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전도서 10:2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시편 81:11-12
저마다 많은 슬픔을 안고 산다. 드러난 것도 있고 드러나지 않은 것도 있다. 스스로 지고 가는 이의 남모를 슬픔이 때론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한 사람을 알고 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모든 슬픔까지 함께 나누는 일이다. 저마다 아홉 가지의 좋은 기억보다 한 가지의 슬픔의 무게가 더 무겁다. 그러므로 나는 아니다, 하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갇힌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이를 오늘 지혜로 들으면,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1).” 하고 전도자는 말한다. 그 차이는 분명하여서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2).” 이와 같은 확연한 차이를 보면서도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자는 이고 지고 끌리는 발로 간신히 선다.
우리는 정해진 길을 간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이와 같은 확연한 구분 앞에 승복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 16:31).” 이를 알 때 우린 굳이 이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일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와 같은 슬픔을 딛고 주 앞으로 나아가는 길.
그러므로 소모적인 시간과 말을 줄이는 일,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3).” 보면 참 누구의 의견을 듣기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려는 아집이 강하다. 누가 어떤 결정을 이미 다 하고 내게 통보하듯 말할 때 나는 뭐라 이를 말이 없다. 그런 자의 경우 뭐라 하면 반발한다. 결국은 자기 생각대로 할 것인데 여기에 동조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여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잠 12:23).”
나이가 들어간다는 일은 자기 고집이 완고해져 가는 일 같다. 더러는 지금도 그런데 나중에 노인이 되어 주체할 수 없는 자기의 고집을 이고 지고 살까 두렵기도 하다. 보면 대부분이 오래된 슬픔이다. 이를 자신이 이룬 성과로 둔갑시키는 재주들이 있다. 마치 하와와 같이 말이다. 뱀이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그러자 하와는 살짝 자신의 판단을 곁들여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대답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 행위언약을 세우실 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7).”
‘반드시 죽으리라.’와 ‘죽을까 하노라.’는 그 이해와 해석이 전혀 다르다. 성경은 이르신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닌 것이다. 우린 너무 쉽게 주의 말씀을 비튼다. 자기 생각을 끼워 판단한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5).” 오늘 지혜서의 난제다. 우린 이를 자주 겪으며 산다. 한 가정의 가장이 혹은 나라를 통치하는 이의 허물이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때 기이한 일이 벌어져서 “또 내가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종들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7).” 지혜가 무시될 때 합당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자를 얻기는 어렵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주가 이루시기를. 나는 다만 그 쓰임에 합당하기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저에게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굳이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다. 어떤 결정에 앞서 여지를 두고 같이 나눌 때 뭐라 이를 말도 있는 법이다. 다 그리 정하고 구구절절 이어지는 설명에는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같은 것이어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그러니 참,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 앞에 입을 다물게 된다. 자신의 요구와 소원을 하나님의 뜻 앞에 두는 기도는 흔하다.
함부로 자기 판단을 따르는 일에 대하여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9).” 오늘 전도서는 그 정해진 것의 분명한 의도가 있음을 알게 한다. 한 아이를 내 곁에 두시는 일, 미주알고주알 묻고 다시 살피는 아이의 태도가 때론 번거롭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 맡기신 일로 여기는 것. 우리 육신도 형편도 때론 슬픔과 억울함까지도. 그러니 상대적으로 누구의 늘 똑같은 힘겨움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결국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10).”
무딘 도끼로 나무를 찍으면 팔만 아플 뿐이다. 돌을 떠내고 나무를 베는 자의 일이란 게 당장의 앞일도 알 수 없다는 게 있다. 앞서 9절의 의미다.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 그런데 요즘은 너무 급하게 변해간다. 이를 또한 동조하듯 교회들조차 원칙도 정함도 무뎌진다. 개인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하여 성경은 우릴 일깨우고 바른 길로 이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2-14).”
결국 우리의 안이함은,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18).” 하는 오늘 지혜자의 말 한 마디에 여러 번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나는 그래서도 주목 받는 생이 되고 싶지 않고 나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보다 인상적인 것을 경계한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 3:14-15).” 지혜를 귀히 여김은 하나님은 지혜이시다. 선이시고 의이시다. 덧붙일 무엇도 필요하지가 않다. 그런데 문제 우리가 자꾸 자기의 생각을 보태는 일인데, 앞서 하와와 같이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할 때 저의 마음은 알겠지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하시는 말씀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81:1).
우리의 이러한 판단이 주가 주시는 지혜이겠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잠 14:3).” 곧 우리가 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유순하고 지혜 있는 자로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15:2).” 이와 같은 지혜와 말씀은 하나이다. 고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 16:19).”
결국 이 일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할 때 우린 달라진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그럴 수 있는 능력도 그래도 되는 권리도 모두 주께 받은 것으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6).
우리의 슬픔, 어떤 고단한 삶에 대하여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저는 우리의 체질을 다 아신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4).
나를 나보다 더 많이 아시는 분 앞에서,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81:7).
이 모든 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는 사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 선물을 가지고 사는 삶, 날마다 더하여 받는 하루,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한 없이 부족하고 주의 긍휼하심은 풍성하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그러므로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13-15).
나는 누구를 대할 때 또는 무슨 일을 두고 같이 생각이 많아질 때 주춤하여 주의 말씀을 당긴다. 그리고는 구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이 기쁨, 더는 잃고 싶지 않은 것을 가지고 조심하며 발을 뗄 때마다,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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