었다가 깊이
들이킨 후 천천히 내뱉는 그 맛이라니. 하지만 그게 다다. 다음 번의
것은 역하고 때로는 헛구역질까지 난다.
눌러 끈 담배연기가 가늘어지는 걸 보며 나는 거실로 나왔다. 거실
탁자 위에는 조간신문이 놓여 있다. 오늘은 아내가 적어 놓은
메모지도 옆에 있다.
「종호, 유치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원 앞으로 나가. 난 오늘
원장들 모임 있어서 출근했다가 바로 가봐야 해. 용돈은 지갑에 넣어
뒀어. 좋은 하루!」
아내의 글씨체는 약간 왼쪽으로 45도 누운 형태다. 그것은 평소
아내의 걸음걸이와 닮아 있다. 아내의 구두굽이 불균형하게 닳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바깥쪽으로 발을 딛는 듯한 걸음걸이는 보폭을
조절하는 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고, 장모는 몇 번 나 듣는 자리에서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건성으로 읽는 둥 마는 둥 하던 신문을 들고 식탁으로 갔다. 식탁
위에는 어김없이 아내가 차려놓은 아침 식사가 있다. 그리고 오늘도
식탁보 위에는 아내가 남긴 메모가 있다.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국은 꼭 데워 먹고, 식사 후에는 밑반찬들
냉장고에 꼭 넣어. 설거지는 물론 꼭! 꼭! 해. 알았지? 안 그럼 집에
냄새배. 알지? 부탁해.」
결혼 전부터 해오던 학원 선생질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으나, 늘
말투가 애들 다루듯 한다. 못마땅하다고 몇 번 그 일 때문에 뭐라 해
보았지만, 그럴 때면 아내는 입술을 오물대듯 씰룩거릴 뿐 그냥 웃고
만다.
아내는 이처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러니
고분고분 아내의 메모에 따라 빈집에서의 하루를 시작하는 셈이다.
하지만 식전에 피운 담배 탓인 지 오늘은 밥 생각이 없다. 아내가
알면 또 한소리 듣겠지만, 식탁 위에 차려진 반찬들을 냉장고에 도로
넣고 대신 찬 우유를 꺼내 마셨다.
오늘도 할 일이 없다. 기껏 잘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초등학교
애들 몇 명을 모아 논술이랍시고 가르치면서부터 나의 하루는 늘
느슨하다. 간간이 선배에게서 원고 교정 일을 맡아보곤 하지만,
바쁘다는 생활리듬이 어떤 것인지 이제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나는 그저 한가롭고 게으른 사람이 되었다.
그런 데에 비해 아내는 아침마다 전쟁이다. 워낙에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아들 녀석을 흔들어 깨워 자신의 출근길에
유치원까지 바래다주어야 하니…. 물론, 국물이 있는 아침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아는 억척스런 조선여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침마다 죽어나는 건 종호다. 나도 아빠처럼 일 주일만 펑펑
놀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릴 때도 종종 있을
정도다.
식탁에 앉아 한껏 게으르게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이 시각에 전화할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 이제 나의 생활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시각에 나를 찾는 전화는 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울리는 전화를 내버려 둔 채 욕실로 들어갔다. 일단 샤워를 좀
하고 난 뒤에 아내의 미술학원으로 전화를 할 생각에서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전화벨은 연거푸 몇 번을 더 우는 것 같았다.
나는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 전화는
벨소리가 죽어 있다. 선풍기를 켜고 젖은 머리를 털면서 알몸으로
앉아 담배를 집으려는데, 자동응답기의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내인가 보다. 내가 집에 있으면서도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아내는
때로 자동응답기를 통해 또 다른 지시를 남겨두곤 한다. 물론
출판사나 다른 용건으로 남겨져 있는 메시지가 더러 있긴 하지만.
나는 전화기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며 머리를
계속 털었다. 당연히 아내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한참동안 웅웅- 대는 기계 음만 들리는 것이다. 뭔가
전화기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막 손을 뻗으려는데, "다시 걸게요"
하는 여자의 음성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굴 뻔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의 음성이 들려서 그랬다는 게 아니라, 하필이면 손을 뻗었을 때,
그것도 앞 뒤 말은 모두 짤라먹고 난데없이 '다시 걸게요'라니!
순간 나른하게 흩어져 있던 신경 세포들이 양미간으로 모아지고
이맛살을 찌푸려졌다. 누구지? 나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에는 듣지 못했던 소음들이 기계음 속에 섞여 있었다. 길거리 같다.
자동차 소리 같기도 하고,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같기도 하고,
그리고 "다시, 걸게요"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철커덕 하며
녹음 테이프가 멈췄다.
누굴까? 세 번, 네 번을 연거푸 다시 들었는데도 도무지 생각나는
얼굴이 없었다. 괜한 궁금증은 사람을 조바심 나게 했다. 하지만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어쨌든 "다시 걸게요" 했으니 다시 걸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바심을 달랬다. 그리고 녹음된 여자의 음성을
지웠다.

벌써 시간은 열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종호를 데리러 가야
한다. 십분 전 한시에는 유치원이 끝나니까, 그렇다면 슬슬 준비를
해야 한다.
유치원에서 운행하는 차량을 이용해도 될 텐데, 거리에 비해 아이가
너무 돌아야 한다는 이유로 아내가 그것을 마다했다. 아이 걸음으로
십여 분 남짓 한 거리를 유치원 차를 타면 삼십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내 성격에 분명히 유치원에도 건의를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 하나 때문에 같이 탑승하는 다른 아이들을
또 그만큼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아내는
출근길에 직접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려오는 수고를 스스로 마다하지 않는다.
적당히 생각해 봐도 그러는 아내의 속내를 모를 것은 아니다. 내가
사무실에 다닐 때 타고 다니던 차와 아내의 소형차를 팔아 지금의
중형차로 빠꾼 데는 다 그 때문이다. 적당한 허영과 과시가 아내의
작은 즐거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이렇듯 가끔 일이 생기면 종호를 데리러 가는 것이 싫지는
않다. 녀석과 함께 한가로이 산책하듯 걸어오다 보면 뜻하지 않은
재미난 이야기를 얻어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엄마
학원의 파랑 반 선생님이 화장실에 있을 때 어떤 아저씨가 문틈으로
엿보다 들켰다는 이야기라든가, 건물 주인과 옥신각신 하며 엄마가
다투었다는 이야기, 또는 유치원에서 제 또래 여자아이의 속옷
그림이 무슨 그림인데 그걸 맞추기 위해 남자아이들과 책상 밑에
기어들어 갔었다는 이야기 같은…, 제 엄마 앞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이야기를 마음껏 떠들어댈 수 있으니, 아들 녀석도 나와의 동행이
번번이 싫지는 않은 눈치다.
아내는 본래 학원에서의 일이나 심지어 집을 넓혀 이사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까지 나에게 말하지 않는다. 올 가을쯤에 평수를 좀더
넓혀 이사를 할 계획이란 소리도 사실은 종호에게서 들었다. 아내는
그러한 것을 나에 대한 배려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물론 나는
모르는 척 한다. 알아도 별 소용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얘기하면 뭘 알아? 자긴 자기 주머니에 용돈이 떨어졌어도
떨어졌는지 어쩐지 알기나 해? 하며 가끔씩 면박 아닌 면박을
주거나,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지, 신문 값이 얼마나 하는지
모르는 나의 무관심을 아내는 자신의 강인한 생활력과 견주어
과시하는 듯 하다.
그러니 나는 자처해서 천덕꾸러기가 되는 셈이다.

