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언 15:33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7
주신 여건 가운데서 묵묵히 ‘살아드리는’ 게 충성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신다(11).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훈계’라는 오늘 잠언의 말씀과 이어진다.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가 된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데 따른 구별은 겸손으로 드려지는 생활에서 판명 나는 것이다.
조지 허버트의 시를 노트에 옮겨 적으며 여러 번 읽었다.
사랑이 환영의 말을 건넸으나 내 영혼은 뒤로 물러섰으니
오물과 죄 때문이라
그러나 눈치 빠른 사랑이 꾸물거리는 나를 보고
내가 들어서자
가까이 다가와 내게 부족한 게 있는지
친절하게 묻는구나
여기에 합당한 손님이라고 내가 대답했더니
사랑이 말하길, 네가 그 사람이 되리라
고약하고 배은망덕한 내가? 오 내 님이여,
난 당신을 볼 수 없노라
사랑이 내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답하길,
내가 아니면 누가 눈을 만들었느냐?
주여, 맞소이다만 제가 눈을 더럽혔나이다. 제 수치가
합당한 곳에 있게 하소서
사랑이 말하길, 그렇다면 너는 수치를 누가 당했는지 모르느냐?
내 님이여, 그러면 내가 섬기겠나이다
사랑이 말하길, 너는 앉아서 내 음식을 맛보아야 하리라 하니
내가 앉아서 먹었노라
[사랑 3, 전문]
나는 오물과 죄 때문에 꾸물거렸다. 사랑은 그런 내게 다가와 부족한 게 없는지 친절하게 물었다. 주인인 사랑이 친절하게 대하자 나는 돌연 배은망덕하게 손님으로서 내가 합당하다고 우쭐댔다. 그러자 사랑은 충분히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한다. 내가? 순간 민망하여 ‘나는 당신을 볼 수 없다’고 하자, 그 눈을 누가 만들었지 상기시킨다. 그 눈을 내가 더럽혔다며 수치를 드러내자, 그 수치를 누가 대신 당했는지 알게 한다. 결국 나는 그 사랑을 감당할 길 없어 무엇으로든 섬기겠노라 했더니, 가만히 앉아 차려놓은 음식으로 나를 대접한다. 나는 아무 공로 없이 앉아서 먹는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게 아니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 해! 하는 마음은 성경이 주는 마음이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죄가 있는 데 은혜도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말(言)을 고르고 온 마음을 다해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의 특징은 겸손이었다.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하시는 오늘 잠언의 말씀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뭐라도 해야겠다며 ‘그러면 내가 섬기겠나이다.’ 하니 ‘사랑이 말하길, 너는 앉아서 내 음식을 맛보아야 하리라.’ 나를 가장 안전한 곳에 두시고 주의 말씀을 차려주신다. 그래서 ‘나는 앉아서 먹었노라.’ 이보다 확실한 겸손도 없다.
갚을 길이 없는데, 오히려 나는 허물과 실수로 수치뿐인데, 내가 얼마나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의 수혜자인지를 알 수 있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눅 12:37).” 감히 내가 이대로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는 황송하다. 어찌된 일인지 이번 주간 내내 옆 사무실들이 비었다. 바깥 날씨는 매서운 강추위에 오그라들 정도인데, 발밑의 조그만 난로 하나면 충분한 곳에서 나는 소리 내어 말씀을 읽는다.
비록 서른 삶의 짧은 인생으로 죽은 이름 없는 시골 교회 목사 조지 허버트의 시를 음미하는 일이라니! 저의 시 안에 담긴 그리스도 예수의 무궁하신 사랑을 함께 고백할 수 있었다. 앞에 읽은 예레미야서에서 복음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그 보루는 규정에 따라 사람이 살게 되리라(렘 30:17-18).”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주리라.’ 그리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2).” 이 분명한 사실 앞에서 더는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내가 섬기겠나이다.’ 하던 마음조차 겸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참고 견디며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오늘의 나는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인 양 굴었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왜 때로는 더 어렵고 불편한가, 봤더니 여전히 내 안에는 내가 어떻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자기만족이 교만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을 대할 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는 서운함이 먼저 드는 것이고 말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해서 내 앞에 음식을 차리신 게 아니다. 자격이 아니며 나름의 수고의 대가도 아니다. 바울이 그처럼 외치었던 값없이 주는 선물이 여전히 죄인으로서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이미 그 값을 다 대신 지불하신 이 앞에서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앉아서 먹었노라.’ 하는 허버트의 진술은 경이롭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그런 거였다! 손님으로, 종으로 있을 땐 그저 민망하고 송구스럽기만 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어찌? 하는 마음은 겸손이 아니라 또 다른 거절이었고 교만이었다. ‘화목 제물’로 드려진 주님의 값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죄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게 어찌 겸손일까? 나 같은 게 무슨, 하는 마음이 결코 순수한 게 아니었다. 싫은 것이다. 손님으로 왔으니 내가 값을 지불하겠다는 것이고, 종으로 있으려니까 내가 시키는 걸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섬기겠나이다.’ 하는 말보다 더 무서운 교만도 없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 저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갔던 삶의 족적을 마주하며 감동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이처럼 공들여 나의 마음을 글로 담을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허락하시는 주님께 찬송과 경배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믿음 안에서라.’
그러기 위해 ‘나는 그리스도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의 고백이나 허버트의 고백처럼, 나 역시 주님께 드려지고 표현되는 진술이 되고 고백이 되기를 기도하였다. 세상에 인정받고 사람에게 관심을 사는 게 아니라, 온전히 주께 드려지기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이 경건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7).” 하는 이 명료한 진리 앞에서, 가만히 주만 바라보기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내게 두신 것으로 가장 선하고, 나를 이끄시는 가장 인자하심을 따라, ‘내가 앉아서 먹었노라.’
나의 글쓰기와 책읽기와 생각하기는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라고 누리는 데 소용되기를. 누구를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는 마음조차도 온전히 주의 뜻에 합한 것이 되기를. 아무 것도 하는 게 없고 드릴 게 없어 송구한 마음이다가도, 그러므로 주가 베푸시는 상을 받음으로 ‘내가 앉아서 먹었노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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