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로마서 12:3-13 / 성도의 트라이앵글

전봉석 2018. 9. 12. 15:36

20180916 주일



로마서 12:3-13

성도의 트라이앵글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들어가는 말


모든 괴로움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들 때문이다. 이걸 해볼까? 저게 맞나? 이 길이 옳은가? 하는 따위의 갈등과 회의는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필연적이다. 특히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믿음 가운데 산다는 일은, 우리는 스스로가 의연할 수 없고 느긋할 수 없으며 자기가 만족할 수 없다. 그럼에도 확신을 갖고 사는 의연한 삶이라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에 자족하며 만족하고 사는 삶이거나 아니면 스스로 만족하여 ‘이만하면 됐지?’ 하고 여기는 거짓 위로를 위안으로 삼고 사는 경우일 뿐이다. 둘 다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


흔들림 없이 항해하는 배는 있을 수 없듯이 인생을 사는 동안 흔들리지 않는 삶이란 없다. 차라리 물속에 잠기면 제 무게에 더는 흔들림이 없을 것인가? 우리는 사는 날 동안 내내 환난이다. 그리하여 ‘소망과 환난과 기도’라는 트라이앵글 구조로 산다.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긴다고는 하나 생활의 일렁거림은 여전하여서, 매달 도래하는 공과금과 카드 결제대금일과 끼니마다 먹고 싸는 일과 철마다 입고 쓰는 일과 때마다 잠자고 일어나는 일에서 우리는 시름한다. 과연 어느 부자인들 예외일 수 있을까?


더욱이 세상 구조는 스스로 정직하면 이문을 더 얻을 수 없고 성실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며 맡은 바 자기의 일에 충성일 때는 외면당하기 일쑤다. 그러니 적당히 꼼수를 부리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남들과 같이 탈법과 탈세와 탈선을 해가면서 같이 어울릴 수 있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을 때,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든 돈이 되는 세상이어서 말이다. 위선은 필수이고 아닌 척, 가장하는 일은 필연이 되었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나름 몰랐다는 듯이 시치미를 떨어줘야 같이 사는 사람들도 덜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니 주 앞에서 우리의 부끄러움은 날로 늘어난다.


오늘 본문은 우선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분명한 것을 알게 한다. 3절 말씀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곧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로 이와 같은 생각은 할 수도 없는 것이었으니.


첫째, 자기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그럴 수 없어 늘 고달픈 것이다. 왜 자꾸 견주게 되나? 이는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처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하는 것이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두신 일이 작은 일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민 16:9-10).”


또한 직분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확보하려 할 때 드는 생각이다. 목사니까, 집사니까, 성도라면,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는 식으로 자기 판단이 앞설 때 당장 주어진 오늘의 일을 등한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일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은 모두 우상숭배이다. 우리의 ‘마땅히’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하나님은 내게 가장 적합한 환경과 상황을 조성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오늘도 내게 ‘그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한데 늘 우리의 지나침이 문제다. 이를 확대하거나 축소하거나, 그 바탕에는 불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여기서 ‘지나치다’는 것은 스스로 정한 기준으로 하나님의 기준이 이에 미덥지 않은 것이다. 실제 그 기저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도태될 것 같아서, 남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아서, 곧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움으로 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성경의 가르침은 엄연하시다.


곧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둘째, 하나님은 저마다에게 합당한 은사와 직분을 주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8-20).” 결국 내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신 바 그 생을 다하는 날까지 얼마나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무던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즐겨 생각하는 어느 무드장이의 예화가 떠오른다. 저는 가난하였고 늘 쪼들리는 형편이었으나 열 명의 자녀를 두었고 날마다 성실히 일하는 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십년을 수도원에서 면벽수행을 마치고 나름 영성이 충만한 이가 자신의 샌들을 수선하기 위해 공방에 들렀다. 허름한 공간은 협소하기 이를 데 없고 무드장이의 형편은 한눈에 봐도 안타까울 뿐이었으니, 저는 자신의 낡은 신발을 수선하는 동안 이런저런 말로 무드장이의 사정의 물었다. 무드장이는 그때마다 개의치 않고 자신의 남루한 형편을 곧이곧대로 말해주었다.


그 말을 다 듣던 이가 혀를 끌끌 차며 그런 형편에서도 어찌하여 자녀를 열씩이나 두어 이처럼 더 힘에 겨워하는가, 그를 나무랐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드장이는 전혀 노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태연하게 저이에게 되물었다. 아니 그걸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저보다 더 잘 아실 분 같은데요? 내게 그리 주시는 분에게 직접 물어보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무드장이는 그러면서 묵묵히 저의 망가진 샌들을 고쳐주었다. 수도사는 자신의 십년 수행이 저의 삶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그 길로 도로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주신 바 그 일상에 성심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마땅히’다.


서로의 다양성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


길은 같으나 서로의 역할이 다르고, 방향은 하나이나 그 쓰임은 여럿이어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손은 손의 일을 하고 발은 발의 일을 하고 입은 입의 일을 하며 눈은 눈의 일을 한다. 그럼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의 다양한 은사를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8).”


그런데 장로가 목사를, 목사가 어느 집사를 주관하려 든다. 이는 자기 일에 온전하지 못할 때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격이다. 정작 자기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연약함을 동정할 줄도 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획일적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25-26).” 그러려면 중심이 분명해야 하는데 우리는 사람을 보고 일하기 십상이다. 곧 ‘먼저’가 될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렇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 ‘저 아이’를 대하고 ‘저 한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 우리는 우리의 선의로 하는 게 아니다. 저에 대한 측은지심도 아니다.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은 실제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겠으나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는 저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저 아이’, 몰상식하고 몰염치하며 몰지각한 ‘저 아이의 엄마’를 이해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것도 주신 바 그 은사에 따라서 하면 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안 되는 걸 억지로 할 수는 없겠으나, 안 되니까 더욱 주의 나라를 바라고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일이다. 결코 우리는 남을 위해 살지 못한다. 은혜는 오롯이 하나님만의 것이고 인생은 오롯이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은사다.


