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전봉석 2017. 1. 10. 07:35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 10:16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편 128:1-2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 복되고 형통한 까닭은 주를 경외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지만 악인은 죄에 이를 따름이다. 모든 수고가 복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죄였다. 그러므로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6).” 하는 결과론적인 오늘 잠언의 말씀이 당연하게 들린다. 곧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9).”

 

어렸을 때 나도 교회를 다녔었지, 하는 말로 회상하는 정도에서 오늘에 안주하는 친구가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와 함께 밤늦게 서울엘 다녀왔다. 고등학교 때 가출을 하고 가 있던 며칠, 또는 지방 국립대를 떨어지고 슬퍼할 때 동행하였던 인자한 의사 형님이 그 추억을 더듬으며 서너 번 강조하였다. 누님들은 각자가 눈에 띄게 늙어 있었다. 친구의 처는 늘 피곤한 기색으로 눈길을 피했다. 서너 시간 앉았다 돌아오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강인했던 젊은 날이 생생했다. 그에 비해 이별은 간소하였다.

 

뭐라 한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하나님을 마주하는 데 있어 자신의 간증을 기초로 하는 것은 위태롭다. 다들 안 믿지만 하나님은 늘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한 번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적이 없다. 예순을 넘긴 큰 누님은 연거푸 자랑하였다. 시인은 기쁨으로 주께 나아간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다만 ‘큰 기쁨의 하나님’을 바란다. 그런 여건과 상황을 들고 기쁨으로 나아간 게 아니다.

 

내가 주를 찬송하는 것은 기도 응답에 따른 게 아니다. 이만큼 나를 도우시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즉!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나의 구함과 간구를 해결해달라는 민원이 아니었다. 다만 주의 빛과 진리로 나를 인도하시기를. 그 소원은 주가 계신 곳에 이르기를. 큰 누님도 작은 누님도 모두 목사와 결혼했다. 작은 이는 일찍 이혼을 했고, 이태 전에 위암으로 죽었다. 그 사이에서 남은 딸애는 공황장애로 대학을 포기했다. 큰 이는 목회를 떠나 다른 일을 하며 나이를 먹었다. 직장암을 이겨낸 걸 자랑하였다.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기를 바람에서다. 큰 누님은 자신의 간증을 소중히 여겼다. 한데 하나님이 옹색하게 들렸다. 그런 두 누님의 생이 막내인 친구에게는 가소로운 것이다. 더욱이 그의 처는 신학까지 한 이가 교회를 등진지 오래다. 두 아들을 건사하는 일에 등골이 휘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혹시 몰라서 성경 본문을 속으로 외고 있다가 삼켰다. 어쨌든 두 누님은 사모였고, 큰 형수는 ‘신앙이 좋은 이’였으며, 그의 처는 부르심을 따라 신학을 하였던 것에 비해 안 믿는 가정의 초상집과 다를 게 없어 놀랐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은혜는 궁색하였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그럼 장례절차에 따른 예배는 어쩌나? 하고 물었더니 전에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친구가 중학교 때 잠깐 다녔고 큰 누님이 이사하기 전에 다녔던 교회에 연락을 했다고 하였다. 어찌 다 과거형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여서 안타까웠다. 종교성이 남다른 집안인데 누구도 하나님께 절실하지 않았다.

 

간증을 붙드는 누이의 증거가 친구의 마음을 더욱 완강하게 하였다.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모두는 내가 목사인 것을 한사코 외면하려 드는 느낌이었다. 안 믿는 형님이 그 가족들 사이에서 의사로 지내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인지도 모른다. 다들 나름은 믿었고 믿는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그의 행적이 가족들 사이에서 더 유익하게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친은 고통 가운데서 죽었고 VIP 장례식장에 누웠다.

 

뭔가 아쉽고 어딘가 안타까운 만남이었다. 돈이 있어야 하고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게 친구의 간곡한 소원이었다. 뭐라 한들. 친구에게 오늘의 내 모습은 저들 누나들처럼 혹은 별 거 아닌 아내의 신앙처럼 그저 그럴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느니 깔끔하게 형처럼 사는 게 낫다고 여긴다. 아! 문득 바울 사도의 증언이 떠올랐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이를 어찌 설명으로 알려줄 수 있을까?

 

예수님처럼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비록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으나 나는 저를 위해,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였다. 이어지는 다음 세대의 고달픔이 여실히 느껴져서이다. 공황장애를 앓는 큰 조카와 두 아들은 주의력결핍장애를 앓는 듯하였다.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그러나 확연히 보이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제 그만 교회 나가! 하고 이르자 친구는 항변하듯, 나도 하나님이 있다는 건 믿어! 하고 답했다. 저는 보이는 것을 주목하고 그것을 바랄 뿐 ‘뜬구름 잡는’ 종교적인 누님들의 간증에 질려 있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신 이다. 그가 이르시기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는 막연한 명령이 아니라 막중한 과업이다. 하나님을 망각할 때 보이는 것은 부정적인 것뿐이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병들지 말아야 돼. 돈이 있어야지. 사는 날은 길어졌는데, 아프지 말고 살아야지. 친구의 항변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운동 열심히 하고 돈도 열심히 번다고 번다. 그런데 그 삶의 우여곡절이 늘 끊이질 않는다. 나는 친구의 말에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같은 것을 바라보는데 누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보고 누구는 아낙 자손의 위력에 주눅이 들었다. 이는 건강이나 돈의 문제가 아닌데, 이를 알려줄 능력이 내겐 없었다.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이면 되었다.

 

모세의 무모함은 막연한 게 아니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극기도 아니고 나름의 인내로도 아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32).”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모하게 보이나 앞선 이들의 공통점은 다르지 않았다. 곧 예수를 품고 사는 일은 그를 먹는 삶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나는 건강도 돈도 자신 없으나 말씀으로 붙들려 말씀으로만 살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딸애가 사귀는 남자 애를 데리고 왔을 때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하나도 맘에 들지 않는다. 어떤 조건이 아니라, 주의 일을 업으로 삼으며 사는 사람이어서 우선은 지켜보자고 하였다.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누가 알 수 있을까? 어떠하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고 구하며 사는 것이 값진 거였다.

 

이래저래 마음이 어려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우리의 생(生)은 여기가 아니다. 본향이 있다는 걸 잊지 않을 때, 왜 그처럼 자라가야 하는지를 놓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 그 목적은 뚜렷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