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이사야 62:12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6:1-2
우리 신분이 변하였다. 황무지에서의 삶이었고 아무런 생명의 소망이 없던 자이었다. 그런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신부로 삼으셨다. 새로운 신분 그 이름은 ‘헵시바’와 ‘쁄라’로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라는 뜻과 ‘결혼한 여자’라는 의미의 말이다. 곧 결혼하기 전의 여자와 결혼한 여자의 신분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 16:6).
행동반경이 안전한 구역이 되었다. 아름다운 곳이다. 곧 세상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그 분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서로의 길이 다르다. 누구나 주 앞에 올 수 있으나 오지 않는, 우리 구원의 결국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알린다.
오늘 1절,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 말씀의 화자는 그리스도시다. 시온은 주께서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이다. 의와 구원은 동의어다. 빛은 구원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시고 오늘도 쉬지 않으신다. 이를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그러므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하나님의 성도라 칭함을 받는 우리는 그 삶이 구별된다. 오늘 2, 3절 말씀,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곧 우리에게 더하신 영광이 첫째로는 새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은 존재를 대변하는 것으로 단어 그 이상의 뜻을 가진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다. 사래가 사라가 되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시온은 본래 ‘버려진 자’, ‘황무지’였으나 이제는 ‘거룩한 백성’,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 ‘찾은 바 된 자’,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 12절,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이 놀라운 시온의 위상과 같이 곧 믿음의 선친들과 같이 우리는 성도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름의 변화만큼 변화된 위상이 있다. 곧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 또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7-18).”
그와 같이 우리 교회 이름 하현은 본래 하현달로 음력 25일을 가리키며 지는 달을 연상케 하고, 곧 아침이 온다는 뜻도 내포하여 필명처럼 사용하던 것이다. 이를 글방 이름으로 사용하다 교회 이름으로 불리면서 나타낼 현(現)자로 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교회로 그 뜻을 달리하였다. 하나님이 붙드시고 그리 사용하실 것으로,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 26:18-19).” 즉 교회로서 그 사명을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삼은 까닭은,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37:28).
이를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하여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7-18).” 이것으로 우리 교회는 존재한다. 고로 우리는 ‘헵시바’라 또는 ‘쁄라’라 하는 새 이름의 신분을 가진다. 실제 이 이름은 히스기야 왕의 왕비 이름으로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 하는 뜻이다. ‘결혼한 여자’로 더는 자유로우나 자유로울 수 없다. 더는 ‘버려진 자’ 또는 ‘황무지’였던 시온이 아닌 것과 같다.
4절,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이는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5).” 하나님을 나타내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산다는 것,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실제 나는 어릴 적에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했다. 그때는 여수 애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나환자촌의 모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였다. 그러니까 그 사이 나는 토;원 후 이듬해에 1년 늦은 중학생이 되었다. 당시 남중 남고의 살벌한 분위기와 여러 복잡한 심경은 사는 게 지겨웠다. 어려운 몸을 이끌고 사는 일도 그러했고, 주변을 같이 하는 일반적이지 못한 이들의 삶도 그러했다. 하나님을 바라는 데도 구차하게 여겨졌고, 남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평범함이 저들이나 나나 특별한 것이란 데서 어린나이에도 힘이 겨웠다. 이런 얘길 할 사람도 이해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한 사건이 터졌다. 등굣길에 교복 단추가 하나 없다는 이유로 선도부가 교문 앞에서 불러 세우고 따귀를 후려갈겼다. 그는 하필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갑내기였으나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선배였다.
알면서도 그런 것인지 자기 책임에 충실했던 것인지, 나는 그때 같은 또래에게 그것도 등굣길에 수많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맞은 것에 더는 살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이후 반년을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수면제를 모았다. 스스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은 나의 지긋지긋한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곧 다 끝난다, 하는 생각은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모든 걸 체념하게 버려둘 수 있었다. 그날이 왔을 때, 나는 그래도 한 친구에게만은 ‘내가 갔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고, 그 친구는 곧이곧대로 그 말을 선생에게 전하였고, 선생은 어머니를 학교로 호출했고, 어머니는 그 소릴 듣고 앓아누웠고, 어쩔 수 없이 나의 그날은 늦춰지고 있을 때 아버지가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약을 먹고 편히 죽을 생각이었는데 매 맞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아버지는 밤새 나를 때렸고, 그때 부모는 내 앞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그런 일을 겪고 다음 해 2학년 부활절을 맞으며 세례를 받았다. 그때의 나는 미안함과 염치가 없고 죄송함이 한데 버무려져 회개인지 신세한탄인지 꺼이꺼이 울었다. 그런데 같이 학습세례를 받고 성경공부를 하던 또래 아이들도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이 중첩되어서였을까? 예닐곱 명의 우리는 세례를 준비하면서 자주 만났고 자주 울었다. 누가 무슨 말만 해도 하나가 울면 모두가 울었는데, 그것이 회개였는지 처량한 인생살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나는 '자살미수자'로 하나님 앞에서도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날 위해, 굳이 왜 나 같은 것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지 도무지 그 사실이 너무 감사하여서… 우리는 세례 받는 내내 너무 울어서 강단에서 아버지는 예식을 마저 진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저의 죽으심과 부활의 참 기쁨을 아는 사람이면 아는, 면구스러움이기도 하다. 운다고 갚을 길 없는 은혜여서 말이다.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고 물론 나의 죄 된 여러 갈래 죄의 길은 자라는 동안 나를 갈팡질팡하게 하였고 더욱이 대학을 가면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후 함부로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8-19).” 그러니까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내 안에는 어떤 알 수 없는, 이와 같은 뻔뻔함이 있었고, 이는 어떤 든든함, 배짱 같은, 뻔뻔함이라도 좋을. 함부로 살면서도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여겨지는 어떤, 무모함 같은, 믿음은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그 모든 게 다 주의 은혜였음을. 나의 특별했던 유년의 시간들이 그때는 사는 게 지옥 같은, 황무지였는데 이제는 구별된 시간들로 하나님이 나를 더욱 사랑하셨다는 데 아무런 의심이 없다. 어떤 억울함도 아쉬움도 없다. 어제도 묵상하였던 것처럼 모두가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였던 결과이다. 오늘 6, 7절,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하시는 말씀과 같이 저들의 기도는 날 위하여 그침이 없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이제는 나로 누굴 위해 기도하게 하심은 저로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3-4).” 그 일에 마음을 두고 사는 일.
어제는 존 번연의 <죄인에게 넘치는 은혜>를 다시 꺼내 읽으며 그땐 나도 그랬지… 하는, 나의 어리석었던 날들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오늘 나에게 더하시는 삶이 오늘 8, 9절 말씀에서 읽힌다.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양식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이 마시지 못하게 할 것인즉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 곧 축복의 삶이란,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10).” 나 같은 자에게 맡기신 이 귀한 시간이 아닐까? 내가 하는 게 없다 해도 나로 주가 하시는 일이 있음을 믿고,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12).”
주의 증인이 되는 것,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7).” 그러므로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우리 교회가 또는 나의 생활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96:1-3).
이에 오늘 시편도,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146:1-2).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150:3-4).
이 놀라운, 시끄럽고 고요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그렇게 하여 이제 나의 남은 생이 주의 기쁨이 되기를.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146:6-7).
이를 살며 사랑하며 배워서 앎으로, 갚을 길 없음을 알면 알수록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4).” 하고 나로 하여금 인정하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8-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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