조금 서둘러야겠다. 옷장에서 회색 면바지를 꺼내 입는데 좀약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그 위에 흰색 반 팔 티셔츠를 받쳐입다가
혹시 종호 담임선생이라도 만날지 몰라 줄무늬 밤색 남방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현관을 나서기 전 쓰레기 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멀찍이 샛별 유치원이 보이면서 걸음을 줄였다. 혹시 종호와 같은
반 여자아이의 엄마를 마주치지나 않을까 해서다. 아마도 그
여자아이가 녀석들이 함께 속옷 그림을 보려고 했던 아이일 게
분명하다.
두어 달 전, 종호를 유치원에 입학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아이의 엄마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종호 아버님이시죠?"
여자가 처음 인사를 건넬 때만 해도 나는 그녀를 종호의 유치원
선생으로 알았다.
"아, 예. 안녕하세요."
"어머. 우리 미진이가 종호 얘길 가끔 해서 알아요. 우리 애가
종호를 좋아하나 봐요. 호호. 종호가 아버님을 쏘옥 빼 닮았네요. 몇
번, 종호랑 같이 지나가시는 걸 뵌 적도 있어요."
여자는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말을 하며 나를 아는 체 했었다. 나는
여자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나서야 종호의 유치원선생이 아닌 같은
반 여자아이의 엄마라는 걸 알고 혼자 계면쩍어 웃었다.
화장기 옅은 얼굴에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모습이 보기 싫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가끔씩 아는 체 하며 인사를 건넬 때는 은근히
긴장을 하게 된다. 제풀에 거리를 두고는 있어도 그럴수록 여자는
허물없이 나를 대하는 게 더러는 민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 아는 사이였던 것처럼 턱없이 반가워하는 건 물론이고, 나를
너무 고상하게 여기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귀밑까지 이발을 좀
하시지 그러세요, 라고 하는 정도야 두 번째 보았을 때부터 그 여자
특유의 인사법으로 단정지었지만, 역시 종호 아버지는 분위기가
달라요, 하는 둥의 표현은 왠지 나로 하여금 낯뜨겁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있으면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고 직접 물어보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래도 제
딸애가 내 아이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태도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도 서너 번 여자와 마주치면서 말을 나눈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특유의 백치미가 있는 것이다. 약간은 싸구려 티가
나는 것 같다가도 남다른 정겨움이 느껴진다.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더러 종호를 데리러 가는 날이면, 가급적 여자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어림없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직 안 끝났죠? 어휴, 차를 공장에 맡기고 택시
타고 오는데 어찌나 합승을 하는지. 짜증나서 혼났어요. 요즘 같이 빈
택시가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런 택시가 걸려서 원. 에휴, 호호."
난데없는 너스레에 나는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역시 오늘도,
그 여자다.
"아, 네. 안녕하세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얼른 빼며 엉거주춤하니 대답한다.
"어머. 오늘, 근사하시네요? 호호. 그런데 책은 나왔어요?"
"네?"
호들갑스런 인사야 그렇다 쳐도 느닷없는 책 이야기는 또 뭔지….
친근함을 과장하는 말투야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대수롭지 않았지만,
늘 이런 식으로 여자의 말은 종잡을 수가 없다.
"하긴 뭐, 글이라는 게 그리 쉽게 나오면 되겠어요? 호호. 종호가
그러대요. 우리 아빠 글 쓰신다고요. 어쩐지, 그러실 것 같았어요. 딱
보는 순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호호. 너무 멋져요.
이래봬도 내가 한 때는 문학소녀였거든요. 호호. 어쩐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한눈에 척 알아봤지요, 제가. 호호. 시예요? 소설이에요?"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법이다. 얌체 공 같다.
"아…." 뭐라 대답하기 민망하기도 해서 담배 끝을 손으로 눌러
떨구며, "오늘따라 아이들이 더 늦게 끝나네요." 하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여자는 뭔가 재미난 이야깃거리라도 생긴 듯 "그럼, 댁에서
창작하시는 거예요? 직장은 안 나가시나 봐요?" 하는 것이다.
이거야 원. 쭈뼛대듯 담뱃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 내가 할 말은
없었다.
"참! 종호 엄마가 무슨 미술학원인가 하신다죠? 참, 능력
있으시네요? 이런 어려운 시절에…. 호호."
아내가 그렇다는 건지, 내가 그렇다는 건지. 정말 능력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비꼬듯 재주가 좋다는 건지. 어떻게 들어야 하는
건지…, 그녀의 말은 늘 아리송하다.




접속


소파에 누워 깜빡 졸았다. 어지간히 길어진 낮 시간인데도 장마
끝물이라 그런지 오후의 창 밖이 어둡다. 당장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모양이다. 온 몸이 땀에 젖어 후줄근하다.
찬물로 샤워라도 해야겠다 싶어 소파 옆에 떨어진 책을 줍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저예요."
백나연이다. 종호와 유치원에서 같은 반 여자아이, 미진이 엄마라는
그녀는 나이 서른 다섯으로 둘 째 애를 유산하고부터 사내아이를
하나 더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늘 일에 바쁜 자신의
남편에 비해 골프니 스쿼시니 하는 따위의 운동을 적당히 즐기며
사는, 이름하여 유한 마담인 셈이다.
그녀에 대해 내가 이처럼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지난주에도 종호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을 때 다시 그녀를 만나고 난 뒤부터다. 그렇다고
그 날은 아내에게 특별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닌데, 나는 자청해서
종호를 데리러 갔었다. 아, 먼저 분명히 밝혀두지만 절대 백나연이를
만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와 아는
체 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내가 왜 아내의 학원으로
먼저 전화를 해서 종호를 데리러 가겠다고 했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담배가 떨어져서 사러 나가는 길에 그러고 싶었던
것인지…, 일이 되려니까 그렇게 된 것인지, 뭐 어쨌든.
그 날도 백나연은 여느 때처럼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아는
체 했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종호가 퉁명스럽게 자장면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알았다고 하면서 얼른 종호의 손을 잡고
돌아서려는데, 종호는 나의 손을 뿌리치며 미진이라는 여자아이가
자장면을 사야 한다고 우겼다. 괜히 난처해진 나는 엄마 학원에 가서
엄마랑 같이 먹자고 하며 종호를 달래 보았지만 종호는
막무가내였다. 내기를 했는데 자신이 이겼다며, 그러니 미진이가
자장면을 사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나는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종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백나연이 웃으며 말했다.
"호호. 그렇게 하세요. 우리 미진이가 자장면 내기에서 졌다고
하잖아요. 괜히 그러다 종호 울리겠어요. 내기는 내기니까, 당연히
우리 애가 졌다면 내가 사야죠, 뭐. 호호. 가세요. 모처럼 애들 덕분에
중국 음식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뭐. 호호"
늘 그렇듯이 백나연은 한꺼번에 말을 길게 하며 앞장을 섰다.
그러니 종호만 맡겨두고 나 혼자 먼저 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우리는 가까운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단란한 가족 같네요. 호호. 우리 애 아빠는 워낙 바빠서
미진이랑 같이 외식할 시간도 없는데…. 종호는 얼마나 좋아. 그치?
늘 아빠가 한가하시니까, 좋겠다! 얘! 호호." 하더니, "어머, 내가
주책이야. 호호…."하면서 백나연은 먼저 빈 테이블에 가 앉는
것이다.
아마도 엉거주춤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를 의식했던지 백나연은
자리에 앉기 바쁘게 자장면을 주문하였다.
그런데 두 아이는 서로 다투기라도 한 것인지 정작 음식이 나오자
자기들은 말이 없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연신 떠드는 사람은
미진이 엄마, 백나연이 뿐이었다.
글은 다 써 가느냐…, 요즘 무슨 운동을 하느냐…, 골프를 해보지
그러냐…, 둘째는 왜 안 갖느냐…, 자신은 얼마 전에 유산을 했으며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너무 죽이 잘 맞아 피곤하다느니…, 남편은
며칠째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느니…, 다음에는 외제차로
바꿔야겠다느니… 하면서, 한꺼번에 여러 말들을 떠들어대느라 정작
자신의 자장면은 거의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은 낯간지러운 이야기도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던지, 나는
나도 모르게 진짜 오랜 친구나 된 것처럼 고개까지 주억대며 듣곤
하였다. 백나연의 화법은 그렇듯 주술적이다. 듣다보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이 여자가 왜 나에게 이런
말까지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래서? 어쨌는데? 하는
식의 궁금증을 갖게 하는 재주가 신통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다 먹을 동안 혼자 떠들다시피 하던 백나연이 불쑥
나에게 전화번호를 물은 것이다. 가끔 미진이에게 읽힐 책이나
자신이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전화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미진이를 집사람 미술학원에 보내야겠다는
말까지 하는데, 내가 안 가르쳐 줄 리 있겠는가. 나는 나무젓가락이
싸여있던 종이를 펴서 흰 면에 집과 집사람 학원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 뒤로 백나연은 이렇게 가끔 전화를 한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호호. 뭐, 하세요?"
"네…? 아, 깜빡… 잤어요."
몇 번의 통화를 하다보니 어느새 나도 백나연과의 대화가
자연스럽다.
"푸푸. 아무튼, …좋네요. 전, 미진이 수영장에 데리고 왔어요. 강습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혹시 뭐하시나 해서 전화한 거예요. 괜찮죠?
호호. 괜히 글 쓰는데 방해될까 봐 조금 망설였는데, 호호. 낮잠이나
주무셨다니, 호호. 좋아요, 좋아."
백나연의 목소리는 언제나 즐겁다. 꾸밀 것도 없고, 꾸밀 줄도
모르는 막힘이 없는 말투다.
"어제, 술을 좀 했거든요. 모처럼.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하루종일
빌빌해요. 병든 닭처럼. 후후"
어느새 나도 곧잘 말을 받아친다.
"어머! 술 잘 드세요?"
나의 객쩍은 소리에 백나연은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물었다.
"후후. 아뇨. 못하니까, 이렇게 빌빌대죠. 죽겠어요. 아주."
말을 하면서 나는 무선 전화기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기 무섭게 담배를 빼어 물었다. 워낙에 순박한 여자다.
처음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정신 박힌
주부라면 어떻게 허투루 아무에게나 이처럼 말을 걸겠는가 싶어 제법
경계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백나연은 천성이 약지 못한
사람이었다. 뭔가를 재고 따지고 허세를 떠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오히려 푼수 같은 여자였다.

