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전봉석 2017. 3. 5. 07:40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잠언 5:1-2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34:1

 

 

 

주의하여 근신하고 지켜야 할 것에 대하여, 바울도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일렀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왜냐하면)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0-21).” 은혜가 있어야 이 모든 게 가능하다. 내가 임의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마음과 의지와 삶의 결단을 주셔야 한다.

 

그런 자의 특징은 ‘항상’ 주를 찬송한다. 그럴 수 없는 지경에서도,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에 드러난다. 이를 맛보아 아는 자는 주께 피할 수 있다. 그를 경외함으로 부족함이 없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8-9).”

 

아닌 것 같다. 상대적으로 ‘음녀’의 것이 더 달콤하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잠 5:3).” 당장의 이것을 어찌 마다할까? 욱, 하면 튀어나오는 말과 잠시라도 즐거울 수 있는 게임과 늘어져 게으름이 주는 안일함을 포기하기 어렵다. 한데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4-6).”

 

그 결과는 너무 끔찍하다.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경외감이다. “그런즉 아들들아 나에게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7-8).” 아, 쉽지 않다. 모든 게 어렵다. 특히 아이들의 마음을 내가 어찌 잡을 수 있을까? 사람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게 또 있을까? 이를 내가 어찌 하려고 할 때는 영락없이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번번이 실패다. 좌절뿐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것은 내게 허락하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이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결국은 말씀이고 말씀이 우선이며 말씀으로 딛고 걸어야 한다.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그러므로 말씀을 의지하며 사는 게 지혜였다. 이 좋은 걸, 좋으신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내게는 포기하지 않은 게 남은 것이다.

 

쌍둥이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잠시(?) 글방도 쉬기로 했다. 그냥 토요일이니까 보내시라, 와라 해도 그게 또 그렇지가 않은가보다. 이르고 달래 부탁을 하였는데도 소용이 없으니, 덕분에 토요일 오후가 한가하였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를 새로 구해 읽었다. 한 사람 그 저자에게 푹, 빠져 그의 도서를 모두 섭렵하는 일은 일장일단이 있다. 아무래도 출판사의 상술이 한 몫을 하는 것이겠지만 같은 내용이 되풀이 된다. 그럼에도 나의 독서법이 나쁘지 않은 것은 그의 깊은 영적 발자취를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전기문이나 자서전을 읽는 것과는 다르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서도 그러했지만 말씀의 깊이를 더하는 챔버스의 묵상과 설교가 재.미.있.다. 이게 말이 되나 싶게 그처럼 한 사람의 훌륭한 영성을 만나는 것은 복이다. 첫째, 말씀을 마주하는 태도를 은연중에 본받게 된다. 둘째, 일상에서 보다 실질적인 삶의 적용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더욱 우선하는 것은 셋째, 저들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게 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 것이다.

 

이를 구약의 계시록이랄 수 있는 아가서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서술하였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이를 내 눈높이로 바꾸면 이렇게 읽힌다. ‘성도 중에 어여쁜 자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면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의 장막 곁에서 네게 맡기신 사람과 일상과 시간을 살아라.’

 

거짓말처럼 그리 됐다. 혼자 있는 시간을 따분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어떤 어려움 때문에 마음이 저 혼자 요동을 칠 때도, 지쳐 쓰러져 넘어졌을 때도 저들의 책이 있어서다. 어떻게 그런 게 그렇게 재미가 있다. 전에 좋아하던 소설과 시보다, 남들이 빠져드는 오락이나 동영상보다, 심지어 누굴 만나고 함께 어울리는 시간보다도 더욱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싶다.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알 수 없는,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어떤 끌림이 나를 붙드심을 느낀다. 같은 말 또 하고 했던 말 되풀이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면서 읽는다.

