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1 주일
행 7:9-13, 요 3:19
시기하여 팔았더니
사도행전
7: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7: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7: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7: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7: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들어가는 말
어느 통계에 보니 부부 사이의 80% 이상이 화를 쌓아두고 산다고 한다. 자주 짜증내고 화를 내고 마땅치 않아하는 사이는 정작 가까운 사람들이다. 남에게는 굳이 미운 마음이 생기지도 않는다. 이런 우리 마음을 예수님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화만 내도 심판이 있고, ‘이런 돌 머리야’ 하고 조롱만 해도 공회에 넘겨지고, 급기야 ‘미련한 놈’이라 욕만 해도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하시니… 물론 헬라어로 ‘화를 내다’는 ‘낙엽이 타는 정도의 화력으로 훅, 하고 일었다 풀어지는 기질 같은 정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화를 마음에 담고 계속적으로 쌓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말 속에 분을 가져도 살인과 다를 게 없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달아보신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대상 28:9).”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곧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 같은 본문을 가지고 옥한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당부의 설교를 하였다. ‘첫째, 자신의 의를 철저히 배격할 것.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철저히 의지할 것. 셋째,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원할 것. 넷째,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히 의지할 것.’
곧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기도할 때도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만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덮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수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그런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1. ‘요셉’을 파는 ‘여러 조상’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행 7:9).” 즉 오늘 본문은 스데반 집사의 설교 중에서 ‘요셉’을 팔았다는 진술부분이다. 왜 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이어 ‘여러 조상’이 ‘요셉’을 팔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시기 때문이었다. 싫었던 것이다. 미운 것이다. 화가 났다. 저들 가운데 어느 특정인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여러 조상’이 다 그랬다. 곧 우리는 누군가의 조상이 된다.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에서 ‘애굽’은 늘 성경이 일컫는 바, 세상을 의미한다. 어쨌든 그때마다 상황은 역전되어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서, 항상 보면 선한 결과로 이끄셨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즉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럼 결과가 그러하니 아무래도 좋다는 소린가? ‘요셉’은 누구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를 시기하여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여러 조상’은 오늘 날 우리들을 지목한다. 삶의 곤고함은 그 뒤를 따른다.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즉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심령은 항상 그 ‘흉년’과 같이 팍팍하기 이를 데가 없다. 가족 간의 반목은 물론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하다. 이혼이 증가하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가족끼리 자행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괜찮다고 위안한다. 다 잘 될 거야! 하고 자족한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다고 하지 않는다.’ 왜들 그러는 것일까?
첫째, 시기와 미움 때문이다.
저들 ‘여러 조상’은 ‘요셉’의 말을 자기자랑으로 들었다(창 37:8). 오늘 날 ‘여러 조상’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하는 이와 같은 말씀을 거북하게 여긴다. 시기하는 마음 때문이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3:12-13).”
시기란 샘을 내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애초에 처음 사람도 그랬다. 저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오늘 날 우리는 저마다 자신을 숭배한다. 자기존중과 자기만족을 우선으로 여기며 산다. 자신의 성적 취향을 선호하고 가치관과 기준을 견지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4대 우상에서 극장의 우상, 종족의 우상, 시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과 같다. 극장: 고뇌 없이 남의 손을 빌려 사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떠받드는 특권층이다. 종족: 자기들끼리 문화를 형성하여 이분법적인 사고를 고집한다. 시장: 자기들만의 언어 세계를 가졌고 점점 더 분화한다. 동굴: 주관적인 견해를 견지한다.
둘째, 어둠에 가려진 자신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성경은 사람들이 왜 성경을 싫어하는지 분명히 밝힌다. 다들 화가 나서 그런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니! 자기 아이가 우선이고, 가족이 먼저고, 돈과 명예가 중요한 것인데…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이와 같은 말씀이 거슬리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삶을 선호하고 ‘내가 알아서, 내 멋대로’ 살고 싶은데 성경은 자꾸 내 안의 수치심과 죄책과 비밀스런 위선을 들추는듯하다. 그럴 바엔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막 15:13).”
2.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행 7:9)”셨다. 예수님 당시의 선각자요 지혜자요 누구보다 월등한 지식을 가졌던 가말리엘은 말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 5:38-39).” 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가? 오늘 날 많은 지식인들은 가말리엘과 같은 자세를 선호한다. 굳이 예수를 배척하지 않는다. 기독교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복음을 존중하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이치를 동시에 따른다. 여러 종파도 존중한다. 종교적인 화합을 선호한다. 종교가 삶의 위안이 되는 것으로, 서로의 취향이라 일컫는다. 그럼에도 성경만 편협한 것 같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곧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그러므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저들의 팍팍한 삶은 기어이 주를 만나기까지 해소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의 선택이다. 갈 데까지 가봐야 하는 삶은 끔찍하다. 고스란히 자신의 몫을 짊어지고, 그 고통을 자식들에게까지 전가하며 이어지고 되풀이 되어 고통 중에 신음한다. 이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나님은 이내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신다.
3. 오늘 우리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① 이 지혜는 창세전에 작정하신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②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는 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③ 그리스도와 한 마음이 되었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6).” ④ 우리는 이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추구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⑤ 마음과 뜻을 온전히 합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⑥ 곧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⑦ 우리 마음에는 평강이 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⑧ 우리로 인내를 이루게 하신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⑨ 천국 백성들로서 우리는 감사와 찬송을 배우고 익힌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나오는 말
※ 이를 우리 일상에서 느끼고 나타내 것에 대하여
① 자신을 부정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② 서로가 한 몸을 이룬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③ 화평의 십자가를 진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④ 십자가로만 이길 수 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5).”
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⑥ 우리도 십자가로 산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⑦ 이로써 주가 지키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7).” 곧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8).”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선으로 이루신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행 7: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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