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전봉석 2017. 9. 6. 07:31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 12:5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편 65:4, 10

 

 

 

클래식을 들을 줄 알아서가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그냥 틀어놓기 좋은 게 그리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악기를 연주한다는 일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 같다. 우리 몸의 지체가 선율을 받아내어 오롯이 그 음을 따를 때 소리는 순하여 몸을 따르고 몸은 이에 순응하며 소리의 길을 더한다. 타악기는 세기를 조절하며 두드려서 소리가 된다. 관악기는 호흡의 일부가 되어 미칠 수 있는 숨의 정도에서 호흡에 따라 소리가 된다. 건반악기와 현악기는 몸의 일부가 되는 소리 그 자체다. 단연 성악은 사람의 몸이 주체이면서 악기이면서 소리이다. 모든 악기는 사람의 몸에 수긍하며 순하여져 소리를 낸다.

 

'악기는 소리를 내지만 소리는 악기 안에 없다.' 사람이 악기를 두드리거나 불거나 문지르거나 치거나 안거나 밟아 누르고 밀어내어, 소리는 터지고 끌어내어져 사람과 악기의 조화가 된다. 그런 거 보면 어디서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싶게, 소리의 출생은 사람의 사랑으로 잉태되어 만들어지고 늘어지다 허공으로 소멸한다. 가끔씩 격정의 선율에 오열하다 순식간에 연주가 끝나고 소리가 사라졌을 때 나는 아찔하다. 순간 정막과 함께 본래의 주인이었던 소음들이 와글거리고 있을 때의 면구스러움에 대하여. 선율은 내 귀에 가득차서 몸을 출렁거리게 하였다.

 

이것이 책 읽기와 어우러지면 그 조화는 한층 더 형이상학적이다. 옆에서 연주되는 선율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오는, 책 읽기에서 한눈을 팔 때 비로소 선율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구나 싶은 무아(無我)의 세계에 식겁한다. 시간은 뚝딱, 흘러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였고 선율은 시치미를 뚝, 떼고 여전히 그런 것처럼 흘러가다 소멸한다. 무아지경의 찰나였다. 그런 것처럼 지나온 시간은 종종 ‘내가 그랬었지!’ 하는 여운만 남겨두고 시치미 뚝, 뗄 때 아찔하다. 어느 훗날 하나님 앞에서의 이 땅의 삶이 그러할 것 같아서 말이다.

 

오늘 말씀은 세상이 이러저러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한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렘 12:4).” 28년 전 어느 랍비가 한반도에서 핵 확산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했다는 소릴 읽었다. 북한은 같이 죽자는 식으로 위협하고 남한은 강대 강으로 맞서면서 서로 먼저 굽히기를 요구한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도 사람들은 길들여진 안일함으로 설마, 하고 만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1).” 때론 하나님이 정말 계시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세상은 제멋대로이다. 일부러 그러시는지 내가 마음 쓰고 신경이 쓰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상하다. 하필 왜 저런 아이를 붙이셨나 싶게, 이상한 가정에서 자랐고, 이상한 아이엄마의 요구와 이상한 아이의 태도가 때론 버겁다.

 

오랜만에 아들 녀석과 영화를 한 편 보고, 딸애 퇴근 시간에 맞춰 짜장면을 먹고 들어왔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와글거렸고 나는 몰래 안정제를 씹어서 삼켰다. 누구보다 이상한 사람은 그러니까 나인 것이다. 나를 돌아보게 하시려고 저들을, 심지어 나의 건강을 악기로 사용하신다. 나는 과연 어떤 소리를 낼까? 실제 우리의 일상은 단일하지 않다. 같이 앉아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곁을 오가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문득 읽은 인터넷 기사를 생각하고, 누구 옷차림에서 또 어떤 말투나 몸짓에서 순간 무엇을 연상하다, 대화는 이어지다 끊어지고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나도 내가 이처럼 복잡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 같다는 생각을 처음 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조율하신다. 어깨가 결리고 유난히 다리가 저려 혼자서도 쩔쩔매는 게 모처럼 아들이랑 영화도 보고 할 건데, 싶어 근육이완제를 두 알 삼켰다. 그랬더니 속이 울렁거리고 금방이라도 토하고 싶은 것이다. 무얼 먹을까? 어딜 갈까? 할 때 가장 선명한 제약은 돈의 정도다. 언제나 보면 돈의 구애가 가장 직접적이어서 이에 간섭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단순한 음표로 이를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선율은 오묘하다.