인생은 결코 연극이 아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9-11).”


고대 연극은 대부분 가면을 썼다. 이 가면을 ‘페르소나’라 하는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지고 남을 의식하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그리 표현한다. 결국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소위 말해 ‘빈말’이라는 말도 적당히 필요한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로를 하고 친절을 행사하는 데 있어, ‘빈말이라도’ 감사를 표하고 걱정을 보태며 위로를 더할 수 있다. 여기서 정직을 운운하는 일은 어리석다. 서로에 대한 예의란 그런 것이다. 한데 이게 또 지나쳐 마치 남의 인생을 대신 살듯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첫째,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한다. 둘째, 서로 우애하고 존경해야 한다. 셋째,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넷째, 열심을 품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주를 섬기는 일에서 비롯된다. 사람에게 하듯 하면 위선을 떨 수밖에 없다. 빈말이 늘고 거짓 표정과 위선적인 언행이 따를 수밖에 없다. 어찌 악한 세상에서 악을 미워할 수 있겠나? 우리 힘으로는 어렵다. 그러자면 세상을 등지고 사는 수밖에! 그래서 공동체를 꿈꾸고 어디 동떨어진 곳에서 구별되게 살고 싶어 한다. 낭만을 꿈꾸듯 이는 또한 위선이다. 자기들 끼리 거룩한 용어를 쓰고 천사의 말을 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한들?


그러니 악을 미워하는 일도 주를 섬기는 마음에서다. 선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그룹에 또는 누구와 같이 뜻을 도모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는 이유도 가족이니까, 한 핏줄이니까 하는 따위의 일이 아니다. 내가 왜 저런 사람을 대해야 하나?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나? 왜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열심을 다하고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아야 하나? 곧 우리의 열심은 모두 다 주를 섬기는 일이어서이다. 내가 설교 원고를 쓰는 일은 누가 식당에서 보다 깔끔하고 정직하게 식재료를 준비하는 일과 차를 운전하며 안전운전을 도모하는 일과 아이들을 가르치며 주의 사랑으로 대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고로 악을 미워하는 일도, 선에 속하는 일도 모두 주를 섬기는 일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결국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6).” 곧 우리의 행실과 그 열매를 보고 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하면 악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 것도 주의 법도를 알기 때문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104).” 그래서 우린 거짓 행위를 미워하되 이 일이 곧 주를 섬기는 일로 이어진다.


고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이는 필수적인 것이고 당연한 이치이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암 5:15).” 그러므로 하나님이 싫어하실 일을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일을 미워하는 일이 선에 속하는 일로 열심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를 섬기는 일이 되었다.


성도의 트라이앵글- 소망, 환난, 기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


어쩌면 성도로 사는 일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일보다 괴롭다. 다들 아무렇지 않고 괜찮은데 유독 우리들만 주의하고 또 조심하는 게 성도다. 그러자니 우리 안에 이는 회의와 갈등은 남들보다 심하다. 다시 말하지만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살지 않는 다음에야 그 부대낌이 여간한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숱한 믿음의 청년들이 갈등한다. 동거가 보편적이고 혼전관계가 대수롭지 않은 게 되었으며 살다보니 이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을 존중하며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그 이상의 것으로 여겨 합법화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정말 옹졸한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기쁨과 평강은 ‘믿음 안에서 충만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임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곧 우리의 수고나 애씀이 또 나름의 가치나 판단으로가 아니다. 왜 그런가?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우린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우리는 누구도 깨끗함을 받을 수 없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나오는 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는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말씀에 대한 소망이다.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이다. 우리의 믿음은 소망을 붙들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떤 어려움 또는 난처한 상황들이 실은 우리의 인내를 만드는 것이었으니 무엇에 대한 인내인가? 단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그러기 위해 젊어서는 ‘사서 고생도 한다’는 말일까?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여기 이 땅에서 사는 게 전부라면 뭘 꼭 그렇게까지 참고 견딜 필요가 있겠나?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우리의 소망은 주께 있었던 것이다. 이 땅이 아니었다. 사람에게 두는 게 아니었다. 누구를 지지하며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는 데 있지 않았다. 사람을 보고 아쉬운 소리 할 거 없다. 저들은 결코 우리의 소망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6-17).”


고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이것으로 우리는 환난을 이겨낼 수 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 1:18).” 곧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그리할 수 있는 힘은 그럼 어디에서 오나?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결국 우리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게 믿음인데, 그 믿음은 소망을 품을 때 힘을 얻고, 그 힘의 원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땅히’의 것이었다. 한데 어찌 하나님을 사랑할까? 그래서 기도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기도도 연마다. 사랑도 무던히 더해지는 마음인 것이라면 주께 바라고 구하는 기도는 그만큼 주를 사랑하는 표현이다.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오늘 본문은 성도로 살아가는 데 있어 3원칙이라 할 수 있는 트라이앵글 ‘소망과 환난과 기도’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환난이 기도하게 하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소망은 더해진다. 소망을 가졌으면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데 그러기까지 기도는 쉬지 않는다. 기도는 주를 바라는 마음의 정도이고 주를 사랑하는 표현의 방식이다. 기도와 소망과 환난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이든 이 셋은 항상 나란히 거듭 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이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곧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