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전봉석 2016. 12. 13. 07:36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

잠언 13:5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4-5

 

 

 

만물보다 부패하고 거짓된 게 마음이다. 이를 누가 바로 알까? 주님은 행위대로 보응하신다. 불의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다. 중년에야 마침내 이를 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이와 같은 말씀을 입에 머금고 있다 보면 더는 할 말이 없어진다.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까닭은 당장을 모면할 수 있어서 어찌 나중을 도모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믿고 육신의 힘을 의지하는 데 경계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5).” 은연중에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는데 이는 주를 떠나게 한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7).”

 

왜냐하면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8).” 이를 아는 자는 주께 간구한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14:7).”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께서 일하셔야 한다. 내가 할 수 있지 못하다.

 

오전에 아이가 영화제에 대한 기사를 보내왔다. 편집을 도와 다시 메일로 보내주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가 왔다. 같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오후가 다 돼 돌아갔다. 다 나름의 자기 생각과 아집이 있는 것이라, 뭐라 한들. 들리지 않는 말의 정체를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와 같은 말이 의미 없는 것인지, 그럼에도 권면하고 다시 다독여 주의 길을 함께 가자, 해야 하는 것인지. 다신 그런 말 하지 말아야지, 하고 나면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내 속이 더 답답하고 견딜 수가 없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20:9).” 들리지 않는 말들이 그대로 허비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마나 한 소리도 아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해주는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으나, 그러게. 벌써 1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겨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있었다. 네팔과 인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아이에게 가라, 가지마라 한다고 해서 들릴 리 없고. 한참 연애가 더 중하고, 자기 생각에 이끌리는데 주일을 권한다는 게 왠지. 이런 소릴 얘한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가도, 하게 하시는 또는 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을 내게 넣으시는 데는 별 수 없다.

 

때론 정말이지 듣거나 말거나, 행하거나 말거나, 그럼에도 나는 전하고 권하고 다시 말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말이란 표면에 있는 게 아니었다. 헤롯도 세례요한의 말을 달갑게 들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또한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12:37).”

 

즐겁게 혹은 달갑게 듣고 호응했다고 해서 저들이 믿고 돌이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잘 아셨을 텐데도 주님은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듣고 돌아가 다 잊은 듯 도리어 저들이 십자가에 내어줄 사람들인 걸 알면서도 전하신 것이다. 듣고 안 듣고, 이에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엄밀하게 내 소관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순화하느라 세상적인 관심을 나누고 헛된 말로써 수다에만 그친다면 그게 더 낭패다. 어쨌든 여기까지 두신 이가 어찌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려는지. ‘주는 선하시며 성실하시다.’

 

나는 책임감도 부족하고 잘 잊고 성실하지 못하지만,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 감사한다. 그의 이름을 송축한다. 왜냐하면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미칠 것이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이가 또한 아이를 이끄시고 돌보실 것이다. 숱하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그저 호기심이었든 어떤 군중심리 때문이었든, 그 가운데 제자들이 있었고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훗날 바울이 되는 사울도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허투루 소용없는 말 같으나 그 말이 뿌리 내리고 움이 터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내 십자가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가장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지극하신가를 입증한다. 십자가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내 생각이 우선이고 나의 판단과 기준이 전부인 것이었으나, 십자가 앞에 나올 때 나보다 더 추하고 죄악 된 이가 없음을 마주하게 된다. 전에는 괜찮다, 괜찮다 했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가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한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그 무엇도 소용없다는 걸 여실히 들추어낸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 때 더욱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 수 있다. 아이를 어쩌지 못하고 그저 속을 끓이고 있을 때 그럴 수 있는 마음조차 주의 사랑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긴 내가 뭘 어쩔 것인가? 그럴 수 있지 뭐! 하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길 수 있는 마음이야 말로 무책임하고 별 볼 일 없는 사이에서의 것이었다. 안 가면 안 되니? 왜 혼자서 그 빤한 우상의 나라에 그것도 몇 달씩 나가 있으려고 하니! 어떻게든 좀 말리고 싶은, 꼭 그렇게 살아봐야 아는 것은 아닌데, 싶은. 결코 갈 데까지 가 봐야만 아는 건 아니라고 붙들고 싶은데….

 

이런 마음의 출처가 십자가였다. 이런 말을 누구에게 하면, 젊을 때 여행 다닐 수 있으면 좋지 뭐, 다 그럴 때 가는 거지, 그게 뭐 어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는 말로 대수롭지 않고 듣거나 오히려 나의 염려를 괜한 마음으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하긴 나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면 그처럼 너그러울 수 있다. 다 포용하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지 뭐, 하고 껄껄 웃어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마음을 난들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든가 말든가 괜히 더 말할 필요도 없는데, 내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더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는 나를 더 내려놓고 그리스도만 높이게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한다. 떡을 나눠주고 물고기로 배불리 먹을 때 모여들었던 숱한 사람이 다시 십자가 앞에 모였으나, 모두가 가슴을 쥐고 주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외치고 소리 질러 파렴치한 강도를 대신 놓아달라고 한다. 저를 못 박으라고 외친다. 조롱하고 욕한다. 그저 몇몇만이 비로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 볼 뿐이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아!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나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은, 내가 늘 그의 십자가 앞에 있을 때였다.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배웅하고 돌아서면서도, 아이 손을 잡고 기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런 마음을 내게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그러므로 내 입에 할 말을 넣어주시기를, 다루어야 할 마음과 기도를 외면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4).” 그러므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6).”

 

나는 기도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러므로 내가 날마다 십자가 앞에 서게 하시기를.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 이런 고백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정말 그런 자로 살 수 있을까?

 

나는 자신할 수 없고 할 수도 없어 그저 마음만 먹먹하다. 좀 더 좋은 목사를 만나고 나은 교회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공연히 미안해서다. 다분히 불신앙적인 마음인 것은 알지만, 그저 송구하고 죄송할 뿐이다. 아이에게 어디 가까운 교회라도 나가라고 말하는 나의 상실한 마음에 대하여 주께서 용서하여 주시기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아, 그래서 더더욱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시는구나!

 

오늘 시편 100편의 감사를 진심으로 되뇐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