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전봉석 2023. 3. 1. 05:30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이사야 2:11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5

 

 

 

주를 멀리하고 살 때 그 참상은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잘들 산다고 하나 저들은 참혹할 정도로 혼미하여,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6).” 동방의 풍속, 블레셋의 점치는 일, 이방인과 손 잡고 언약하는 것 등. 실제 우리 삶에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아닌가? 오늘 이사야에 이른 모든 일은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에 곧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2).” 이 모든 여정은 여호와의 전의 산, 시온에 이를 것이다.

 

말일은 종말의 때를 가리키며 동시에 ‘마지막의 날들’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린 현재 마지막 남은 날들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2:28).” 곧 우리가 이 날을 상기하며 사는 일은 지혜다. 마냥 태평한 줄 알고 사는 이는 미련하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더디다 여겨질 때 홀연히 그날은 이른다. 늙은 노모를 보며 또한 우리 자신의 하루하루가 다른 몸의 여건을 살피면 안다. 누구라도 늙고 병들어 죽음으로 간다. 이러한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교회에 두셨다. 이는 성경의 말씀이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3).” 오늘 본문의 의미는 그 의미가 뚜렷하다. 말씀이 나오는 곳, 그 길로 행해야 하는 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럼에도 이를 하찮게 듣고 우습게 여겨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에 대하여는 주의 긍휼하심만 바랄 뿐…. 나는 종종 나의 지난날을 떠올릴 때면 아찔하던 순간이 한둘이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차마 글로도 옮겨오기 어려운 어떤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나까지도 주의 선하심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러한 말씀을 붙들고 설 수 있는 오늘이 귀하다. 눈을 뜨고 주의 전에 먼저 올라와 말씀 앞에 앉히시는 이 시간들이 복되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과 같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4).” 더는 전쟁이 없는 날들을 산다. 오늘 본문의 증언과 같이 나의 날들이 그러함을 인정한다. 사람도 사랑도 일도 사는 것에도 늘 전쟁 같아서 그 치열하였던 날들을 떠올리면 끔찍하다. 주가 판단하시고 판결하신다. 그리고 의로운 통치가 수행된다. 이에 오늘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오늘 우리로 바라보고 살게 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곳,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그날이 올는지, 아니 올는지… 주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실지, 모르는 체 하실지… 장모는 저녁에 말씀을 나누는 중에 그리 말하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떤 확신이 없을 때, 믿음은 있으나 확신은 없고, 부르심은 받았으나 보내심은 받지 못하고 사는 믿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5).” 오늘 말씀을 부르신다. 그리고 권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그저 안이하게 설마, 하고 살아도 되는 날은 없다. 우리는 주의 은총으로 산다. 주가 버리시면 더는 바랄 게 없다. 의지할 데 없는, 버려진 나뭇가지는 말라 불에 태워질 뿐이다. 이를 알면 더욱 주를 의지할진대,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 44:5-6).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나는 이를 늙으신 장모에게 전하고자 애썼고 저이는 자꾸 옛이야기에 빠져 그때의 일들을 회상하였다. 그런들,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8).” 그리 살았던 날들에 대하여 여전한 회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린다. 이때에 오늘 본문은 이어서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10).” 우리로 두려워할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성경은 누누이 외친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모두가 다들 원하는 것에서 그 결과를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상을 버리고 자기 안의 귀한 것을 내어던질 수 있다.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왕하 19:18).” 돌을 쪼아 만든, 나무를 깎아 만든 것들 앞에 고개를 조아리던 시절.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135:15).

 

오늘도 여전하여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동방의 풍속’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한다. 이때에 성경은,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31:23).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 앞에 일찍이 붙들려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은혜다. 나는 이를 노모에게 전하고 노모는 이를 듣다 과거로의 회환이 빈번하다. 어떤 벽 같은 난감함을 느낄 때도 있다. 우리가 안고 사는 자기 아집과 스스로 옳다 여기는 교만이 얼마나 무서울 정도로 처참한지를. 우리 영혼은 마비되었고 아무리 건드려도 반응이 전혀 없는 듯하다. 아내는 육신적으로도 지쳐 어제는 일찍 서둘러 머리를 찍어보고 어떤 처방전에 따라 약을 지어오기도 했다. 노모를 모시는 데 있어 저의 힘없는 체력이 힘든 게 아니라 쓸데없는 고집과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고문 같은 말들이다. 한 사람이 늙어 어린아이가 된다지만 자신의 아집이 완고하여 노인 되는 것이 두렵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91:2-3).

 

우선은 큰 이상은 없어 다행이었고, 같이 점심을 먹으며 요즘은 일부러라도 아내를 불러내서 따로 시간을 갖게 한다. 우리가 주를 바라며 산다는 일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 그 진가가 발휘된다. 그러할 때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 3:5-6).” 우리가 주를 의지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살까? 나는 자주 아내에게 ‘친정엄마’ 이전에 우리에게 맡기신 한 영혼이라 강조한다. 즉 그만큼 적당한 거리에서 주가 하시는 것에 맡겨야 한다. 너무 가까워도 어렵고 너무 멀어져서 어려운 게 사람과 사람 사이라. 특히 가족이란 그러해서, 나는 더욱 거리를 둘 것을 이른다.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11).” 오늘 말씀은 진리다. 우리로 낮이지고 굴복하게 하심은 주를 우러르게 하심이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12).”

 

곧 이 모든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18-19).” 이는 가족이 또는 나의 신념이 우상이었고 이를 끌어안고 사느라 기진한 영혼으로 주께 피할 것이다. 아,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61:3-4).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가족인 것처럼 우상도 그러하다. 돈이 또는 명예가, 건강이 또는 자기 신념이 그러하여서 오직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0-22).” 되레 사랑하는 자가 우상이었다. 귀하다 여기던 것이 주를 멀리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는 저주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5:29).”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93:1).

 

오늘 시편이 제시하는 길, 주의 다스리심을 바라는 것.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출 15:18).” 이러할 때 우린 주를 바란다. 나로 한참 주를 멀리하게 하던 시절, 얼마나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을 꿈꾸며 살았는지. 대신 보상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스스로를 위로하려 들던 모든 것들이 다 죄였다. 오늘에 이르러 주 앞에 아뢰는 말씀,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1:17).” 그때도 주가 아니셨더라면 나는 오늘 어찌 됐을까?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2).

 

내가 멋대로, 주 앞에 함부로 굴며 살 때도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애 5:19).” 그때에도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6-17).” 하여 나는 주 앞에 내세울 게 없다. 없어서 이 몸을 바친다. 누구를 사랑하는 일에서도 혹은 미워하는 일에서도 나는 차마 주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으니….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3-4).

 

오늘 나로 주를 인정하게 하기까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그러니 이제 어쩔 것인가?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온전히 주를 바라고 산다는 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곧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118:6).

 

그러니 더는 굴하지 않는다. 좌고우면 하지도 않는다. 하늘이 두 쪽이 나고 세상이 갈라져 사라진다 해도,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부디 나의 남들은 그러하기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9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