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

전봉석 2016. 12. 16. 07:44

 

 

 

공평한 저울과 접시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

잠언 16:11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13-14

 

 

 

정직함이야말로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반듯한 질서다. 모든 만물은 때를 따라 정직하게 계절을 나누고 정해진 자리에서 자신의 정직을 다한다. 행여 그것이 ‘주머니 속의 저울추’라 해도 그 주인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다. 요 며칠 시국이 시국인지라, 청문회를 보다보면 우리 사람의 추악함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다 드러난 거짓말을 붙들고 끝까지 모른다, 아니라, 하는 자들의 옹색함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문득, 저들은 그게 저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신이 보는 것만 보이고 듣는 것만 들리는 것이다.

 

저는 교수요, 장관이며, 의사요, 기업의 대표였다. 그러니까 그게 단지 저 혼자의 문제로 각자 가지고 있는 ‘주머니 속의 저울추’라 해도 큰일인데, 하물며 드러내어 가르치고 누굴 진료하고 사업을 확장하고 나라를 관장해야 하는 ‘공평한 저울과 접시저울’이어야 하는 데서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한 쪽으로 기운 기준과 한 쪽만을 바라보는 외눈박이의 시선으로는 뭘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오늘 우리 사회의 사태는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서 믿는 자의 자세는 어느 쪽에 서서 덩달아 목청을 가다듬는 게 아니다. 오로지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그러는 데 있어 믿는 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우리는 두렵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14).”

 

다 나름은 일가(一家)를 이루고 누군가의 스승이며 어떤 이에게 모범이 되어온 위인일 터인데, 그럼에도 끝내 자신을 부정하고 정직을 말하지 못하는 자의 ‘어쩔 수 없음’이 두렵기까지 하였다. 이어지는 다윗의 시를 보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그럼에도 악착같이 붙들고 서는 우리의 기준은 무엇일까?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15-18).”

 

곧 주의 인자하심은 값없이 공평하게 주시지만 아무나 받아 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생은 지나가는 것인데, 무얼 그처럼 놓지 못하고 끝내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일까? 신앙이 소신이 되고, 믿음이 취향이 되고, 하나님께 향한 마음이 선택이 될 때 우리도 또한 다르지 않다. 저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양심에 찔리지 않는 것은 그 기준의 끝을 뭉툭하게 도려내어 붙인 자신의 신념과 아집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기준으로 말씀보다 우선하는 자신의 가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누가 항변하듯 말했다. ‘저는 평생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말이 사실이었다.

 

붙들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저에게 선이란 의란 그런 게 아니었다. 성경은 한낱 좋은 책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여러 신의 일종이며 기독교는 다양한 종교 중 하나일 뿐이고, 그러니 자신들이 손을 모으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정작 주님과는 상관없는 주(主)인 것이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허리를 비틀며 누워 잠깐 청문회를 보는 동안 나는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저들의 어쩔 수 없음 앞에 내게 주신 주의 은혜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새삼 감사하였다.

 

설교문을 작성하는 일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솔직히 ‘하기 싫은 숙제’ 같기도 하다. 목요일, 또는 금요일 어느 한 날을 정해서 말씀에만 집중을 한다. 실은 그 전날부터 메모를 하고 전전날에는 책을 읽으며, 성경을 더듬으며 구상한다. 누가 뭐래도 목사니까, 그것으로 나는 이미 수혜자가 되었음을 감사한다. 말을 고르고 바른 언어를 찾아 ‘그의 뜻 안에서’ 가장 취할 수 있는 어휘 전부를 더듬어가는 일은 복되다. 다른 일에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설교문을 작성하기 위한 글쓰기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내밀한 시간이 된다.

 

나의 이 거룩한 부담이 또는 신성한 숙제가 하나님이 내게 두신 가장 최상의 선물인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다 보니 청문회는 물론 일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사고가 일제히 내게 말을 건넨다. 지혜가 큰 소리로 외쳐 부르는 것이다. 거리에서 시장 어귀에서, 나의 관심과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에서 나를 부른다. 이것은 특혜다. 나 같은 이가 어찌 감히,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곤 할 정도로 주의 은혜가 내겐 과분하다.

 

그래서 나는 누가 목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다. 우리 아들이 조카아이가 성경공부를 하는 우리 아이가 또는 늦게나마 나의 아내가… 될 수 있으면 직업적으로 말씀으로 골몰해야 하는 목사가 되길 바란다. 물론 이는 막중한 사명이고 고달픈 헌신이며 자기 생을 희생해야 하는 ‘성직’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한 번 생을 살면서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직업이 사명이 어디 또 있을까? 뭐 그리 대단해서 막중한 사역을 감당한다고 엄살을 떨 게 있나? 만일 자기 입으로 고단한 목회를 운운한다면 그건 뭔가 큰 착각을 하는 것이다.

 

목사로 사는 게 사장으로 사는 일보다 쉽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더듬어가는 게 식재료를 다듬고 새벽시장을 도는 주방장보다 쉽다. 성도들의 변덕에 마음이 시달리는 일이 노사갈등으로 몸살을 앓는 기업인보다 또는 직원을 부리며 종종 송사에 휘말리는 일보다 쉽다. 쉽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겠으나, 가만히 지나보면 하나님이 다 하시는 데 있어 나는 그저 염치없이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되었다. 이래도 되나? 싶게 너무 큰 특혜다. 물론 뭐, 지금 난 들어앉아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으로 지내니까 이런 소릴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입으로 뭐 그리 분주하게 하는 일이 많다고 씩씩거리는 목사라면 그 또한 알만한 거 아닌가? 뭐 아무튼, 나는 내가 아는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목사로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뭘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하면 뭐라 더 할 말은 없지만, 다 지나간다. 왕실장도 늙어서 목을 건들거리며 말을 더듬는다. 홍콩의 어느 액션 배우는 무슨 병에 걸렸다며 힘겨워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누군 또 이혼을 했고 저는 구설수에 올라 고개를 숙였다. 나름 잘나가던 시절이 고작 인생 안에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고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고작, 기껏 그것을 누리자고 그처럼 안간힘을 쓰다 나이를 먹고, 건강을 잃고, 송사에 휘말리며, 늘그막에 먼 산을 본다. 요한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말씀을 보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그는 우리의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다. 인생으로 어찌 영원한 생을 가늠할 수 있을까? 그 긴 영생을 어찌 무엇을 하며 살까?

 

말씀을 준비하고, 그러느라 더듬어 가는 그 말씀의 세계가 너무 좋은 것이다. 어제는 엉덩이가 너무 아프고 허리가 힘들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앉아 있는 것만이라도 아무렇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의자 끝에 걸터앉아 이 글을 쓰면서도, 더듬어 고르고 다루는 이 글쓰기의 참 수고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어느 훗날 저 영원한 세계에서 누릴 그 좋고 좋음의 맛이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느끼는 희열과 비교가 될까?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그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20).” 이것이 오늘 내가 누리는 가장 최선의 천국이 아닐까? 나에게 지각을 주사 이를 알게 하시고, 참된 자를 앎으로 그 안에서 더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과 이 마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더하신다. 내가 보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으면, 내가 들은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이런 마음이 어찌 내 것이겠나. 내게 맡기신, 긍휼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나는 누구보다 큰 수혜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난 자는 그런 자신을 지킨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