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행 14:21-22, 살전 5:9-10 /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전봉석 2019. 11. 21. 09:35

20191124 주일


 

14:21-22, 살전 5:9-10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사도행전

14: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권능을 우리의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 적용하려고 한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설교를 좋아하고, 마치 자신에게 맞는 상담자를 찾아가듯 그런 목사의 설교나 그러한 교회를 선호한다. 그리고는 집단상담에서처럼 돌아가며 성공 사례를 고백하고, 말씀을 적용하여 서로가 어떠한 복을 받았다는 데서 예화나 간증에 열중한다. 교회들은 이를 활용하고 전도용으로 쓴다. 심지어는 유명인을 내세워 초청 주일로 홍보하기도 한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황당한 경우를 다루고 있다. 바울과 바라바가 루스드라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날 때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울은 저의 믿음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고 기적을 행하였다. 그러자 저가 걸었고, 많은 사람들은 바울을 찬양하였다. 바나바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 제우스라 하였고, 바울은 말 전하는 자라 하여 헤르메스 신이라 여겨 저들에게 소와 화환을 올리며 제사하려 하였다. 바울은 급히 저들을 말리며 말하였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먼저 두 가지를 주목하게 한다. 첫째는 사람들이 무엇에 열광하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히 바울은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 그 일을 행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필요에 따른 기적만 본 것이다. 둘째는 그런 일을 행한 사람을 숭배하였다. 곧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고, 사람이 그 영광의 대상이 된다. 바울은 이를 기반으로 교회 부흥을 꾀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엉뚱하리만치, 오늘 말씀은 우리를 황당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오히려 환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서 겪는 환난을 피해 교회로 나왔다. 그 위로를 얻고자 믿음 생활을 한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오늘의 평안을 꾀하고 보다 나은 삶의 질을 꿈꾼다. 이에 대해 오늘 말씀은 우리 영혼에 경종을 울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게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이 주는 유익은 또 무엇인가?

  

  

1. 우리가 환난을 겪어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첫째,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환난을 겪는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굳이 누구도 환난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피하고, 모면하려 다른 길을 구한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대놓고 말씀하셨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5:10).” 그렇다면 도대체 의란 무엇인가? 이 의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데 따른 의가 아니다.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의가 아니다. 이 의는 하나님의 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즉 우리는 갈급한 영혼으로 주 앞에 나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둘째, 우리의 환난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한다.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 3:3).”

 

단순하게 우리의 환난은 죄로 인한 징계가 아니다. 오히려 멸망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한 마치 독감예방주사와 같다. 이를 C. S. 루이스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하였다. 성경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곧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 받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을 두신다. 하지만 우리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 6:9)” 그래서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12:5).” 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셨다.

 

셋째, 우리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삼으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 1:4-5).”

 

한 아이가 있었다. 자꾸 거짓말을 하자 아이엄마는 아이를 뒷마당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해 봄에 심은 나무를 뽑아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이는 조금 힘을 쓰다 나무를 어렵지 않게 뽑았다. 다시 그 옆에 있던 여러 해 된 나무를 뽑아보라 하였다. 하지만 아이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 나무는 뽑히지 않았다. 우리의 습관도 그와 같아서 한 번 밴 것을 뿌리 뽑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일렀다. 이처럼 우리의 죄성은 우리의 아버지의 것으로부터 아버지의 아버지의 것이면서 그 아버지들의 아버지 때의 것부터이다. 이는 우리 의지로는 뽑아낼 수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기려고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넷째, 환난을 통해 우리는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22-23).”

 

점점 더 돈만 있으면 천국 같은 세상이다.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인 것 같다. 그러니 돈이 곧 신이다. 몸이 원하는 바를 충족하는 게 천국이다. 이를 제어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다 해도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애통해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그리고는 전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날마다 몸의 속량을 바란다.

 

다섯째, 우리의 환난은 우리로 소망을 이루는 줄 알게 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도대체 환난을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고통이 즐거울 리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환난을 즐거워하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가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극한 고통에서 오히려 중추신경으로부터의 아드레날린이나 엔돌핀의 교감신경이 주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 의미로 우리의 환난은 신비하게 영적인 교감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으로 인내를, 인내에서 연단을, (연단은 인격이다.) 연단에서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안다. 이를 앎으로 우리는 환난을 인내하고 인내함으로 우리의 인격은 성숙하여져서 연단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을 이루어간다.

  

  

2.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유익과 그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9-10).”

 

바울은 여기에서 환난의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를 풀어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는 것은 노여움 때문이 아니다. 징벌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이 환난의 주된 목적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환난으로 우리를 인내할 수 있게 하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동일하다. 인생이 평탄하든지 어렵든지, 늙었든지 젊었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심지어는 살았든지 죽었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이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최종 유익이다. 이를 다시 병렬식으로 읽어보자.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도록 세우셨다. --> 이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 이는 하나님의 노하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 우리로 깨어 있든지 자든지, 즉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목적은 동일하시다. -->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는 우리를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이다.

 

 

나오는 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오늘 말씀은 바울 사도의 서로 다른 설교가 아니라 일관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 우리가 주의 권능을 단지 이 땅에서의 삶으로, 여기에서의 필요와 목적으로 축소시킨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처사인가? 많은 사람들은 당장의 병 고침과 출세와 성공을 목적으로 예수를 바란다. 그리고 교회로 나온다. 말씀을 묵상하고 삶에 그리 적용되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이는 최종 목적이 아니다. 도리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다.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러므로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도 환난과 고난은 필연적이다. 경건을 위해서도 고난은 따른다. 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더욱 경험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세우심을 얻는다. 오늘 날 모든 피조물도 우리와 함께 그처럼 그리스도의 속량을 기다린다. 그와 같은 환난으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줄을 안다. 오늘 우리가 이를 감당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이는 결코 노하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잠들든지, 심지어는 살든지 죽든지, 우리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스려서는 안 되고(그럴 수도 없고)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의 영을 그가 주관하신다는 의미다. 이로써 하늘에 속한 형상에 의해 땅에 속한 형상은 날마다 지워진다. 이는 고통 없이는 어렵다.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인 것이다. 인내함으로 연단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인격이 생성된다. 이와 같은 인격은 우리의 운명을 가른다. 이로써 소망을 이루는 줄 앎으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5:3-4).

 

이는 오직 순종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우리는 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그러므로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