 

강단이 다르고 끊고 이어짐이 다르다. 연주자의 기교와 섭리는 소리를 더 멀리 또 높이 튕겼다가 흩으시고, 모았다고 거두시기를 반복하며 한 곡이 다 연주되기까지 몸과 악기는 혼연일체 하나가 된다. 오늘 본문을 이쯤에서 다시 읽어보자.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하나님이 내게 두시는 복잡 미묘함을 통해 나의 하루는 더욱 분명하여서, 연주자의 몸에 맞는 악기가 되었다가 소리로 흩어져 너에게 또 내 곁에 두시는 ‘이상한 아이’에게 들려지는 것이다.

 

이를 바울 사도는 냄새로 또는 읽혀지는 편지로 표현한 바 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곧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그렇다면 우린 또한 ‘그리스도의 소리’가 아니겠는가. 저는 나를 불거나 문지르거나 밟아서 또는 두드리고 눌러서 소리를 내신다.

 

이와 같은 소리를 찬양이라고 한다면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7).” 에베소서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로 찬송하게 하시려고 찬송이 되게 하심으로 다함께 찬송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찬송하고,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찬송이 되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다시 찬송하게 하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클래식에는 전혀 문외한인 내가 감히 어떤 선율을 운운하고 어느 연주자의 깊이와 조회를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다만 나는 소리가 되어져 선율을 타고 흐르는 그 기이함에 대하여 경이로울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연주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오늘 말씀에서,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그야말로 요지경인 세상에서, 일촉즉발의 위기 가운데서, 간악한 무리가 정세를 다스리는 땅에서, 나로 하여금 소리가 되게 하신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어김없이 그게 나였음을 말이다. 고로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더 갖고 많이 가져야 넉넉한 줄 아는 세상에서,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나로 하여금 찬송이 되어 찬송을 하게 하시려는 것이다(시 65:4, 10).

 

그러니 오늘에 처한 그 모든 상황이 어떻겠는가. 이 정도도 피곤하고 이만큼에도 넘실거리면 어쩌겠나? 세상은 온통 어떠하다 한들, “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11).” 연주자의 의도를 벗어난 음은 기이하다. 버려진 소리나 잘 벼려진 소리는 한데 연주가 끝날 때까지 이어지나 흡족함이 다르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7).”

 

이런저런 나의 고달픔에 대하여는 애써 외면할 것도 그렇다고 이를 부각시켜 주목 받는 생이기를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 그것이 한 조화라. 연주자의 손길에서 빨라졌다 느려지고, 늘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는 한데 어우러져 선율을 이룬다. 무엇으로 뚱한 아들 녀석에게 했던 말이 내 것이었다. 그럴 거 없다. 네가 누구에게 불만족스러움이 또한 누가 너에게도 그럴 수 있는 것이어서, 너의 헤아림으로 너도 헤아림을 받는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나의 나 된 것이야말로 내 몫으로 누르시고 불어서 밖으로 내어 저 멀리 퍼져가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소리다. 그래 맞다. 누가 한 말이지만, 아직 연주는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연주자의 손에 들려 음을 조율하느라 팽팽히 당겼다 늘이고 소리를 멀리 뱉었다 모두는 과정을 되풀이할 뿐이다. 어느 훗날 우리 모두 주 앞에 서는 날, 비로소 연주는 시작되어 영생의 그날들이 경이로운 찬송이 되는 게 아니겠나.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