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5 성탄예배
누가복음 2:8-11
구주가 나셨으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들어가는 말
우울한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다. 예년 같으면 기쁘고 즐거워야 할 시기인데, ‘코로나19’로 다들 ‘조용한 성탄절’을 강요당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특수’를 노렸던 사업장이나 개인들이나 저마다 울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통해 한 번쯤 <성탄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부활의 의미>로 묵상하면 어떨까? 실제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고, 이교도적인 열광과 말씀에 위배되는 행사들로 퇴색된 지 오래다. 당시 이교도의 축일-태양신 숭배와 날짜와 같고 그 행태도 닮았다. 로마제국은 서구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독교를 등에 업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있어 성탄절을 성대하게 치르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사실 여부를 떠나 ‘크리스마스이브’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들 밤거리를 활보하고 난장판을 일삼기 일쑤다. 경건함은 사라지고 흥겨움만 추구하게 되었다.
지난 주일날 말씀에서도 성탄을 축하하러 온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그 의미, 저들이 걸어왔을 먼 노정의 처절한 광야 길과 이를 알고 두 살 미만의 모조리 학살하는 헤롯과 그 일당들의 참혹한 행위에 치를 떤다. 그 와중에 ‘그 지역에서’는 가장 낮고 천한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이 전하여졌고, 저들은 엄숙하고 거룩하게 아기 예수께 경배를 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저 흥청망청 웃고 즐기며 축하할 일은 아닌 게 분명하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이셨다.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마 1:21).” 2천여 년 전, 왜 하나님은 굳이 사람으로 오셔야 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으며, 이내 부활 승천하신 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야 했는지, 우리는 오늘 조금은 엄숙하게 성탄절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이는 우리의 ‘육신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여전히 ‘세상의 열매’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현실에서, 새삼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삶의 의미를 바로 알고자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고, 곧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신다. 정리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저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우리로 복된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 확증된다. 값없이 믿어 구원에 이른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가령 우리의 구원이 단지 이 땅에서 삶의 회복이 전부라면, 굳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실 필요가 없었다. 천사들을 시켜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구원의 목적이 다른 것이다. 왜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가 그처럼 ‘무기력한 죽음’을 맞이하였나? 우리 죄의 삯을 대신 갚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신 뒤에 성령을 우리 안에 내주 임재하게 하셨나? 우리로 영생의 삶을 위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겨 볼 것이다.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1.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복잡한 일이다. 안 믿는 자들은 사는 게 단순할지 몰라도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곧 우리 안은 치열한 싸움터다! 이를 과장하면 자칫 율법주의자가 되고, 이를 느슨하게 보면 값싼 은혜주의자가 된다. 스스로 엄격하다거나 남에게 엄격한 기준은 자기 의의 영광을 구하기 십상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8).” 우리는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이루신다. 그럼 ‘육체의 일’은 무엇인가?
2. 육체의 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이는 그저 안 믿는 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육체의 일은 분명하’게 우리에게도 나타난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으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을 즐긴다. ‘우상 숭배와 주술’과 같이 자기 신념을 믿음으로 숭배한다. 그러할 때,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날마다 이를 경계해야 한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육체의 일’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성령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3. 성령의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는 각각 세 개씩 묶어 하나님과의 관계(사랑, 희락, 화평)와 사람들과의 관계(오래 참음, 자비, 양선)와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충성, 온유, 절제)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열매들’이라 하지 않았다. 이는 개별적이지 않고 동시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화평을 누리면서 양선을 행하지 않을 수 없고, 참을성은 많은데 온유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하나다.
1) 사랑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첫째 되는 열매이면서 나머지를 이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믿음을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의 특징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 결국 ‘사랑과 진리’는 하나다. 진리의 말씀으로, 태초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오늘에도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게 하고(마 5:44),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게 하고 용서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눅 6:32).
2) 희락
성령의 열매 희락은 가공할 수 없는 기쁨이다. 행복과 다르다. 행복은 일시적이다. 즉흥적이며 감정적이다. 희락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희락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관용을 베푸는 자로 산다는 소리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은 우리로 낙심에 빠져있지 않게 하시고,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알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3) 화평
성령의 열매 화평은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평안이다. 전에 느끼지 못한 것으로 우리의 형편을 초월하고, 남과 비교를 거부한다. 가령 걱정이 태산 같은데도 이상하게 안도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이는 ‘주의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을 위하여’ 우리로 ‘의의 길’을 가게 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남들보다 나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주가 우리를 변호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54:1).” 우리 안의 화평은 세상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것이 주가 내 안에 계심으로 맺어가는 성령의 열매 화평이다.
4) 오래 참음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첫 번째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훈련 없이 불가능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곧 우리의 오래 참음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 어떻게? 우리 안의 성령이 그리 하신다.
5) 자비
성령의 열매 자비는 친절함이다. 오래 참음이 소극적인 대응이었다면 친절함은 적극적인 대응이다. 이는 하나님을 좋게 하는 일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우리의 참음도 친절도 막연한 수긍이나 무관심이 아니다. 예수님은 인자하셨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엄할 때는 엄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6) 양선
성령의 열매 양선은 연마이고 단련에 의한 단련된 행동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우리 스스로 실천할 수 없다. 단시일에 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심으로 무던하게 연마시키고 단련시키는 소망의 결실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7) 충성
성령의 열매 충성은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나의 자세 첫 번째다. 믿음은 단련되어야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에 성실함을 더하고, 성실함은 충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충성은 가장 적극적인 성품이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충성은 보장된 약속이다.
8) 온유
성령의 열매 온유는 그 위로를 주께 두는 마음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겸손히 딛고 달려갈 수 있다고 하셨다. 온유는 곧 겸손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하루를 살며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넘치는 은혜를 실감할 때 겸손은 더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9) 절제
성령의 열매 절제는 맨 마지막에 오는 것으로 첫 번째인 사랑이 앞에서 끌고 절제가 맨 마지막에서 밀고 간다. 모든 열매에는 절제가 관여한다. 사랑에 절제를 없으면 집착이 된다. 희락에 절제가 빠지면 쾌락이 된다. 화평에 절제가 없으면 안이해진다. 오래 참음에 절제가 없으면 우유부단하다. 자비에 절제가 없으면 유야무야 타협한다. 양선에 절제가 없으면 자신만족에서 선하다. 충성에 절제가 없으면 헛되이 희생한다. 온유에 절제가 없으면 악을 묵인한다. 절제에도 절제가 없으면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된다. 절제는 훈련의 대명사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절제는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는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나오는 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5-17).”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엄숙한 날이다. 세상은 받지 않았다. 알지도 못한다.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삶은 필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오랜 훈련으로 맺어진다. 안 믿는 자들은 단순하고, 우리는 복잡하다. 새싹이 1톤 이상의 무게를 들어 올리며 땅을 뚫고 나오듯, 우리가 젖 먹던 힘을 다해 살아가듯, 사는 게 장난이 아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장엄하다. 룰루랄라, 잘 놀다 가는 한 생이 아니다. 그러자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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