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22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포로로 끌려온 땅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운다! 알 수 없는 이해다. 공감이 크다. 이 세상에서는 웃음을 짓는 일보다 슬픔에 사로잡히는 때가 더 많다.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을 보지 못했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 137:2-3).” 웃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시민권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을 성경은 원하지 않으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그리고 길을 제시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는지 그 심정이 느껴진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초등학교 3, 4학년 아이들 다섯이 글방으로 와 영화를 보았다. 1, 2학년 동생 둘도 합쳐 모두 일곱이었다. 왁자한 소란이 공포로 다가왔다. 그래도 약을 먹지 않은 건 아내가 와서 같이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순조롭게(?) 잘 끝나는가 싶더니 한 아이가 화장실엘 가겠다며 뛰어나갔다. 혹시 몰라 아내가 따라가고 조금 있다 아이가 돌아와서 배가 아프다며 주저앉았다. 오후 2시가 되도록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본래 장이 안 좋은 아이라고 하였다. 순간 아이를 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소파에 눕히고 배를 쓸어주었다.
순간 불안이 엄습했다. 어느새 나는 손을 떨며 안정제를 삼켰다. 마침 영화가 끝나고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섰다. 아내는 아이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였다. 모두가 돌아가고 나는 녹초가 되었다. 약이 흡수되는 데 걸리는 시간, 15분. 아이가 누웠던 자리에 드러누웠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러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뒤 아내가 전화를 했고, 무사히 아이엄마에게 데려다주었다고… 그 말에 또 알 수 없는 안도의 눈물이 흘렀다. 어떤 서러움. 아놔. 이게 뭘까?
수요일마다 아내가 같이 오기로 했다. 석 주째 약을 먹고 있었다. ‘강변 거기에 앉아서, 울었다.’ 아이가 재잘거리며 웃다 사래가 들렸다. 하필 과자를 주었는데 재채기를 한다. 연필꽂이의 연필 끝이 아이 쪽으로 꽂혀 있어 불안하다. 물을 먹을 때 웃기면 안 된다. 아이가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할 때 혼자 보낼 수 없다. 서로 장난하는가 싶더니 욕설이 튀면 아찔하다. 사탕을 주면 혹시 그냥 삼킬까봐 줄 수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예기 불안인 것을 알지만 번번이 나를 억누른다. 태국에 간 아이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며칠째 보지 못한다. 수면제를 먹고 목을 맸던 아이는 격리병동에 입원을 했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서.’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죄의 결과다. 필연적인 것이다. 부모도 자식도 모두에게서 상처를 주거나 받았다. 돈이 많으면 그 많은 돈이, 없으면 그 없는 돈이,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사랑할 이가 없으면 그 공허함이, 건강한 육체면 건강이, 병든 몸이면 병듦이…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서 우리는 저마다 운다. 딸애가 아내에게 내 얘기를 하더란다. 너무 이해가 안 되는데 그래서 더욱 사랑한다고 말이다. 지나가듯 들려준 말이라 대수롭지 않은 듯 흘겨들었는데 내내 미안하고 고맙다.
시온을 기억하며 운다. 우리 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DNA 가운데 하나님의 속성이 이를 감지한다. 순수함으로 그저 하나님과 보냈던 시간, 다른 것을 다 잃더라도 그것만은 회복하고 싶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기를 바라는 이유다. 결코 내가 의를 행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다. 선을 이루어오라고 보내신 게 아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 선하신 이와 함께 하기를 바라시는 거였다. 그러느라 하나님은 나의 조건과 형편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본래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그 생령의 영. 죄로 잃어버린 나의 본질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슬퍼하지 않는 게 사랑이 아니다. 눈물이 죄가 아니다. 불안과 공포는 당연한 것이다. 저러다 아이가 죽을 것 같다. 나 때문에 어찌 될 것만 같다. 주 없이 살 수 없다. 나의 이 고백은 고상을 떠느라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절박함의 절규다.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다. 다 잃는다 해도 하나님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벨론, 이 세상에 정들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자식도 부모도 아니다. 하나님이다. 두려움의 끝은 언제나 주의 도우심이다. 주가 아니시면 감당이 안 된다. 아이를 꽉 껴안으면서 부르게 되는 주의 이름은 간절함이다. 돌아보면 너무 일찍, 어려서부터 나는 요령을 배워야 했다. 사랑 받기 위해 혹은 저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 속에서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은 아니어도 됐다. 그 차이를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살면서 우린 얼마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지, 그런데 그게 도우심을 바라는 거지 하나님은 아니었다.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은 사실을 바로 알게 하시려고, 오늘 내게 두시는 불안과 공포도 귀하다. 당연히 괴롭고 힘들고 싫은데, 그렇다고 이제는 이걸 고치고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는 않고 싶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갈급하고 바라는 것이라면 이것이 축복인 것이다. 결코 환영할 수 없는 특별함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나를 의인 되라고 부르신 게 아니다. 참 의 되시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시려고, 육신의 고통도 두시고 심약하여 불안한 마음도 두신다. 그것으로 혈기를 내기도 하고 그래서 나의 바닥을 드러내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이제 살 수가 없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리 좋은 그 무엇도 필요 없다. 하나님은 결코 위기를 해결해주지 않으신다. 나의 지독한 경험상으로도 하나님은 절대 환경을 여건을 대신 처리해주기 위해 능력을 더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 위기를 같이 지나가신다. 끔찍한 환경에 같이 거하신다.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고 위기가 사라질 때 위험하다. 그 문제가 또는 위기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일깨우지 못하고 무마된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상이 된다. 섬기고 받들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여느 신들 가운데 하나가 될 뿐이다. 믿음은 신념이 되고 신앙은 자신의 신조가 되어 우러르는 하나님은 경외함이 아니라 그것으로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소용될 뿐이다.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것뿐이다. 여기는 베벨론의 어느 강가라. 우리는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비록 가진 게 없어도 진실함이 귀하다. 진실은 나의 인자가 아니다. 나의 인자함은 내 안에 그리스도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거할 때,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병들었든 건강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있든 없든, 천하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오직 예수뿐이라. 오늘의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음이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
곧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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