며칠 전, 뜻밖에도 아내와 나는 백나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신, 미진이란 애 엄마 알아?"
아내의 느닷없는 질문 앞에 침대에 걸터앉아 마감뉴스를 보고 있던
나는 당장 미진이라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 하고
되물었다가, "아, 종호랑 같은 학원 다니는 여자 애?" 하고 말을
했다.
"응! 그 애 엄마가 애랑 같이 학원에 왔더라."
아내는 화장대 앞에 앉아 콜드마사지를 하고 있었는지 번들거리는
얼굴로 거울 속의 내게 말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찾아간다 하더라."
조금은 심드렁하게 말을 받자, 아내는 괜히 팽한 소리로 다시
물었다.
"당신이랑은 꽤 친한 거 같던데? 같이 밥도 먹었다며?"
아내의 말투가 은근히 날이 섰다.
"어? 무슨 싱거운 소릴…, 어어! 그게 언제더라." 나는 괜히 뭔가
숨기려다 들통난 사람처럼 말을 쭈뼛대며 이었다. "당신 학원장들
회의 있던 날인가? 아니다, 그 다음 번인가? 뭐, 아무튼. 그때 종호랑
같이 자장면 먹었어. 미진인가 하는 애랑 무슨 내기를 했다나 봐,
종호가. 기어코 그 애한테 자장면을 사야 한다고 하는 통에…."
괜히 나도 모르게 설명을 길게 하게 된다. 하지만 아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그 여자, 조금 이상해. 자기네 애가 무슨 영잰 줄 알아. 나 참. 기가
막혀서. 미술에 소질이 있긴 무슨 얼어죽을 소질. 색 분간도 못하는
애를…. 하여튼 우리나라 엄마들 문제야, 문제."
연신 얼굴을 문질러 대며 아내는 열을 올렸다. 학원에 애를 맡기는
엄마들 절반이 다 그렇다는 둥, 그게 다 겉멋 들어 그렇다는 둥,
학원에 맡겼으면 알아서 가르치게 두지 사사건건 참견하는 꼴을 보면
당장이라도 학원을 때려 치고 싶다는 둥…. 마치 거울 속의
자신에게나 이야기를 하듯 끝도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고 언제 끝날 지도 모를 터라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내 방으로 가려고 했다. 그때 아내가 말을 덧붙였다.
"잘 해! 괜히 이상한 소문나지 않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나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쯧."
괜히 팽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낮 시간에
몇 번 백나연이와 통화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뭐, 나는 신경 쓰지도 않아! 당신이 무슨…." 하더니, 하려던 말을
돌려서는 "세상이 워낙에 요지경이어야 말이지. 당신이 좀 약게 살
필요는 있다는 말이야, 내 말은…." 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괜히?"
나는 풀이 죽어 아내에게 물었다.
"허구한날 글 쓴답시고, 꽁생원처럼 굴잖아. 혼자 집에 틀어박혀서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하나. 뭘 하는 건지 원.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깐.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뭐, 까짓
거. 다른 집 남자들은 별거야? 난 우리 신랑이 제일 멋져. 술 먹고
속썩이기를 하나, 그렇다고 놀음을 좋아하나. 좀 답답하긴 해도, 난
괜찮아."
도대체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쩌라는 건지.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우리 신랑이야 착한 거 빼면 뭐
볼 거 있나? 하하. 난 그래도 당신이 좋아. 누구처럼 지 마누라를
패기를 하나! 꽁생원이면 어때. 지들은 뭐가 잘나서…. 웃겨 정말."
무슨 말인지, 누구 말인지 몰라 "누구?" 하고 물었더니, "당신은
몰라. 미친 연놈들이 어디 한둘이야?" 하면서 티슈를 신경질적으로
뽑는 것이다.
엉거주춤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아내는 늘 이런 식이다. 큰누나처럼 또는
원장선생님처럼 마치 나를 애 다루듯 하는 거야 이미 그렇다 쳐도,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나와는 상관없이 자기 혼자 말하기에
바쁘다. 이런 아내가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편하다. 적당히 부부간의
거리를 조율하면서도 지극히 대담한 아내의 배려가 자칫
훌륭하기까지 하다.
머쓱해져서 티브이를 끄고 내 방으로 건너가려는데, 아내가 화장을
지우던 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침대로 걸어왔다.


"아, 수영 강습이 끝났나 봐요. 나중에 또 전화 드려도 되죠? 또 잘
거예요? 아, 부럽다. 알았어요. 나중에 봐요."
늘 그렇듯이 백나연은 혼자 떠들다 전화를 끊었다.
낮 동안에 가끔 나누는 백나연이와의 밀담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어찌나 호들갑스러운지 통화를 끊고 나면 정신이 다 몽롱할
지경이었다. 별반 무슨 비밀스런 얘기도 아니고…, 대수로울 건
없었다.
막상 통화를 끊고 책상에 앉아있으려니까, 무료한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하겠다던 생각도 귀찮아져서 나는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통신에 접속을 했다. 그곳에 있는 문학 동호회에 가입한 것은 일년
남짓 된다. 가끔씩 글을 올리곤 하는 카페인데, 며칠 동안 올려져
있는 회원들의 글을 건성으로 훑어보고, 회원끼리 주고받는 편지함을
열었다. 다 그렇고 그런 내용들뿐이다. 얼마 전에 번개라는 걸 한
모양이다. 각자의 대화명 뒤에 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나는 '글쓰기'를 클릭하고 몇 줄의 안부를 남기기로 했다. 좀체
오프라인 모임에는 참석하지는 않고 있는 터라, 그다지 친분 있게
지내는 회원도 없지만, 글을 통해 서로에 대해 아는 회원은 이제
제법 된다. '정팅'이라고 해서 시간을 정해놓고 가끔씩 문학 토론이나
독서 토론을 할 때면 함께 그 대화방에서 채팅을 나눈 적도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모임의 회장 격인 '시삽'이 내 앞으로 편지를
남겨놓았다. 이번 번개 때는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 봐서
서운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늘 그렇지만 나는 온라인 상에서 글을 쓴다는 게 왠지 어색하다.
그것은 번번이 다 쓰고 올린 다음에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문장이나 내용이 적잖게 걸리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서 말을 할 때는
단지 말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표정이나 눈짓 그리고 사소한 몸짓
하나 하나도 모두 언어가 되어 전달되는 셈인데, 글은 다르다. 글자
안에 갇힌 상대방의 다른 언어까지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자칫 엉뚱하게 읽힐 소지가 있다.
가끔 보면 그래서 다툼이 이는 경우도 있는가 본데…, 그런 뜻으로
쓴 것이 아닌데도 잘난 체를 했다느니, 상대를 업신여긴다느니
하면서 오해를 사는 경우 말이다. 가장 단순한 예로, 가깝다고
생각해서 하대를 한 것인데도 그것이 자신을 무시한 것으로 여겨
"너, 몇 살이니?" 하며 대놓고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는 글도 적잖다.
기호화된 말은 그 뜻을 푸는 자세에 따라 달리 전달되기도 한다.
어쨌든, 언제 기회가 되면 꼭 참석하겠다는 속에 없는 말과 즐거운
번개였던 것 같다고 하는 다소 부러움 섞인 내용으로 내 앞으로의
글에 대한 답장을 쓰고 있는데 [메모]가 들어왔다.

[메모] 미소: 안녕하세요?
[메모] 미소: 저 기억하시죠?

'미소'라는 한글 아이디를 보고 대뜸 나는 '그녀'라는 걸 알았다.

[메모] 아, 네. 안녕하세요?

지지난 달쯤이었을까? 내가 동호회에 올려놓은 글을 읽고, 나의
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적어 온 회원이다. 우리는 대화방에서도
채팅을 나눈 적도 있다.

[메모] 미소: 저를 기억해 주시니 기쁘네요.
[메모] 후후. 뭘..

더러, 동호회 회원간에는 [메모]를 주고받는다. 정기적으로 토론이니
문학비평 같은 것을 하는 시간에도 개별적으로 [메모]를 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은근히 재밌다.

[메모] 미소: 저는 지난 번 대화 이후에 조금 불쾌하신 점이
있으셨나 걱정했어요.
[메모] 네? 아니, 왜요?
[메모] 미소: 그냥. 그땐 제가 너무 당돌하게 말한 건 아닌가 하고요.
[메모] 아니요. 원, 별 말씀을….

사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글을 읽고 토론을 할 때면 적잖은 설전이 벌어지는 게 당연하다.
어쩌면 그건 서로를 마주 대하고 있지 않는 데서 오는 객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호화 된 말은 때로 거침없이 용감한 법이다.
나 같이 어눌한 사람이라 해도 내 차례가 되어 발표를 할 때면,
직접 보면서 말을 할 때와는 달리 사뭇 용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 더구나 문학 토론이라는 게 적당히 상대의 글을 씹어주는
것을 미덕쯤으로 여기지 않던가. 그게 마치 서로를 위하는 것쯤인 양.
또는 자신의 치열한 문학열을 과시하는 것으로 착각하는지도.

