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전봉석 2019. 6. 11. 07:13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 24:14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편 96:9

 

 

존 번연(1628-1688)<죄인들의 우두머리에게 내린 은혜>e-북으로 읽었다. <천로역정>도 새로 받았다. 곧 애니메이션으로 상영한다고 하여, 다시 읽는데 놀라웠다. 우린 누가 박사학위 논문 최종 발표를 앞두고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며칠째 숨이 가쁘고 호흡이 답답하여 병원에 갔더니 기형적인 몸 때문인 것 같다는 소리만 들었다. 이런저런 일을 두고 주께 아뢰고 바란다. 하는 일이 잘 되길 구하고 이를 응답으로 삼곤 한다. 당시 번연은 영국 국교회의 설교금지 명령을 위반하여 12년간 복역하였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선교사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폐렴으로 숨졌다. 인디언 지역의 선교사로 5년간 나갔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다. 그런 그를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데려다, 그의 딸 제루사가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러다 제루사도 폐렴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일련의 상황들을 두고 주의 은혜라고 말하기가 참 어렵다. 그런데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믿음의 사람들이 살단 간 인생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오늘 시편 96편은 말씀을 증거하는 데 있어 그 열망을 노래하고 있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이와 같이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일갈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24:14).” 어쩔 것인가? 묻는 듯하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

 

앞서 복음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은 오롯이 말씀을 사모하고 이를 증거하고 나타내기에 전폭적이었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12:4).” 솔직히 나는 오후께 우울하였다. 누군 갱년기라고 하였고 누군 그저 또 그러려니 하였다. 엑스레이를 찍고 전에 검사한 것들을 살피며 의사는 이를 무조건 신경정신과 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하고 시작한 그의 설명은 논리적이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몸이 뒤틀려 있고, 12번 척추를 통하는 숨길이 어쨌든 기형적이라 힘들 것이라 했다. 물론 새로 먹게 된 고혈압 약을 얼마간 중단하기로 하였다. 그럼 다른 약이나 어떤 처방이 없는가 물었더니 저는 난처해하며 달리 방도가 없지 않겠나 하고 얼버무렸다. “그 날에과연 나는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럴 수 있을까?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하는 말씀 앞에 아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읽은 존 번연의 고백은 새로웠고, 떠오르는 믿음의 사람들이 놀라웠다. 나의 나 됨은 명확하여서,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5:9).” 2 아이가 나에 대해 이런저런 호기심을 갖고 있는 걸 알면서도 나는 기다린다. 1 여자아이는 극심한 무기력증으로 도대체 아무 것도 할 것 같지 않아 그만 오게 할까? 하고 아내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니 아이가 카페에 일기를 올렸다. 물론 대충 그냥 쓴 글이다. 오늘 오면 그만 오게 하고 돌려보내야겠다던 생각은 무색해졌다. 하나님의 의중을 알 길이 없다. 내가 저를 어쩔 수 있을까?

 

아이는 여전히 횡설수설 맥락 없는 글을 쓰고 말을 한다.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다. 성경공부를 할 때 아이의 기도는 어렵다. 귀를 쫑긋 세우고 유심히 들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렵기만 하다. 다만 저가 부르는 주의 이름과 주께 바라는 마음을 신뢰하며 함께 아멘을 하였다. 그럼에도 아이가 오고, 1 아이의 글을 읽어야 하고, 2 아이의 탐색 대상이 돼야 하며, 기형적인 몸으로 호흡을 하고 고단한 몸을 이끌며 살아야 한다. 살아서 사는 날 동안, 그게 감옥이든 인디언 마을이든, 폐렴에 걸렸든 옥에 갇혔든 처한 상황에서 주를 증거하고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노래한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96:1).” 이는 설교적인 삶이다. 누군가에게 들려져야 하고 보여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편저로써의 삶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그러므로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96:2).” 아직도 숨길이 이어져 오늘을 하루 더 살아야 하는 목적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8).”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증거되어진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7).” 우리가 말하는 선만이 선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최선과 차선이 따로 없다. 모든 게 최선이다.

 

나는 나의 우울함을 그리 받았다. 고단한 몸으로 사는 일은 엄연히 우울한 일이다. 우울한 걸 우울하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나의 사명을 존 번연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나 브레이너드나 제루사나 허다한 무리들이 보지 못하고도 믿는 그 믿음의 소망으로 붙들고 싶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12:3).” 그럴 수 있는 게 무얼까?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이를 알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3).”

 

믿음으로 사는 일이란 어떤 결과나 결실을 응답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날들이 응답 아닌 게 없기 때문이다. 나의 기도와 아룀의 결과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고 도리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 것 또한 주의 긍휼하심인 것이다.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하고 위하는 것은 어떤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함이 아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었다. 저런 애 좀 사람 한 번 만들어 봐! 하고 누가 말했었다. 나는 저를 돌이켜 뭔가 나은 결실을 꿈꾸기도 하였다. 한참 사춘기를 배회하고 공부에 흥미를 잃던 아이를 잘 건사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였고, 믿음으로 잘 키워 버젓이 한국은행에 취직하게 한 것이라, 이를 자랑으로 여긴 경우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글을 쓰게 하고 훗날 문예창작과에 좋은 결과로 입학시킨 것을 두고 좋은 결실로 삼아 기도응답으로 여겼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22:27).” 우리의 사는 이유는 단 하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2).” 이 땅에서의 성과를 두고 복을 운운하고 은혜를 측량하고 기도응답을 선호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오후께 우울해하고 있는 나를 성경은 몰아치듯 이끄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은 종종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기구하였고 초라하였고 안타까웠으며 답답하였다. 왜 성경은 그리 말씀하시는지 알겠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73:38).” 무엇이 우리를 더 주를 가까이 하게 하는가?

 

이 땅의 형통이 아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9-20).” 다른 거 없다. 주시는 바 그 날에 내게 두시는 일에 묵묵한 것이 충성이었고, 이는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나의 이야기가 주의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이 응답이었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6: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