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전봉석 2023. 5. 1. 05:08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이사야 63:7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7:11

 

 

 

우리 삶에 있어 우리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요소들은 ‘에돔’과 같다. 이는 외부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내부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를 어찌 다루시고 관여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하시는지, 오늘 본문은 앞서 이를 밝힌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나 심판도 내리시는 이시다. 오늘 1절은 이를 함축한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하나님은 의를 알리신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심으로 우리의 ‘에돔’을 걷어내게 하신다. 먼저는 스스로를 자부하는 마음이겠다. 지혜자는 묻는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실제 우리가 살면서 우린 얼마나 스스로의 열심과 배려를 자부하고,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잠 20:6, 9). 이를 일깨우면서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로 온전히 행하게 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에돔’은 스스로 높인 자이다. 하나님은 저를 태중에서부터 버리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이로써 야곱 곧 이스라엘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부터 특별하였다. 이를 오늘 시편에서 보면,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시 147:19-20).

 

우리는 이 기준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목적은 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나는 기도할 때면 우리로 주를 바라고 믿게 하심을 두고 감사한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내가 이루어 그리 자격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린 자부할 수 없다.

 

다만 온전히 행할 뿐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의, 그것으로 우린 우리도 감출 수 없는 삶으로 산다. 이는 ‘소금’으로써 부패에 저항하고, ‘빛’으로써 어둠에 맞서며, 산 위의 동네를 비춰 어중이떠중이까지도 밝게 비춘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더욱이 감출 수 없는 것은 향기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또한 우리의 삶은 그대로 주변 이들에게 읽히는 편지와 같이 다 드러낸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이와 다르게 ‘에돔’ 곧 우리를 대적하는 ‘외면하는 자들’의 특징은 한탕을 노린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 20:19).” 횡재를 바라며 이에 관여하는 모든 일은 다를 게 없다. 그러할 때 저들 입 안에 모래가 가득하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17).” 그뿐인가? 매사가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어서 감정으로 휘둘린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19:2).”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20:21).” 그러다보니 한결같음이 없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23).” 수시로 변덕스럽다. 이럴까 저럴까 한다.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신 32:28-29).”

 

그러니 진득함도 은사다.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잘 되고 못 되고는 내 몫이 아니다. 오고 안 오고, 내가 왜 부흥을 고려해야 하나? 그런 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 나는 다만 하나님께 전가함으로 모든 문제에서 놓여난다. 무엇도 내 의지대로 해결할 수 없다. 힘으로 또는 능력으로 이룬 것 같아서 된 것 같다가도 어그러지기 일쑤다. 더욱이 자식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같은 소리다. 하물며 사람? 사람이 사람을 어찌 바꾸겠나? 그래서 주를 바람으로 함부로 나대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사람뿐 아니라 물건도 사업도 앞 일에 대하여도,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20:25).”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내 안의 ‘에돔’과 나의 밖의 ‘에돔’을 경계한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더 그 고통을 감내하신다. 오늘 본문 1절이 함축하고 있는 ‘에돔’, ‘보스라’는 지명이다. 에돔은 우리가 다 알듯이 야곱의 형 에서를 지칭하고 저의 종족이 살던 후손들을 총칭한다. 보스라는 에돔의 주요 도시로 저들의 거점을 이른다. 성경에서 에돔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괴롭혔다. 악의 세력으로 사탄의 세력을 뜻한다. ‘에돔’은 우리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게 하는 모든 요소다. 이를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우리의 원수에 대하여 ‘원수 갚은 날’로 표현하기도 하셨다.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사 63:4-5).”

 

우리로서는 ‘에돔’을 상대할 수 없다. 밧단 아람 땅에서 식솔들을 거느리고 돌아오는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저는 이로써 홀로 남아 주와 씨름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저는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그러기까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7-8).” 얕은 수를 쓰고 치사하지만 그렇게까지 한 것은,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11).” 그러므로 저는 주 앞에 엎드린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 오늘 본문으로 보면 3절,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하실 때 붉은 의복은 우리 구주 예수를 연상하게 한다. 즉 원수를 짓밟고 모든 피 값으로 자신을 내어주시까지,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5).” 아무도 구원을 도울 수도 스스로 이룰 수도 없었다. 이를 시인은,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37:39-40).

 

우리의 구원은 다른 수 없다. 내가 내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등불을 켜야 하는데 잠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4, 27).” 이를 위하여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13).” 게을러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30).” 하여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를 스스로 괜찮다 하면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이를 마치 미개한 교육으로 여기는 현대인의 삶이란 게 점점 더 짐승 같이 짝짓기를 하고, 부모를 잡아먹고, 그야말로 동물적인 감각으로 산다. 이를 이성적이라 하면 할 말이 없다.

 

성경은 거듭 아니라 하신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29:15).” 누군 이러한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들이 엄마를 치고 뭐라 따지며 으르렁거리는데도 이를 두고 보며 ‘자라면 나아질 것’이라 착각한다. 뭐, 그것이 훌륭한 교육법이라면… 그래서 서로 자기 좋을 대로 두겠다면이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4-25).”

 

나아가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사람이 짐승을 모두 자기 좋을 대로 사랑을 한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7).” 결국은 스스로의 자부심으로 산다는 소린데,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8-31).” 오늘 날 우리의 ‘에돔’이다. 사회 현상이다. 내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꾸며낸 말이 아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심판을 예고한다.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사 63:6).”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린 주 앞에 엎드릴밖에.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15).” 두려운 것은 이것이 점점 짙어져서 우리 아이들이 사는 사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는 허물어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커녕 비인격적인 것들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소비한다. 소위 ‘욜로족’들처럼 당장의 쾌락과 단순한 물욕으로 자기만족을 채우는 시대다. 당장, 지금, 현재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여 사는 사람들. 한 발 물러서보면 짐승 같은 삶을 스스로들 고상하게 포장할 뿐이다.

 

성경은 이에 ‘생각하라’는 것이다. 시인은,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130:4).

 

사유(思惟)는 생각하고 또 생각함을 의미한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94:8).

 

이에 바울은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는 우리 안팎의 ‘에돔’을 상대하려면 생각해야 한다. 이를 오늘 시편은,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147:5-6).

 

그러므로 부디,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