[메모] 미소: 사실, 그 일 이후 계속 접속을 안 하셔서..
[메모] 미소: 조금 찔렸어요.
[메모] …….
[메모] 미소: 그래서 집으로 전화도 했었는데..
[메모] 미소: 혹시.. 들으셨어요?

순간 나는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뭘 들었냐는 거지?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남겨져 있던 전화기의
녹음된 음성을 떠올렸다.

[메모] 아, 들었어요.
[메모] 그게 미소 님이었군요??

미소와는 몇 번 대화방에서 토론을 하며 채팅을 나눈 게 전부다.
물론 토론이 열리지 않는 날, 이렇게 쪽지를 주고받거나 하긴
하였지만, 새벽 늦게까지 쪽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으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메모] 미소: 막상 음성 남기려니까 쑥스럽던데요?
[메모] 미소: 기계에 대고 혼자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 줄
처음 알았어요.
[메모] 그랬군요. 난 또.. 그게 누군가 했어요.
[메모] 여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가하고 궁금했었는데..
[메모] 미소: 같이 토론하던 날 이후로 통 접속을 안 하시더라고요.
[메모] 미소: 그래서 난 내가 단단히 실수를 했구나 생각했죠.
[메모] 후후. 별 말씀을. 그냥 조금 바빴어요. 이래저래.
[메모] 그런데 저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메모] 미소: 푸푸. 회원정보에 보면 연락처 정도는 나와 있어요.
[메모] 아하.

회원들 순서대로 하면 두 달에 한번 정도 내 작품을 놓고 토론을
한다. 아마 그 날도 그 날이었던 모양이다. 평상시에는 접속해 있는
회원들끼리 자유롭게 방을 만들어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곤 하는 게
보통이지만, 일 주일에 한번 토론이 있는 날은 텍스트로 정해진 글에
대해 꽤 진지하게 토론이 이루어진다.

[메모] 미소: 그럼 괜히 걱정한 거 맞죠?
[메모] 후후, 네.

미소는 스물 아홉이다. 무용과 출신이며, 춤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여자다. 분당인가 어디서 무용학원을 운영하며 대입
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게 개인 레슨을 해 주고 있다고 하는데,
내후년쯤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더 공부할 생각도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채팅이나 쪽지를 주고받으며 알게된 사실이다. 그녀도 역시
그만큼 나를 안다. 얼마 전까지 출판사에 다녔고, 지금은 글을
쓴답시고 백수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 그러다 아이들 몇을 모아
논술을 가르치고 있으며, 시쳇말로 '셔터 맨'이라는 사실까지도.
아내의 가게 셔터를 올려주고 내려주며 무위도식하는 남자를 '셔터
맨'으로 비하하여 부른다지? 그만큼 능력 있는 여자를 집사람으로
두고 있다는 비아냥거림일 게다.

[메모] 미소: 요즘은 통 글을 올리지 않네요?
[메모] 아, 네.. 워낙에 소질이 없는 건지..
[메모] 쓸려고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메모] 미소: 무슨 그런 말씀을..
[메모] 미소: 저기, 지금 시간 괜찮아요?
[메모] 네? 왜요?
[메모] 미소: 아뇨. 그냥.
[메모] 미소: '[메모]'치기 귀찮아서..
[메모] 미소: 대화방을 만들면 어떨까 해서..
[메모] 아, 이런. 조금 있으면 집사람이 들어올 때가 돼서..
[메모] 오늘은 좀.. 내가 저녁을 준비해야 해요..
[메모] 미소: 푸푸. 그래요? 그림 좋네요.
[메모] 미소: 괜히 무안하네.. 쩝..
[메모] 미안해요. 이따 밤엔 어때요?
[메모] 미소: 뭐, 꼭 그러실 건..
[메모] 아뇨. 이따 12시쯤 해서 다시 접속을 할게요..
[메모] 미소: 그러시든지. 그런데 그 시간에 내가 있으려나?? 푸푸.
[메모] 후후. 그래요, 그럼. 시간 되면 이따 봅시다.
[메모] 미소: 그래요. 그럼, 안녕.

통신이란 참 신기하고 야릇한 구석이 있다. 전화 통화하고는 사뭇
다른 어떤 느낌이다. 문자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혼자 머릿속으로
상대를 상상하고, 그러면서 내내 나름대로의 이상형을 끼워 맞추기도
하면서, 가상의 또 다른 존재를 서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언젠가 미소가 말한 것처럼, 온라인 상에서의 허구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싫든 좋든 꾸며질 수밖에 없는 모습은 그 개체의
문제가 아닌, 본인의 상상에서 먼저 그려지고 재단되는 속성이 있는
것이니까.






어느 별






지구로부터 이 억만년 떨어진 암흑계에는 안드로메다라는 작은 별이
있다.

태초에 신께서는 만물을 창조하기에 앞서 '고라'와 '고멜'이라는 두
천사를 천상으로부터 추방하여야만 하였으니, 만물 창조의 근원으로
사랑을 목적으로 삼고 있던 신은 창조적 대과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에로화'를 외치는 '고라'와 '고멜'을 소멸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저들은 신의 눈을 피해 서로를 사랑이라는 이름로 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께서는 자신만이 사랑의 근원이기를 원하셨으므로 사랑의 대상
또한 자신이기만을 바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라'와 '고멜'의
사랑은 신의 존엄성과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신은 저들의 존재를 깨끗이 지우기로 결심하셨는데….
만물 창조에 앞서 한 점의 흠도 원치 않았던 신으로서는 그러한
자신의 진노 앞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질서와 권위를 우선으로 하는 사랑이야말로 신을 중심으로
하는 온전한 창조의 결과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그 원칙은 곧
사랑의 제 일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혼돈과 공허만으로 가득하였던 태초의 창조역사에서 '고라'와
'고멜'이 먼저 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을 우선으로 하는 사랑을
나누고 있었으니, 창조에 앞서 저들을 먼저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은
창조의 목적이기도 한 완전한 사랑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던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고뇌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신께서는 깊은 고뇌에 빠져 창조적 대과업을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때 천사장으로 있던 '갸브리엘'이 죽음을
무릎 쓰고 신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사랑과 은혜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나의 아버지여!

어찌 스스로 흠이 되시려 하나이까?

저들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도 없는
피조물의 사랑에나 지나지 않나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는 하나
결국 자신을 위한 자신만의 사랑일 뿐
대상 없는 사랑임에는 분명하오며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저희는 아옵니다.

부디, 저들의 존재를 소멸하기에 앞서
저들의 사랑 또한 대상 없는
사랑의 고통으로 본보기를 삼아
그 또한 신의 창조적 대과업으로
하나의 원칙을 삼으소서.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에는
피조물의 사랑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저들의 사랑을 통해 알게 하소서.

저들 또한 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오니
저들의 온전하지 못한 사랑 또한
신께서 창조하셨다 할 수 있사옵니다.

오, 대 주재여! 창조주이신 나의 아버지시여!
저의 그릇된 충언을 용서하옵소서.

혀가 짧고 지혜가 둔하여 자칫 창조주의
허물을 지적하는 꼴이 되었나이다.

하오나, 이 어찌 티끌만도 못한 제가
주의 완전한 창조 역사에
어긋남을 아뢰겠나이까.

저들을 소멸하시기 보다
주의 편만(遍滿)한 관용을 보이시어
저들을 용서하시고, 저들이 낳은 사랑의
결과로 대신 유리(遊離)하게 하옵소서.

저들의 사랑으로 저들이 낳은 결과를
유리(遊離)하는 형벌로 대신하려함은
사랑함으로 사랑하여 더할 수 없는 외로움을 낳고
채움으로 채워도 채울 수 없는 허기를 낳으며
끊임없이 갈구하여 헛된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오니
이 또한 온전한 사랑을 이루게 함인 줄 아옵니다.

혼돈 속에 버려져 있는 저 별, 안드로메다로
저들을 추방하시어 저들로 저들의 사랑으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소서.

하여 저들은 소멸을 대신하여 떠돌이 별 안드로메다로
추방당하였으니, 그것은 천사장 가브리엘의 목숨을 건 진언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신의 권위에 도전한 대상 없는 사랑의 대표적인
천사 '고라'와, 사랑을 이유로 질서를 무시한 결과의 천사로 '고멜'이
지목되었던 것이 오늘날에도 유리(遊離)하는 고통으로 사랑을
대신하기에 이른다.

