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전봉석 2023. 3. 13. 05:41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4, 27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105:19

 

 

 

하나님의 구원은 성취되었다. 선민을 향한 예언이다. “여호와께서 … 긍휼히 여기시며 …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 연합하여 그들에게 예속될 것이며,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로 삼겠고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들을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들을 주관하리라(1-2).” 이는 한 민족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이르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오늘을 살면서 이러한 구원에 대해 생활이 말해준다. 한 날의 하루씩 소리친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우리의 확신은 이와 같이 자라가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에 따른 하루하루가 성취된다. 이 확고한 구원의 여정은,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05:17-19).

 

하는 오늘 시편의 내용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이를 알면 한 날의 수고로 족하다. 마음의 어려움도 그에 따른 한 생의 고단함도 끝이 나는 게 아닐까?

 

나는 요즘 장모와 아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누가 일러주기를 가족은 가족을 돌보는 거 아냐! 남이면 해도 가족이어서 어려워! 하는 말에 앞서 부모를 보낸 저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예전에는 대가족제도에서 생활하여서 저마다 돌아가며 짊어졌던 것이 이젠 핵가족화 되면서 한 자식이 일방적으로 돌봐야 하는 형국이고 보면, 저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저의 큰 언니는 여전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니, 그도 그럴 것 같다. 노인의 집요함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시달리는 것이라 이를 어찌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난 저 두 사이에서 어느 쪽도 편을 들 수 없다. 다만 아내와 둘이 있을 때 그의 신경질과 푸념을 받아주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우리의 한 생이 가고 또 한 생이 오는 일은 얼마나 고단하고 위대한 일이었나? 새삼 경이로울 정도이다.

 

더는 힘에 부쳐 요양원으로 모셔야지, 하면 아내는 또 펄쩍 뛰니까… 그 마음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나는 자주 당부하기를 주가 맡기신 한 영혼으로 감당하자고 하지만 그게 또… 난 또 한 다리 건너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 소릴 할 수 있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러니 참… 이를 일개 가족의 문제로 놓고 보기보다 우리가 한 영혼, 그 한 사람이 거죽을 다하고 생을 마감하기에 앞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여러 속내가 있을 것인데, 나는 장모의 한생을 돌아보면 그도 그럴 만하겠다 싶은 것이다.

 

붙들고 앉아 같이 성경공부를 하듯 일러주는 말씀에 주의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는 또 다른 것이라, 그러니 아내와 장모를 분리 관계로 놓아야 하나… 어제는 내내 마음이 어려웠다. 느닷없이 5만원이 없어졌다며, 니가 썼니? 어디 뒀니? 하고 시작된 말이 다 저녁에까지도 이어져 빨아 널은 가방까지 찾으면서 소동을 부렸다. 그런 식이어서 아주 작은 것으로 내내 사람을 들들볶는 겪이다. 그러니 그게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잃어가는 조각조각의 기억 때문인 듯도 한데, 난 아내가 걱정이란 말에 장모는 또 그 말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아…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네가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이제는 온 땅이 조용하고 평온하니 무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도다(3, 9).” 오늘 이사야의 말씀으로 우리가 바라는 안식을 생각한다. 주가 주실 평안을 소망하게 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12).” 하고 묻는 대목에서 나는 새삼 바울의 한 설교가 마음을 울리는 듯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럴 겨를이 없이 살았던 자의 늙음은 저주다. 모두에게 고통뿐이다.

 

서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낀 상태의 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주를 바람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24).” 오늘 이 날의 말씀은 만군의 하나님의 경영이다. 그의 다스리심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27).” 오늘 이사야에서 나는 주께 바랄 것을 붙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유난히 한 구절의 말씀 앞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다. 이를 이렇게도 궁리하였다가 저렇게도 생각하였다가 어느 것도 답이 아니라는 데서 두 손을 든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생을 다하는 동안 정녕 우리의 기쁨은 무엇인지,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105:1).

 

오늘 나의 일련의 생활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앞서 누군가의 어려움에서 저의 어쩔 수 없던 어려움이었다. 곧 우리가 놓이는 이와 같은 ‘어쩔 수 없음’을 들고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2).

 

그래서 늘 성경은 이르셨나?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그러므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3-4).

 

오늘 시편이 우리의 비상구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도 아뢸 수 있었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어느 삶인들 허튼 게 있을 수 있겠나? 나는 장모의 고단하였을 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저의 어쩔 수 없었을 그 숱한 날을 짐작해보기도 한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가도 아내의 시달림이 안쓰러워서도 나라도 뭔가 결정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중압감을 느끼기도 한다.

 

누가 말하길 자신은 아버지를 보내면서 두 손 들었고 지금 남은 엄마의 남은 생을 보면서 두 발 들었다고 한다. 농담일 텐데 농담일 수가 없는 것은 앞으로 이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니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까, 싶은.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붙드는 것인데,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어떤 어려움, 이 가운데서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이에,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7).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심은,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9).

 

이는 요셉이면서 예수이시다. 이는 우리 성도의 가야 할 길이기도 하겠다. ‘말씀이 응할 때까지’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우리 생의 날들이 말씀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이면서 아브라함과 다윗과 바울의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그 중심 이야기가 되시며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우린 누구도 누굴 뭐라 할 수 없음은 그게 곧 나 자신이었다. 이런 나를 위하여 주가 오셨다.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

(33).

 

이는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하여 주 앞에 모두 내어놓는 것임을.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우리로 주 앞에 세우시기까지….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39, 42).

 

고로 오늘 우리의 이 고단한 현실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그러할 때,

 

그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시며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43-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