 

그리 되어진 것에 대해서는 어찌 설명해줄 방도가 없다. 나도 숱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무엇보다 책읽기를 열렬히 강조하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던가? 이는 단지 취향의 문제 또는 기질이나 성향의 차이가 아니다. 감히 말하지만 성령의 특별한 은사 가운데 하나이다. 잘 읽고 못 읽고를 떠나 그게 그러니까 자꾸 읽힌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거기에 나의 오랜 독서습관 가운데 한 작가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그의 책만 읽는다거나 무모할 정도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다거나 일부러 독후감을 쓰진 않지만 이처럼 내 안에서 궁굴려 오래도록 입에 머금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를 가르쳐 아이들에게 전하지만 열에 아홉은 그리하지 못한다. 잘하면 읽는데서 그치거나 억지로나마 독후감을 쓰는 정도에서 그친다. 나의 주장은 게 아무리 좋아도 내 이야기로 섞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산삼이 아니라 그 이상의 귀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내 몸에 섞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를 어찌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나? 성령이 주시는 은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하다. 읽고 느끼고 생활에 적용하다 늘 그러기엔 턱없이 부족한 나에게 실망하여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게 되고, 다시 읽고 느끼고 적용하다 또 쓰러져 주의 이름을 부르고….

 

한 가지 분명한 건, 책에서 무얼 얻기 위해 읽는 건 아니다. 저는 어떻게 살았나? 알고 싶어서 읽는 것도 아니다. 이미 얻은 것을 누리는 것이며 저를 알기에 같이 가는 것이다. 곁에서 누가 아무리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할 때 오히려 저의 뒷걸음질 치는 게 보인다. 그게 아무리 좋아도 무슨 소용이 있나 말이다.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에 대하여’ 몰라도 된다. 그 사랑을 알 때, 그의 사랑에 대하여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자하심을 알 때, 인자하심에 대하여 굳이 바라지 않는 것과 같다.

 

선생은 뜬금없이 누구 책을 권하며 꼭 읽어보라고 하였다. 그 책에 대해 찾아보니 죽을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신비체험의 내용이었다. 선생은 미덥던지 재차 강조하며 자신도 읽어볼 테니까 나더러도 꼭 읽으라고 하였다. 그 채근하는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답하길,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듣고 싶지 않다, 하고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하지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종교서적이라고 다 읽히는 게 아니다. 때론 신앙서적이 안 믿는 자의 통찰과 깊이를 더한 소설이나 시보다 못한 게 더 많다. 니고데모가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자들은 보다 안전하고 가벼운 앎으로 족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차이는 미국에 대해 아는 것과 미국에서 사는 것과의 차이다.

 

돈이 하나도 없고, 만나야 할 사람도 해야 할 일이 없는데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새로 온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이 두 권이나 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 것은 내 앞에 두시는 날을 살면 된다. 아이를 새로 보내시면 가르치면 되고, 어디가 아프면 견뎌야 하고, 마음이 멋대로 우울해하면 지킬 수 있는 만큼 지켜내면서, 그럴 수 있는 힘은 이와 같은 여건과 상황을 조성하시는 게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바울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갔고 다윗도 모세도 아브라함도 모두 그리스도를 붙들고 나아갔던 것처럼, 향방 없이 하는 게 아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싸우는 게 아니다. 내 몸을 쳐 복종하기까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

 

아, 나의 삶도 그러할 수 있다면. 믿음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주의 길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다면. 이와 같은 간절함이 주를 사모하게 한다. 주를 사모하였던 저들의 간절함을 사랑하게 한다. 그러다 나는 결국 미치지 못할 것을 고백하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임의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던가? 심지어 내 마음 하나 바르게 건사할 수 없는 위인인 것을. 그러므로 나는 더없이 빙충맞고 어눌하고 구차하다 해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연명하는 자라 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는 자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대할 때마다 감동이다. 구구절절 지금 이런 소리가 나올 때냔 말이다. 미친 척하고 나와서 한다는 고백이…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맞다. 다윗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나를 위해 이 시를 지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 34:2).” 이를 듣고 내가 기뻐할 수 있다는 게 신비다. 믿음의 사람들은 손을 내민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3).” 부디 나에게 들리는 걸 아이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기를.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7-18).” 그러므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