혼돈과 공허로 창조 전 세상을 지배하던 암흑 가운데 떠돌이 별
안드로메다가 있었으니, 만물 창조 이후에도 태양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흑암 속에 버려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미소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안드로메다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소와 나는 그 날 이후 거의 매일 밤 채팅을 하였다. 어떤 날은
서로의 지나온 유년 시절을 이야기하였으며, 또 어떤 날은 현재의
헛된 꿈들을 토로하며 서로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문자화된 언어로써만
서로를 알고 서로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나에게는
크나큰 충격과도 같았지만, 나에게도 터무니없이 멍든 유년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도 미소와의 채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랬었지, 아 맞아. 내가 그랬었어' 하면서 나는 나의 나된 모습을
거울을 맞대고 보는 듯이 새삼 돌아보곤 하였던 것이다. 말과 말
사이에서, 나의 잊혀졌던 기억들이 건져 올라올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려 한숨을 쉬곤 하였다. 그럴 때면 화면 저편의
미소의 말이 나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지듯이 달래주곤 하는
것이었다.
통신은 환상의 늪과 같다. 그것은 환각이고, 마약성분이 강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말하는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러므로 서로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 그 어떤 치기 어린 감정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 서로의 대화가 거듭될수록 가슴 저
밑바닥에 망울져 있는 상처까지 부끄러움 없이 끌어내게 되었고,
그러면 때로 서로는 역할을 바꿔가며 하루는 의원이 됐다가 하루는
병자가 됐다가 하는 것이다. 의원이 되어 상대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다독이는가 하면, 병자가 되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서로가 그리는
모습으로 상상하면 그만이었다. 굳이 만나야 할 필요도 없었고,
만지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사랑인 것이었다. 그랬었다. 미소와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며 그저 말과 말로 이어지는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내가 무턱대고 그녀의 연습실이 있다는
분당으로 찾아간 것은 우리만의 나눔의 룰, 대화의 법칙, 사랑의
방식을 깬 행위인지도 모른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굳이 만나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것이
가능한 줄로만 알았는데…. 며칠 전부터 나는 대화를 하다말고, 보고
싶다는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오랜 사랑의
방식이었고 보고, 만지고, 느낄 때에야 가능하였던 사랑의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한 번, 만나. 보고 싶어.

언제부턴가 말을 놓기 시작한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다시금
만나자는 제의를 하였다.

미소: 음.. 왜 또..
싫어? 굳이 우리가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미소: 그렇게 말하면, 굳이 만나야 할 이유도 없죠.
미소: 어쨌든, 그쪽은..
어쨌든 그쪽은? 아하, 내가 유부남이라 그렇다는 거로군!
미소: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있죠.
뭐, 그렇다면..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늘 이런 식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제 죄의식 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소와의 관계에 있어 사랑이라는
표현이 사뭇 어처구니없는 것이긴 하지만, 달리 나의 감정을 다르게
표현할 게 없었다. 밤마다 미소를 기다리고, 미소와의 대화를 통해
진하게 느끼곤 하는 감정을 도대체 무어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우정? 신뢰를 동반한 앎? 적당한 대화 상대? 그것도 말이 통하는?
천만에. 언제부턴가 나는 그녀를 만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보고
싶어하고, 느끼고 싶어하고, 허상이 아닌 실체로 사랑으로 대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언제부턴가 아내와 종호가 잠들면 내 방으로
건너가 소리나지 않게 방문을 잠그곤 하였다.

미소: 죄송해요.
아니야.. 어쩌면, 당연한 거지.
미소: 어쩌면..?
미소: 사실 나도..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미소: 알아요? 누군.. 뭐..

푸른 모니터 위로 미소가 다 하지 못한 말들이 내 가슴에 한 자 한
자 찍혀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칼날에 베이는 것처럼 통증으로
느껴졌고, 모니터 속으로 손을 뻗기만 하면 금세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실존적인 안타까움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혼란스러움이 나를 부르르 떨게
하였다.

나는 서둘러 아내의 학원으로 갔다. 아내는 최 선생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눈길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덤덤하니
책상 위의 놓인 자동차 키를 집어들며 말했다.
"아마, 나 오늘 좀 늦을 거야. 수업 끝나고 서점에 좀 들렸다가,
봐서 서울엘 좀 다녀오려고. 그 왜 있지? 기현이? 나 중학교 동창
말이야. 전에 왜 그 집 애 돌잔치에도 갔었잖아? 오늘 그 친구를 좀
만날까 하고…."
생각에도 없이 자꾸만 말이 길어졌다. 그러나 아내는 점심으로 시킨
쫄면 그릇에 얼굴을 묻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누가 뭐래요?" 그리고는 옆에 놓인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혹시,
술 마시면 전화해요? 내가 나가던가 할 테니까! 전에처럼 술 마시고
운전하면 알아서 해?" 하고는 최 선생을 보며 앙칼지게 한마디
덧붙였다. "글쎄 운전을 하고 온 사람이 집에 들어왔는데도 술
냄새가 풀풀 나는 거 있지? 미쳤어 하여튼."
그러자 그 얘길 들은 최 선생은 호들갑스럽게 입을 닦으며 말했다.
"어머, 어머 그러다 큰일나요. 우리 형부도 그러다 면허 정지까지
맞았잖아요. 글쎄 있잖아요…" 하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내와 최 선생을 뒤로하고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한층 더 미소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처럼 가슴을
아리게 한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다. 꼭 작정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수업 시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이상의 여유가 더
있었지만 나는 공중전화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수업을 가야 하는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수업을
못하겠다고 하며 다음에 보충을 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듯 전화를
끊었다. 거짓말이기는 하였지만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무작정 분당으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분당에 있는 서현역 근처에 도착해서도 혹시 미소가 말하던 그녀의
연습실이 어디쯤일까 가늠하며 주위를 몇 번 맴돌았다. 그러다
서현역 아래 있는 '혼자 내리는 비' 라는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안은
대여섯 개의 테이블이 고작이었다. 실내는 바깥의 후줄근한 날씨에
비해 오싹하리 만치 온도가 낮았지만, 창가에 걸어둔 깜빡이 전등이
크리스마스 때에나 어울릴 것처럼 어색하게 푸근했다. 널따란 통
유리로 바깥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것과는 달리 대낮인데도
깜빡이등을 켜둔 주인의 감각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래도 창가
쪽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카운터 옆에 있는 파란색 공중전화로
갔다. 그리고 미소의 호출기에 음성을 남겼다. 가급적이면 놀라지
않게,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하려니까 오히려 더 떨리고
어색했다.
어, 여기 분당이야, 어, 난데, 저기, 여기, 서현역 근처에 있는
카페야, 이름이 혼자 내리는 비라는 카펜데… 그때 전화기 저 편에서
삐익삐익- 하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얼떨결에 나는 전화기의 별표를
누르고 카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남긴다고 남긴 메시지가 너무
어색한 것 같아서 다시 음성을 남길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어차피
할 말은 다 한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카페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문가 쪽의 자리로 가 앉았다.
주인 여자에게 커피와 담배를 함께 주문하고 나는 가방에서
서영은의 『한 남자를 사랑했네』라는 책을 꺼냈다. 김동리 선생이
살아생전, 부인이 있는 선생을 사랑했던 서영은의 고백적
수필집이었다. 어디선가 흘려 들었던 책 소개와 제목을 미소와
채팅을 하면서 일부러 서점에 들러 사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몇 줄 읽다가도 누가 들어오는 인기척이라도 나면
출구 쪽을 살피곤 하였다. 머리카락이 생 머리로 어깨 정도 내려오는
단발이라고 했던가?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다고도 했던가?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의 브랜드가 '쌈지'라는 가죽 제품이라고 했던가?
하는 시시콜콜한 내용들을 기억해 내고, 특히 들어오는 여자들의
생김생김을 눈여겨보곤 하였다.
그러다 문득,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고, 어디에 앉아 있는가 하는
것쯤은 다시 음성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다. 미소도 나를 보지
못했으니까! 나는 다시 전화부스로 가서 음성을 남겼다.
회색면바지에 흰색 면 티셔츠를 받쳐입었고, 위에는 겨자 빛깔이
나는 윗옷을 입었으며, 출구에서 들어오면 바로 오른 쪽에 있는 첫
번째 테이블에 앉아 있다, 는 메시지를 남기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입고 있는 겨자 빛깔의 이 윗옷은
언젠가 아내가 백화점에서 세일한다며 사온 것이었다. 그런 아내에게,
내가 어떻게 이런 색깔의 옷을 입느냐며 면박을 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는 여태 한 번도 입지 않고 장 속에 넣어두었던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씁쓰름한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나는 다시 서영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은 삶이 오히려 고통스럽다.' '사랑의
감미로움에 이끌려 상대방의 살 속 깊이 더 깊이 파고드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은 급기야 자기 속에서 상대를 죽이고 싶고 죽임을
당하고 싶은 파괴적 마성과 만나게 된다. 그 마성이 흡혈이다. 흡혈은
도착의 극한, 가학의 극한이다.'라는 부분을 연거푸 다시 읽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고 담배를 빼어 물었다. 오죽하면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을까, 하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정말 그럴 수 있은 게 또한 사랑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카페에 들어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정상대로라면 그 시간에 나는 아이들을 앞에 놓고 책읽기가
어떻다느니, 서론 쓰기는 어떻게 해야 한다느니 하며 수업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어색하고도
현실감이 없는 시간이었다.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나의 몸을
빌려준 것처럼, 아니 누군가를 대신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너무도
어색하고 이상했다. 꿈속인 것처럼 몽롱하고 답답한 기분도 들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치 수렁처럼, 이
수렁에서 붙박이 신세가 될 것만 같았다. 나를 지배하는
환상으로부터 살이 먼저 썩어 들어가고 어느새 뼈마디는 딱딱하게
굳어져 더는 움직일 수도 없는 박제인간! 꼼짝 못할 가위눌림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일어서려고 해도, 이제 가방을
들고 계산을 치르기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데,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나간 다음에 미소가 온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럴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서영은의 산문집을 꺼내려다 며칠 전부터 쓰고 있던
「안드로메다의 사랑」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
그릇된 사랑은 떠도는 것이다. 신께서는 또 한번 만물 창조의
결과를 두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사람이 홀로 독처(獨處)하는
것이 안쓰러워 신은 남자에게 여자를 짝으로 만들어주셨으니,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고백으로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신께로부터 배운 사랑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어느 날 문득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졌다. 신께로
향한 남자의 사랑을 여자는 모두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여자는 스스로 신이 되기로 결정하였다. 신이 정해놓은 규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절대로 먹지 말라'는 규율을 어김으로써
신과의 대등한 관계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그것을 자신의
남자에게 먹게 하였다. 그럼으로 신을 배제한 둘 만의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사람 남자는 '모든 동산의 나무의 실과는 다 먹어도 되는 것'과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을 맞바꾸게 되었다. 남자는 무엇보다 신의 사랑으로 만족하였지만,
누구보다 여자를 사랑하였다.
결국 신께서는 처음 사람 남자의 선택에 크게 노하셨다. 그러므로
저들 또한 천상의 낙원으로부터 추방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고라'와
'고멜'의 사랑이 본보기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람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더 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저들을 '고라'와
'고멜'의 별 안드로메다로 추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만물
창조에 있어 무엇보다 신중하셨던 안식 하루 전의 사람 창조에
결정적인 흠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께서는 깊은 고뇌로 수면 위를 운행하시고 계실 때, 천사장
'갸브리엘'이 다시 한번 신 앞에 나와 아뢰었다.

