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전봉석 2017. 1. 21. 07:38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잠언 21:23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2-4

 

 

 

우리 안엔 멈춰버린 시간이 있다. 한껏 외면하고 살지만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 마주하는 문이다. 그 문을 열면 여전히 저 안에는 나의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얼마 전 친구 모친상을 당해 장례식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환갑이 다 된 큰누이가 나를 알아보고는 반가이 맞아주었다. 저는 목사의 아내가 되었고 목사는 일찍이 목회를 그만두었다. 목숨이 곧 끊어질 어미에게 늙은 딸이 귀에 대고 물었다. 엄마, 엄만 왜 그렇게 나를 혼냈었어? 왜 한 번도 나한테는 잘했다, 하고 칭찬해주지 않았어? 늙은 누이는 그런 얘기를 푸념처럼 들려주었다.

 

뱃속 깊은 데, 우리의 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는 어린아이가 산다. 이를 물리쳐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으로 기질을 삼았고 체질을 이뤘으며 각자의 성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내 안의 어린아이를 무력화시킨다. 아니 저와 같은 어두운 면을 선으로 사용하신다.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에 앞서 노아의 계보에서 셈과 함과 야벳에 대해 나누었다. 단지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의 우리 이야기가 그저 내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다.

 

창조론을 믿지 못할 때 시달리게 되는 무수한 경우의 수에 대하여 나누었다. 곧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에 생겨나는 터무니없는 경우의 수가 얼마나 난무하는지에 대해, 돼지머리 앞에 절하고 손을 휘저으며 알지도 못하는 정령들을 향해 도움을 구하는 행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어떻게 복인지, 왜 은혜인지, 아이는 공감하는 것이었을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기특하였다.

 

이번 한 주간 유난히 나는 내 안의 어린것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그러다 어느 계기가 되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일쑤인 서러움과 원망과 불안에 대하여.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 오전에 소리 내어 성경을 읽다가 마주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울컥, 멈추어야 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35).” 모름지기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 그 근본의 문제였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일러,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33).”

 

내 안에 두고 사는 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 퍼뜩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어서이다. 안 그래야지,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고개를 내미는, 내 안의 어린것이다.

 

심리학에서 이를 트라우마라 하든, 내재된 자아라 하든, 없는 이가 없으니 원죄의 뿌리가 여기에 기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여전히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사는 데는 사람이어서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는 어림없는 일이겠으나,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문득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도 그렇게 들린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아,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낙심하는 마음 위에 들려주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주님이 하셔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코 나는 나를 감당할 수 없음을 여실히 주께 고하는 것. 그리하여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나를 도우시나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니 나의 나 됨은 어디서 오나?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 백날 수고하여 애써봐야 소용없다. 좋은 사람을 찾아 이 산 저 산을 헤매고, 사상과 철학을 좇아 갈구한들…. 전화버튼을 잘못 눌러서 소설가 K와 연결이 됐다. 웬일이세요? 하는데 어? 하고 놀랐다. 그렇게 서로 안부를 묻고 자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요즘은 누가 어디 아프다 그러면 거의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였다. 도움이 어디서 오나? 그 답을 손에 들고도 우리는 한숨뿐이다.

 

게임에 환장하고 스마트폰에 미쳐서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마음 깊숙이 똬리를 틀고 산다. 공허함 때문이다. 마주하지 못한 하나님의 부재는 오락으로 채워진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보채고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어찌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술에 빠지고 여자에 쏠려서 돈이 우선이고 권력과 명예가 최고봉이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식부자의 사기행각이 그 단적인 예다. 방송이 저를 치켜세우고 방송에서 떠벌린 저의 허황된 주술에 놀아나 개미군단이 족족 주식으로 가산을 탕진했다.

 

애고 어른이고 가릴 게 없다. 주님과의 교제가 아니고는 영락없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그리스도인으로의 은택이다. 사명이었다. 주님은 내 안의 어두운 데서 이르신다. 은밀하게 들려주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28).”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다시 말하지만 나의 나 됨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그와 같은 이가 내 안에 계시다. 저가 계심으로 나는 나 됨을 주께 아뢴다. 나의 고약한 어둠이 뿜어내는 원망과 서러움의 소리를 주께 고한다.

 

오후께 쌍둥이 아이가 왔다. 둘 다 바라던 인문계 고등학교가 돼서 축하해주었다. 한데 아이들은 그저 멀뚱할 뿐이다. 데면데면 도대체 얘들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축하를 건네던 나는 머쓱해져서 아무 말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게.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에덴에서 쫓겨날 때부터 사람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사는 게 되었다. 하나님 없는 부재는 끔찍할 정도로 서럽다. 어찌해야 아이들을 교회로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저 음울한 마음에 주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너무 조용하고 너무 많이 없고 너무 무심한 아이들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주의 이름만 되뇌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4-27).” 그래 맞다. 바라는 대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 바라는 대로 바라는 자는 자신을 깨끗하게 함으로 주의 깨끗하심을 본다. 결국 나의 교만한 눈을 낮추신다.

 

애기 다루듯 아이들을 대하면서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이제야 눈도 마주치고 뭐라 하면 네, 하고 피식 웃으며 대답도 해주는 형편이니까. 이 아이들에겐 옳은 소리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응원하고 또 응원하면서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리는 것밖에 달리 더 좋은 수가 없을 듯하였다.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갔으니 글방에 더 치중해야 할 텐데.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주께 아뢰고 주만 바라는 게 상책이었다.

 

이에 잠언은 엄중히 일러,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 21:23).” 다분히 중의적으로 들린다. 내가 나를 그리 대해야 하면서 아이들을 대할 때도 다를 게 없었다. 내가 내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누구 마음을 어찌 다룰 수 있을까? 주가 아신다. 이 모두를,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그와 같은 주님이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주밖에 없음을,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4).”

 

내 안의 어린것이 나를 주도하지 못하도록 성령이 내 안에 늘 내주 임재하시기를. 그리하여 말씀보고 그러므로 기도하고 그래서 주만 바라보기를. 내 안의 어둠을 주가 아시나니,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내게 두신 사명을 바르게 이루어가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다른 무엇이 나의 도움이 될 수 있나!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2).” 하여,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 이로 인해,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7).”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