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전도서 11:9-10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편 82:6-7
인생의 허무함과 동시에 장래의 우리 존재를 일깨운다. 특히 청년의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를 즐거움과 기쁨으로 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심판이 있을 것을 일깨운다. 이어 오늘 시편은 우리가 본래 어떠한 존재인지,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우리의 한계를 알고 지내는 것이 옳음을 알린다. 그럼 이 어쩔 수 없는 생의 가장 귀한 행위가 무엇인가 살피면 오늘 전도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구제하는 일에 둔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 어떤 보상이나 보람을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행위로 이를 아시는 이가 갚으실 것을.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
내 것을 내 것으로 알 때 우린 나눌 수 없다. 어느 것 하나 내가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주가 이루신다. 잠언은 이를 여러 곳에 강조하였다.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14:21).” 이러한 곳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9:17).” 우리가 하나님을 꾸어드리는 일, 그 절대자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28:27).” 이를 두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내가 누구인지, 주의 제자로 구제할 때에는 결코 그 상을 잃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시 112:9).
누구를 위하고 구제하여 헌신한다는 일은 주가 더하시는 권능으로가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온전하길 바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이 이야기 속의 청년은 바르게 살고 주의 뜻을 따르길 바랐으나, 저는 부유하였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라 하실 때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그래서 우리의 부유함 혹은 적당함이 되레 안주하게 한다. 이를 엄히 경고하시며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그만큼 가진 것으로 인해 주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무서운 경고다. 후에 깨닫고 그 문으로 들어가길 바라나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허다하다.
지금 이 ‘청년의 때’가 아니면 곧 더는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언제 또 재앙이 임할지 우린 알 지 못한다. 오늘 전도서의 교훈이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2).” 나눠줄 수 있을 때 나눠줘야지 후에 좀 더 있을 때, 하고 미루다 모든 걸 잃을 수 있다. 일곱과 여덟은 성경에서 완전수로 쓰인다. 할 수 있는 전부를 일컫는다. 하여 예수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우리가 ‘나중에’ 하고 미루고 영영 그 때가 오지 않을 것이 무수하다. 그러므로 때가 오면 은혜를 아낌없이 베풀라는 말씀으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신다.
곧 내 의지로는 할 수 없고, 설령 했다 해도 이를 알아주고 돌아오는 게 있어야 마음을 달래는 경우들도 흔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아시면서도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지레 겁을 먹고 행함으로 옮기기를 꺼려한다. 쉽지 않은 일이어서 내 의지로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누가 오겠다고 할 때 나는 먼저 겁을 낸다. 저의 아픔을 내가 지고 이려 한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마음이 찔린다. 양심이 아프다. 심판의 때에 서로의 자리는 위치는 바뀔 것이다. 이를 전도서는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곧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3, 4).” 당장 오늘 자신의 형편을 따져 ‘내 코가 석 자인데…’ 하고 미루거나 회피하면 더는 기회가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더욱 강조하기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마음만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베드로는 이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우린 늘 어떤 선택 위에 서야 한다.
‘트롤리 딜레마’란 게 있다. 제동장치가 망가진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저만치 선로 위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공사 중이다. 내 앞에 선로를 바꿀 수 있는 장치가 있다. 한데 또 선로를 바꾸면 한 명의 인부가 피할 수 없어 죽게 된다. 선로를 바꿀 수 있는 스위치가 내 앞에 있다. 나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늘 나름의 최선을 따른다고 하지만 세상은 매순간 이와 같은 딜레마다. 자로고 ‘성경을 읽으려 촛불을 훔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다른 악을 자행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슬퍼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6-7).”
내가 하려 하면 모든 게 모순이다. 하나 주께 의뢰하면 모든 게 선을 이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하나님의 계획을 우린 다 알 수 없다. 전도서는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5).” 우리의 알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6).” 결국 이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7:18).” 우리로 모든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린다.
주를 의뢰함이란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주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소유하고 산다는 것,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하고 외치시는 주님.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13:43).”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귀와 주가 말씀하시는 귀, 곧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것을 알게 한다. 오늘 전도서는 이를 분변함으로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7).” 바로 오늘, 우리의 청년의 때, 해를 볼 수 있는 지금이 기회다. 곧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8).” 곧 노인이 되어 인생의 끝을 맞이해야 한다.
나는 요즘 ‘그 일’을 도우며 무엇이 우리 생의 소망인지를 자주 생각한다. 장모는 이제 옛이야기가 잦아들었다. 그 시절, 저의 떠올리는 회상이 덧없음을 알고 장래의 일을 소망한다. 누가 어떤 어려움으로 마음이 힘들 때 나는 저에게도 이를 알렸다. 앞으로 더 살날을 계산하기보다 당장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을 소중히 여기는 일에 대하여…. 저의 사연을 글로 옮길 수는 없으나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를 게 없다. 결국 염려에 사로잡히면 같고, 앞날을 두고 씨름하면 피장파장이다. 믿는다고 하는 일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하는 말씀과 같이 우린 모두 갈 바, 될 일을 알지 못하고 산다. 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아브라함의 순종이다. 이런저런 사정과 형편을 고려해서는 헤어날 수 없다.
누구는 염려증으로 특히 건강에 대해 늘 염려한다. 남과 다른 몸과 형편으로 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나는 저에게 손명희 시인을 소개했다. 1963년 그녀는 뇌성마비로 태어났다. 열일곱에 하나님을 만나 전신마비로 살면서도 저의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셨다. 저의 초기 시로 유명한 것은 <나>이다.
나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의 갖고 있지 않는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손명희(1985년 찬양으로 불리다.)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다 <위로>라는 시도 만날 수 있었다.
위로
밤이 깊으면 아침은 더 밝아지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시달릴 때
주가 말씀하시네
나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아
아무도 없는 빈들에 던져져 외로워 할 그 때
주의 음성이 들리네
나 너를 영원히 떠나지 않아
혹독한 절망에 눌려 살 소망 잃을 때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위로가 크리라
극한 슬픔에 잠겨도 쓰러지지 않으리니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리라
이에 오늘 전도서의 교훈은 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청년의 때’에 대하여 살피게 한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9-10).” 우린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고 생을 마감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나는 장모에게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리워하다 생을 다할 것인지, 장차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생을 준비할 것인지… 말씀을 전하며 물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우린 자신을 어찌 바라보는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 우린 어제 저녁에 이를 본문으로 하여 말씀을 되새기고 남은 생을 살피었다.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 앞에 오늘 시편은,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82:1, 6-7).
우리가 ‘지존자의 아들들’로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출처는 하나님이심을 알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요 19:11).” 하면 어떤 어려움도 혹은 피치 못할 사정들도 모두 주의 손에 달린 것으로,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2).
자칫 불의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이를 위하여도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3-4).
오늘 우리 곁의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내가 저를 두고 생각함은 지극히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으나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예수처럼 살려할 때,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46:9-10).
주가 내 곁에 계심을 어려운 이의 어려운 사연에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이를 명심하며,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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