대 주재여! 천주여! 만물을 창조하신
우리들의 아버지, 처음 사람의 완전한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고뇌하고 계시나이까?

피조물의 사랑은 완벽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아버지의 완벽한 사랑과 견줄 수 없나이다.
부디 저들의 사랑의 선택을 용서하시어
편만(遍滿)한 관용을 베풀어 알게 하여주옵소서

어찌 다시 저들을 떠돌이 별로 추방하시어
아버지의 공로에 스스로 흠이 되시려 하시나이까?

저들을 위해 저들을 별을 지목하시고
저들에 의해 저들의 수고로 관리케 하소서

땀을 흘려야 소산을 얻을 수 있게 하심으로
아버지의 수고를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태(胎)를 열어 해산(解産)의 고통을 더하시면
비로소 저들을 지은 조물주의 고통을 알겠나이다

부디 저들의 선택을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여 처음 사람 남자는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인 여자와 함께
천상의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이 땅으로 보내지게 되었으니, 다시는
낙원을 찾고자 하여도 찾을 수 없도록 신께서 스스로 천상의 낙원을
가리게 되었다.
처음 사람 남자는 땀을 흘리지 않고 소산을 얻을 수 없는
지상에서야 비로소 천상에서의 충만하였던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고통을 통해서야 완전하였던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사람 남자는 그러므로 자신의 땀으로 얻은 소산을 두고 신 앞에
제단을 쌓았으니, 은혜의 왕, 사랑의 주인인 신께서도 저들에 대한
진노를 거두고 그제야 여자의 태를 열어 자식을 선사하시게 되었다.


여기까지 읽고 있던 A4 용지를 신경질적으로 구기며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이처럼 가상의 비현실적인 미소에게 빠져들 줄은 정말 몰랐다.
고작 통신으로 주고받는 채팅이 전부였고, 간간이 이어지는
전자메일이 유일하게 우리를 잇고 있던 선이었는데, 이런 걸
사랑이라니!
어느새 창 밖으로는 길 건너의 붉은 네온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실내 스피커에서 "호출하신 분"을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미소의 호출번호 끝자리 네 개가 정확하게 불려지고 있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이것이 어찌 가상이며 비현실인가!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받는 전화'라고 씌어진
전화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 저편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다시 "여보세요, 여보세요"를 연거푸 하며
되뇌다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흔들어보기도 하였다. 그러고 있었을
때, "여보세요." 하는 희미한 음성이 들렸다.
"어, 나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러는 게 어딨어요? 아무런 약속도 없이? 날더러 어떡하라고?
흑흑…"
전화 저편의 미소가 울고 있었다. 나는 경솔했다. 경솔하고 또
경솔했다. 미소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저렸다.
"어, 그냥…, 갑자기 수업이 없었어…, 그래서 그냥…, 울긴 왜
울어?"
당황한 나는 자꾸만 말을 더듬거렸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미소가
말했다.
"나, 아까…. 그 근처까지 갔었어요. 흑흑…. 그런데…, 그런데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연습실로 도로
왔어요…. 그리고 이렇게 여태까지 멍하니 앉아 있어요… 나,
어떡해요?"
너무 가엾고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괜찮아 난, 뭐… 책 읽고 있었어… 아주 시원하고 좋은데 뭐…
신경 쓰지마. 울긴 뭘 울어… 울지 마…"
가슴이 저려 금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벌써 몇 시간째야? 왜 여태 그러고 있어요? 바보처럼… 아씨….
진짜 신경질 나…. 어떻게요?"
"뭘? 아, 난 괜찮아, 정말."
이상한 일이다. 소리를 지르고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데도, 그래야 될
것만 같은데도, 나는 자꾸 미소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어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이 결국은 나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괜찮긴? 내가 안 괜찮다, 뭘."
이렇게 조금은 미소의 목소리가 밝아지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책은 다 읽었어요, 그럼?"
"아니, 조금 남았어 이제. 내친김에 다 읽고 갈까봐." 하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쭈뼛대며 다시 물었다. "저기, 지금이라도 나올래?"
손바닥만한 전화부스 안에서의 이 말이 나를 우습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나 아직 애들 레슨 다 안 끝났어요. 한 애가 늦게 왔거든. 그나저나
밥은 먹은 거예요?"라고 묻다가, "어, 내가 이따가 다시 걸게요.
끊어요." 하고는 황급히 전화를 끊는 거였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다 식은 커피를 훌쩍 마셨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물었다. 그래도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다시 전화를
건다고 하지 않는가!



둘째 사람 여자는 두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태를 찢는 고통으로
해산을 하고서야 비로소 신의 완전한 사랑의 품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여자는 첫째 사람 남자가 땅을 갈러 밖으로 나갈 때면 두
아이를 놓고 천상에서의 완벽했던 사랑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랑으로의 완전한 자유를, 자신이 누리고 소유했던 사랑의 풍만함을
들려주었다.
한 아이는 여자의 완전했던 사랑의 자유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한
아이는 여자의 사랑을 그리워했다.

두 아이는 자라서 성년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땀방울로 땅의
소산을 거두었다. 저들은 처음 사람 남자처럼 그것을 완전한 사랑의
주인이신 신 앞에 제물로 바쳤다. 하지만 신께서는 하나의 제물은
열락(悅樂)하시고, 하나의 제물은 열락(悅樂)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는 다른 하나를 죽여 자신이 그 모든 사랑을 차지하려
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살인을 범한 사람이 되었다. 신께서
저에게 나타나셔서 죽은 자의 피를 요구하셨다. 그러자 그는 신에게
아뢰었다.

내가 그를 지키는 자이니까?
왜 나에게서 그를 찾으시나이까

나는 나의 사랑을 요구하였을 뿐으로
저와 나는 똑같은 여자의 태에서 나왔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저의 사랑을 물으시나이까
내가 저를 지키는 자이니까?
나는 나의 사랑을 사랑하였을 뿐이오니
나를 내버려두소서

이렇게 되자, 신이 크게 노하심은 당연하였다. 당장 저를 죽여
사랑하는 자의 피를 되찾고 싶으셨다. 그러나 신은 자신의 사랑으로
자신의 사랑을 찾은 저에게 유리(遊離)케 함으로 사랑의 값을 묻기로
하셨다. 그것은 이미 '고라'와 '고멜'의 사랑으로 유전되어진 피조물의
사랑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사람의 사랑은 이 땅에게 유리(遊離)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구겨놓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 얼마쯤을 더 읽었던
것일까. 스피커에서 나의 이름이 또박또박 불려졌다. 나는 다시
전화부스 안으로 들어가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어, 나야. 다 끝났어?"
행여 미소로 하여금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더없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미소는, "왜 여태 그러고 있어? 진짜!"
하고는 다시 울먹이는 게 아닌가.
나는 정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머릿속이 온통 구겨진
종이 위의 무질서한 글자들처럼 뒤엉키는 것 같았다.
"나 사실… 아파요. 그래서… 이따 동생이 엄마랑 올 거야. 아마,
엄마가 오면, 나는 엄마 집으로 들어가야 할 거 같아. 내 몸이 정말
엉망이거든…"
미소의 목소리가 먼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래? 아… 미안해… 괜한 사람 더 힘들게 했나보다…."
진심이었다. 너무 미안하고 그래서 부끄러웠다.

