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잠언 18:20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시편 105:1
가진 모든 걸 다 팔아서 진주를 사는 자의 안목이 필요한 시대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5-46).” 어쩐지, 아이가 왔다. 녀석은 찐한 사랑을 하였고 대차게 헤어졌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덩치는 남산만한 녀석이 울면서 서너 장의 편지를 적어 보냈고 이별은 간소하였다. 아이의 감수성에 어울릴 만한 소설 다섯 권을 뽑아 빌려주었다. 소설을 쓰면 잘 쓸 아이였다.
이런 저 같은 놈에게 여자가 생기겠어요? 아이의 말에 풉, 웃음이 나왔다. 자고로 뜨거운 물에 덴 개는 찬물도 무서워하는 법이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주일을 같이 지키자고 권하였다. 뭐라 한들 청개구리 같은 아이였다. 스스로 자신은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지 기대가 되는 것이다. 워낙에 겁이 없는 세대다. 좋으면 자고, 아낌없이 버린다. 죄의식이 결여됐다. 그걸 뭐라 하면 왜 그게 문제인가 의아해한다.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랑도 기호의 문제다. 좋으면 그만이고 싫으면 만다. 그러니 된통 사랑앓이를 하는 아이가 오히려 기특했다.
딸애가 2주간의 합숙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왔다. 아들애도 며칠 뒤면 방학이라 들어온다. 아내는 벌써부터 들떠 좋아했다. 추워진 날씨 탓인지 몇 주째 안 아프던 무릎이 이상하게 아팠다. 아이를 역전에서 배웅하고 딸애를 마중하여 같이 들어왔다. 온화한 토요일 오후였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차들은 줄지어 서서 경적을 울려댔다. 들어가는 길에 콩비지를 한 봉지 샀다. 가게 두 내외가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세상은 여전한데, 나만 안온하여서 낯설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누웠다가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생에서도 가만가만 느껴지는 ‘아름다운 덕’이다. 다들 나를 보면 좋아 보인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그렇게 이해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아주 비밀한 사실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다른 모든 것보다 귀한 게 있는 사람의 안온함이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 자의 것이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을 알아본다고 두부가게 내외도 어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딸애가 알려주었다. 어쩐지!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야 왜 그러고 사나 싶겠지만, ‘진주’ 하나면 족한 것이다. 그 ‘밭’이 그냥 밭이 아닌 것이다.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나는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팔에 문신을 하고 입술에 피어싱을 한 아이의 불만족을 이해한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목발 두 개보다 한 쪽 다리가 성한 게 낫다.
젊다는 것의 가장 큰 난제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스스로 해볼만하다고 여기는 자기 판단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나름의 수고와 애씀이 다 소진될 때까지, 부디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나는 또 어떠했는지, 내가 그처럼 고집부리며 먼 길을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누굴 탓하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안타까움으로 위하여 기도하고, 다만 그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내 할 일이겠다 생각하였다. 누구누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말고 아이가 불쑥, 여전히 기다리시는군요? 하고 물었다. 내가 그런가 싶어 잠시 멍해졌다. 그랬구나! 그 이름을 떠올리고 간헐적으로나마 주께 아뢰는 중보가 있었던 게 기다림이었구나.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내가 사망의 자리에 있을 때는 영생이 대수롭지 않더니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음으로 지옥을 두려워하게 되는구나. 늘 그런 생각에 두려워하곤 하였다. 이러다 막판에 영영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부인하는 자리에 들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천국에 대한 기대보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더 선명했던 것이다. 한데 이 모든 게 같은 증거였다. 믿음이 없이는 이와 같은 두려움도 기대도 없었다.
그런 내가 오늘에 이르러서는 최소한 내 곁에 두시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권하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간절하였다. 대체 저 아이가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싶은데도,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고 있었다. 기승전, 하나님이시군요? 하는 아이의 지적도 그것이었다.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군요? 하는 질문이 의아하면서도 당연한 말로 다가왔다. 오늘 잠언의 말씀을 내가 그처럼 사모하는 이유였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잠 18:20).”
나의 남은 생이 오롯이 주님 이야기만 하다 죽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는 관심의 정도다. 말은 표현에 앞서 우리 속에 담긴 내용물에 흠뻑 젖어들게 돼 있다. 말끝마다 돈 이야기를 하거나 누구 흉을 보거나 자식 자랑을 하거나… 되어지는 말의 정도는 오늘의 나를 가늠케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덕을 선포한다는 베드로 사도의 증언은 그것이다. 살아서 더욱 그리스도의 영광을 음미하고, 누리고, 나타내고, 말하고, 나누고 싶은 것이다. 각자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법이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 5:17).” 오늘 설교 본문이기도 한 내용으로, 그러니 내가 누굴 선별하여 중보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아이가 어떠하든, 아무리 부인하고 거절한다 해도 주의 인자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게 내 일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의 마지막 경고는 의미가 깊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21).” 오히려 나 자신을 경계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행여 나의 수고와 마음씀이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를 지켜야 한다.
이는 말을 고르고 가장 적합한 언어를 사용하여 주의 영광을 찬송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누가 어떤 사연을 늘어놓을 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루고 계신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까지, 신중하게 또는 열심을 다해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는 마음. 곧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을 주사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저들 각자의 개별적인 언어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만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묵상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말을 능숙하게 다룬다 해도 성령의 개입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나도 무슨 말을 해주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고, 그러므로 나는 그 어떤 말도 더욱 간절하게 주일을 권하고 함께 믿음 안에서 살아가자고 말해주었다. ‘너 자신을 지켜 우상을 멀리하라.’는 요한의 직언도 그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모든 것이 우상이라면, 행여 내 말이 혹은 나의 생각이 앞서지 않기를. 나는 다만,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시 105:1).”
그러므로 감히 바란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 18:4).” 내가 가장 신중해야 하는 일은 말을 고르고 그 의미를 깊이 되새겨 주의 영광이 담겨지기를. 그러기 위해 내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음미하는 일이다.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항상 이를 손가락에 매고 가슴에 새기는 노력이 우선이었다. 결국은 견고한 의뢰뿐이다. 저는 나의 망대이시다. 내가 그리로 달려갈 때 안전하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음미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21).” 사뭇 두려움이 엄습하는 까닭도 그것이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성구를 찾아가면서, 나는 나의 언어가 주께 합당한 것이기를 간구한다. 이에 오늘 시편은 그 방도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시 105:2).” 내 입에서 그와 같은 찬송이 끊이지 않기를. 둘째,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3).” 내가 주를 자랑할 때 내 안의 즐거움도 마땅하였다.
그러므로 셋째,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4).” 주가 함께 하지 않으시면, 나의 말이 아무리 귀하다 해도 보잘것없고 쓰임이 적당하다 해도 하찮은 것일 뿐이다.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구하는 일은 몰두하는 것이다. 다른 데 시선을 두지 않는 것으로 오롯이 그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9).” 말씀이 나를 단련하시기까지이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대상 16: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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