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잠언 14:26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01:4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의식하는 일이다. 의식됨으로 주의하고 주의하는 만큼 실천을 미룰 수는 없다. 가령, 말로 표현하는 것이 새삼 확실히 보이는 경우와 같다.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아는 것이나 글을 씀으로 더 분명히 들을 수 있는 이치와도 같다. ‘견고한 의뢰’는 의식하는 빈도에 따라 그 세기도 달라진다. 찬송이란 자꾸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고 자랑하는 일이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다윗의 고백이 그래서 나온다.
공들여 내가 아침마다 ‘묵상글’을 쓰는 일은 참으로 복되었다. 글로 쓴다는 행위는 그에 적합한 언어를 찾는 일이고, 적합한 단어를 고르는 데 있어 내가 보는 세계는 더욱 확장하는 것이다. 전날에 있었던 일을 다시 더듬는다. 어떤 일, 혹은 누구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 의미를 유추하고 적절한 표현을 얻기 위해 그 세계를 더욱 진지하게 들여다본다. 그러는 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손길을 마주하는 일, 묵상은 말씀에서 그 확증을 얻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일, 기도를 하는 일,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일, 무엇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일, 이 모두는 공교롭게도 말(言)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합당한 말을 찾기 위한 노력은 더욱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들인다. 이와 같은 일이 더욱 확실한 것은 설교 원고를 구상하고 본문을 읽고, 의미를 더듬어 찾고, 그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는 일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말은 하는 것이 아니고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듣는 이가 없는 말은 혼잣말일 뿐이다. 글도 마찬가지여서 엄밀하게 말하면 누군가가 읽을 것을 전제로 하여 쓰는 것이다. 이때 단어를 고르고 표현에 신중하다 보면, 더 선명한 세계를 열고 들어서는 것을 체험한다.
창가에 서서 소리 내어 성경을 읽는 일은 성경 속으로 이끄는 효과가 컸다. 오랫동안 이처럼 묵상글을 쓰는 일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 작정을 하고 한 날을 설교 원고에 집중하는 일에서도, 그러는 동안 더욱 분명한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의 한 날이 아침에 묵상글을 쓰는 만큼만 ‘견고한 의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표현하는 만큼 길은 더욱 선명하였다. 말이 되는 동안 내 안에 생각은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아, 말씀은 결코 철학이 아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기도를 한다는 것도 말을 다루는 일이다. 나의 심정을 어찌 아뢸까? 어떤 말로 이와 같은 처지를 설명할까?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보여드리면 좋을까? 기도란 주님 앞에서 생각하고 몸짓 발짓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표현하는 일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주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고, 이를 글로 표현하는 묵상글은 말의 지혜를, 그 실체를, 하나님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종일 우리는 말을 생각하고, 말을 다루고, 말을 읽으며, 말로써 사람을 이해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것도 말없이 표현되지 않는다. 말을 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는데, 그 선택의 기준이 오늘의 됨됨이였다.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의지하는 데 있어 이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바로 ‘어떤 말을 따라가고 어떤 말을 고르느냐’ 하는 것이다. 혼잣말이 있듯이 거짓말도 있다. 과장하여 꾸며낸 말도 있고 전혀 엉뚱한 말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선택하는 데 있어, 지금 내가 무엇을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고 항변해도 주변을 에우고 있는 말의 결이 다르다.
성경은 구원을 주는 책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래서 단어를 찾고 적당한 말을 선택하기까지, 어휘를 고르고 더듬어 합당한 말로 표현하기까지, 하나님의 지혜는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결국 말하는 것이 보는 것을 달리한다. 보는 것으로 말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느냐에 따라 사용하는 말이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관심이 말을 이끌어서 ‘말의 세계’가 곧 내가 사는 오늘이 되는 것이다.
보는 것이 말함으로 드러나고 표현된 것이 더욱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표현으로 드러난다. 슬픔은 슬픈 말로 견고해지고 기쁨은 느끼는 말의 표현으로 한정된다. 좋은 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엄연히 좋고 아름답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를 보지 못하고 같이 누리지 못하는 게 죄 때문이다. 죄는 말을 혼란에 빠뜨렸다. 본래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창 11:1).” 그런데 죄의 결과로 언어는 혼잡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9).”
죄로 인해 우리가 서로 각기 다른 말을 하고 사는 것이다. 부부가 말이 안통하고 부모와 자식이 반목하며 친구와 친구가 의심하고 사랑에도 서로의 언어가 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늘처럼 말을 잃게 만드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무슨 말을 더듬으며 찾고 있는 것일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를 알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말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찬송이란 이와 같이 가장 최적의 말을 사용하여 주를 높이는 일이다. 그 안에 사귐이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고백은 말이다. 말은 내가 보는 세계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증명한다. 문득 책을 읽고, 성경을 메모하고, 어느 성경 구절을 찾아 그것으로 고백하기 원하는 나의 모습에 놀랐다. 이를 묵상글에 표현하고 더 나아가 설교문에 작성하려고 모은다.
모은 언어를 적절하게 배열하여 가장 성경에 맞는, 하나님의 생각에 적합하도록 문장을 정렬한다. 단락을 나누고 뜻을 정한 뒤 성경을 증거로 삼는다. 그렇게 작성한 원고를 두고 또 설교를 하다보면 전혀 다른, 더 깊은 또는 더 넓은 내연과 외연의 의미를 마주하게 된다. 좀 민망한 고백이지만 어제는 그 부분에 감사했다. 글쓰기와 책 읽기에 관심을 두게 하신 하나님께 말이다. 우연처럼 누굴 만나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고, 내 안에 확장되는 어떤 슬픔의 근원을 찾아 단어를 고르게 하시고, 평생을 글 밥을 먹게 하신 데 감사하였다.
성경이 말씀이라는 것. 하나님이 말씀으로 오신다는 것.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 말씀이 오늘 내 안에 계신다는 것. 등등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는 말씀의 말씀됨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물론 어떤 직업으로 사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모두는 말을 쓴다. 해야 하고 들어야 하며, 말로 소통하고 표현된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표현하고 적합하게 사용하는 것이 신앙의 열매였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궁극적으로는 말로 표현되어 과즙을 낸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이 열매의 과즙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와 같이 묵상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가장 적절한 언어를 고르느라 신중하고, 신중함으로 주의 뜻을 살피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만큼 내게 두신 세계의 의미가 선명해지는 것이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얼마나 위험천만한 세상인지 모른다. 이에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32).” 그러므로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시 101:2).” 날마다 두시는 오늘 이 한 날의 삶을 바르게 잘 살아드리기 위해,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3).”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이로써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시 10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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