미소에게는 대학 때부터 7년 내내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보다 무려 열 살이 많은 그 남자를 미소는 줄곧 짝사랑 해
왔었다고 하는데, 그 남자가 지지난 달에 결혼을 했단다. 그것도
하필이면 미소가 그토록 따르고 좋아하던 같은 과 선배 언니였다고
하면서, 철저한 배신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미소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었단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자신이 얼마나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그 언니는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소는 자신을 가학하듯 먹지도 자지도 않고 스스로를
괴롭혔다고 한다. 밤새 잠을 재우지 않고 통신에 매달리거나, 그렇게
밤을 새우고는 또 수영장에서 거친 숨이 끊어질 정도로 풀을
왕복하거나, 그러다 풀장 직원에게 끌려나오기도 하면서…, 몇 날
며칠을 술을 마시기도 하고, 끝도 없이 차를 몰고 달리기도 하고….
그러다 동호회에 올려져 있는 나의 글을 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자신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하였다.

"미안해. 그런 것도 모르고."
"아니에요… 정말 나가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럴 수 없었어요… 아… 내 마음을 당신이 알까…?"
울먹이는 미소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런 게, 이런 게 어떻게 사랑일까? 그래서, 그래서 더는 뭐라 말을
못하고 있는데, "어, 엄마가 온 거 같아. 훌쩍… 이따 접속하면 메모
줘요. 얼른 집에 가요, 이제. 응…?" 하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응, 그래…."라고 내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통화는 끊겼다.



지구로부터 이 억만년 떨어진 곳에는 '고라'와 '고멜'의 별,
안드로메다가 있다.







입다





줄기차게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에 항복하고 말았다. 어지간하면 내
방에 있는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고 그만 둘 법도 할 일인데,
열두 번의 신호 후, 다시 또 열두 번의 벨 소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었다. 자동응답기가 열둘을 기준으로 돌아가게 맞춰져 있으니까,
철커덕하며 테이프가 돌아가는 동안만 잠시 그쳤다가 다시 또
전화벨이 울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비몽사몽으로 맞은 편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열시를
넘어서지도 못하고 있는 시침과 분침이 나의 눈을 찔렀다. 과연
언제부터 울어대고 있었는지, 오히려 빈집을 휘감아 돌듯 울어대고
있는 벨소리는 아주 당당하게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여보세요."
아직도 잠을 한 입 입에 베어 물고 있는 말투로,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는 전화를 받았다. 아침에 잠들었으니까 나는 고작 두어
시간도 못 잤다.
"어…, 거기 한문숙 씨 댁 아닙니까?"
"누구요?"
"저, 한문숙 씨라고…."
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부담스러운지, 전화 저편의 남자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다 나는 한문숙이라는 아내의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잠시 멍한 상태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그러세요?"
뜻밖에 아내를 찾는 남자의 전화여서 그랬는지 나는 더욱 삐딱하게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한문숙 씨 댁 맞습니까? 한문숙 씨 계신가요?"
남자는 다시 물었다. 아직도 눈을 반은 감고 있던 나로서는 그냥
지금이라도 다시 눕게 해 준다면 그대로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아,
될 수 있으면 잠을 놓지 않기 위해 말했다.
"없어요. 다음에 거세요."
하지만 그 남자는, "어, 저기. 잠깐만요. 한문숙 씨 댁 맞죠?
실례지만, 한문숙 씨하고는 어떻게 되시죠?" 하며 더욱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봐요. 그러는 댁은 누군데 식전부터 남의 마누라를
찾아대는 거요?"
문득, 내가 말한 식전이라는 표현이 우습게 들렸지만 잠이 달아난
상태에서 나는 정말 화가 나려고 했다.
"아, 네. 저는 ** 카드사 고객관리 담당 임,재,식,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달과 지지난 달 한문숙 씨의 카드 대금이 결제가
안돼서요. 현재 연체 상태인데, 다음 달로 넘어가면 한문숙 씨 신용에
문제가 생기거든요. 한문숙 씨께서도 이번 주까지는 처리를 하시기로
했는데, 아직 입금확인이 되지 않아서 전화 드린 겁니다. 오전에
학원으로 먼저 전화를 드렸는데 안 계시다고 해서, 다시 집으로 확인
전화 드린 겁니다."
남자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한꺼번에 설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전화한 용건을 말했다. 그러니 더는 내가 뭐라 대대거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네에. 저, 그런데 지금
집사람 집에 없습니다. 학원에 있을 텐데…." 하면서 말을 흘렸다.
"한문숙 씨 남편 되신다고 하셨죠?"
"네…."
"그럼 한문숙 씨께 전해주세요. 결제 대금은 이번 달 것까지 해서
사백 칠십 오만 팔천 원이고, 이번 주 안에 꼭 결제 부탁드린다고요.
만약 입금이 되시면 바로 전화 부탁드린다고도요."
남자의 말투는 공손하였지만, 한심한 노릇이라는 듯 알만하다는
투로 말을 하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면 되죠?"
그러니 나는 더욱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네. 저는 **카드, 고객관리 담당 임,재,식,이었습니다. 그럼,
감사합니다."
남자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띠이…띠이… 하는
신호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한동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기분이 나쁜 건 둘째치고, 도대체 이
여자가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길래 이런 전화가 걸려오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아내의 미술학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한마디 해야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잠은 다 달아난 뒤였으니까…. 두 번의 신호음이
가고, 곧바로 최 선생이 전화를 받았다.
"네, 학원입니다."
"아… 저, 나 종호 아빠예요. 저기… 집사람 좀…."
"아, 안녕하세요?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이들이 재재거리는 소리, 최 선생의 슬리퍼 끄는 소리, 문을 열고
원장님, 하며 부르는 소리… 들이 전화기 저편에서 들렸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기다리고 난 뒤에야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야? 왜 벌써 일어났어?"
다짜고짜 아내는 말했다. 순간 나는 아내의 태연한 목소리를 듣자
더 화가 났다.
"카드 회사 전화 받았어?"
"카드? 무슨 회사?"
"학원으로 전화했다던데? 없다고 그래서 집으로 전화했대. 뭐야?
카드 값을 못 낸 거야?"
어딘가 내 말투가 시비조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친놈들. 어련히 알아서 낼까봐 지랄들이야. 그리고 당신이 왜
신경 써. 그런 전화 오면 모른다 그러고 그냥 끊으면 되지."
퉁명스럽게 말을 하는 아내의 욕지거리를 듣자 나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오백이나 되는 카드 값을…. 어디다 그
많은 돈을 쓴 거야? 도대체?"
아내의 목소리 톤으로 나 역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누가 당신더러 그 돈을 내랄까 봐 걱정이야? 왜 아침부터 이
난리들이야, 진짜." 하며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아내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당신이 써댄 돈, 내라고 하는데…,
뭐 뀐 놈이 성낸다고…. 이게, 진짜…?"
이미 달아난 잠이었다. 눈이 따갑고 아팠지만 어차피 다시 잠을
자는 건 무리였으므로 나는 전화기를 들고 내 방으로 갔다. 그리고
담배를 물기 무섭게 창을 열었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하는
동요가 들리는 것 같더니 아내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그래. 왜 당신까지 아침부터 난리야?
내가 알아서 한다구! 당신은 잠이나 더 자. 신경질 나 죽겠는데….
쯧." 하며 신경질을 내는 것이다.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나 역시 소리를 질렀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던가? 어설프게 깬 잠도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아내의 태도가 더 못마땅했다. 그런데, "알았어.
알았다구. 내가 알아서 한다구. 알았으니까, 끊어! 나 지금 바뻐!"
하고는 아내가 전화를 탁 끊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강한 모멸감도 느껴졌고, 수치심도 들었다. 나는 다시 재다이얼을
눌렀다. 하지만 한참동안 신호음이 가는데도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반복되는 신호음을 들으면서, 그만두자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담배를 눌러 끄고 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옮겨 들었다.
"네, 학원입니다."
최 선생이었다.
"집사람 좀 바꿔줘요."
나는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대뜸 아내를 찾았다.
"저기, 원장 선생님… 지금… 아이 엄마가 오셔서… 상담
중이세요…."
최 선생도 얼추 분위기를 눈치를 채고 있는지, 조심조심 말을 했다.
"……."
나는 화가 치밀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기…, 이따가 전화 드리라고 할까요?"
최 선생이 물었다.
"네…. 아뇨. 됐어요." 하고는, 수화기를 책상 위에 집어던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집에서 말을 안 하고 있었다. 전과는 달리 아내와
종호에게 괜히 짜증을 부리거나, 저녁 시간이면 내내 나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아졌다. 평소에는 싱겁게 툭툭 장난을
걸어오던 종호 역시도 며칠 전부터는 내 눈치만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냐고 몇 번 묻던 아내도 이제는 나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그저 내버려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헛걸음을 하고 분당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나는 혼란스러웠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가 뒤죽박죽이 된 것처럼, 모든 게 귀찮고 짜증만
났다. 그러다 보니 일체의 현실이 거추장스런 짐으로 여겨졌고,
그동안 쓰고 있던 글들조차 지겹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하루는
그래서 통신에 올렸던 글들을 모두 다 지워버리기도 하였다.
그 모든 혼란이 가상 공간인 통신 때문에 생긴 일이었고, 내가 너무
그것에 집착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단정지었다. '미소'라는
대화명, 닉네임으로 불리는 그녀를 비롯해서 청솔이니 나그네니
푸른하늘이니 월령이니 하는 따위의 저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실존하는 실재의 인물인지, 아니면 가상의 허깨비인지…. 익명의 휴대
공간 속에 숨어있는 저들은 과연 나의 삶 속에 어떤 의미로 들어와
있는 것일까? 저들이 글로 표현하는 삶을 내 안에서 다시 이해하고
복원함으로 새로운 존재의 청솔이니 푸른하늘이니 아니면, 미소라는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운 만큼 통신에 접속했다.
그리고 더한층 사이버 공간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였고, 말과 말
사이의 허구와 실체를 찾아 헤매다 애쓰는 만큼 더욱 더 가상
공간으로 빠져들어 갔다. 어떤 사람은 절대 저들의 존재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내가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이고,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사는지에 대해 열 중 아홉은 거짓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통신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의 선입견일 것이다.
모두가 다 그렇다면, 모든 게 다 거짓이라면, 그러한 세계를 그리고
만드는 우리들의 존재까지도 부정되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분당에서 돌아온 뒤, 미소는 더없이 친절하고 애처로웠다. 그 전처럼
자주 채팅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미소의 몸이 극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평에 계신 할아버지의 농장으로 요양을 가
있어야 할 정도이며, 가평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낮 동안에 두어 번
정도 미소가 전화를 걸어오는 게 전부였다. 더러는 내가 먼저 미소의
호출기에 객쩍은 소리를 음성으로 남기기도 하면서….
미소의 할아버지는 가평에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을 끼고 조그마한
배 밭을 가꾸고 있다고 했다. 미소의 아버지가 손수 설계를 하고
건축한 그 시골집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도 함께 있다고 하였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면서 나는 다시 학원으로 전화를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아내에게 사과도 해야 할 것 같았고, 사실은 그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물어보고, 어쨌든 내가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장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다 담배를 눌러 끄고는 나는 또 습관처럼 접속을
하였다. 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기다리는 미소의
메일은 없고, 문학 동호회 시삽으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가 있었다.
무슨 일 있느냐, 글이 다 지워졌던데 혹시 회원간에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냐, 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조금은 엉뚱한
내용이었지만, 그래서 어쩔까 하다가, 어쨌든 나의 순간적인 감정으로
그랬던 것이고 하니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고, 갑자기 내
글에 염증이 났으며, 그래서 순간적으로 글을 지웠을 뿐이라고,
그러니 미안하다고 사과를 덧붙이며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쓰겠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잠깐 동호회 게시판을 둘러보다가
그 위에 '한글 97'을 열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 참전하던 용사 '입다'는 신에게 서원(誓願)을
한다. 만일 전투에서 자신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게 해 준다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장
먼저 달려나와 자신을 맞는 사람을 신 앞에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신께서는 '입다'의 서원을 받아들여, 불리하던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게 하신다.
'입다'는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이 서원(誓願)하였던 일은 까맣게
잊고 개선장군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너나없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 아직 상거(相距)가 먼데 제일 먼저 달려와
'입다'의 목에 안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입다'의
외동딸이었다.


