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전봉석 2017. 1. 20. 07:34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

잠언 20:25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138:3

 

 

 

뭐가 좋으면 그냥 좋은 거지 아주 좋은 거가 되면 그것이 후에 덫이 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지나치면 서원을 부르고 지나면 후회를 낳는다. 아주 좋고 아주 좋은 것은 주님뿐이라. 지나치고 지나쳐도 모자란 게 주님을 향한 마음이다. 그래서 지혜자는 일러,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모든 ‘지나침’과 ‘아주’는 교만인 것이다.

 

어디 그게 한두 번이었나? 하다못해 무슨 물건을 살 때도 그것만 있으면 다 이룰 것처럼 굴다 시들해지면 처치 곤란인 게 늘 머쓱해진 마음이었다. 어쩌면 ‘내가 악을 갚겠다.’ 하는 마음이 이에 해당되는 게 아닌가? 형편이 어려워서 바른 경우도 차리지 못하는 주제에 아이에겐 덥석 명품 옷과 신발을 사준다느니,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장난감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22).” 오늘 잠언의 말씀이 그리 들린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 내 이야기다.

 

모든 걸음이 주께 있음을 기어이 가던 길을 되돌아오면서야 깨닫게 되는 것인가.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4).” 며칠 만에 아이가 카톡을 보고 문자를 주었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너무 퉁명스런 말에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러게, 뭐라 한들. 다들 똑같다. 기어이 해봐야 안다. 것도 필요한 것이려니. 내 안에 조바심을 두시는 건 염려함으로 기도하게 하시려는 것인가. 모든 인생은 여호와로 말미암음이다. 나는 이 명제가 든든하다.

 

늘 그렇듯 목요일, 오전에 올라가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점심을 먹고 탈고를 한 뒤 두 사내아이를 달래 감상문을 쓰게 하였다. 요즘은 글을 쓰게 하는 일보다 책을 읽게 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긴 겨울방학 동안 스무 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만 원짜리 문화상품권을 주기로 했더니 나름 일주일에 서너 권의 책을 가져다 본다. 드러누워 존 파이퍼의 <순교의 영웅들>을 읽었다. 윌리엄 틴들, 존 페이튼, 아도니람 저드슨. 생소한 이들의 순교 앞에 먹먹하였다. 저처럼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한 이들 때문에 오늘에 나도 있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문득 나 같은 사람이 너무 거저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아이를 생각하는 정도에서 마치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툴툴거리기 일쑤인데. 오늘에까지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의 헌신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는데도 도움을 또는 위로를 건네었다.

 

순교를 입에 올리기엔 너무도 두렵고 벅차다. 내 인생은 내내 은혜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어느 분이 어떤 사역을 하네, 누가 어떻게 지내고 있네 하는 소릴 들을 때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나야말로 거저먹는다 싶다. 몇 주째 옆 사무실 공사 때문에 이어폰을 꽂고 찬송을 재생하여 듣다보니 그게 참, 모든 게 은혜 아닌 게 없다. 비루하고 못나고 어깃장 놓기 잘 하는 위인이라 빙충맞기는 얼마나 지독한지 모른다. 나는 감히 무엇이 되겠다, 어떤 사람으로 살겠다, 어디에 쓰임 받고 싶다 하는 소원을 품기에도 적당하지 못하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이나마도 나는 과연 적절한지. 진정 마음이 상한 자로 충심의 통회가 이루어지며 살고 있는지. 고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하시는 말씀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뭘 좀 한 게 있어야 하는데… 이런 말조차 공연히 자기연민에 겨운 소리가 아닐지 의심된다.

 

‘간증이 약한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위기의 순간을 건너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스왈드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나구나’ 생각하였다. 나는 아픈 게 싫다. 힘든 게 싫고 혹시나 어려운 일이 올까 두렵다. 그래서 주를 바라고 구한다면 너무 뻔뻔한 일일까? 나는 그저 단순하여 안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파야한다면 덜 아프게 잘 견디게 해달라고 말이다. 때론 나의 바람이 너무 유치하여서 민망하다. 그러니 누굴 위해 기도한다는 건 순 엉터리다. 그저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볶이는 마음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정도이다. 주님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다른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게. 한 번 지랄을 떨고 나면 아무래도 의기소침해진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나로서 대체 무슨 대단한 확신을 붙들고 사는 것일까? 딸애가 커피와 견과류를 선물로 가져왔다. 자려고 누워있는 내게 잘 지냈어? 하고 장난처럼 묻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나보다 하찮은 이가 또 있을까? 주의 은혜가 아니면 어디다 감히 얼굴을 내밀고 살까. 이제 교회건물 주인 남자는 볼 때마다 깎듯이 목사님 목사님 한다. 어제는 무슨 일로 전화를 하게 됐는데 마치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는 사람처럼 네, 목사님! 하는 것이다. 나는 참 그런 게 민망하다.

 

두부가게 여자가 뭐하시는 분이세요? 하고 묻자 곁에 섰던 아내가 목사님이세요. 할 때도, 아이가 기도하면서 우리 목사님이라 나를 호칭할 때도 나는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럴만한 자격은커녕 삶으로도 지탱이 안 되는 사람인데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가장 쉬운 일로 나는 그저 말씀을 읽고, 누구의 생애에 깃든 주의 인자하심을 읽으면서, 나에게 맡기신 나의 생의 가장 최전방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고작 나 하나 건사하는 일로 쩔쩔매면서 말이다.

 

묵묵히 그저 나에게 두신 삶을 살아드리는 일. 그거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면. 그러기 위해서도 주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시 138:3).” 곧 나의 간구가 주 앞에서 온당하기를. 부디 주의 뜻에 맡는 것으로 간구함으로나마 바르게 드려지기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와 같을 때 다시 읽힌다.

 

내 육체에 채우는 수고와 애씀이 몸된 교회를 위하여, 너를 위하여 괴로움마저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라면. 결코 주의 고난이 완성되지 않고 미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로써 참 순종을 알고 주의 온전하신 영광에 참예하는 길이라면. 내게 맡기신 이 한 날의 씨름과 마음씀으로 족한 것이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두신 것, 내게 맡기신 것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일이었다. 연약한 육체는 물론 곁에 두심으로 애면글면 속 끓이게 하는 아이에게도 주의 이름으로. 나를 생각하는 것이 행여 자기연민이 되지 않고, 너를 생각하는 일이 마치 공덕심에 의한 게 아니고, 교회를 생각하는 일이 뭔가 대단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인 양, 스스로 작위하지 않기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그리하여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시 138:1-2).” 곧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