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룻기 1:1-18 /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전봉석 2020. 12. 30. 10:56

 

20210101 신년 가정예배

 

룻기 1:1-18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인생에 기근이 닥치면 누구나 살 궁리를 하게 된다.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 엘리멜렉은 가족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들어갔다. 모압은 이교도의 땅이다. 저들은 주를 경외하지 않는다. 결국 엘리멜렉이 죽었다. 어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의미는 함의적이어서,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동시에 내포한다. 결국 저의 처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만 남겨졌다.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두 아들의 며느리를 얻었다. 하나는 오르바고 하나는 룻이다. 십 년쯤 살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 죽었다. 이교도의 땅으로 갔던 엘리멜렉의 죽음과 그 땅에서 어찌 살았을지 짐작이 가는 두 아들의 죽음은 우리로 깊은 묵상을 요구한다.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려 선택한 땅에서 저들의 결말은 허무하고 참혹할 따름이다. 남겨진 세 과부 나오미와 오르바와 룻은 살 길이 막막했다.

 

그때 하나님이 저들을 돌아보셨다는 소식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들려왔다. 성경은 이를 누차 강조하신다. 그렇게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하나님의 징계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곧 우리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닥치는 ‘인생의 흉년’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욥 14:17).”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아들들도 잃고, 과부가 된 두 자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석연찮았다. 그래서 저들을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일렀다. 오르바는 돌아갔고 룻은 따랐다. 오르바도 룻도 같은 처지에서 서로의 선택은 갈렸다. 나오미는 저들을 위해 복을 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새로운)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때에 나오미는 깨달은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누구나 어떤 어려움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종교인은 자신의 선택으로 기독교를 택하고 믿지만 그리스도인은 선택받음으로 잡힌 자들이다. 우리는 붙들린 그것을 붙들려고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새해 첫 날 아침, 가정예배로 먼저 드리면서 우리는 엘리멜렉의 선택과 그 결과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러해서 어떠했을지, 남겨진 나오미와 두 아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저들을 결국이 주는 의미를 묵상해야 한다. 그때 자신이 나고 자란 모압에 남기로 한 오르바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오히려 무모하게 홀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나서는 룻의 결단을 눈여겨봐야 한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기로 한 것은 단지 정 때문이 아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뒤늦게 돌이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나오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올해, 2021년도 우리 앞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일들이 펼쳐질 것이다. 어떤 것은 말도 안 되는 ‘흉년’으로, 우리도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스스로 살 궁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오늘 이 룻의 신앙이 우리 가족의 것이 되길 기도한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왜? 저는 알았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바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훗날에 바울의 고백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바로 지금 룻의 고백과 같다.

 

말씀을 정리하면,

 

첫째,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통치, 그의 도우심’ 외에 다른 것으로 도움을 삼으려하지 말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그래봐야 다들 인생은 한 뼘 길이밖에 안 된다. 그러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둘째, 하나님은 ‘어떠하든지’ 공의로우시고 인자하심으로, 우리 인생의 ‘흉년’을 통해서도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단련하신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연단이 없고 징계가 없는 믿음은 성장도 없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이면 훈련하신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며 그 뜻을 이루신다. 그러는 동안 불순종에 의한 ‘인생 길, 광야 40년’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어쩌겠나? 하나님은 기어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앞서 요셉도 형들의 죄악으로 애굽에 팔려 가 모진 고초를 겪었으나,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7).” 하는 고백을 하였다. 이는 어느 훗날 우리의 고백이다.

 

오늘 본문의 놀라운 결국은,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룻 4:16-17).” 즉 가까운 훗날에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으로, 종종 우리는 ‘막장’에 다다른 것 같이 막막할 때도 있겠으나, 광부들은 거기서 석탄을 캐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할 때 우리의 신앙고백은 놀라울 따름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 6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