흥건하게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나는 소파에 널브러지듯 누웠다.
아침부터 엉뚱한 일에 신경을 쓴 탓인지, 써두었던 글을 조금 읽고
있으려니까 금세 잠이 몰려와 서너 시간을 골아 떨어졌었나 보다.
그렇게 소파에 누워 있으려니까, 갑자기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오후가 다 되었는데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식탁 위에는 아내가 차려놓고 나간 아침 식사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다 식은 국 국그릇에 밥을 말아 훌훌 마시듯 떠
넣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인지, 미소인지…. 나는 입에 있는
밥을 삼키지도 못하고 얼른 뛰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백나연이었다.
"호호. 안녕하세요? 식사 중이신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약간 싱거운 기분이다. 기다리던 전화도 아니고, 차라리 아내가
전화를 한 것이었으면 좋았을 걸…. 나는 전화기를 들고 식탁으로
왔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입안을 헹구었다.
"호호. 나중에 걸까요?"
뭐가 늘 그렇게 재미있는지, 백나연의 목소리는 언제나 통통 튄다.
"아녜요. 다 먹었어요."
"점심이 늦네요."
"점심? 후후. 아침입니다."
"네에? 여태 뭘 하시구요?"
"…, 잤어요."
"어머, 어머 미쳤어. 배도 안 고파요? 호호,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아무리 그래도 곧 있으면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에 아침이라니…,
호호."
이제 나는 백나연이와의 통화가 즐겁다. 스스럼없는 말투에 가벼운
말들이 나를 편하게 하는 것 같았고, 시시콜콜하게 별 얘기도
아니면서 꾸미거나 말을 돌릴 필요도 없고, 단순 무식하게 내키는
대로 듣고 받으면 그만인 말들뿐이었다. 때로는 시어머니 흉이나
집안의 대소사를 늘어놓고 떠들어댈 때면 괜히 민망해지긴 하였지만,
그 또한 백나연이 특유의 화법으로 나의 나된 여성적 성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동물학적으로는 내가 남자임에 틀림없지만 지극히 여성스러운 그
무엇이, 그때까지 내가 모르고 있던 내 안의 어떤 성향이 백나연이나
미소로부터 새롭게 태어나 자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거 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여성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도
같다. 또래의 사내녀석들과 같이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것 보다,
그늘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거나 종이 접기를 하며 노는 걸 더
좋아했던 것도 같고, 크고 많은 것보다 작고 앙증맞은 것을 더
좋아하였으며, 그것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다이어리 하나 열쇠고리 하나 또는 늘 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볼펜
하나에 자주 감동하곤 하는 것이 어쩌면 다 그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나는 마주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을 여기저기
나대며 돌아 치는 것보다 좋아했다.
그러니 나의 씩씩한 아내는 시시껄렁한 말보다 활동적인 걸 더
좋아하고, 무얼 하든 자신이 다 알아서 해치운 걸 좋아하는 편이어서
자연히 나는 나의 성향이 눌린 채 아내의 그늘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백나연의 수다스러운 성격과 허물없는 너스레가 싫지 않은
건 분명하였다.
"오늘 저녁에 수업 있어요? 괜찮으면 나랑 저녁이나 드실래요?"
느닷없이 백나연이 물었다. 늘 전화 통화를 하다 끊는 게
고작이었던 백나연이 오늘은 웬일로 먼저 만나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태 백나연이와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가끔 종호 유치원 앞에서 보는 것과 이렇듯 미주알고주알
전화를 통해 만나는 것 외에는 한번도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참 나…. 세월 좋은 한량은 따로 있다니까, 아무튼. 오늘이
금요일예요, 금요일. 달력이나 좀 보고 살아요." 하고는 자기 말에
자신이 우스웠던지 또 한바탕 까르르 웃었다.
"금요일? 아…, 그럼 이따 다섯 시에 한 팀 수업 있고, 그 다음엔
별일은 없는데…, 왜요?"
"왜요, 는 무슨…. 그냥요. 그냥, 오늘은 제가 너무 너무 심심해서
괜찮으면 같이 밥이나 먹으려고 하는 거죠. 호호. 전에 제가 자장면도
샀는데, 여태 그 빚을 안 갚고 있으니까, 그 빚을 좀 받아낼까 하는
거죠. 호호."
그러게. 빈말이었지만, 종호와 같이 자장면을 얻어먹고는 다음에
한번 갚겠다는 말을 한 것도 같은데, 그 뒤로 자연스럽게 통화는
했을지 몰라도 굳이 서로가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누가 먼저
만나자고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치…, 왜요? 싫어요? 사람 무안하게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요? 싫으면 말구요."
아침에 아내와 한바탕 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차라리
그래서라도 조금 늦게 들어오는 것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샐쭉하니
어린애처럼 말을 하는 백나연의 말투도 우습고 해서, "하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좋아요. 그럼, 오늘 내가 그 빚을 갚죠." 하고
말했다.
그러자 백나연은 송도 어디어디를 아느냐, 그 옆에 뭐가 있는데
거기서 아주 근사한 재즈 음악이 어떻다, 하며 또 한참을 떠들었다.
"저기, 그런데…. 미진이는 어쩌구요?"
나는 한참 백나연의 수선스런 설명을 듣다 말고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백나연은 애 엄마가 아닌가.
"어머? 미진이요? 참나. 오늘 유치원에서 캠프 갔잖아요. 종호는 안
갔어요? 그럼? 이상하네. 같이 간 거 아닌가?" 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얼굴
출처 : 비공개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